‘모 아니면 도’라는 사회풍토를 경계한다 2024.01.03
오래전 독일에서 “전부(全部) 또는 전무(全無) 법칙(Alles-oder-Nichts-Gesetz)”이란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에게는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1960~70년대 독일 사회상과 근래 우리 사회상을 비교하면서 독일 사회에서는 ‘전부 또는 전무’ 법칙이 존재하겠지만, 정당(政黨) 간에 타협하려는 경향이 뚜렷한데, 어째서 우리는 ‘모 아니면 도 법칙’에 그렇게 끈질기게 매여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고받는 타협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난 몇 번의 국내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렇게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전후 10년이 되던 해인 1955년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의 첫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재임 1949~1963)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Moscow)를 찾아가 소련(소비에트연합국, Union der Sowjetrepubliken)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두 국가 간의 외교관계 정상화가 방문의 목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은 종전 후에도 소련이 억류하여 온 독일 출신 포로의 귀환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 프랑스, 미국에 억류되었던 독일인 포로는 비교적 빠르게 귀국할 수 있었던 데 비하여, 소련에 억류된 독일 포로는 고국으로의 생환을 기다려야 하는 고난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데나워 총리의 외교적 노력으로 약 2백 20만 명의 포로가 동토(凍土)의 땅 소련의 억압에서 풀려나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아데나워 총리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힙니다. 총리가 모스크바에서 귀국하자 비행장에는 포로의 가족들이 나와 환영하며, 감사해하는 장면들이 당시 일간 신문을 장식하였다고 합니다.
왼쪽: 소련에 억류된 약 2백 20만 명의 독일인 포로가 귀국을 기다렸다.
오른쪽: 아데나워 총리가 협상에서 귀국하자, 공항에서 한 포로의 어머니가 감사하고 있다. 숙연해진다. 사진: Google에서 캡처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적국 공산 소련에 지급 대가가 너무 크다는 소리가 나오고, 그 자금으로 소련이 재무장하여 다시 독일을 침공해 올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아데나워 총리는 “협상에서는 상대방이 있고, 결과에 서로 만족한다는 교감이 있어야 좋은 협상이다”라고 일갈(一喝)하며, 협상에서 후려치기는 금물이라는 교훈적 메시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가슴에 담을 만한 메시지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독일 사회에서 1966년 큰 이변이 일어납니다.
당초 1948년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할 때, 자유민주당(FDP) 출신 호이스(Theodor Heuss, 1884~1963, 재임 1949~1959)가 첫 대통령직에 오르고, 첫 총리 아데나워가 이끄는 독일기독민주연합(CDU)과 기독사회연합CSU) (이하 기민사당)과 자유민주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합니다.
* 주해: 자유민주당(FDP):Freie Demokratische Partei. 독일기독민주연합(CDU): Christliche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기독사회연합(CSU): Christliche Sozialistische Union.
그리고 1963년 아데나워 총리가 물러나자, 그간 부총리직과 경제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던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1897~1977, 재임 1963~1966)가 총리직을 승계합니다. 그가 총리로서는 크게 두각을 내지 못하자, 1966년 자유민주당이 그간의 연정을 파기합니다. 당시 기민사당 단독으로는 연방정부를 구성할 국회 의석이 부족했습니다.
1966년 독일정치 역사상 첫 대연정(大聯政, Die Grosse Koalition) 정부가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키징거 총리(Kurt Georg Kiesinger, 1904~1988, 재임 1966~1969)가 이끄는 기민사당과 브란트(Willi Brandt, 1913~1922, 재임 1964~1987)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 (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이하. 사민당)은 대연정 정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회 및 정치적 변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해: CSU는 독일 남부지역인 바이에른(Bayern)주에만 국한된 정당
1963년 총리 Kurt Georg Kiesinger(오른쪽), 그리고 부총리 겸 외무상 Willi Brandt(왼쪽)가 나란히 첫 내각에 임한다.
사진: Google에서 캡처
대연정이라는 좌표 아래 이념의 색깔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정당이 '정치적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모두가 놀라워했습니다. 바로 까만색으로 상징되는 보수파 기민사당이 빨간색 정당인 사민당과 ‘의기투합’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에 독일 사회는 경악(驚愕)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민당은 키징거가 나치독일하에서 나치당원(NSPD)으로 나치 군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크게 부각하며 줄곧 맹비난했다면, 기민사당은 빌리 브란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중립국 노르웨이에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다고 하면서 ‘빨갱이’로 몰아세워 왔던 것입니다. 감정의 골이 무척 깊었습니다.
그런 키징거와 브란트가 ‘천연덕스럽게’ 손을 잡고 대연정 정부를 구성하면서 총리직은 키징거, 부총리 겸 외무상 직은 브란트가 맡게 됩니다. 정치적 큰 타협이었습니다. 필자는 어리둥절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필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설가, 프리드릴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저서 《친구 그리고 적(敵), (Freund und Feind)》 (G. Gotta. Tübingen, 1797)에서 “(그는) 나에게 귀(貴)하고 귀한 친구이지만, 나는 그의 적을 이용하련다. (Theuer ist mir der Freund, doch auch den Feind kann ich nützen)”라는 내용을 만나면서 독일인의 의식구조의 한 단면을 보는가 싶었습니다. 유럽 생활권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이 비교적 ‘주고받는 유연성’, 즉 ‘타협의 정치’가 가능하겠다는 것을 깨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언론계가 잠시 큰 정치적 변화를 언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였던 것이 필자에게는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필자는 1955년대 국내 국회의사당(현 서울특별시의회 건물)에서 한 의원이 어느 안건에 반대한다며, 단상에 이부자리를 깔고 철야 농성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대조적인 정치사회풍토를 무거운 마음으로 기억하였습니다.
그러한 시각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지난 반세기에 크게 진전하지 못했으며, 오늘도 답보 중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무거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필자가 오래전 독일에서 일어난 ‘대연정’의 역사적 궤적을 돌아보며, 정치·외교상의 현상과 문제는 논외로 하고라도, 대연정으로 당시 독일 사회가 비교적 조용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작금에 우리 사회에서 여·야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한계점을 넘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가 몹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볼썽사납기까지 합니다. 하여, ‘모 아니면 도’라는 경직된 사회풍토를 경계합니다. 극복해야 할 난제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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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