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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미철학> “인격 동일성의 문제(The Problem of Personal Identity)" - 심리주의 동일론의 비판을 중심으로
*요약문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변화 속에 놓인 나를 묻는다. 변화란 동일성을 전제할 때라야 성립 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을 상기할 때, 유년의 나가 청년의 나로 변했다는 말은, 그 둘이 동일함 존재임을 함축한다. 유년의 나와 청년의 나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며 무수한 변화를 겪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변화가 함축하는 동일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동일성의 기준이 되어 주는지를 두고 상이한 입장들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이들 간에 벌이는 논쟁을 우리는 인격 동일성의 문제라고 한다. 그 대열 속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입장으로 꼽히는 신체 동일론과 심리주의 동일론은 그 기준이 신체의 지속이라고, 심리적 요인의 지속이라고 각각 답한다.
신체 동일론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7권을 기초로 하여, 동일한 인격의 근거를 신체의 동일성에서 찾는다. 즉 본질적 속성이 유지되고, 시공간적인 연결 속에서 질료가 대체되는 방식으로 신체가 지속되었다면, 그 인격을 동일한 인격으로 본다. 반면, 신체 동일론의 대안으로 등장한 심리주의 동일론은 신체 동일론을 반박한다. 인격 동일성의 근거는 기억 등의 심리적 요인의 지속에 있지, 어떤 신체 기관이 지속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심리적 지속만이 동일한 인격의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심리주의 동일론의 효시가 된 이는 존 로크로 그는 `의식'의 개념을 개진해 `인간'과 `인격'을 구분한다. 이를 통해 그는 신체는 인간의 일차적 근거이지만, 인격의 근거일 수 없음을 천명한다. 이에 따르면, 신체는 인간 동일성의 기준이지, 인격 동일성의 기준이 아니다. 더불어 이러한 구분은 한 인격이 반드시 한 인간에 귀속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으로, 물리적 기반 없이 인격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를 내포한다. 즉 어떤 인격이 어떤 신체에 깃들던 간에 심리적 지속성이 확립되기만 하면 그 인격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인격은 신체는 물론, 데카르트적 실체와도 무관하다는 결론을 도출해냄으로써, 동일성의 기준을 구하는 우리의 시도에 있어 영혼과 같은 비물질적 실체를 배격한다. 이러한 로크의 이론을 계승한 현대의 심리주의 이론가들은 심리적 연결을 바탕으로 인격의 생존을 설명하며 인격의 복제나 분열을 허용한다. 다시 말해, 복제를 통한 인격 동일성의 지속과, 그런 방식으로써의 영생을 긍정하며, 인공종(人工種)들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일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파핏은 전송의 사고실험을 제시해 이러한 입장을 표명한다. 전송의 기본 아이디어는, 물질이 아닌 정보의 전송만으로 인격 동일성이 보장된다는 것인데, 이는 클로네이드사나 SF에 등장하는 복제 인간들에게 원리적인 토대로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송은 신체 동일론을 반박하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반론으로 제시되고 있다. 심리주의 이론가들은 전송의 사례가 신체의 지속 없이 인격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여긴다. 그러나 분리 논증과 행위의 신체성 논제에 따르면, 전송을 통해 원본의 인격 동일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전송 끝에 살아남는 인격은 원본의 연장이 아니라, 원본과 다른 삶의 형식을 지닌 복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송은 신체 동일론의 반론이 되지 못 한다. 그리고 인격 동일성이 신체의 지속을 빼놓고 유지될 수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신체성이란 기준은 인격 동일성의 유지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송은 오히려 신체성이란 기준이 지닌 필요성을 제고시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즉 파핏이 제시하는 사고실험은 복제를 통한 영생의 한계를 드러내며, 스스로의 맹점을 노출시킨다.
단지 심리의 지속만으로 인격 동일성을 설명하려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태도는 신체성을 철저히 배척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입장은 자신들의 바람과는 달리, 신체성의 맥락을 간과해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은 의식 통합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채, 인격의 지속을 오로지 의식의 연결 관계로만 설명하는데, 의식의 주체는 반드시 신체성을 기반하여 구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심리주의 동일론은 당초 신체 동일론의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이제는 다시 신체 동일론이 심리주의 동일론을 보완해야할 차례이다.
※ 주요어 : 인격 동일성의 문제, 신체 동일론, 심리주의 동일론, 존 로크, 전송
Ⅰ. 서 론
조부의 임종 순간을 목도했다. 조부의 임종은 오로지 의사가 내린 공식 사망시각으로 확정된 것이었다. 기실 의사가 1시간 전에 사망선고를 내렸든, 1시간 후에 사망선고를 내렸든, 침상에 뉘어 깊은 수면에 빠진 조부의 모습은 하등 달라질 게 없었다. 의사의 친절한 언도가 아니었다면, 조부의 임종을 파악하지도 실감하지도 못할 뻔했다. 나의 조부는 언제부터 망자와 다름없는 존재가 된 것일까.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린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 언제는 조부가 치매를 겪으며 사나운 말년을 보내기 시작한 그때부터인지도 모른다. 의사 공유를 할 수 없게 된 조부는 그때부터 전과 같지 않은, 전혀 다른 내용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침상에 곤히 누워있는 이 육신은 여전하고 엄연하게 나의 조부였다. 침상에 놓인 이가 나의 조부가 아니라면, 그토록 참담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화장 후에 유골이 된 조부를 보면서도, 조부를 외치며 호읍하는 인척들을 보면서도, 조부에 대한 물음은 뇌중을 떠나지 않았다. 저들이 목 놓아 부르는 조부는 어떤 조부인가. 어젯밤에 조부인가. 10년 전에 조부인가. 아니면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조부인가.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저들의 기약은 대관절 무엇으로 보장되는가. 혹여 나중에 다시 만나더라도 그가 조부라는 걸 알아볼 수나 있을까. 어떻게.
인격 동일성의 문제라는 구체적인 용어는 몰랐지만, 조부의 임종은 나를 그것과 마주하게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며 퍽이나 자주 이 문제와 마주친다. 사춘기를 겪으며, 거울을 들여다보며, 사진첩을 들추며, “어떤 게 나인가?", “이래서 나인가?", “이게 왜 나인가?", “나는 왜 이따위인가?",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가?" 라는 시치미를 동반하면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있을 내가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그 하나로서의 나를 고려하는 우리의 고민은 삶 전체를 관통한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과 이번 생을 넘어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민은 철학적 담론 안에서는 인격 동일성의 문제라는 용어를 빌어 표명되었고, 이 용어가 그 구심점이 되어 활발한 논의가 진행돼오고 있다. 본고에서는 인격 동일성의 문제가 벌이는 논의를 추적하는 과정으로서, 주축이 되는 신체 동일론과 심리주의 동일론의 두 입장을 순차적으로 고찰한 뒤에, 그 둘이 얽혀 형성해놓은 지형도를 밝히고자 한다. 신체 동일론의 반박으로서 등장한 심리주의 동일론은 인격 동일성의 문제에서 신체 동일론의 주장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며, 그것을 배제하려 드는데, 이러한 심리주의 동일론의 태도는 오히려 자신이 지닌 약점을 노출하는 자충수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왜냐면 심리주의 동일론은 그 성립의 기저에서 신체 동일론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 동일성의 문제에서 신체라는 기준을 간과한 심리주의 동일론은 한계에 봉착한다. 따라서 그 둘은 배제가 아닌 길항의 관계에 놓여 있어야지만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유의미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을 밝히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Ⅱ. 본 론
1. 예비적 고찰
(1) "인격 동일성의 문제"란 무엇인가?
"인격 동일성의 문제(The Problem of Personal Identity)"는 인격의 통시적(通時的, over time)인 동일성을 만족시키는 서로 다른 기준들 간의 논쟁을 말한다. 인격 동일성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이냐를 두고, 상이한 입장들이 저마다의 입론을 내세워 맞서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어떤 인격을 동일하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이 논쟁 과정이 추구하는 바이며, 이것이 곧 인격 동일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개별자의 동일성을 판단하려는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한 인격을 다른 인격과 구별하는 개별화(individuation)의 문제와 한 인격이 시간을 통과해서도 어떻게 동일성을 유지하는가 하는 재확인(reidentification)의 문제로 분화된다. 개별화의 문제가 인간의 무리에서 특정인을 식별해내는 것이라면, 재확인의 문제는 특정인이 특정인임을(즉, 특정인 자체를) 재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격 동일성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만족되어야 하지만, 본고에서는 재확인의 문제에 보다 집중하고자 한다. 복제를 통하여 한 인격이 동일한 인격으로 살아남는가의 문제는, 시간을 통과한 동일성의 문제, 즉 재확인의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재확인의 문제는 다시, 시점 t2의 인격 P2가 앞선 시점 t1의 인격 P1과 동일하기 위한 통시적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로 정식화된다. 다시 말해서, 재확인의 문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남아서 지속되는 그 무언가를 밝히고자 하는 시도로써, 변화 속에 놓인 나라는 존재를 궁리한다. 이 말은 다시, 과거에 있던 나는 어째서 나이고, 미래에 있을 나는 어째서 나인가? 라는 우리들의 본성에 관한 원초적인 물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유년의 나와 청년의 나는 상당한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무수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그럼 그 둘은 어째서 동일한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재확인의 문제는 이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변화라는 말 안에는 이미 동일성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유년의 나가 청년의 나로 변화한다고 할 때, 만일 양자가 동일한 존재가 아닌,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였다면, 우리는 그 둘의 관계를 변화라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우리는 오로지 동일한 대상에 한해 변화라고 말한다. 고로 변화로 설명되는 양자 간의 관계는 양자의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에 놓인 그 모든 나가 나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모든 나가 하나같이 동일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이 점을 상기할 때, 변화를 성립시키는 근거로써의 동일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기준으로 보장되는가를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묻고 있다. 무엇보다, 어느 누구도 변화 속에 놓인 나이지 않을 수 없기에,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중요하다.
더불어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인류의 항구적인 관심인 영생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사후에도 존재가 지속된다는 믿음은 예외 없이 생전의 나와 생후의 나가 동일하다는 전제로써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존재가 지속된다면, 죽음이라는 변화의 전과 후의 상태,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사실상 영생이 전제하는 동일성의 개념은 시간을 통한 동일 인격의 지속에 관한 것이기에, 재확인의 문제는 영생의 조건으로서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된다.
(2) `Personal Identity'에 대한 국문 번역의 용례
`Personal Identity'를 국문으로 옮기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이에 국내 연구자들은 나름의 일리를 지니고서 각기 다른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단 `identity'를 `동일성'으로 국역하는 데에는 큰 이견 없어 보인다. 국내 연구자 대부분이 `정체성'이란 용어 대신 `동일성'이란 용어를 따르고 있다. 탁석산은 `동일성'과 `정체성'의 구별 사용을 대상 규모에 따른 "편의상"의 적용으로 본다. 큰 규모의 대상에게는 `동일성'이라는 용어보다 `정체성'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동일성'이란 표현보다는 `국가의 정체성'이란 표현이 보다 어울린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는다. 더불어 앞 절에서 언급했듯, 동일성이 변화의 성립 근거가 된다는 점 또한 `동일성'이 `정체성'보다 더 지지를 받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재확인의 문제는 변화라는 요인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변화 속에서의 지속을 고려하는 맥락에서 보면 `정체성'이란 용어보다 `동일성'이란 용어가 더 적합하다. 반대로 개별화의 문제에는 `동일성'보다는 `정체성'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해 보이는데, 이 경우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시간의 한 단면을 잘라놓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독립적 존재의 성질을 따져보는 것이기에 그렇다. 특정 시점에서의 타자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을 의미로 한다면, `정체성'이란 용어가 `동일성'이란 용어보다 어울리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재확인의 문제에 주목하는 본고에서는 `identity'를 `동일성'으로 옮긴다. 변화를 겪어내는 지속의 문제는 `동일성'이란 용어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어 `person'이 `동일성'과 결합하면서 사정은 더 복잡해진다. `Personal identity'란 동일한 용어를 두고 `개인 동일성', `자아 동일성', `인격 동일성', `자기 동일성' 등의 번역어가 상존하고 있다. 이순성은 많은 연구가들이 `인격'과 `자아(self)'를 상호 교환하여 사용하면서 `인격 동일성의 문제'와 `자아 동일성의 문제'를 동일시한다고 지적하는데, 이런 습관은 로크의 인격 이론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로크 이후 `인격'은 의식 활동의 주체라는 `자아'의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자아'의 개념이, 경험하는 자신에 대한 전적인 일인칭의 관점을 의미하는 한, 그것은 결코 외부에서는 파악될 수 없다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그에 비해, `인격'이 객관적(외부적) 관점으로 파악되는 특성들로 논의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추후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인격 동일성의 문제가 유의미한 논의로 나아가기 위해선 일인칭의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자아 동일성'라는 표현보다는 `인격 동일성'이란 표현이 본고에는 더 적합하다고 본다.
김선희는 철학사를 비추었을 때, `인격'은 대체적으로 "어떤 속성을 만족하는 개별자"로 이해되어 왔으며, `인격'의 개념에서 문제가 되었던 건 `어떤 속성'에 있지, `개별자'에 있는 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여러 연구가들이 속성으로서의 `인격'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상이한 이견들을 보였지만, 적어도 개별자를 지칭하는 한 단위로서의 `인격'은 그런대로 일관되게 다뤄왔다는 것이다. 물론 `인격'이란 개념이 개별자라는 단위 지칭을 넘어서 다단한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개인 동일성'이란 표현에서 `개인'이란 용어는 개별자라는 하나의 단위로서의 `인격'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개인'이 개별화되는 단위 주체로서의 접근이라면, `인격'은 도덕적 책임 주체로서의 접근으로, 그 개별자가 지니는 특성과 의미에 중점을 둔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점 또한 추후에 더 이야기될 것이다. `인격'이란 개념이 지닌 다단한 의미를 고려할 때,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보다 실제적인 논의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결국 `인격'의 개념을 밝히는 일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개인 동일성'이란 표현은 `인격'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아주 적합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아울러 `자기 동일성'이란 표현은 심리주의 동일론에 반박하는 리쾨르 식의 입장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그 용례 상, `인격'에 대한 특정한 이해 방식이 부여된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동일성'이란 표현은 인격 생존의 문제에서 그 토대가 `아무 신체'가 아닌 `나의 신체'가 돼야 한다는 우리의 직관적 요청을 충족시키기에 상당한 일리를 지닌다. 이런 입장은 `인격'에 대한 일련의 고찰 뒤에 도출되는 것이므로, 그 고찰의 과정을 추적하고자 하는 본고에서 단숨에 `자기 동일성'이란 용어를 채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Personal identity'를 `인격 동일성'이라 이름 붙인다.
2. 심리주의 동일론의 이론적 검토
(1) 신체 동일론의 입장
심리주의 동일론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그 논의의 기틀을 제공한 신체 동일론의 입장을 간략히 검토해보자. 신체 동일론이 드러낸 맹점을 지적하며 등장한 것이 바로 심리주의 동일론이기 때문이다. 인격 동일성의 기준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장 쉬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신체의 동일성이다. 유년의 나와 청년의 나가 동일한 인격으로 인정되는 건, 그 둘이 동일한 신체를 지녔기 때문이고, 이는 일반적 통념으로 우리에게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가 하루 만에도 세포 수억 개가 생몰(生歿) 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유년의 나와 청년의 나는 분명히 다른 물질을 함유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 둘은 동일하지 않은 신체를 지닌다. 그 둘은 다만 시공간적인 연결 속에서 지속되어 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신체 동일론에서 말하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은 신체 원형의 보전(保全)이 아니라, 신체의 지속을 뜻한다.
이런 생각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7권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속성'이라는 보편자를 공유하는 개별자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뤄진다. `실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질료와, 그 질료가 이뤄낸 형상으로 인해 각기 개별적인 실체로 존재한다. 형상은 실체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해당하는 실체의 종(種)을 정의하는 동시에, 해당하는 실체를 특정의 것으로 결정짓는다. 이에 따라, 한 실체를 앞선 시점의 실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 실체의 형상을 구성하는 본질적 속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것의 질료가 동일하게 지속되거나, 부분적이며 점진적으로 대체되었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무생물체와 생물(명)체는 그 경우를 달리하는데, 무생물체의 경우는 질료와 형상이 변하면 동일성이 상실되지만, 생물(명)체의 경우는 질료와 형상이 변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점진적으로 대체되어 지속된 것이라면 동일성이 확보된다고 본다. 이러한 사항들을 기초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거해 `인격'을 하나의 실체로 적용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시점 t2의 인격 P2가 시점 t1의 인격 P1과 동일하기 위해서는, P1과 P2는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특정한 신체와 특정한 정신적 삶의 용량을 반드시 유지하고, 그것을 형성하는 질료가 부분적이며 점진적으로 대체되는 방식으로 P1과 P2의 신체가 동일한 질료여야만 한다. 이것이 인격 동일성을 신체 동일성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신체 동일론은 인격이 정신적 삶을 갖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나, 동일한 인격의 근거를 신체의 동일성에서 구한다.
로크는 다음의 진술에서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
하나의 합착된 동체 속에서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한 그루의 식물은 하나의 공통된 생명에 참여하고 있으며, 동일한 생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그것은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중략) 동일한 유기체에 지속적으로 결합하는 부단한 물질의 입자들이 동일한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2.27.7)
이런 고찰로부터 로크는 인간도 `동일한 지속적 생명에의 참여' 때문에 동일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에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지만, 변화에 놓인 세포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유기적인 결합을 하기 때문에 동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가령, 화상을 입거나 성형을 감행해 전과는 다른 외양을 갖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체 동일론의 설명으로도 동일한 인격으로 인정될 수 있다. 왜냐면 그의 형상을 이루는 질료들은 부분적 소멸과 점진적 대체로 지속되었을뿐더러, 여전히 그라고 하는 동일한 신체(생명)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다리를 잃는다 해도, 또는 장기 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이 이전과 다른 인격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까닭은 이런 판단의 소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로크의 지지에는 단서가 붙는다. 신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차적 근거이지, ‘인격’의 근거일 수는 없다. 이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기본 발상으로, 다음 절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그러나 신체 동일론의 전언에 따라, 신체의 지속을 인격 동일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갈증을 느껴야 한다. 우리가 신체를 결여한 사후에도 인격이 지속된다고 믿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동일성이 단순히 신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 동일론에서 제시하는 본질적(종적) 속성의 유지와, 질료의 점진적 대체는 그 범위를 과연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도 분명치 않다. 시공간적 연속으로서의 점진적 대체를 거쳐, 본질적 속성을 벗어나 버리는 경우들을 우리는 충분히 떠올릴 수도, 접할 수도 있다. 가령, 외과적 수술을 통해 남성도 여성도 아니게 된 `뉴-하프(new harf)'의 경우는 ― 남성이거나 여성, 반드시 둘 중 하나여만 하는 것이 인간의 종적 속성이라면 ― 본질적 속성을 결여하게 됐으니, 그는 본래와 동일한 인격이 아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뿔이 돋아나 기형적 모습을 하게 된 사람들은 ― 뿔이 나는 것이 인간의 종적 속성이 아니라면 ― 이전과는 동일한 인격이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기억상실증 환자나 치매 환자의 경우, 그들이 환자가 되기 전과 환자가 된 후의 신체는 분명히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들의 전과 후를 여전히 동일한 인격으로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친인(親姻)의 사체(死體)를 존중하는 우리의 태도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으로서 우리가 신체에 대해 지니는 얼마간의 기대를 반영한다. 마찬가지로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친인을 간호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수고는 사고 전의 친인과 사고 후의 친인을 동일한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이에 대한 근거는 신체에서 비롯한다. 그렇지만 간호하는 이가 비통한 마음을 갖는 건, 식물인간이 된 친인이 어떤 붕괴를 맞이했다는, 즉 이전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어떤 대상에 대한 파악을 그 대상이 지닌 물질성에 근거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원초적이며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격 동일성의 근거를 신체에서 구하려는 신체 동일론의 태도는 그러한 본능의 소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격 동일성의 기준을 오로지 신체만으로 삼았을 때, 해결이 쉽지 않은 난처함들이 줄을 이어 제기된다. 그 탓에 우리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에 대한 여전한 꺼림함을 느껴야만 한다. 인격 동일성의 기준을 추구하는 우리의 시도에 있어, 이러한 신체 동일론의 한계를 딛고자 나타난 것이 바로 심리주의 동일론이다.
(2) 심리주의 동일론의 입장
1) 기억 이론
신체 동일론의 대안으로 등장한 심리주의 동일론은 심리적 요인의 연속성이 인격의 동일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심리주의 동일론의 가장 전통적인 형태는 기억 이론으로, 이 이론은 어떤 인격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가 지닌 성격과 태도,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억이 인격의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나라는 개인의 역사를 기억하는 나이기에, 나는 나로서의 동일성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청년의 나가 유년의 나를 동일한 인격으로 자각하는 건, 청년의 나가 유년의 나를, 그리고 유년 이래로 이어져 온 경험들을 청년인 지금의 내가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기억 이론의 주장은 개인들의 경험적 측면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는다. 물론 앞서 살펴본 신체 동일론의 입장에 의해서도 유년의 나와 청년의 나는 동일한 인격으로 인정된다. 그 둘이 동일한 인격인 것은 신체가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지속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 이론에서는 신체의 지속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뉴-하프'의 인격 동일성은 그가 지닌 신체 사항의 이력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뉴-하프'가 되고자 했던 그의 태도와, 그 태도 때문에 중성화 수술을 감행한 과거의 경험을 스스로 기억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 이론의 입장은 이산가족의 경우로 설명될 수 있다. 유년에 헤어졌다가 백발이 성한 노년이 돼서야 상봉한 형제가 있는데, 형은 수십 년 만에 만난 동생의 겉모습이 너무 변한 탓에, 상대방이 동생인지 아닌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곧 그 상대방이 두 형제만이 공유하는 유년 시절에 대한 소상한 기억을 풀어내자, 비로소 형은 상대방이 자신의 동생임을 확신한다. 곧 동생이 지닌 그 소상한 기억 때문에, 형은 수십 년 전의 동생과 지금 대면한 상대방이 동일한 인격임을 인정하게 된다.
존 페리(J. R. Perry)는 『개인의 동일성과 불멸성에 관한 대화』에서 바바라 해리스(B. Harris)의 소설 『누가 줄리아인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줄리아란 여자가 어린애를 구하려다 기차에 치여 사망하고, 그 모습을 목격한 어린애의 엄마 매리는 충격을 받아 쓰러진 뒤 뇌사상태에 빠졌다. 줄리아는 온전한 두뇌와 망가진 신체를 지니고 있고, 매리는 온전한 신체와 망가진 두뇌를 지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줄리아의 온전한 두뇌를 매리의 온전한 신체에 이식하는 수술이 진행되었다. 이 “신체 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럼 수술 후의 살아남게 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이 책에서는 수술 후에 살아남은 이가 줄리아라고 말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매리의 신체를 지니고 있으나, 엄연히 줄리아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이가 줄리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이 기억과 같은 심리적 지속성에 있다고 믿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입장을 대변한다.
신체적 기관의 지속이 인격의 지속을 가능케 한다는 신체 동일론의 주장과는 달리, 심리주의 동일론은 인격의 지속이 어떤 신체 기관에 의해 야기가 되었든, 야기되지 않았든, 그 여부 자체를 상관하지 않는다. 신체적 근거 없이도 심리적 지속만으로 인격의 동일성이 지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체가 다르더라도 동일한 기억을 갖고 있으면 인격 동일성은 유지되고, 신체가 똑같더라도 동일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인격 동일성은 유지되지 않는다고 기억 이론은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효시가 된 것이 바로 존 로크의 `군주의 신체이전(body transfer)'으로, 로크는 이 예시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압축한다.
만일 어떤 군주의 영혼이 그의 과거 삶에 관한 기억과 의식을 그대로 지닌 채, 구두수선공의 영혼이 떠나버리는 그 순간 구두수선공의 신체로 들어가서 생기를 불어넣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과거 군주의 행위에만 오로지 책임을 지는 군주와 동일한 인격으로 볼 것이다. (2.27.1)
즉 로크에 따르면, 인격 동일성의 기준은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의식')에 달렸고, 기억이 미치는 한 다른 시대의 다른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동일한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로크는 만약 자기가 지난겨울 테임즈 강에 홍수가 났던 일을 의식할 수 있고, 심지어 노아의 홍사 사건까지도 기억한다면 자신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억 이론에 따르면, 기억상실증 환자나 치매 환자가 이전과 동일한 인격이 아니라고 꽤 명쾌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이전과 동일한 인격이 아닌 이유는, 그들이 동일한 인격의 핵심 기준인 기억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 이론이 어디까지나 심리주의 동일론의 초보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는 건, 우리의 기억이란 본시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영아기(嬰兒期)에 대한 기억을 갖지 못한다면(그것이 망각 때문이든, 원천적인 능력의 결핍 때문이든), 영아였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하지 않은 인격인가? 더군다나 우리가 지닌 영아기에 대한 기억은 부모의 술회나 사진 등을 통해서, 즉 자체적 생성이 아니라, 외부에서 부여하는 학습의 산물로 형성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부적 유입 없이도, 어렴풋하긴 해도 영아기에 대한 기억을 나는 지닐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기억은 무엇보다도 망각과 날조에 대한 맹렬한 근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기억 이론은 필히 정교화(혹은 후퇴)의 과정을 요구받는다.
기억 이론의 정교화에 있어, 기억의 망각에 대해 말하자면, 이런 식의 설명이 가능하다. 자신의 과거인 A를 기억하는 A1이 있다. 또 자신의 과거인 A1을 기억하는 A2가 있다. 하지만 A2는 A에 대한 기억이 없다. 즉 망각한 것이다. 그럼 A와 A2는 동일하지 않은 인격인가? 그렇지 않다. A2가 A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A1이 기억의 관계로 그 둘의 사이를 이어주기 때문에, A는 A1은 물론이거니와, A2와도 동일한 인격이다. 이처럼 일련의 기억의 연쇄를 통해, A는 기억으로써도 인격의 동일성을 확립한다.
더불어 우리 중 거의 모두는 행복의 방편으로 기억을 날조한다. 자기가 겪은 경험이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경우에, 그 경험에 대한 기억에 바람을 담아 자신은 그렇게 행동했다고, 혹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경험을 변형시키고, 변형시킨 것을 자기의 기억으로 삼는다.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심리적 기제로 우리의 기억은 꼭 그렇게 날조되고야 만다. 따라서 내가 지니고 있는 기억을 통틀었을 때, 그것들이 과거에 내가 실제로 겪은 체험과 정확하게 일치하느냐를 묻는다면, 그렇지 못 한 기억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상 내가 지닌 기억은 대개 그 체험의 실제 여부와 정합적으로 연결되었기보다는, 내가 그것을 경험했다는 혼자만의 믿음(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기억의 근성을 염두에 두었던 로크는 실제로 행했던 일에 대한 기억을 ‘강한 기억’으로, 실제로 행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행했다고 믿는 일에 대한 기억을 ‘약한 기억’으로 구분했다. 또 리처드 스윈번(R. Swinburne)은 이것을 ‘참된 기억’과 ‘심상적 기억’으로 분류했으며, 데렉 파핏(D. Parfit)은 우리의 모든 기억은 실제로 (‘약한 기억’과 ‘심상적 기억’의 연장인) ‘유사 기억(q-memory)’이라고 주장한다.
요는, 기억 이론은 심리주의 동일론의 대표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기억이 심리주의 동일론이 주장하는 심리적 요인의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태여 이런 말을 덧붙이는 건, 많은 연구가들이 로크가 말한 `의식'을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실제로 `의식'을 기억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 동일성에 대한 로크의 입장을 `기억 이론'이라고 통칭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의 연장이라 하겠다. 하지만 로크가 말하는 `의식'은 기억보다 포괄적인 개념임이 분명하다. 기억은 의식 활동의 주요한 표지이지만, 어디까지나 의식 활동의 부산물이지 의식 활동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과 기억을 동일시하는 등식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크가 말하는 `의식'이란 사유하는 지성적 존재의 핵심으로, 일인칭으로서의 나를 스스로 인지하는 자기확인과 자기반성의 작용이다. 바로 이 `의식' 때문에 각자는 그 자신에 대하여 그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된다. 로크가 개진한 `의식으로써의 인격'이란 개념은 인격 동일성의 문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런 로크의 성과를 계승한 현대의 심리주의 이론가들은 로크의 후예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심리주의 동일론에, 아니, 그뿐 아니라 인격 동일성 문제에 전방위적인 여파를 불러일으킨 로크의 공헌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2) 존 로크의 공헌
"인격 동일성에 대한 모든 논의들은 로크가 말한 것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누넌의 말처럼, 로크는 인격 동일성의 문제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중대한 문제 제기들과, 그로 인해 벌어진 적잖은 논쟁들의 불씨를 제공했다. 이는 그의 주저인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제2권 제27장에서 `인간'과 `인격'을 구분하며, 당시로써는 생소한 개념이었던 `의식'의 개념을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인격’이 ‘인간’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의식’ 때문이며, 바로 이 `의식' 때문에 `인격'이 `인간'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론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고 로크는 말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의 한 종(種)이긴 하나, 본능에 따라 반응하는 여타의 동물과는 달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위를 하는 자율적 존재이기에, 우리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용어와는 구별되는 `인격'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일차적 근거는 신체에 있지만, 그와 다른 차원으로서의 `인격'의 근거마저 신체일 수는 없다. 사고하는 능력은 지녔지만 자기의식이 없는 신체를 `인간'이라 규정할 수 있다면, 사고활동을 하면서 자기의식을 가진 비실체적 존재를 `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로크가 행한 `인간'과 `인격'의 구분은 이를 천명한다. `군주의 신체이전' 예시에서 로크가 과거의 군주와, 군주의 기억을 갖고 있는 현재의 구두수선공을 동일한 `인간'이 아니라, `인격'으로 말하는 것은 두 용어의 구분된 적용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그가 `인간'과 `인격'을 구분하는 것은, 한 ‘인격'이 필연적으로 한 `인간'이 아닐 수 있는 상황을 예비하는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군주의 인격이 군주와는 다른 인간인 구두수선공의 신체에 깃든 상황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한 인격은 한 인간의 신체에 고유하게 복속되는 것이 아니요, 한 인격과 한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로 짝 지어진 것이 아니다. 심리적 지속성이 확립되기만 한다면, 어떤 인격이 어떤 신체에 깃드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신체를 지니든 그 인격은 동일하다. 조금 더 확장하자면, 인격을 소프트웨어로, 신체를 하드웨어로 보았을 때, 소프트웨어가 다양한 하드웨어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로크의 발언은 시사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을 일종의 소프트웨어적 개념으로 보는 현대 심리철학의 궤는 이러한 발상의 계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로크의 공헌으로 말미암아, `인격 동일성의 기준'과 `인간 동일성의 기준'은 구별돼야 한다는 로크의 후예들이 지닌 생각이 확립될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신체 동일론에서 주장하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이란, 어디까지나 `인간 동일성의 기준'에 불과하지 않다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럴 뿐만 아니라, 로크는 `인격'을 데카르트적 `실체'와도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우리의 주체적 자아(의식)를 `실체'의 지위로까지 끌어올려 간주하던 로크 당대의 풍토를 감안할 때, `실체'를 `인격'의 영역 밖으로 축출한 로크의 성과는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로크는 `인격'이 `의식'이라는 심리적 특성에 전적으로 의거해있다는 점과, `의식'이 신체나 실체의 의미를 포섭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인격'이 `신체'는 물론 `실체'와도 무관하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이를 통해, 로크는 `인격'을 기존의 방식과 다른 측면에서 탐구, 논의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인격 동일성을 논하는 현대의 심리주의 이론가들의 입론은, 인격 동일성의 기준을 비분절적이며 불변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데카르트적 자아를 부정하는 토대 위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로크가 말하는 ‘의식’은 ‘인격’을 이루는 핵심 토대로서, 비물질적 실체에 수반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과 같은 생물학적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어떤 물리적 기반 없이 독자적이며 독립적으로 이동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로크의 견해를 확장한 현대의 심리주의 이론가들은 ‘인격’을 자연종적 개념이 아닌, 국가와 같은 구성적 개념으로 다루려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약정에 따라 어떤 인위적(비자연적) 존재에게 인격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격에 대한 심리주의적 설명은 머지않은 미래에 더욱 성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복제 인간에 대해 인격을 부여하는 일에 수월한 이론적 토대의 역할을 한다. 심리주의 이론가들이 고수해온 일관된 견해는 어떤 외적 형식(신체)을 띠든 간에, 심리 지속이 가능하며, 심리가 지속되는 한 인격의 동일성은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복제 인간이 나의 심리를 지속해 간다면, 그 복제 인간은 나와 동일한 인격이므로 그를 통해 나란 인격은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심리주의 동일론에 대해 내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복제 인간이란 존재가 인류의 불가능한 꿈으로 여겨져 온 영생(사후의 생존이거나, 죽음 자체의 제거이거나)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수단으로 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처럼 복제를 통한 나의 생존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격 동일성의 문제에서 신체라는 기준을 완전히 배제해버린 심리주의 동일론의 주장이 과연 얼마나 온당한가에 대해서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3) 복제를 통한 생존의 가능성
사후에도 지속되는 인격에 관한 문제, 즉 영생의 문제에서 가장 전통적인 해답이 되어온 건, 인간적 실체에 대한 오랜 믿음인 영혼이다. 영혼이라는 설정은 모든 현상적 변화 가운데에서 변하지 않고 고유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이해되기에, 영혼이란 개념은 사후와 관련된 물음들에 효과적인 대답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영혼의 개념은 그 존재를 그 존재 자체이게끔 하는 핵심으로 애초에 설정된 것으로서, 사실상 인격 동일성의 기준에 관한 모든 물음에 해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영혼이란, 말하자면, 해답을 위한 맞춤 해답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영혼이란 개념이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는 비경험적 실체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인격 동일성의 기준으로서 영혼을 수용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신앙 차원의 문제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물을 수 있다. 과연 영혼의 개념은 통시적 인격 동일성의 설명에 있어서 반드시 요청되는 개념인가? 아니면 영혼이란 개념 없이도 사후에까지 미치는 동일한 인격에 대한 기준을 우리는 발견해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우리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입장을 추적해가고 있다.
현대의 심리주의 이론가들은 인격 동일성의 문제를 ‘의식’의 통시적인 통합과 지속의 문제로 보는데, 이러한 기본적 시각은 전술한 대로 로크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또 그들이 심리적 연결을 바탕으로 인격의 생존을 설명하며, 인격의 복제나 분열을 허용하는 것 또한 로크적 발상의 계승이라 할 수 있겠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 복제와, 복제를 통한 영생 가능성의 전망이 확산되는 가운데, 심리주의 동일론의 견해는 개인들이 지닌 영생에 대한 바람과, 그 바람의 실현으로 이해되는 인공종(人工種)들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일에 이론적 토대의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의 영생을 논하는 데 있어, 심리주의 동일론은 영혼의 개념과는 다른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파핏은 로크의 계보를 잇는 현대의 대표적인 심리주의 이론가로, 그 역시 ‘인격’은 실체가 아니며 심리적 연결 관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즉 인격의 동일성을 심리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 파핏에게 인격의 동일성은 꼭 단일한 나에게 속한 것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누차 되풀이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단지 심리적 연속이다. 로크가 신체 교체나 환생에 관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제시한 후, 사고실험을 통한 신체와 의식의 분리는 인격 동일성의 논쟁에서 통상적인 것이 되었는데, 파핏 또한 자신의 입장을 반영한 전송(teletransportation)의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지난 2002년, 최초로 인간 복제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클로네이드(Clonaid)사가 취하는 영생의 방식이라 함은, 나이 든 사람을 젊게 복제하여 그 복제 인간에게 정신과 기억, 성격 등을 이식하는 기술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클로네이드사가 인간 복제를 시행하는 주된 이유는, 과학적 진보를 통해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간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파핏이 제시하는 사고실험의 기본 아이디어와 궤를 함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흔히 가정하는 복제 인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 전송의 사고실험이 제공하는 이론적 기반 위에 서 있다. 신체의 정보만으로 동일한 인격이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을 그네들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언스 픽션 장르에는 클론과 안드로이드 같은 복제 인간들이 이제는 친숙하다 싶을 정도로 익히 등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 내에서 복제체(replica)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원본체와 동일한 기억을 주입시키는 과정에 있고, 그 과정을 통해 복제체 자신은 자신이 원본체 그 자체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 관객인 우리들은 이러한 작품의 전제를 당장에는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연 한 인격이 심리적 요인의 지속성만으로 신체의 구애 없이 이동 가능하며, 이동의 경우마다 동일한 인격으로 존속할 수 있는가? 과연 나는 나의 복제를 통해 영생할 수 있는가? 이어지는 장에서는 전송의 사고실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인격의 동일성 문제에서 심리주의 동일론의 주장에 따라, 신체성의 근거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음을 논의해 보겠다. 이는 본고의 핵심 주장이기도 한 것이다.
전송의 사고실험은 심리주의 동일론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신체의 시공간적 지속 없이도 인격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신체 동일론의 반론이 된다. 그러나 사고실험을 따랐을 때, 인격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면, 즉 나의 신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내가 아닌 복제체에 불과할 뿐이라면, 이는 결코 신체 동일론의 반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심리주의 동일론의 맹점을 부각시키는 형국이 될 것이다.
3. 심리주의 동일론의 맹점: 신체성의 복권
(1) 전송(teletransportation)의 사고실험 비판: 분리 논증
파핏은 원격전송장치(teletransporter)에 의해 나의 두뇌(기억과 같은 심리적 요인의 담지 기관)와 신체의 정확한 정보가 다른 행성인 화성으로 보내지는 경우를 가정한다. 화성에 위치한 수신기가 지구에서 보내진 나의 두뇌와 신체의 정보를 읽어서 적절한 물질들을 동원해 나와 똑같은 복제체를 재구성한다. 여기에서 파핏은 다시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한다. 첫 번째 경우는, 원본인 나의 두뇌와 신체는 전송 과정에서 파괴된다. 두 번째 경우는, 전송의 과정에서 나의 두뇌와 신체는 파손되지 않지만, 나의 심장이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그로 인해 나는 얼마 안 있어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이며, 그전에 나는 통화 장치의 스크린을 통해 화성에 있는 나의 복제체와 얼마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동안 나는 나의 복제와 공존한다.
이러한 전송의 사고실험에서 중요한 점은, 원격전송장치를 통해 전송되는 건 내 신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이 아니라, 내가 지닌 심물(心物, 심리적 요인과 신체)에 관한 정보라는 점이다. 즉 원격전송장치는 물질을 전송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체와 두뇌의 정보 전체를 전송하는 수단인 것이다. 전송의 과정은 나의 심물에 관한 정보만을 전송하는 것이지, 나의 두뇌와 신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 자체가 전송돼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전송된 정보를 받아 재형성된 신체는 전송 이전의 본래 신체와는 시공간적인 연속으로서의 신체적 지속성이 전혀 없다. 여기에는 정보의 집합으로서의 인간의 신체에서 근본적인 것은 정보이며,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즉 전송의 사고실험은 심리주의 동일론의 입론에 따라, 신체의 지속성 없이, 과학 기술을 통한 심리적 요인의 연결만으로 인격의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사례로써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심리주의 동일론의 그런 의도와는 달리, 전송의 사고실험은 오히려 심리주의 동일론의 지닌 맹점을 드러내며, 신체 동일론의 입장을 지지하는 형국으로 드러난다.
먼저 파핏이 상정한 첫 번째 경우는, 지구에 위치한 송신기에서 원본체를 파괴한 후, 화성에 위치한 수신기에서 원본체의 심물 정보에 맞추어 동일한 신체를 복원한다는 원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에 따른다면, 원본체와 복제체는 결코 동일한 인격일 수 없다. 이를 명확하기 위하여 파핏의 사고실험을 다음과 같이 변형시켜볼 수 있다.
<분리 논증>
나(A)는 화성에 가기 위하여 원격전송장치(송신기)로 들어간다. 송신기에 들어가자 나의 두뇌와 신체가 분해되면서, 나의 심물 정보는 화성에 위치한 수신기로 보내진다. 그것을 전송받은 화성에서는 나의 신체를 복구한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이유 때문에, 나의 심물 정보가 두 곳으로 전송된 나머지, 두 대의 수신기에서 동시에 두 명(B와 C)이 복구되었다. 내가 두 명으로 분리되어 복구된 것이다. 그러면 지구에 있던 나는 화성에 도착해서 두 명이 된 것인가? 그럼 그 둘 중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두 명이 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분리가 일어난 경우, 화성에 살아남은 B와 C, 두 사람 모두는 A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이 A일 수도 없을뿐더러, B와 C 중에서 어느 한 쪽이 A와 특별히 더 동일하다고 할 수도 없다. B와 C는, A의 완전한 심물 정보를 동일하게 전송받은 서로의 복제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일 A의 심물 정보를 전송받아 복구된 존재가 바로 A가 돼야 한다면(이 경우야말로 동일한 인격의 지속이기 때문에), A의 심물 정보를 전송받아 복구된 B와 C도 A여야만 한다. 그러나 동일한 하나의 사람인 A는 두 명의 사람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왜냐면 동일한 하나의 사람이 동시에 상이한 물리적 공간을 점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A의 심물 정보를 전송받아 복구된 B와 C, 둘 모두는 A일 수 없다. 애초에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은 복원된 B와 C가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B와 C는 A와 완벽하게 유사하지만 A인 것은 아니다.
또한, A의 심물 정보를 두 명에게 복제했을 경우, A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한 명에게 복제했을 경우에도 A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관적이다. 이것은 설령 분리가 일어나지 않아, 단 하나의 신체만이 복구된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A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지구의 A는 화성에서 B로도 C로도 살아남지 않는다. 화성에서 살아남은 B와 C는 둘 다 A와 성분적(질적)으로 동일한 A의 복제체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A는 송신기에서 신체가 분해되면서 죽었고, B와 C는 A의 기록된 심물 정보에 따라 그와 유사한 또 다른 신체로서 화성에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심물 정보를 전송하는 신체의 분해와 복구의 과정에서 A라는 동일한 사람이 살아남는 건 아니다.
전송의 사고실험은 신체의 동일성(시공간적 연속성) 없이, 정보의 동일성만으로 인격의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전송의 사고실험 사례는 신체 동일론에 대한 반례로 제시되어 왔다. 즉 지구에서 나의 심물 정보를 전송하여 순간적으로 내가 화성에 도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신체의 시공간적 지속성을 인격 동일성의 기준으로 보는 신체 동일론에 대한 반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선 논의에 의하면, 정보의 동일성이 인격의 동일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나의 심물 정보를 전송함에 있어서 나의 심물 정보가 둘로 분리되어 두 사람으로 복구된 경우 나는 그 두 사람과 동일한 존재일 수 없다. 이와 같이 나의 심물 정보를 전송하여 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면, 곧 살아남는 건 내가 아니라 단지 나의 복제체에 불과하다면, 전송의 사고실험은 시공간적 지속성을 뛰어넘어 나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경우가 아니다. 그리고 전송을 통하여 시공간적 지속성과는 무관하게 인격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전송은 신체 동일론을 반박하는 사례가 되지 못 한다. 이런 결론은 전송의 가능성이 신체 동일론의 반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심물 정보의 동일성만으로 인격의 동일성이 보장되지 않으며 인격의 동일성을 위해서는 신체 동일성(시공간적 지속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파핏이 제시한 두 번째 경우가 함축하는 직관 또한 신체 동일론의 관점을 대변하며, 오히려 신체 동일론의 관점을 지지해준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경우의 전송의 과정에서 나는 분해되지 않아 지구에 생존해 있고, 나의 심물 정보를 전송 받은 화성에서는 나의 복제체가 복구되어 있다. 즉 나와 나의 복제체는 동시에 공존하며 대화까지 나누고 있다. 이 경우에 누가 진정한 나인가? 내가 여기 지구에 살아 있는데, 동시에 내가 화성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내가 여전히 지구에 남아 있는 한, 화성에 있는 존재는 더욱이 나일 수 없다. 이는 나의 심물을 전송하여 화성에 도착한 것이 나와 동일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화성에 존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복제체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의 나와 화성의 복제체는 서로 다른 개체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둘은 저마다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축적하고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복제체는 시간을 통하여 나의 인격 동일성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개체로서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더욱이, 이 사실은 내가 전송 과정에서 죽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화성에 있는 복제체의 삶은 내가 죽었든 살았든 복제체의 삶일 뿐, 나의 삶의 연장이 아닌 것이다. 즉 원본이 파괴된 경우에도 심물 정보의 전송은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시키지 못 한다. 송신기에 들어가서 죽은 사람과 수신기에서 복구된 사람은 동일한 인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경우도 첫 번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체 동일론의 반례이기 보다는, 인격의 동일성을 위해서는 신체적 기준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2) 행위의 신체성 논제
지구의 나와 화성의 복제체 중에서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지구의 나가 진정한 나라고 보아야 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성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한 두 개별자 중, 지구의 나가 바로 진정한 나이며, 화성의 복제체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우리의 직관이 가장 먼저 알려준다. 이것은 어째서일까? 우리의 직관은 행위의 신체성에 근거한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다면 그 행위는 행위자의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실제성, 역사성, 인과성을 가진다. 즉 송신기에 들어가는 나의 행위는 내 몸으로 실제로 수행한 것이며 그 당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행위의 인과적 역사는 나의 신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실제로 행한 바는 그 행위를 수행한 나의 신체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하여 내가 송신기에 들어간 원본으로서의 나라는 것은 그 행위로부터 인과적 지속성을 보존하는 나의 신체에 근거한다. 이에 따르면, 내가 송신기에 실제로 들어갔다는 것은 나에게는 참이지만, 화성의 복제체에게는 참이 될 수 없다. 그는 지구의 송신기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화성의 복제체는 직접 지구의 송신기에 들어간 적이 없으며 그 행위와 아무런 인과적 역사를 갖지 않는다. 다만, 전송받은 심물 정보에 의해, 자신이 그러했다는 기억(하지만 실제가 아닌 착각인)을 가졌을 뿐이다. 이런 결론은 신체 동일론의 관점과 일치한다. 지구에서 송신기에 들어간 나의 신체와, 전송 과정 후에 살아남은 나의 신체는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었기에, 나는 나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반면에 화성의 복제체는 지구의 송신기에 들어간 나의 신체와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본래 나의 인격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
심리적 지속의 관계로만 인격의 동일성을 설명하려는 심리주의 동일론은 자신의 입론 내에서 신체성의 근거를 배제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러한 부단한 노력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심리적 지속의 근거로써 신체를 동원하는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인격 동일성의 문제에서 신체성이 지니는 중요성을 다시금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송의 사고실험에서도 드러나듯, 그들이 말하는 심리적 지속의 관계는 두뇌라는 신체에 의존하여 구현된다. 그들은 충실하게 두뇌라는 신체에 기반을 두어 심리적 지속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 없이는 두뇌를 의식할 수 없다. 나의 두뇌가 지각하는 것은 나의 신체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심리주의 동일론이 말하는 신체성의 배제는 `나의 신체'에서 `아무 신체'로의 환원을 표명할 뿐이다. 개별적 실체성을 부정하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입장은 의식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채, 인격의 지속을 단지 심리 지속성의 관계로만 설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의식 통합의 주체는 필요하지 않은가? 심리주의 동일론에서는 그러한 최소한의 신체 기관인 두뇌를 끝내 배제할 수 없다.
다시 줄리아와 매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앞선 언급에서는 수술 후에 살아남은 이가 줄리아일 것이라고 우리는 이야기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매리의 신체를 지녔지만, 줄리아와 심리적인 지속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의심이 제기된다. 만약, 사고 전의 줄리아는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는 선수였다고 하자. 또 매리는 뛰어난 가창력으로 사랑받는 국민가수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줄리아의 기억에 따라 훈련을 위해 빙상장에 나가지만, 번번이 엉덩방아만 찧고 있다. 낙담한 그녀가 친구들과 위로주를 마신 후에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했다. 그런데 그것도 하필 그녀가 부른 노래가 사고 전 매리가 부른 히트곡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주위에 사람들은 과연 살아남은 사람을 줄리아라고 여길까? 아니,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은 줄리아가 아닌 매리이며, 다만 살아남은 매리가 자신을 줄리아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게 더 합당하지 않은가?
요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으로 심리의 지속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는 심리주의 동일론은 그 자신의 성립 조건으로서 신체성에 대한 완전한 배척을 주창한다. 인격 동일성의 기준을 추구함에 있어, 신체성이란 요소는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와는 모순되게 신체성이란 요소는 그러한 심리주의 동일론의 기저를 떠받치고 있다. 즉 심리주의 동일론의 입장은 신체성이라는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Ⅲ. 결 론
우리는 일련의 고찰을 통해, 인격 동일성의 문제에서 주축이 되는 세력으로서 신체 동일론과 심리주의 동일론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둘이 얽혀 형성한 지형도의 대강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재확인의 문제를 정식화하는 언명 ― 시점 t2의 인격 P2가 앞선 시점 t1의 인격 P1과 동일하기 위한 통시적 기준은 무엇인가? ― 에서 대문자 P로 표기되는 것을 신체 동일론은 신체의 지속이라고 보는 반면, 심리주의 동일론은 그것을 심리적 지속의 표현으로 본다. 로크로부터 비롯된 심리주의 동일론은 당초 신체 동일론이 드러내는 맹점들을 지적하며, 신체 동일론의 대안으로 등장한다. 로크를 계승한, 로크 이후에 심리주의 이론가들은 인격 동일성의 기준을 신체적 기관의 지속과는 상관없는 문제로 보는 일관된 입장을 보여준다. 그들이 보기에, 인격은 데카르트적 실체도 아니요, 인간이란 생물학적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서, 어떠한 물리적 기반 없이도 독자적으로 이동 가능한 것이 된다. 이런 발상은 인격이란 한 인간의 신체에 전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와 다름없는 것으로, 이는 생명공학을 필두로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인간 복제를 통한 영생 가능성에 대하여 이론적인 토대의 구실을 한다. 인격이 어떤 신체에 깃들든 간에, 심리적 요인이 지속되기만 하면, 동일한 인격이 존속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주장과 기대와는 달리, 시공간적인 연속으로서의 신체성을 완전히 배제하고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지반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면 신체 동일성이 아닌, 정보 동일성만으로 인격의 동일성은 확보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전송의 사고실험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심리주의 동일론이 벗지 못 하는 신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은 오히려 신체 동일론의 입장을 강화시킨다는 점 또한 우리는 논의했다. 신체적 지속 없이 인격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격 동일성의 유지를 위해서는 신체적 지속이 필수적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행위와 기억의 신체성은 원본체와 복제체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존재론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기준이 되며, 무엇보다 심리주의 동일론은 의식 통합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채, 의식의 연결 관계만을 강조하는데, 의식 통합의 주체는 반드시 신체적인 형식을 통해 구현될 수밖에 없다.
신체 동일론의 대안적 반론으로 등장한 심리주의 동일론은, 일견 신체 동일론의 맹점을 딛고, 인격 동일성의 기준에 대한 우리의 갈급함을 해소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 탓에 신체 동일론은 폐기돼야 할 과거의 허물로 치부됐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심리주의 동일론은 신체라는 기준 없이는 유효할 수 없다. 심리주의 동일론은 신체라는 기준을 충실하게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성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서는, 혹은 신체성의 고려 없이는, 심리주의 동일론의 주장이 성공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다시 신체 동일론이 심리주의 동일론을 보완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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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 : 변화와 동일성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