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기도 972. 성전 정화를 하는 예수님(240314)
민요세비
지난 사순 2주차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도하는 곳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마라, 환전상을 엎어버린다.
왜 환전상을 엎어버리고 쫓아 내었을까?
성전의 사제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예물을 사서 바칠 때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화폐를 사용하게 했다.
먼 시골에서 가난한 순례객이 일년에 한 두 번 며칠을 걸려 성전에 와서 가장 작은 예물인 비둘기를 바쳐야 할 때
집에서 잡아 온 비둘기는 안되고 성전에서 파는 비둘기만 가능하다고 법을 만들어 놓고,
이를 사려면 말도 안되는 비싼 가격을 주고 사야 하는데 그것도 환전을 해서 비둘기를 사야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짜고 하는 야바위꾼들이었지요.
기도하는 곳이 이런 장사꾼들의 천지가 된 것을 채찍으로 내 쫓아도 사제들과 유다인들은 말을 못하고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 증거를 대라고만 말합니다.
성전을 부의 축적 도구로 사용하는 사제들은 그 후로도 계속되어 왔습니다.
요즘의 교회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가? 연관어 검색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하느님, 영원한 생명, 구원, 말씀, 복음, 자비, 가난, 은총과 기도 같은 언어보다
헌금, 봉헌, 행사 같은 돈과 관련된 언어가 더 많다면, 옆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교회가 부자이면 좋지요. 부자의 재산을 헌납 받아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에게 재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면 교회는 하늘나라를 세상에 만드는 일을 효율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투명해야 합니다.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거두어들인 돈은 변하지 않았는데 계산이 맞지 않는다면 맞지 않는 만큼은 다른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는 의심을 사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의 본질인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말씀도 진리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성전 마당이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어울리고, 형제처럼 나눔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면 하물며 교회 밖의 가난에는 눈을 돌려 보겠는가요?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소금과 촛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냉담자가 많아지거나 미사참례자가 줄어드는 이유가 코로나19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반성해 봐야 할 점도 많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불참 해도 된다고 가르친다면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불참하게 됩니다. 미사에 불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심이 없어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죄의식만 심어서 주일 미사 참례에 불참하면 죄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한 시간, 기도해야 하는 시간이 기쁨과 영광의 시간에 동참해야 하고,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더, 많이 내야 신심이 돈독 하다는 분위기로 몰아 간다면 부자에게 유리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깃발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에 꽂혀야 합니다.
가난한 영혼들이 교회에 와서 가치를 느끼고 희망과 비전을 가지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희망의 끝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되고 행복하게 되고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선교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