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시작을 흔히 선조 연간 김효원과 심의겸을 이조좌랑의 임명을 둘러싸고 중심으로 무리를 나누어 대립한 것에서 찾는데, 동인과 서인이라는 명칭은 당시 김효원과 심의겸의 집이 있던 위치에 빗대 그리 부른 것이었다.
그것을 정통성이 취약하던 선조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이용하면서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기축옥사를 둘러싸고 서인과 북인, 남인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피가 피를 부르는 처절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원래 동인은 야은 길재의 영향을 받은 영남지역의 선비들이었다. 반대로 서인들은 주로 기호지방 - 즉 경기와 충청 일대의 전통적으로 중앙정부와의 유대가 강했던 선비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각각 영남학파, 기호학파라고도 불렀는데, 당연히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동인은 현실비판적인 성향이 강했고, 서인은 상대적으로 현실지향적인 성향이 강했다.
조식과 이황, 그리고 성혼과 이이는 이러한 그들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저 밥그릇싸움이나 하려는 당파가 아니라 이미 서로 다른 이념에 의해 분화된 붕당이었던 것이다.
물론 서로 다른 이념과 성향으로 갈라서게 된 만큼, 이들 역시 다시 내부의 서로 다른 이념과 지향으로 인해 갈라서게 된다. 아무래도 조식과 이황이라고 하는 당시 유림 최고의 석학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너무 다른 사상과 지향을 갖고 있던 터라 특히 이들의 학풍이 공존하고 있던 동인에 있어서 그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른바 노론, 소론, 북인, 남인이라고 하는 사색당파의 시작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주리론적인 이항로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황과조식이지만 사뭇 그 해석은 달랐다. 여전히 성리학적인 이기론적 틀을 고수하며 도학적인 이발기승론을 주장했던 이황에 비해 조식은 오히려 왕수인의 양명학과 비슷하게 지행일치의 행동철학을 들고 나온다. 조식의 사상은 양명학의 그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이러한 사상의 차이는 결국 기축옥사 이후 서인에 대한 대응에서 서로 다른 입장차이로 드러나게 되는데, 결국 그로 인해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 조식의 제자들이 주로 북인이다.
또 이렇게 갈라진 북인은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두고 내부에서 다시 분열한다.
이이첨, 정인홍을 위시한 대북은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지지한 반면, 박성량등의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한 것이다. 한때 선조에 의해 광해군이 극도로 견제받으면서 소북이 득세하는 듯도 했지만, 결국 선조가 급작스레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에 밀려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남은 대북. 지행일치라는 게 좋을 때는 좋지만, 안 좋게 풀리면 독선과 아집으로 흐르기 쉬운 거라, 결국 정인홍의 배타적이고 고집스러운 독선과 이이첨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사방에 적을 만들고 만다. 심지어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남인들조차 이들에게 배척당해 정치적인 적으로 돌변하니, 결국 남인을 끌어들인 서인에 의해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이들 역시 소북의 전철을 밟는다. 상당의 영수 정인홍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 사사되는 전례에 없는 처분을 당하고 말이다.
그렇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는다. 원래 서인의 기반이 있는 곳이 경기와 호서, 당연히 한양 역시 그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고 궁궐에는 왕이 있다지만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반란을 일으킬 여건이 되었다. 광해군이 반란을 방관했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그렇게 반정을 일으켜 인조를 즉위시키고 서인은 조정을 주도하게 된다. 남인이 있기는 하지만 반정을 주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서인이기에 그 힘은 크지 않았다.
이 서인이 갈라지게 된 것은 숙종 연간 여러 차례 환국을 겪으면서 남인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 상황에서 과연 남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아버지 윤증의 비문을 두고 송시열과 윤휴가 대립하던 것과, 당시 숙종의 외척이 전횡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것을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서인 내 소장파와 노장파의 대립 등이 그것이다.
그것이 결국 다시금 경신환국을 맞아 남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로 번지면서 남인에 우호적인 소장 선비들이 윤휴를 중심으로 소론이 되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노론이 된다. 이후 소론은 경종 때 잠시 반짝하다 영조 연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면서 사실상 정치일선에서 사라지게 된다.
소론이 사라지고 나자 이번엔 사도세자에 대한 문제를 두고 노론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노론 벽파,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던 것이 노론 시파다.
참고로 세도정치를 주도한 안동 김씨가 노론 시파에 속하고, 그와 경쟁하던 풍양 조씨가 노론 벽파에 속한다. 노론 시파는 상대적으로 천주교에 관대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결국 헌종의 즉위 이후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은 풍양 조씨에 의해 재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 여러 학파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가장 진보적인 - 요즘 말로 하면 빨갱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학파가 바로 이러한 노론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원래 노론의 정치적 기반이 기호지방이고, 노론을 후원하던 것이 경강상인이었다는 것과 그들이 정권의 중심에서 연행길 - 청으로의 사신행 - 에 자주 올랐던 것을 생각해 보면 사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이의 주기론은 기의 운화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에 굳이 중화를 고정지어 생각할 것도 없고, 만주족이라 해서 계속 오랑캐로 여길 이유도 없었다.
이른바 인물성동이론이다.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 어찌 보면 사대의 원리로 돌아가자는 이들의 성향은 노론의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이후 박규수, 김옥균, 박영효로 이어지면서 구한말 개항파를 구성하게 된다.
다 나왔으니 이제 남은 건 남인이다. 조금 심하게 말해 거의 바퀴벌레 수준이다. 선조 연간 서인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북인과 대립하고 뛰쳐나와 남인을 결성한 이래 한 번도 분열하거나 하는 법 없이 정조 연간까지도 끝까지 살아남아 정치의 일선에서 활약한다. 유성룡에서부터 정약용까지 서인이 노론이 되고 노론이 노론벽파와 시파로 나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끝까지 남인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남인이 서인에 비해 약세였던 데다, 숙종 연간 환국을 둘러싸고 잠시 정권을 주도한 이외에는 항상 야당으로 서인을 견제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실학자라고 해도 남인 출신의 정약용 등과 노론 출신의 박지원 등은 그 성향이 사뭇 달랐는데, 그것은 그들이 따르던 학풍과도 큰 관계가 있다.
남인은 보다 근본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만큼 혁신보다는 안정을 추구했고 그래서 보다 안정적인 사회를 가능케할 수 있는 농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던 반면, 북학파는 인간의 욕망과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중상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
이러한 성향의 차이는 개항 이후 개항파로서 개혁을 적극 주도한 북학파의 후손들과는 달리 의병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남인계열로 갈리게 된다. 세계관의 차이가 현실에서의 행동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럼 순조 이후 세도정치기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사실상 당파가 소멸한다. 이 시기 당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누가 더 장동 김씨 -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를 따로 구분해 그리 불렀다. 장김이라는 건 장동 김씨를 줄인 말이다. - 에 가까우냐, 누가 더 풍양 조씨에 연주를 갖고 있느냐가 어떤 당파에 속했는가보다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그 끝에 장동 김씨의 신파와 풍양 조씨와 연합한 소론이라 할 수 있는 흥선대원군이 나타난 것이다.
[출처] 조선의 당파와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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