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가족 23-34, 우리의 발걸음이 맞춰지는 날
“어, 지금 오나?”
거창에서 출발한다고 연락드리니 지금 오냐는 아버지의 대답에 딸을 기다리고 계셨구나 싶어 서두른다. 점심 먹지 않았다고 하니 당신은 이미 먹었다며 둘이 먹고 오라고 한다. 밖에서 사 먹으면 그거 다 돈이라고 하시면서.
김민정 씨가 “고기” 하고 말하기에 곁에서 얼른 덧붙인다. “저희 아버님이랑 같이 밥 먹으려고 아무것도 안 먹고 서둘러서 왔어요. 배고파요. 같이 먹으러 가요.” 하니, 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배고프다는 딸의 말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인 것이다. 자식의 곪은 배를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되랴.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김민정 씨가 아버지께 물을 따라드린다. 그 손길과 입가의 미소가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 준다고 느꼈다.
묵은지해장국과 뚝배기불고기가 차례로 나온다. 밥공기가 뜨겁다. 아버지께서 딸의 스탠 밥뚜껑을 열어준다. 딸은 아버지의 흰밥 위에 불고기를 올려준다. “예, 예, 히히.” 하면서. 아버지께서 당신의 해장국 그릇을 톡톡 치며 “너도 이거 묵으라.” 하신다. 묵묵하게 건네는 말이 식탁 위를 채운다.
불룩 나온 배를 보며 “병원 가 봤나.” 하시면서도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딸에게 “밥 더 먹어라.” 하며 반 공기를 덜어 건네주신다.
“이제 더위가 꽤 가시고 날이 좀 선선하죠? 산책하기 딱 좋겠습니다. 따님이랑 근교 여행해요. 멀리 가는 게 부담되시면 근처 풍경 좋은 곳 산책합시다. 기회가 있을 때 함께 다녀요. 그렇게 두 분 사이를 돕고 싶어요.”
“그래, 저 가자 그럼.”
미리 밀양 근교에 여행할 만한 곳을 검색하고 찾아보았지만, 먼저 이야기를 꺼내진 않는다. 우선 물었다. 아버지께서 생각한 곳이 있었다. 다행이다. 안내해 주시는 곳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밀양을 가로지르는 강변을 걷는다. 내리막길을 만나자 김민정 씨가 아버지께 손을 뻗는다. “겁을 내고 있어.” 하며 아버지께서 손을 맞잡는다. 내리막 계단이 끝날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평평한 길에서는, 이제는 딸이 아버지를 앞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멈춰 서서 아버지를 바라보고 웃는다. 아버지와 몸이 나란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오르막길에서는 아버지께서 주춤하신다. 이땐 또 김민정 씨가 손을 잡는다. 서로 그렇게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도움 주고 도움받으며 오르내린다.
슬금슬금 직원 곁으로 오려는 김민정 씨에게 속삭인다. “얼른 아버지 곁으로 따라 가셔요. 그래야 저기 오르막길에서는 김민정 씨가 손을 잡아주지요.”
김민정 씨가 주춤하더니 이내 아버지 곁에 나란히 선다. 발걸음이 비슷해지니 두 분이 손을 맞잡을 때가 있다. 두 분의 발걸음이 맞춰지는 날, 비슷해진 발걸음 속에서 아버지의 연세를 읽는다. 이제는 김민정 씨가 아버지 손을 잡아드릴 때가 온 것이다.
식사할 때도 아버지께서는 고기를 절반이나 남기셨다. 풍경 좋은 곳을 산책할 때도 자주 쉬어가셨다. 노인의 식사와 청년의 그것은, 노인의 언덕길과 청년의 그것은, 노인의 여행 계획과 청년의 그것은, 아무래도 조금 다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계획하고 두 분의 여행을 주선했다면 두 분의 발걸음에는 다소 버거웠을 것이다. 아버지와 딸이 식사 자리에서 어디 가면 좋을지 의논하고, 두 분의 계획에 따라 도우니 당신에게 꼭 맞는 여행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젊은 직원의 기대와 열정 담은 여행 계획보다 김민정 씨와 아버지의 걸음에 맞춘 느긋한 여행 계획이 이제는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께는 더 여행답고 여유로울 수 있겠다 싶었다. 이제는 힘에 부쳐서 거창에는 못 간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빨리 와! 살이 쪄서 그래. 이거 오르고 자꾸 색색거리고 그러네. 단 거 먹지 마라!” 하고 호통치던 작년, 재작년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오늘의 아버지는 참 부드럽다. 점점 더 작아지시는 것 같다. 무언가 아버지를 작아지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는 그걸 시간의 흐름이고 늙음이라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움을 갖춘 사람은 어쩌면 인생이 유한하고, 우리는 늙어감을 아는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래서일까, 부드러워진 아버지의 모습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약간의 슬픔이 포함된 어떤 감정이 다가온다.
자주 찾아뵐 수 있게 도와야겠다. 이제는 정말 그래야 할 것 같다. 사정이 핑계가 되고, 핑계가 익숙함과 무심함이 되기 전에 말이다. 언젠가 당신에게 다시는 찾아뵙지 못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이전에 놓친 기회들이 영영 사무치는 후회가 되지 않도록.
돌아가는 길, 아버지께 연락드렸다.
“저희 잘 가고 있습니다. 중간에 카페 들렀어요. 제가 졸려서 무리하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커피 마시고 안전하게 돌아가려고요. 또 오겠습니다. 다음엔 또 다른 곳 느긋하게 산책해요. 따님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 예.”
“어, 그래.”
2023년 9월 25일 월요일, 서지연
아버님, 딸과 함께 식사하고 산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금 귀찮고 힘들어도 딸이 먼 곳에서 왔다고 함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신아름
명절 앞두고 아버지 댁 찾아뵙고 인사드리니 감사합니다. 아흔을 바라보시는군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실 줄 알고 지내기 십상이죠. 자주 연락드리고 찾아뵙겠다니 감사합니다. 월평
첫댓글 내가 부모라면 서지연 선생님 같은 사람이 내 딸을 도와주어 참 고마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