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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Xaver Winterhalter (1805-1873)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19세기 유럽의 유명인들, 특히 귀족이나 왕족들의 초상화로 유명한 독일의 화가이지 판화가 입니다.
1805년 바덴 대공국에서 태어났습니다.
1830년대 벌써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그는 1838년 오를레앙의 루이즈, 벨기에의 왕후와 그녀의 아들을 그리면서 유명해 졌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미술계에서 그의 평가는 박해졌습니다.
원래 빈터할터 자신도 초상화는 그냥 잠깐 할 생각이었지만 초상화가로서 그의 인기가 폭발적이 된 바람에 그는 계속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결국 때부자가 되었습니다.
1873년 프랑크프루트에서 사망했습니다.
1841년작
Louis Philippe I, King of the French
루이 필리프 1세 (1773-1850)
부르봉 왕가의 일원이었음에도 (방계, 직계와는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여 팀킬을 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인지 그도 혁명을 지지했고 다른 나라들이 프랑스를 공격했을 때 그는 혁명군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 군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1793년 로베스피에르와 급진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그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오스트리아 군에 항복하고 프랑스는 그의 아버지를 처형했습니다.
그는 스위스에 망명하여 정치에 관심을 끄고 죽은 듯 지내며 가명을 쓰며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스위스의 한 학교에서 교사로 일 했는데 교장의 요리사 였던 마리안 반조리라는 여인과 연애질을 하다 그녀가 임신 한 것을 알게된 교장이 그녀를 밀라노로 보내버리고 태어난 아이는 곧바로 고아원에 버려졌습니다(…)
그는 계속 여행을 다녔고 1809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을 합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가가 다시 들어서자 그도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1830년 샤를 10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치를 하지 않았고 나름 노력은 했지만 보수적이고 고압적인 내각 때문에 그의 인기도 떨어졌습니다.
그의 치세때 빈부격차는 매우 심해졌고 결국 1847년 사회가 무너지고 경제가 무너진 뒤 1848년 혁명이 일어나 실각했습니다.
반세기전 루이 16세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까봐 두려웠던 그는 가명을 써서 프랑스를 탈출한 뒤 영국에서 1850년에 사망했습니다.
왕을 쫓아낸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을 뽑았습니다만 이 양반은 1851년 자신을 종신 대통령에 임명하고 결국 1852년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1840년작
Leopold I, King of the Belgians
레오폴 1세 (1790-1865)
레오폴 1세는 작센 코부르크 잘펠드의 프란츠 공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16년 당시 영국의 섭정이었던 미래의 조지 4세의 유일한 자식인 샬롯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듬해 아이를 낳다 사망 합니다.
1828-1829년 사이에 그의 애인이었던 독일 출신의 여배우 카롤리네 바우어는 이 샬롯 공주와 매우 닮았었다고 합니다. 이 즈음 그리스 왕위를 권유 받지만 그는 거절하고 1831년 벨기에의 왕이 됩니다.
1832년 오를레앙의 루이즈와 결혼하여 네명의 자녀들을 둡니다. (그중 한명이 레오폴 2세인데 이 인간이 콩고를 자기 사유지로 한 동안 콩고에서 약 천만명이 착취당하며 죽었습니다.)
1840년 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누나의 딸) 과 작센 코부르크 고타 의 알베르트 (형의 아들) 의 중매를 서서 그들은 결혼 했습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을 외교력으로 잘 대처해 무난하게 빠져나갔습니다.
1865년 사망했습니다.
1843년작.
Victoria I, Queen of the United Kingdom
빅토리아 여왕 (1819-1901)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은 미친왕 조지 3세의 4남 켄트공 에드워드의 유일한 딸로 태어났습니다.
보통이라면 그녀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겠지만 다른 후계자 후보들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그녀는 1837년 윌리엄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1839년 작센 코부르크 고타의 알베르트에게 청혼하여 약혼하고 1840년 결혼에 골인을 합니다.
부부간의 금슬은 매우 좋았고 여왕은 알버트공과 9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아시다 시피 여왕은 총 64년의 긴 세월 동안 왕위에 있었고 그 기간 동안 내각은 20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 중에서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4번이나 수상직을 맡았습니다. 신사적이고 위트가 넘쳤던 디자렐리에 비해 글래드스톤은 상당히 딱딱한 인간인지라 여왕은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모양..)
하지만 1861년 그녀와 오랫동안 사이가 나빴던 모후가 사망하고 그 이듬해는 평생 사랑한 부군인 알버트 공이 4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알버트 공은 사망하기 얼마 전 아일랜드에서 여배우와의 소문이 난 에드워드 왕세자를 훈계하기 위해 케임브릿지로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걸려 + 과로로 결국 사망했습니다.
여왕은 남편의 사망을 못난 아들 새키 때문이라 생각했고 한 동안 아들을 냉랭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알버트공의 사망후 그녀는 평생 검은색 옷만 입었고 공석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대의 한계인지 그녀는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것을 반대했고 강대국이라는 포지션을 계속 차지하기 위해서 항상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고 생각하고 대영제국의 팽창을 “미개인”들을 문명화 시키고 더 잔혹한 열강의 위협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블라블라블라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1897년 그녀는 제위 60주년을 맞이 했습니다. 1901년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은 유럽 전체로 퍼져 그녀는 유럽의 할머니라고 불렸습니다.
현재 유럽 왕가에서 그녀의 후손이 없는 가문이 거의 없는데 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와 개드립이 쩔어주는 그녀의 부군 필립 공 또한 그녀의 후손들입니다.
빅토리아 여왕, 알버트 공, 애들 1846년작.
1842년작.
Prince Albert of Saxe-Coburg-Gotha/ Prince Consort of the United Kingdom
작센 코부르그 고타의 알베르트 공/ 알버트 공 (1819-1861) (알버트로 함)
알버트 공은 1819년 작센 코부르크 자알펠드공 에른스트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친과 모친의 불화로 인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친인 작센 고타 알텐부르그의 루이제는 남편의 외도질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맞바람을 피우기 시작하고 1824년 결국 별거, 1826년엔 이혼을 하고 맙니다.
1824년 모친을 마지막으로 봤다는군요.
모친은 1827년 애인인 한슈타인 남작과 결혼하지만 1831년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시대의 트렌드에 맞게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 철학, 경제학을 공부했고 승마, 체조, 음악, 펜싱도 잘 하고 얼굴도 잘 생긴 엄친아로 자랐습니다.
알버트 공은 상당히 진보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본 대학교에서 공부한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1840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합니다만 영국인들은 그를 웬 가난뱅이 듣보잡 촌놈이라 생각했고 처음엔 인기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왕과 9명의 자녀를 두는데 시대에 드물게 모두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원래 가정부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친구였던 레첸 남작부인을 무능한 house dragon(…)이라 생각하고 결국 여왕과 피튀기는 배틀 끝에 그녀를 쫓아내고 보육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도 충분히 높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쨌든 아내가 여왕이라 좀 쩌리 취급을 받아 허탈감 비슷한 것도 많이 느낀 모양입니다. 처음엔 공기 취급을 당했지만 점점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인기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여왕과 업무 결제도 같이 하고 장관들이나 의원들도 혼자 만날정도 였다고 합니다. 상당히 진보적인 인물로 노예제와 아동 노동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1859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1861년 장남인 웨일즈 공 알버트 에드워드를 훈계하기 위해 케임브릿지에 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히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 못난 아들 새키/에드워드 7세 1846년작.
(미래의) 프리드리히 3세, 빅토리아 (프린세스 로얄), (미래의) 빌헬름 2세 (큰애기), 프로이센의 샤를롯 (작은애기).
1862년작.
1864년작.
Victoria, Princess Royal/ German Empress, Queen Consort of Prussia
빅토리아, 프린세스 로얄/ 독일의 황후, 프로이센의 왕후 (1840-1901)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공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적엔 매우 총명하여 부모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와 다르게 바로 밑 남동생인 에드워드 왕자는 사교성과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공부에선 그녀를 따라갈수 없어서 이때부터 삐뚤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 그녀와 에드워드 왕자의 사이는 매우 좋았습니다.
어렸을적 그녀는 불어, 독일어, 문학, 역사, 과학을 가정부들에게서 배웠고 알버트 공은 직접 철학과 정치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ㄷㄷ.
1851년 그녀는 미래의 남편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자를 처음 만나고 1855년 그들은 약혼합니다. (14세, 프리드리히 왕자는 24세…..) 그리고 1858년 결혼 했습니다.
매우 사이가 좋았고 그녀는 9명의 자녀를 둡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 튼튼한 팔로 유명한 빌헬름 2세도…
진보적인 성향의 부모와는 달리 빌헤름 2세는 뼛속까지 프로이센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인 인물이라 모자간의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합니다.
1864년 프로이센과 덴마크와 전쟁이 일어나고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결혼한 동생 에드워드와는 잠깐 사이가 멀어졌다고 합니다.
1888년 프리드리히 왕자의 아버지인 빌헬름 1세가 90세로 사망하고 그녀의 남편이 제위에 올랐지만 그는 겨우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사랑했던 남편을 기리며 지은 성에서 은거하며 공석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1901년 유방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일생동안 모친인 빅토리아 여왕과 매우 사이가 좋아서 서로 거의 8000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여왕= 3777통, 빅토리아 황후= 4000통 이상)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에게 적은 편지에서 자신의 아들을 많이 깠는지 죽기 전 동생인 에드워드의 비서에게 빌헬름 2세가 보지 못하게 자신의 편지들을 모두 영국으로 옮기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Friedrich III, German Emperor, King of Prussia
프리드리히 3세/ 독일의 황제, 프로이센의 왕 (1831-1888)
무려 90세까지 산 빌헬름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알버트 공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아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동생이라 왕세제였던 아버지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인 답게 보수적이고 상당히 고압적인 인물이었지만 어머니 작센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프로이센의 왕족들이 모두 그랬듯이 어렸을때부터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지리학, 음악, 역사, 종교, 그리고 체조에 승마까지 배웠다고 합니다.
18살 때 그는 전통을 깨고 입대 대신에 진보적인 스탄스로 유명했던 본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858년 러시아의 대공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을 씹어버리고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와 결혼했습니다. 정치 성향도 비슷했고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던 그들의 사이는 매 우 좋았고 9명의 자녀들을 둡니다.
1861년 아버지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왕으로 즉위하여 그는 27년 긴 세월을 왕세자로 보내게 됩니다.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덴마크 (1864), 프랑스(독불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통일 후, 재상인 비스마르크와는 여러모로 생각이 맞지 않아 키배를 몇번 벌이기도 했고 결국 공석에서 비스마르크를 비난하여 빌헬름 1세의 심기를 건드린 그는 정치에서 배제되었습니다.
1888년 드디어 56세의 나이로 독일의 황제로 즉위했지만 그는 후두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나라에 대한 황제의 의무를 하지 못하게 한 자신의 병을 매우 치욕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하려 했지만 겨우 99일 만에 독일의 미래를 걱정 (후계자가 빌헬름 2세였으니 뭐..)하며 사망했습니다.
Wilhelm II, German Emperor, King of Prussia
빌헬름 2세/ 독일의 황제, 프로이센의 왕 (1859-1941)
1859년 앞서 적은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왼쪽 팔이 15cm 정도 더 짧았는데 평생 컴플렉스로 남아 항상 왼쪽 팔을 감추려고 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외할머니라 사촌들도 매우 많았는데 어렸을적 그는 사촌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머리회전이 빨랐다고 하지만 그의 개 같은 성격과 쩔어주는 막말 덕분에 이런 장점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렸을적부터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큰 감명을 받았는지 군복 입기와 큰 군함을 좋아하는 밀덕으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를 매우 존경했고 성향도 그와 더 비슷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후와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다고 합니다.
1888년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고 제위에 올랐습니다.
비스마르크와 계속 의견차이로 마찰을 일으키고 1890년 비스마르크는 사임했습니다.
그는대제국 건설, 해외 식민지 그런걸 원했고 (Germany’s place in the sun) 외교정책을 벨트폴리틱이라고 불리는 방침으로 수정하여 영국과 경쟁한답시고 큰 군함들을 지으며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비스마르크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외교망을 무너뜨렸고 계속되는 외교적 삽질로 결국 1차세계대전이 터졌습니다.
1918년 독일의 패색이 점점 짙어갈 때 쿠데타가 일어나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습니다. (여기서 좀 재밌는게 있는데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했던 말이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고 20년뒤에 예나에서 프로이센이 패배했듯이 (프로이센이 나폴레옹한테 얻어 터진 전투) 이대로 계속 가다간 내가 죽고 20년 뒤에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했는데 비스마르크는 1898년 사망, 1차세계대전은 1918년 종전. ㄷㄷㄷ)
망명한 뒤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유태인들이 사회악적인 존재고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포그롬 (집단 박해)비슷하게 다 때려 잡아야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나치당에 호의를 느꼈다고 하지만 히틀러는 빌헬름 2세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고 나중에 4남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나치당원이 되어 크리스탈나흐트 (1938년 나치의 대대적 유태인 박해 사건)에 쉴드를 치지 “야 이 못난놈아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ㅉ 내가 독일인라는게 쪽팔린다 이 ㅅㅋ 야.” 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중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지 그는 히틀러에게 축하한다는 전보를 보냈는데 내용이 “어잌쿠 나의 병사들 데리고 파리 점령한거 축하.”
1941년 네덜란드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언은 제정복고가 될때까지 독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아마 돌아갈 일 없을 듯.
1853년작.
Eugenie (두번째 이에 악센트가 있습다.), Empress Consort of the French
외제니, 프랑스의 황후 (1826-1920)
1826년 스페인의 귀족, 아블리타스의 백작 (작위가 꽤 많습니다) 돈 시프리아노 데 팔라폭스 이 포르토카레로의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언니인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스페인의 넘버 원 귀족인 알바 공과 결혼했습니다. (현재 알바 여공작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파리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남편이 되는 나폴레옹 3세를 만나 1853년 결혼했습니다. 1856년 유일한 아들 나폴레옹 외젠을 낳았습니다.
이 나폴레옹 외젠은 1879년 아프리카에서 줄루 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그녀에게 많이 의지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보수적인 카톨릭 성향을 가졌고 프랑스의 멕시코에서의 삽질과 막시밀리안 대공의 죽음을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1871년 나폴레옹 3세가 실각하여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1873년 나폴레옹 3세가 사망하고 6년뒤에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많은 충격을 받았는지 건강이 계속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1920년까지 살다 마드리드에서 사망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빠숀 아이콘으로 유명했고 쩔어주는 보석 컬렉션의 소유자였는데 이 컬렉션의 대부분은 사후 브라질 출신의 사교계 명사 였던 Aimee de Heeren (1903-2006 발음을 모르겠네요ㅠ)가 사들였다고 합니다.
남편 나폴레옹 3세, 1855년작.
Aimee de Heerens
1864년작.
위 두명은 동일인물.
Charlotte of Belgium/ Carlota, Empress Consort of Mexico
샤를롯, 벨기에의 공주/멕시코의 황후 카를로타 (1840-1927)
벨기에의 왕 레오폴 1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57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안 대공과 결혼했습니다.
황후였던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와 달리 시어머니였던 조피 대공비는 샤를롯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샤를롯 본인도 이상주의자였던 남편과 성향이 비슷해 사이가 좋았고 또한 쩔어주는 미모로 남심을 뒤흔들고 다녔던 엘리자베트 황후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던 그녀는 멕시코의 혼란을 틈타 멕시코를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한 꼼수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 대공에게 멕시코의 제위에 오르기를 제안했고 대공은 승락하면서 1864년 멕시코에서 제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르자마자 불리해진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을 버렸고 미국 해군에 막혀 프랑스의 원군도 상륙을 실패하여 고립되었습니다.
상황이 절박해지자 샤를롯은 급히 유럽으로 돌아가 여러나라를 돌며 호소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867년 빅토르 위고 같은 많은 지식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남편 막시밀리안 대공 (멕시코에선 막시밀리안 1세)은 멕시코 공화국의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즈의 명령에 총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불쌍한 카를로타!"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큰 충격을 받은 샤를롯은 완전히 미쳐버렸고 이탈리아에 있는 미라마레 성에서 1927년 사망할때까지 살았습니다.
죽을때까지 막시밀리안 대공을 사랑했다고 하며 남편의 죽음 후 그녀는 많은 유산을 상속 받았는데 오빠인 레오폴 2세의 부하였던 보호인이 레오폴 2세의 명으로 돈을 횡령하여 레오폴 2세의 사유지였던 콩고의 식민지화에 썼다고 합니다. (...)
1865년작?
남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
1865년작.
1865년작
윗둘은 동일인물
Elisabeth of Bavaria/ Empress Consort of Austria.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오스트리아의 황후 (1837-1898)
173cm/49kg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요제프공의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꽤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1853년 남편이 되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세프 1세와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원래 황제의 어머니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의 언니 헬레네가 황제와 결혼하는 것을 원했지만 고분고분한줄만 알았던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베트를 보고 한눈에 반해 어머니의 바램을 씹어버리고 1854년 결혼 했습니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자란 엘리자베트 황후는 딱딱한 궁중 에티켓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그녀를 어리고 멍청했다고 생각한 시어머니인 조비 대공비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1855년 장녀/허니문 베이비 조피를 낳았습니다만 조피 대공비는 그녀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고 자신이 돌본다며 장녀를 빼았아 갔다고 합니다.
1856년 차녀 기셀라를 낳았지만 기셀라 역시 조피 대공비가 데려갔습니다.
1857년 그녀는 처음으로 헝가리를 방문했습니다.
헝가리와 헝가리인들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평생 헝가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같은해 장녀 조피가 사망했고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1858년 아들 루돌프를 낳았고 1868년 딸 마리 발레리를 낳았습니다.
173cm의 큰 키에 (남편보다 더 컸다고 합니다) 49kg를 운동과 극단적인 식단으로 유지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말년에는 체중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해져 하루에 세번씩 몸무게를 쟀다고도 합니다.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푸는 버릇도 있었다고 하는데 쪽팔렸는지 별장에 개인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비밀 계단을 설치해서 버릇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외모에 많은 자부심이 있었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2세 이후에 더 이상 초상화와 사진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항상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래서 그랫다고 합니다.
여자의 미모를 빼았아가기 때문에 아이들을 저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89년 황태자 루돌프는 애인 마리 베체라 (17세)와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이얼링 사건) 이 사건을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사망할때까지 검은색 옷만 입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아버지, 어머니, 언니, 베프를 잃은 그녀의 우울증은 더욱 더 심해졌고 예전에도 그랬지만 자주 도피성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1898년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 성향의 정신병자에게 암살 당했습니다. 황후를 평생 사랑했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친척들에게 "그녀가 내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모를거야." 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1865년작.
1857년작.
헤센과 라인의 마리/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러시아의 황후 (1824-1880)
헤센의 대공 루드비그 2세와 대공비 빌헬미네의 막내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대공비와 애인 그란시 남작의 불륜으로 태어났지만 루드비그 2세가 스캔들을 원치 않았기에 자신의 딸로 인정했다는 것 이 정설입니다.
1838년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산더는 유럽 여행중 14세였던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던 러시아의 황후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황태자는 "나도 알고 있음 엄마 관심 끄셈." 으로 1841년 결혼 했습니다.
8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남편은 그녀를 정중하게 대했지만 사생활이 매우 난잡한 인간이었고 그녀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매우 수줍고 조용한 성격에 빠숀 센스가 별로였고 위티한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리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1855년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1865년 아끼던 장남 니콜라이가 요절하여 충격을 받은 그녀는 더 조용한 성격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1880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녀가 사망한지 몇달 안 되어 알렉산더 2세는 황후 생전에도 궁에서 자신의 사생아 3명과 살고 있던 정부와 비밀 결혼을 했습니다만 1883년 폭탄테러에 끔살당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
1844년작.
브라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브라질의 초대 황제인 페드루 1세의 딸입니다.
1854년작.
The Maharajah Dalip Singh
1864년작.
Madam Barbe de Rimsky Korsakov
러시아의 작곡가인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브의 아내.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첫댓글 그림도 마음에 들고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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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찍은 사진
와 진짜 뭐 저렇게 잘그린담.....
하아..19세이상이라고 읽은 내가 나쁜놈이지..
아니 죄송하다고 할 필요까지야 ..제가 더 죄송합니다
그 못난 아들 새키 ㅋㅋㅋㅋㅋㅋㅋ
와 넘 재ㅣ밌다
와....진짜사실적이ㄷ다
초상화는 잠깐 하려고 했는데 그걸로 인기가 올라가서 결국 때부자가 되었다는 말이 왜 이렇게 웃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적이면서도 그림같은 아름다움이 있네요. 서양화과인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좋은 작가를 또 한명 알고가네요 감사함당ㅎㅎ
그때당시 사진이고 뭐고 없을때니 진짜 화가가 폭발적인 인기가 있을만 했군요.
와.... 멋있다
난 왜 빈털터리로봤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빈털터리화가
와 예쁘다..퍼갈게요 ...
저렇게 그림을 그릴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ㅜㅠㅠㅠ
첫번째 그림 며칠전 베르사유에서 본그림 ㅋㅋㅋㅋzz
쩐다. ..
이쁘다..
펭귄님 일일이 대댓글 다 달아주고 계셔 ㅋㅋㅋ 정성스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