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산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막국수로 유명한 천서리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여주와 양평의 경계이다. 파사성은 남한강 동쪽에 있는 해발 230.5m인 파사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삼국시대 산성이다. 성 아랫마을의 이름 이포(梨浦)는 아마도 ‘배개’, 즉 배가 드나드는 갯가라는 뜻의 우리말이 한자어로 바뀌면서 쓰인 한자명인 듯하다. 길가에 있는 이정표를 따라 20여 분 정도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이 산성은 짧은 산행에 비해 남한강과 함께 남한강의 보(洑)인 독특한 모습의 이포보(梨浦洑)가 한눈에 들어와 많은 상춘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2011년에 조성된 이포보는 여주군조 백로를 형상화하여 디자인하고 백로와 알을 상징하는 조형물에 남한강이 미려하게 흐른다. 이포보는 4대강 16개 보 중 가장 아름답다 한다.
태백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충북 단양과 충주를 지나면서 깊어지고 넓어졌다, 여주를 지나면서 흐름이 느려져 고운 모래가 쌓인 이곳에 나루가 만들어졌으니 옛날부터 풍경이 좋았던 모양이다. 건너편에 백애산(白崖山)이 있는데 '배개'라는 말의 또 다른 한자 표현일 것이다. 갯가 풍경이 유명하여 다산 정약용도 이곳을 묘사한 시에 ‘…물가의 풀꽃이 너무 좋아서 상앗대 하나로 아침 저녁 봄물을 건너네’라고 읊었다. 이 나루는 충주, 여주, 이천 등지에서 양평이나 한양으로 나가는 뱃길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기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농사보다도 장사로 생활하는 것이 훨씬 나은 곳’이라고 하였다. 교통거점이라는 의미다. 이제는 이포대교가 생기는 바람에 나루는 없어졌지만 옛날부터 남한강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애환이 짙게 깔린 곳이다. 대표적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가면서 이곳에서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것이나,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이 나루에서 사흘을 머물렀다는 것은 이 지점에 많은 역사의 흔적들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성 바로 아래에 강을 바라보는 마애불이 있고 매해 제를 올리는 것은 인간의 맺힌 마음을 풀기 위한 몸짓이라는 증거이다.
파사성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으로 이때에도 이미 ‘고산성(故山城)’이라고 되어 있어 축조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파사산성에 관한 문헌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1595년(선조28)에 보이고 있으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파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최근까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삼국시대의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 등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잔존물을 발견, 파사성의 축성 시기가 삼국시대로 밝혀졌을 뿐이다.
파사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신라 제5대 파사왕 때라고는 하지만 정확한 기록이나 문헌은 없다. 또한, 고대 파사국(婆娑國)의 옛터가 있어 파사성이라 했다지만, 이 또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강유역의 많은 산성들은 애초에 만든 주체가 누군지를 놓고 논란이 많다. 파사성에서 나온 유물들도 고고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파사성 발굴에서 백제 주거지와 토기 다수가 발견되었고, 유사한 축조법을 보이는 이천의 설성산성이나 할미산성 등을 들어 파사성을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일찍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경로인 남한강을 지키기 위해 세운 성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돌의 치석(治石)법, 성벽의 보축을 포함한 축성방식이나 현문의 구조 등으로 미루어 신라의 축성술이라 할 수 있고 토기 역시 신라의 것들이 많다. 그래서 6세기 중엽 진흥왕 대에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하면서 죽령에서 한강하류지역, 즉 파주의 칠중성, 화성의 당성, 하남의 이성산성 등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보호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결국 어느 주장이든 간에 남북으로 배치된 고대 정치세력 간의 경쟁에서 전략적 핵심 교통로를 보호하는 요충임을 의미한다.
파사산성은 주변에 다른 산봉우리가 없어 사방이 다 보이고, 성곽의 일부가 한강 연안까지 돌출되어 있어 한강의 상·하류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왜란 중에 조정에서는 파사산성 수축에 대한 논의가 많이 진행되었고, 왜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하였다. 새롭게 성을 고치고 쌓은 것은 1592년 임진왜란 때로 당시 유성룡의 건의로 승군을 통솔하던 총섭 의엄이 승군과 함께 3년에 걸쳐 지금의 파사성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선조실록(宣祖實錄)』과 유성룡의 『서애집(西厓集)』에 나와 있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변사에서도 “파사산성(婆娑山城)은 상류의 요충지로 용진(龍津)과 더불어 서로 의지가 되는 형세이니 기보(畿輔)의 보장(保障)이 될 만합니다.”라고 하면서 파사산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서애의 손길이 닿았으니 더욱 ‘징비’의 의미가 다가오는 자리이다. 전쟁은 일어나기 전, 평화 시에 대비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 더욱 새겨지는 시절이다.
선조대왕실록 기록을 보면, 파사산성의 보수를 승려인 도총섭 의엄에게 지시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의엄은 성을 수축하고 안에 집을 짓고 둔전을 개척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성안으로 들어가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부역을 면제하여 다수가 모이도록 했으며, 이들에게 군량·기계·군정(軍丁) 등을 준비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유성룡은 화살 300여 부(部)와 전죽(箭竹) 1만여 개를 보내주었고, 경기감사(京畿監司)도 전죽 2만여 개를 보냈으며, 여주(驪州)·이천(利川)·양주(楊州)·광주(廣州)의 전세(田稅)로 군량을 삼게 하여 200여 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황해도에서 대포와 소통(小筒)을 보내주어 어느 정도의 화기도 갖추게 되었고, 군량도 3,000여 석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비변사에서는 의엄이 혼자 성을 지키기 어렵고 군사를 모집하거나 군량을 운반하는 일 등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무장인 김수남(金壽男)을 수성장(守城將)으로 결정하여 함께 협력해서 파수(把守)하게 할 것을 경기도체찰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현재 출입문으로 쓰이는 남문지 왼쪽으로 곡성과 함께 성곽이 잘 복원돼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나머지 구간은 복원되지 않고 무너진 곳이 많지만, 옛 성곽의 모습을 간직한 곳도 남아있어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성곽이기도 하다. 성 내부에는 수구지를 비롯해 우물터와 각종 건물터가 남아있다. 파사성 가장 높은 지대인 동북쪽에는 곡성이 있는데 삼국시대의 성벽이 일부 원형대로 남아있어 이를 허물지 않고 볼 수 있도록 2008년 보수 공사를 했다. 당시 보수 공사를 하며 상부는 계단 형식으로 정비한 점이 특징인데 노후한 성벽이 윗부분의 하중으로 인해 더는 훼손되지 않도록 하려고 이런 방법을 택했다.
현재 확인된 파사성의 시설들은 동벽 남쪽과 남문지 서쪽, 북벽 서쪽의 성벽이 돌아가는 부분에서 발견된 3개소의 곡성과 포루 등이다. 포를 쏘거나 망을 보는 데 사용된 포루는 삼국시대에는 당연히 없었던 만큼 조선시대에 이르러 곡성을 포루로 만들어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남한강 상류와 하류로 진입하는 외적을 감시하는 데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췄던 파사성. 작지만 지리적·전략적 요충지로서 우리나라 성곽 역사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