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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 시봉일기 4권 위법망구] 범어사의 보배| 광덕스님 시봉일기
위법망구의 보살, 광덕 큰스님 백운지흥(白雲知興) - 부산 금정산 미륵사 주지 6. 범어사의 보배 진진거사는 나이로는 나보다 훨씬 위였고 범어사에도 먼저 왔지만 단지 계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항상 선방 제일 끝자리에 앉았는데 그렇게 겸손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다시 그 시절을 생각해도 나는 진진거사와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도 성내고 남을 비방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체 남의 말은 하지 않았고, 결제기간 동안 열심히 정진하다가 해제가 되면 소천스님을 모시고 전국을 돌며 금강경으로 구국구세운동만 했다. 그렇게 하다가도 절에 돌아오면 언제 나다녔느냐는 식으로 참선공부에 몰입했다. 진진거사는 참선에 몰두하고, 또 새 불교운동에 몸을 바치면서 스스로 자신을 철저하게 버렸기에 사지(死地)에서 살아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금강경은 상(相) 없음으로 종(宗)을 삼고 머묾(住) 없음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用)을 삼는다’고 일찍이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진진거사의 머릿속에는 어느 때나 이 금강경 가르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니 금강경의 광명이 그에게서 넘쳐났다. 후일 조실스님께서 광덕(光德)이라는 법명을 지었지만 이 역시 이미 예견된 금강경과 관계된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 훨씬 뒷날의 일이지만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고암 사숙님께서 종정으로 계실 때, 광덕스님의 법호를 ‘금하(金河)’라고 지었다.
금은 광명을 상징한다. 일찍이 반야광명을 그렇게 외치고 다니며 구국구세운동을 벌였고 급기야 불광까지 만들어 또 광명천지를 드러냈으니, 이런 일련의 일을 미루어보면 광덕스님은 틀림없는 불보살의 화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진진거사는 조실스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계 받는 것을 자꾸만 미뤘다. 신묘(1951)년 칠석 때도 미뤘고 다시 계사년에도 미뤘다. 계사년에는 두루막을 입고 수계장소에 참석만 했는데 그때 조실스님께서 진진거사에게 법명을 주시면서, “수계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니 이름이나 받아 둬.”하셨다. 진진거사는 머리를 조아려 조실스님의 말씀을 순순히 따랐다. ‘광덕(光德)’ 조실스님은 법명을 광덕이라 지어 주시면 이렇게 말씀 하셨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불법을 빛내고(光) 온 누리 중생들에게 불심을 심어 주는 덕행(德)을 하거라.” 불법을 빛냄은 문수의 지혜를 발휘함이요, 온 누리 중생에게 불심을 심어 줌은 보현의 행덕을 실천궁행함을 의미한다 하겠다. 조실스님은 광덕이라는 상좌에게 문수의 지혜와 보현의 행덕을 갖춰 몸소 실행하라는 엄청난 주문을 하신 셈이다. 아무에게나 그런 주문을 하시겠는가, 평소 그런 그릇이 된다고 믿으셨기에 계 받기를 원하셨고, 또 그런 이름을 지으셨다고 본다. 그만큼 조실스님은 진진거사에게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고 계셨으며 상좌가 스승의 뜻을 충실히 이행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셨다고 본다.
소천스님을 따라 구국운동에 나갔다가 얼마간의 짬이 나면 진진거사는 지체없이 범어사로 돌아와서 상지전(上持殿), 특별선원 끝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나 입선과 방선시간을 제대로 지키기가 어려웠다. 진진거사를 기다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낮에는 조실스님의 손발 노릇과 절 내의 일을 두루 해야 했기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밤이 되어야 진진거사는 맘놓고 공부할 수 있었다. 밤중에 공부하다가 졸리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가서 선방 대중들의 신발을 깨끗하게 닦기도 했고, 낮에 하지 못한 지저분한 허드레 일을 하기도 했으며, 마당에서 포행을 하며 잠을 쫓기도 했다. 그야말로 불철주야, 도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쳤다.
특히 그 당시 조실스님께는 외국인 손님이 거의 매일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진진거사는 통역관(?)으로 조실스님의 부름을 받아야 했다. 전쟁으로 인해 나라의 중추기관이 모두 부산으로 내려와 임시 수도 역할을 할 때였고, 우방국의 지원이 부산을 통해 들어올 때였기에, 부산이 무척 바빴다. 아울러 동래 범어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들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범어사에 들렀기에 외국인들의 발길이 그만큼 잦았던 것이다. 외국인이 범어사를 방문하면 그 당시 스님들로서는 외국인과 대화를 직접 할 수 없으니 주인이나 손님 모두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때에 진진거사가 범어사에 있었으니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어떤 외국 손님이 오더라도 진진거사만 오면 의사 소통이 원활하여 만장담소(滿場談笑)가 넘쳐났다. 이 얼마나 시원 상쾌한 노릇인가 말이다.
“고 처사는 우리 범어사의 보배야.”
외국인이 돌아간 뒤 조실스님은 진진거사를 언제나 이렇게 칭찬하시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여러 가지 면에서도 진진거사만 사내( 寺內)에 있으면 만사가 막히는 법이 없었다. 그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게 조실스님께나 사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지만 그는 어느 때고 조금도 상을 내지 않았다. 아니 역할이 커갈수록 오히려 겸손하고 하심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그러한 헌신적인 삶이 그의 참모습이며 내면의 진정한 인간성인지 모르겠다.
아마 갑오년 봄이었을 것이다. 조실스님이 점심공양을 마치고 염화실 앞에서 양치를 하고 계시는데, 스웨덴의 여군장교 네 사람이 조실스님 가까이로 다가와서 양치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으며 피부색이 유난히 희며, 또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분명한 팔등신 미인들이었다. 나는 조실스님 뒤쪽에 수건을 들고 다소곳이 서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 영어 할 줄 알아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짧은 영어 실력을 드러냈다가는 자칫 망신당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꼭 다물고 팔을 휘저어 손사래를 치며 모른다는 시늉을 했다.
조실스님은 항상 공양 후 틀니를 빼서 칫솔로 안팎을 잘 닦은 다음 컵에 담긴 물에 헹궈서 입안에 끼우셨다. 이 광경을 시종 지켜보던 여군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도 뜻이 통하지 않자, 양치 마치고 일어서는 조실스님에게 다가가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인사말을 하는데 말을 잘 못 알아듣지만 조실스님도 그녀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녀들이 호의적으로 인사하는구나 하고 짐작하신 듯, 뒤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셨다. 그것은 진진거사를 빨리 불러오라는 신호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조실스님께 건네 드리고 쏜살같이 상지전 특별선원으로 달려가서 진진거사에게 눈길을 보냈다. 마침 날씨가 따뜻하여 점심공양을 마친 젊은 대중들이 문을 모두 열어 놓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벌써 진진거사는 조실스님의 호출인 줄 짐작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진진거사와 함께 걸으면서 대강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윽고 진진거사가 여군장교에게 영어로 인사말을 건네자 그네들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화제를 조실스님께 돌렸다. “우리는 스웨덴 육군병원 소속의 의사들인데 담당분야는 치과입니다. 노스님께서 틀니를 하고 계신 것을 자세히 보았는데, 몇 가지 질문을 해도 실례가 안 될는지요?”
곧바로 진진거사는 조실스님께 그네들의 말을 통역해 드리고 조실스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이에 조실스님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웃으면서 좋다고 허락하셨다. 그리고는 나는 돌아보셨다. 그것은 이 손님들을 염화실로 안내하여 차를 대접하라는 무언의 분부셨다.
조실스님 방에 안내된 그들은 무릎을 꿇지 못해 어쩔 줄 몰라했다. 진진거사가 평좌해도 좋다고 일러주자 그때서야 웃으면서 편안히 앉았다. 그리고 조실스님을 행해 질문을 해왔다. “조금 전 틀니를 보았는데요. 혹시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틀니가 좀 두꺼워서 말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조실스님의 대답을 진진거사가 지체없이 통역을 했다. “틀니는 몇 년 동안 사용하셨습니까?” “내 회갑 되던 해부터 사용했으니 벌써 4년째가 되나 봅니다.” “저희 네 사람은 치과의사입니다. 노스님께서 현재 사용하는 틀니가 불편하시면 저희가 틀니를 새로 해드릴까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조실스님께서는 불편하지만 틀니가 고장이 난 것도 아니니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대답하시자 그들 중 선임자인 듯 싶은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음식 드실 때와 말씀하실 때의 두 가지로 틀니를 만들면 노스님께서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음식 드실 때는 좀 무거운 틀니를 사용하시고 말씀하실 때는 가벼운 틀니를 사용하시면 편하실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이때 조실스님께서 시자인 나를 바라보시기에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시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가까이 다가가니 나직이 이르셨다. “작년 봄에 스웨덴 여의사가 준 명함 어디 있느냐?” “예? 명함 말씀입니까?” “그래 명함 말이다.”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스님께서 얼마 전에 성철스님에게 약 주시면 명함은 안 주셨는지요?” “약만 주고 명함은 안 줬다.” 나는 명함을 찾느라 한동안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명함이란 작년 봄에 조실스님에게 신경통 약을 본국에 연락하여 가져온 스웨덴 여군장교의 것을 말한다. 계사년 봄이니까, 정확히 14개월 전에 지금 온 치과의사와 똑같이 생긴 여군 장교 네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때 조실스님은 견비통(肩臂痛)이 심해 시자인 내가 크림을 담았던 사기로 된 통으로 부황을 떠 드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 광경을 보고 견비통으로 고생하시는 조실스님을 위해 본국에 연락하여 50알이 든 견비통 약병을 하나 가져왔다. 그 약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의 해안에만 자생하는 풀을 주원료로 만든 약인데, 조실스님께서 그 약을 40알 정도 복용하시자 3년여를 괴롭히던 견비통이 씻은 듯이 말끔히 완쾌되었던 것이다.
그때 약을 가져온 여군장교가 명함을 주고 갔는데 조실스님은 가끔 명함을 손에 들고 만지시며 견비통을 치유해 준 고마움을 상기하시곤 했다. 치과의사 앞에서 갑자기 그 명함을 찾으라는 분부셨다. 내가 명함을 찾는 동안 진진거사는 채공실로 가서 과일과 차를 더 내와서 그네들에게 대접했다. 그네들도 명함의 주인공들이 누군가 궁금했는지 내가 얼른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마 반 시간은 좋이 걸렸을 것이다. 땀을 흘리며 정신을 집중해서 찾았는데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경책을 넣어둔 책장의 서랍에서 마침내 그 명함을 찾아냈다. 조실스님이 그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이분이 내 견비통을 말끔히 치유해 주었소.” 명함의 주인공은 스웨덴 병원 외과의사 아무개라고 적혀 있었는데 명함을 받아 들여다보는 여군장교의 안색이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 장교는 저희와 함께 입대한 외과의사입니다.” “서로 잘 아는 사이군요.” 조실스님도 반가운 표정으로 응대했다. “저희보다 일 년 먼저 한국에 왔는데요, 2년 동안 근무 마치고 지난 겨울에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우리 나라에 오지 않나요?” “예, 복무 마쳤으니 본국의 육군병원에 근무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만나볼 수 없다는 말에 조실스님은 매우 서운한 표정을 지으셨다. “여러분은 언제 돌아갑니까?” “일 년 후에 가게 됩니다.” “본국에 돌아가거든 한국 부산의 있는 범어사 노승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노라고 전해 주길 바랍니다.” “예,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조실스님과 대화가 마무리되자 그네들은 진진거사와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범어사와 불교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았고, 조실스님에게도 각별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곧 진진거사가 설명을 드렸다. “이분들이 조실스님이 자기네 고향의 아버지 같다고 합니다.” “날더러 말이냐?” “예, 자기 아버지도 회갑이 넘었는데 턱에는 휜 수염이 나 있고 좀 뚱뚱한 편인데 그 고장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의사랍니다.” “아버지가 의사라서 따님도 의사가 되었군 그래.” “모든 여건이 가능하다면 조실스님께 스웨덴을 구경시켜 드리고 싶다 합니다.”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와야 할 텐데…….”
그들, 여군 장교 일행은 그 뒤 서너 차례 더 찾아와서 조실스님을 뵙고 갔는데 틀니를 맞추기 위해 병원으로 몇 번 나오셔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조실스님은 그네들의 고마운 호의에 답하느라 흔쾌히 대답하시고 한 번은 버스와 전차를 갈아타면서 서면에 있는 병원까지 다녀오셨고, 또 한 번은 그네들의 지프로 다녀오셨다. 그네들은 틀니를 아주 꼼꼼하게 만드는 듯 제작기간이 매우 길었다. 병원에서 틀니를 찾으러 오라는 날짜가 십여 일이 남았을 무렵, 서울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한다는 공문이 날아들었다.
그때가 결제 중인지라 대중스님은 움직이지 않기로 하고 조실스님과 비룡스님이 상경하기로 대중공사에서 결론을 내렸다. 나는 급히 걸망을 챙겨 조실스님 모시고 상경했고 상경한 지 십여 일 후에 혼자 부산으로 내려가서 조실스님의 틀니 두 개를 찾아 그 길로 되짚어 상경했다.
그 이후로는 두 개의 틀니가 조실스님의 여생을 책임졌다. 틀니는 튼튼하고 입에 잘 맞아서 언제나 만족스러워 하셨다.
조실스님이 상경하신 뒤에도 그 여군 장교들은 거의 일요일마다 범어사에 찾아와서 조실스님의 안부를 여쭙곤 하더라고 했다. 그때마다 진진거사는 조실스님을 대신하여 그네들을 따뜻이 맞고 성의껏 대접하곤 했다 한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4 위법망구, 송암지원, 도피안사 |
첫댓글 글이 조금 길긴 한데 한편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드니 꼭 공부하시길 권합니다.
광덕이라는 법명의 주시면서 조실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옮겨봅니다.
"불법을 빛내고(光) 온 누리 중생들에게 불심을 심어 주는 덕행(德)을 하거라.”
법명의 깊은 뜻을 평생 새기며 전법을 위해 애쓰신 큰스님이셨네요.
범어사 곳곳에서 스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언제든 달려가는 보현행원을 몸소 실천하신 모습에서 우리들의 생활도 이와 같으면 참 좋겠습니다.
밤중에 졸리면 나와서 대중들의 신발을 닦고, 허드렛일을 하시는 모습도 본받고 싶습니다. 그러시면서도 겸손을 실천하신 분...
실천의 중요성도 함께 공부합니다. 고맙습니다. _()()()_
재미있는 이야기이면서도 배울점,생각해볼 점이 많네요. 타국의 의사들이 나타나 견비통약이랑 틀니를 맞춰주고 가셨다니 그것도 참 신기합니다.
저도 주먹을 꼭 쥐어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공양 감사드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오늘 다시 보문님 글을 보니, 우리 큰스님 법명이 예사롭지 않으셨네요. 스승님의 안목이 새삼 놀랍습니다.
제가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법명이 흔히 보는 그런 법명이 아니라 바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光德>이란 법명 자체가 참 새롭고 밝게 들려왔어요. 이런 법명 가진 스승님들 안 계시거든요? 대개 불보살님 명호나 옛 스님들의 법명을 차용하는데, 우리 큰스님은 전무후무한 법명이시었지요. 뒷날 108참회문에서 같은 이름의 부처님이 계시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한참 뒤.
오늘 보니 큰스님 법명은 그대로 <문수>와 <보현>의 합작이네요. 光은 지혜, 곧 문수를 뜻하고, 德은 덕행, 즉 보현을 말합니다. 보현보살이 행덕, 덕을 행하는 보살이시거든요? 그러니 광자와 덕자 두 글자에 우리 동산스승님의 밝으신 안목이 그대로 들어있는 겁니다. 동산스승님은 우리 큰스님이 나중에 문수와 보현의 화신이 되실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우리 큰스님, 정말 놀랍고 놀라운 일 투성이입니다. 그 중 하나가 영어회화 실력인데, 우리 또래의 사람들은 거의 동감하겠지만 큰스님보다 30여년 후배인 저희들조차 중고 때 영어를 6년을 배워도 조그마한 회화라도 할 수 있는 분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어요. 그런데 큰스님의 저희보다 훨씬 이전의 연배임에도 회화를 하실 수 있었다니! 놀랍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더듬는 수준이라도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출가자가 누가 있었겠습니까. 도 하나 깨치면 전부 다 알게 된다, 고 하던 시절인데.
저 밝으신 큰스님께서도 연로해지시자 당신의 그 밝음으로도 당신을 보호하시지를 못하셨어요. 우리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할지, 깊이 숙고하게 해주는 일화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노쇠하시어 그냥 병의 물결에 휩쓸려 가신 큰스님을 생각하며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할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