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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중 한분이 저에게 요동,요서,요지방에 대해서 질문을 하셨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답변을 작성해 보았는데, 내공이 부족합니다. 정보를 잘못 전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요동,요서, 요지방이 어디인가 답변해보기 위해 작성하였지만 결론은 모른다는 것이고 모르면서 변명은 무척 긴 글이 되었다. 지루한 요동,요서,요지방의 글을 읽어보기 전에 이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견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견해들 중의 한 의견으로 보아 달라고 당부 드리고 싶다.
반도(半島)란 바다에서 돌출한 육지 부분으로, 한반도, 요동반도, 산동반도등을 보면 어떤 곳을 반도라고 말하는지 알수 있다. 요동반도의 위치는 요하에서 압록강 사이임을 알 수 있으니,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요동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요동은 요하의 동쪽이고 요서는 요하의 서쪽인데 요동은 요하에서 압록강 까지 이고 요서는 난하에서 요하까지 인데 난하 인근의 산해관에서 만리장성이 끝이 나고 있으므로 만리장성 안밖이 경계가 될 것이니 요서는 산해관에서 요하까지로 보면 될 것이다.
요동은 춘추전국시대 중원국가의 동쪽 지방이었으니 고조선이 있었던 곳인데, 전국시대의 연나라가 동호, 조선을 물리치고 요동군을 설치함으로서 중원국가의 동북아시아 방어기지로서 요동군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요동군은 한쪽 지역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원의 국가가 강력해지고 영토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서 요동군의 위치도 동반하여 동쪽으로 이동해 들어 왔을 것이다.
요동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3가지 정도의 논쟁이 있다.
1) 현재의 요동이 처음부터 정해진 요동이었다
2) 당요의 본붕지인 산서성의 요지방의 동쪽이 요동이다.
3) 처음에는 난하를 중심으로 요동이 있었다가 현재의 요동으로 이동하였다
요동은 한민족의 문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깊은 지역이기 때문에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데, 본인은 요동의 이동설에 동조하고 있는 편이며 위의 3)항과 같이 난하일대를 요동으로 이해 하고 있다. 난하가 옜날에는 요수로 불렸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난하 일대가 요동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조하는 편이지만, 언제 이동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많이 엇갈리고 있다.
본인은 고구려의 요동성은 현재의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 하고 있으나, 현재의 요하가 요하가 되었던 것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멸망하고 거란족이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요나라 영토내에 있었던 이름 없던 강이 더디어 요하가 되었던 것이지 그 이전에는 난하 일대에 요동이 었으므로 고구려의 요동성은 난하일대에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고구려의 요동성이 난하일대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던 고구려보다 휠씬 막강한 고구려 였을 것이나, 이러한 사실에 동조하는 것은 재야사학자들 뿐이다. 고구려는 초기 부터 상곡,어양, 우북평을 넘어 산서성의 태원을 공략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요동성은 난하일대가 확실하다고 하고 있으나, 산서성의 태원일대를 고구려가 점령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영구적인 점령이 아닌 일시적인 정복활동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중국은 기원전부터 역사서를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지리정보를 담은 지리서등을 작성해 왔는데, 이러한 역사와 지리정보를 담은 지도의 제작은 언제부터 였는지 알 수 없지만, 송나라 시대때 인식하고 있었던 지리 정보를 담은 지도를 살펴 보면 의문이 가는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12세기의 지도에 보면 여전히 난하가 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요하는 이름도 없는 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전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난하를 요수로 표현하였을 수도 있지만 요나라의 요주도 함께 표시 되어 있는 것을 감안 한다면 요수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진행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국가중 요동과 관련이 가장 깊은 나라이니, 일단 고구려와 관련된 요동을 한번 살펴보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위치해 있으며 2천리 영토를 가진 나라이면서 남으로는 예맥조선과 접하고 북으로는 부여와 접하고 동으로는 옥저와 접한다.
현재의 요동을 기준으로 하여 지도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한민족의 고대 국가는 알고 보면 해중에서 건국되었던 것이다.
서쪽으로 1천리 정도 이동 시키면 고구려 건국초의 상황과 비슷할 것 같은데 서쪽으로 1천리 옮기면 요동은 난하 인근이 된다.
고구려의 요동 동쪽 1천리 위치설은 후한서, 삼국지 등에 등장하는데 편찬시대가 위진남북조 시대 이므로 5~6세기에 중국인이 인식한 요동은 난하일대 였을까?
잘못된 기록이라고 간단히 넘기면 될 문제 이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요동성은 어디란 말이며 고구려가 설치한 요서의 10여성은 어디란 말인가?
요동이란 지명은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나타나는데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요동이 있다고 하였고 요동군은 연나라가 최강일 때 장수 진개가 동호,조선을 격파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면서 요동군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5개군은 장성밖에 설치하였을까? 상곡,어양,우북평등은 난하 이서지역으로 난하 일대인데 요서,요동군만 요하일대에 설치하였던 것일까?
연나라 장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연,진,조등의 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으므로 연나라 장성이 어디냐에 따라서 만리장성의 위치도 결정된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난하 일대의 산해관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는
1) 연나라 경계가 갈석,요수이 었는데 갈석산이 난하인근에 있으므로 요수는 난하이고 연나라 강역은 난하를 경계로 하였다.(염철론)
2) 북평군 노룡현이 장성의 시발지라고 하였는데, 역시 난하,갈석산과 비슷한 위치이다(통전)
3) 진나라 황제가 갈석산을 다녀오면서 갈석산의 위치를 요동으로 보았다(사기)
연나라가 쌓은 장성이 난하일대에서 끝이 나게 되면 이때 설치한 요서,요동군도 난하 일대 이므로 난하가 요수였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위의 자료를 인용한다.
이에 반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문구만을 인용하여 요동,요서의 위치를 논하는 것을 질책하였다. 하지만 요서,요동군의 명칭을 제외한 여타 지명들이 난하 일대가 아닌 요하 일대에 나타난 바가 없었고 사기의 작성자가 인식한 갈석산은 난하일대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요녕성 일대에 까지 연결된 연나라 장성이 발견 되었기 때문에 난하를 요하로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국수주의자이고, 지식이 부족한 자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요녕성 일대의 장성들이 연나라 장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이후 요녕성 일대에는 수 많은 세력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에서 장성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연장성이라고 단언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난하 일대에서 동호를 격파하고 난하 일대에서 쌓은 성을 요녕성까지 연결하여 쌓을려면 얼마만큼의 노력동원이 필요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공사 이다.
짧은 기간 진시황제의 만리장성을 생각하며 연나라의 장성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만리 장성은 제후국의 장성을 연결한 것이고, 진나라와 멸족당한 6국의 관계도 좋지 않았겠지만 연나라에게 격파당한 동호,조선 백성과의 관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연나라는 동호와 조선 백성들을 무슨 수로 동원하여 그 짧은 기간에 장성을 쌓았을까?
동호는 기원전 3세기말에서 4세기 초경에 상곡등지에서 연나라에게 격파되었지만 다시 성장하였고 기원전 3세기 중반에 흉노보다 강한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나 3세기 초경에 상곡등지에서 흉노에게 격파 되었다.
연나라가 동호를 제압하였지만 반세기 만에 다시 성장한 것을 보면 지속적인 점령이 아닌 일시적인 제압이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전국 말기 연나라가 강성하게 된 것은 연소왕의 훌륭한 정치력에 기반을 하였는데 연소왕 이후에 연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고 연소왕 말기에 장군 악의는 제나라 내지에서 제나라와 대치한 상황이었다. 연소왕 당대에는 제나라를 제압하였지만, 제나라 내지에 주둔한 연의 군대는 연나라의 일정 군사력을 담당하였으므로 이 시기에는 연은 동북방 세력들과 충돌을 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동호,조선을 제압하고 축성하였던 장성과 설치하였던 군을 유지하여 동북방의 경계를 유지하였을 뿐 새로운 개척의 모험은 불가능 한 시기 였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연소왕이 서기전 312년에 즉위하여 서기전 300년경에 동호,조선을 격파하고 장성을 쌓았으니 장성을 축조할 기간은 5년내가 될 것이다.
난하 이서지역에서 요하 이동 내지 까지의 거리는 500km는 넘을 것인데 동호,조선 백성을 통제하며 짧은 기간내에 장성의 축조가 가능하였을까?
요하이동의 내지 까지 연의 장성을 5년 내에 쌓는다면 어느 정도의 인원을 동원하여야 할까? 5년 동안 매일 장성을 쌓는 것도 불가능 하였을 것이지만 가능하면 많게 잡아주자.(365일*5년=1825일)
1) 500,000m * 7m(만리장성 평균높이) * 2(양면) = 7,000,000
2) 7,000,000/1825 ≒ 4,000m2
매일 4,000m2 를 5년 동안 쌓아야 완성할 수 있는 장성인데 하루 4,000m2 를 쌓을 려면 어느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할까? 현재 모든 재료가 제공되고 장비를 이용하면 한 사람이 하루에 10m2 정도를 무난하게 쌓는데 장비의 지원 없이 쌓는 다면 두 사람이 하루에 10m2 정도를 쌓기도 힘들 것이나 이정도로 쌓는다고 계산해보자.
10m2 정도를 쌓는데 필요한 인원
1) 장성을 쌓는 사람 2명 2) 돌을 나르는 사람 2명
3) 흙을 나르는 사람 2명 4) 흙을 다지는 사람 2명
5) 돌을 채취하는 사람 최소 4인 이상
하루에 10m2 정도를 쌓는데 필요한 동원인원이 10명 이상이니 하루 4,000m2 를 쌓을 려면 최소 동원인원이 4,000명 이상이다. 매일 동호,조선 백성 4,000명 이상의 인원을 5년 내내 동원하여 장성을 쌓을 만큼 연나라의 통치력이 강력하였던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전문가들이 좀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주기를 기대하기로 하자. 장성 흔적 몇개 등장하자 마자 그것이 연장성이 되어 버리면 나 같은 비 전문가는 누구를 믿고 역사를 이해하겠는가?
만리장성은 진,조,연등의 장성을 연결하여 쌓은 성이니 기록된바와 같이 만리장성의 끝이 난하 인근의 갈석산, 산해관 이었다면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도 난하일대를 넘을 수가 없을 것이며 고조선과 관련한 요동의 지명도 난하일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송본지리지의 진제국의 강역을 살펴 보면 사기,통전,염철론 등의 기록과 같이 난하가 요수 였음을 알 수 있고 요동이 난하일대 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도의 제작시기가 12세기경 송나라 때인데 이 때까지 난하를 요수로 인식하였는지는 의문이 간다. 난하는 요수 였고 이름 없던 강이 요하가 되자 요수는 난하가 되었던 것일까?
요수는 특정한 강이 아니라 중원 국가의 동북 경계를 흐르는 강을 요수라고 불렀던 것일까?
삼국유사에서 고구려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것을 혹은 안정홀이라고도 하는데 요수 북쪽에 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鴨綠)인데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고 했다.
삼국유사의 요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강이다. 이런 저런 표현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한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고조선 시대에 설치한 요동군은 이후 중원국가가 강해져서 동북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해 옴에 따라서 동반하여 요동군도 동쪽으로 이동해 들어 왔을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이 현재의 요하에서 압록강 사이의 지역이 되었겠지만, 난하를 요수로 인식하였던 것은 송나라 시대의 지리지를 보면 오랬동안 지속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초기 조선의 지도제작의 주축이었던 양성지는 한민족의 족적을 상기하면서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된다고 하였다.
이때 요하를 요수로 하였다면 만리의 강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분이 요하 동쪽의 오천여리 정도의 강토를 만리라고 쉽게 단정 짓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당시에도 난하를 요수로 인식하였던 것일까?
난하 동쪽으로 부여지역과 한반도를 포함하여야 만리의 강토가 될 것인데 고조선의 강역이 요하가 아닌 난하 동쪽이었다고 인식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지금까지 살펴 본바에 의하면 과연 요동이라는 지역은 어디일까에 대한 결론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현재에 인식하는 요동반도가 요하에서 압록강 연안의 지방이라는 것과 가장 최근에 요동이라고 불렀던 지역이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 이외엔 더 이상이 깊이 있는 논의는 불가능 하다.
조신시대 인식하였던 요동이라는 지역은 아래 지도와 같을 것 같다.
첫댓글 오히려 제가 배워야 겠는데요...^^ 강단 쪽도 재야쪽한데 요하 위치 때문에 하도 깨지니까 1번은 이제 아무도 주장하지 않고 있고 제 생각에는 3번이 맞는 것 같아요. 2번은... 글쎄 아직 근거가 불충분한 것 같고...
제가 듣기론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고 하던데..이 이상은 전혀 모르겠네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