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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6일 [대림 제2주일]
복음: 마르코 1,1-8
회개했다면: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난 주일은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 곧 ‘사랑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맞아들일 줄 알았던 마구간과 같은 사람들 안에서만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실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의 세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하시려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의 뜻은 죽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을 믿는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위해 파견된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목적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길쌈을 하거나 경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의존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옷을 만들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광야는 그저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죽는 곳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믿지 않게 될 때야만 하느님의 힘에 맡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회개의 세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윤치영 목사가 ‘감옥조차 하나님 나라로’란 제목으로 간증을 한 내용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윤치영 목사는 전도사 때부터 호주에서 사역하였습니다.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좋아 교회는 나날이 발전해갔습니다.
그런데 고3짜리 여자아이 때문에 교도소에 가게 됩니다.
그 아이는 남자친구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조차 폭력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연락을 받고 윤 전도사는 다른 청년들을 동원해 그 아이를 강제로 교회로 데려옵니다.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아이의 등을 몇 대 때립니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가려 하는 아이를 말리기 위해 스마트폰과 여권을 빼앗습니다.
부모는 윤 전도사가 한 일에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불만이었고 전도사를 고발합니다.
죄목은 납치, 집단폭행, 강도였습니다.
사실 죄목만 가지고는 수십 년의 형량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치소에서의 생활은 끔찍했습니다.
모든 옷이 다 벗겨지고 마약 등을 몸속에 넣어오지 않았는지 개가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런 수치는 처음이었습니다.
1년 이상의 징역을 살면 호주에서 추방당한다고 합니다.
윤 전도사는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이런 처지에 몰아넣은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니 고통 때문에 주님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재판이 다가옴에 따라 두려움이 급습해와서 머리를 벽에 처박고 싶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벽에 부딪히는 순간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그날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머리에 손을 얹으셨는데 그때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던 두려움의 고통이 싹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다”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자 자신과 함께 있는 수감자들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재판에 나아가게 됩니다.
아이의 부모가 많은 변호를 해주었지만 어쨌건 강제적인 위력이 행사된 것은 사실이기에 실형 1년을 살게 됩니다.
윤 전도사는 또 실망합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아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 삐져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감옥에서 이슬람교도들과 마찰이 있게 됩니다.
교도소 막사는 A에서 E까지 있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오면 A막사에 살고 E막사는 출소 직전에 있는 수감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A막사에 있던 윤 전도사를 어느 날 갑자기 E막사로 옮기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그런 것은 거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사를 옮기고 나서 이슬람 사람들이 자신을 그다음 날 죽이려는 계획을 다 짜 놓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본 윤 전도사는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쥐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기기로 합니다.
1년 형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아이에 대한 분노로 공황장애와 공황발작, 폐쇄공포증 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몇 시간 남겨놓지 않고 눈물이 터졌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며 목사 안수를 받는데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분노가 다 사그라지고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느 광고에 자주 나오던 문구가 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You can do it!)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 안에 가진 생각입니다.
하지만 회개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더 깊이 공감합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윤 목사는 처음에 자신의 힘으로 한 아이를 회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자유를 빼앗고 위력까지 행사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셔도 곧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넌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야 그분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윤 목사의 광야는 감옥이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크건 작건 이런 무너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 힘을 빼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내 힘을 믿는 사람이고
아직 내 힘을 믿으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적당한 집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은 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베들레헴의 큰 여관들이 아니라 광야의 마구간처럼 오직 주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나를 만들어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6일 [대림 제2주일]
마태오 3장 1-12절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더 깊은 광야로
서품을 앞둔 형제들을 바라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대견스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훌륭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도 끝까지 선생노릇을 해야 합니다.
누누이 당부하는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서품준비 기간은 여러분이 오랜 세월 배워온 신학과
그간 갈고 닦아온 수도생활의 내공을 세상 앞에 잘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첫 출발부터 부디 가난한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서품을 앞둔 여러분들에게 신자들은 얼마나 큰 정성을 기울이는지 모릅니다.
서품 기념으로 이 것 저 것 챙겨주시고 꼭 뭔가 한 가지 해드리고 싶다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럴 때 기다렸다는 듯이 이거요, 저거요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괜찮습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부탁드릴 것은 오직 한 가지 제가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런다고 쉽게들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집요하게 계속 하시지요.
그때는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제게 해주시려는 그 마음으로 세상의 가장 끝에서, 깊은 오지에서 묵묵히 선교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는 해외 선교 사제 한분을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릴 때 그 후원자분은 정말 큰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에 걸친 후원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정말 청빈의 대명사였습니다.
그의 삶은 극단적 청빈 그 자체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복음사가의 표현을 통해 이 사실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떠오르는 샛별, 대중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높은 성덕,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삶의 일치,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탁월한 언변에 사람들은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예루살렘 부인들도 따라다니면서 꼴불견스러운 낙타 털옷을 입고 다니고, 거친 음식으로 주린 배를 때우고 있던 그에게 다가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겠지요.
그럴 때 마다 세례자 요한은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 극단적인 가난을 선택했고 이를 기반으로 더 높은 성덕을 쌓아나갔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세례자 요한은 절대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대예언자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6일 [대림 제2주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 예언(40,3-4)이 실현된다는 것과 기쁘면서도 동시에 불안한 기다림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어날 중대한 ‘어떤 사건’이 있고 오셔야 할 ‘어떤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다.
제1독서에서는 신비스러운 ‘소리’가 당신 백성을 승리로 다시 이끌기 위해 되돌아오시는 주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라’ 권고한다(이사 40,3-5). 그러면서 슬픔과 비탄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한다.(40,9-11). 주님의 가장 위대한 ‘오심’은 당신 나라에서의 구원사업을 위한 것이다. 그 ‘오심’은 화해와 사랑의 ‘오심’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재건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은 어미 양과 새끼 양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목자이다(40,11). 그분 안에서는 권위와 사랑이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복음: 마르 1,1-8: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 신비스러운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며 그 소리는 사막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다. 그의 선포는 아주 짧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온통 ‘더 훌륭한 분’ 즉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과 그 메시아가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것이다. “내 뒤에 오신다.”(7절)는 말은 오심의 긴박성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며,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기조차 부당하다고 한다. “신발 끈을 풀어드린다.”(7절). 이 두 가지는 모두 주인을 위해 길을 내며 앞서가는 종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중요한 그리스도께 대한 중요한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요한 세례자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며, 또 하나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더 훌륭한 분”은 ‘더 힘센 분’의 의미로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켜”(1요한 3,8) 사탄을 쳐부수시어 구원업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성령을 베푸실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언을 따라 마지막 날에 성령이 충만히 넘쳐흐를 것을 기대해 왔다(이사 44,3; 에제 36,26 참조).
요한은 단순한 ‘소리’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자체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하였다. 그의 생활 자체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웅변적인 설교였기 때문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5절). 낙타 털옷을 입고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았다는 것은, 그의 속죄의 정신만이 아니라 고행의 열정, 또는 그분을 찾아 얻기 위한 간절한 기도, 어떠한 상황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근본적 자유에 대한 갈구, 그리고 주님께서 지나가실 ‘광야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열망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요한은 삶과 설교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4절)의 세례를 선포한다. 즉 메시아의 오심은 마음의 ‘회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개’가 없이는 메시아도 오시지 않는다. 만일에 오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을 단죄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절) 이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체의 제목과도 같다. 이제 복음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우리가 모두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계속해서 참여하여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주님의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즉 신앙인들의 기다림은 무기력하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나아가 창조의 힘을 지닌 기다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다림은 ‘은총’이 아니라 단죄를 위한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오심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짧은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긴장을 이완시켜서는 안 된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우리가 가진 몫을 꾸준히 채워감으로써 완성해야 할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또한 나 자신과 싸움을 계속해 가면서 이루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성탄을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진정한 제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