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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기독교정보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필레오
제네바 종교 개혁가 존 칼빈은 프리메이슨인가?
제네바 종교 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1564년 5월 27일)이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글들이 인터넷에 대략 20여 개가 올려져 있다.
과연 그 사실이 사실인지를 역사적으로 고증하려고 한다. 프리메이슨 전문 연구가는 존 칼빈은 프리메이슨이라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존 칼빈이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존 칼빈의 신학 사상을 극도록 싫어 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존 칼빈을 프리메이슨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존 칼빈이 프리메이슨리라고 주장하는 사이트를 하나 소개한다. 그 사이트는 아래와 같다.
"위그노, 존 칼빈 프리메이슨리("Huguenots, John Calvin and Freemasonry")
Huguenots, John Calvin and Freemasonry ⋆ Discerning the World
이 사이트에 내용 기독교의 기초도 모르자 자가 쓴 글이라는 점을, 필자의 "저서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단의 정체" 437쪽~459쪽에서 충분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1. 이 사이트는 존 칼빈의 손 사인이 프리메이슨 사인으로 단정한다.
위 책의 80쪽 내용을 화면 캡처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산술 문학의 흐름과 장르
철학자
산술에 대한 피코와 로이클린의 논의를 제외하면, 종종 다소 일반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산술에 대한 논의는 이 새롭게 재발견된 학문에 전념한 최초의 인쇄 출판물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1460-1536)을 중심으로 한 학식 있는 사람들과 종교 개혁가들의 서클에서 나왔다.26 따라서 16세기 2번째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숫자 상징주의가 새로운 전문 문학 장르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라고 되어 있다.
존 칼빈 시대에는 장미십자회가 커다란 사회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연금술 과학, 연금술 수학, 예금술 등이 널리 확신되어 있었고, 여기에 유대의 신비주의 사상인 카발라 사상이 혼합되어 16세기 프랑스 사회의 한 장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존 칼빈의 손가락 사인은 르네랑스 시대의 장미십자회 연금술 수학의 표현이자, 비밀결사의 사인이기도 하는 것이다. 존 칼빈을 좀 더 깊이 알아가려면 존 칼빈이 법학을 전공할 때 스승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생애를 어느 정도는 알고 넘어가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0 ?~1537)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이자 로마 카톨릭 신학자로 피카다리의 에타플에서 출생했다. 성장하여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미 로마 카톨릭의 사제(신부) 서품되었다.
파리대학교를 마친 후에 1492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피렌체, 로마, 베니스 등에서 공부하면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익숙해졌다. 그후에 다시 파리대학으로 돌아와서 레모네 추기경 대학의 교수가 되어 문법과 철학을 가르쳤다.
독일의 박식가로 잘 알려진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파 (Heinrich Cornelius Agrippa, 1486- 1535)는, 의사이자, 법학자, 군인, 장미십자회 대표자로 아비뇽과 파리에 장미십자회 연금술을 실천하는 협회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가 남겨 놓은 저서에는 마법, 카발리스트에 관한 문헌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제자 중에는 당대에 유명한 프랑수아 바타블, 샤를 드 보벨, 기욤 파렐, 존 칼빈 등이 있었다. 그는 개혁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존 칼빈과 위그노파와 더 가깝게 지냈다.
존 칼빈의 초상화는 칼빈을 매우 싫어 하는 자가 악의적으로 마녀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칼빈을 옹호하는 측에서도 그런 것이다. 이 사인 중에 맨 왼쪽 초상화는 사자의 발톱("lions paw")으로 사용되었고, 프리메이슨 측에서는 악마의 발톱("devil’s claw")으로 사용되었다. 엄지와 검지의 손가락 사인은 르네상스 시대에 수학에 대한 숫자로 흔하게 사용되었던 사인이다. 나머지 오른쪽 프리메이슨 사인과 똑 같은 것은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구누인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초상화로는 존 칼빈이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2. 기독교가 호러스의 신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주장에 관하여
존 칼빈과 그위노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 사이트에서는 기독교가 이집트 호러스 신을 상징하는 영문 IHS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억지 주장은 어리석고 무지한 거짓 주장이다. 기독교 "기"자로 모르는 자가 존 칼빈이나 개혁신학을 공격한다는 것은 개망신 당하기 쉽다. 그 내용의 글을 화면 캡처하여 아래에 소개하고 비평하여 둔다.
영문의 약자 IHS를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도 사용하고, 일루미나티의 조직인 로마가톨릭 교황이 쓰는 관(모자)에도 새겨져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영문 약자를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 IHS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헬라어 약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노그램(monogram)으로 사용하는데, ‘예수’가 그리스어(헬라어)로 이에수스(Ἰησοῦς, Iésous, 대문자 ΙΗΣΟΥΣ)이다. 이 단어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알파벳을 IHS로 사용했다. 곧 헬라어(그리스어) 알파벳 이오타(Ι, ι, ἰῶτα, iota), 에타(Η, η, ἦτα, eta), 시그마(Σ, σς, σίγμα, sigma)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노그램인 IHS가 서양의 문화에서 이 약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8세기부터 주로 많이 사용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재위하고 있다가 반란으로 쫓겨났던 유스티니아노스 2세(Justinian II, A.D. 669-711) 황제의 동전에 최초로 사용되었다.
그 후에 일루미나티 조직에 하나인 로마가톨릭의 제수이트에서 사용되었다. 현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상징 중에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볼 때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의 약어 IHS를 존 칼빈과 연결시켜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사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와 착각이다.
이 사이트의 내용에 관한 전체 내용이 거짓 내용이라는 것을 을 반박하여 필자의 "저서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단의 정체" 437쪽~459쪽에서 충분하게 반론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만 다룬다.
존 칼빈을 비난하기 위해 거짓 내용을 유포시키는 아래의 사이트 내용은 허구이므로 역사적인 사료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위그노, 존 칼빈 프리메이슨리("Huguenots, John Calvin and Freemasonry").
3. 존 칼빈의 놀라운 정체를 밝힌다.
필자는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이 비밀결사 조직에 하나인 장미십자회 운동에 참여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한국 교계 최로로 공개한다.
대한민국 교계의 85%가 장로교이다. 이 문제는 한국 장로교 신학자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 어떤 일을 당하여도 오직 진실만 전해야 한다. 역사가의 소임도 기록되어 있는 부분을 국민에게 바르
게 알려 주고 전하는 것이다. 역사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제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혁이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존 칼빈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영문 브리태니커(Britannica) 사전 기록을 화면 캡처하여 아래에 올린다.
John Calvin | Biography, Beliefs, Predestination, Writings, Reformation, & Facts | Britannica
"칼빈은 중산층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주교를 위해 일하는 평신도 행정가였으며, 1523년에 그를 파리 대학교에 보내 사제 교육을 받게 했지만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칼빈은 1528년부터 1531년까지 오를레앙과 부르주 법학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런 다음 파리로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또한 에라스무스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인본주의에 노출되었는데, 이는 당시 급진적인 학생 운동을 구성했다. 종교 개혁보다 앞선 이 운동은 원래 언어로 연구된 성경으로 돌아가서 확립될 고전과 기독교 고대의 모델에 따라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것은 칼빈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라고 하였다("Calvin was of middle-class parents. His father, a lay administrator in the service of the local bishop, sent him to the University of Paris in 1523 to be educated for the priesthood but later decided that he should be a lawyer; from 1528 to 1531, therefore, Calvin studied in the law schools of Orléans and Bourges. He then returned to Paris. During these years he was also exposed to Renaissance humanism, influenced by Erasmus and Jacques Lefèvre d’Étaples, which constituted the radical student movement of the time. This movement, which antedates the Reformation, aimed to reform church and society on the model of both classical and Christian antiquity, to be established by a return to the Bible studied in its original languages. It left an indelible mark on Calvin. ")
영문 브리태니커(Britannica) 사전 내용에는 매우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존 칼빈이 1528년부터~ 1531년까지 오를레앙과 부르주 법학 대학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서 이 기간 동안에 에라스무스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 인본주의에 노출되어 당시 급진적인 학생 운동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한국 교계의 신학자는 이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인 기록인지를 아무도 모른다. 이 기록은 존 칼빈이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0 ?~1537)의 제자로 인문주의 급진적인(장미십자회) 학생 운동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제네바의 시장 기욤 파렐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라고 영문 브리태니커(Britannica) 사전 등 수 많은 기록이 증거한다. 그런데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비밀결사 장미십회를 프랑스에서 조직했던 인물이다. 이것은 제네바의 기욤 파렐와 존 칼빈이 비밀결사 장미십자회 요원이라는 사실을 영문 브리태니커 사전의 내용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문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가 존 칼빈이라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고문서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 장미십자회를 프랑스에서 조직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영문 브리태니커 사전에 나오는 존 칼빈 초상화는 19세기 콘라트 마이어(Konrad Meyer)가 그린 것이다. 존 칼빈이 비밀결사 사인을 하고 있다. 이 증거로 존 칼빈이 비밀결사 요원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존 칼빈이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이트는 대부분 거짓 내용이지만, 존 칼빈이 프리메이슨 사인과 똑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초상화는 언제 어떤 화가가 그런 것인지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영문 브리태니커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사진과 기록은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에게 속아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낭비했다. 이 어찌 경악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마틴 루터이다.
4. 존 칼빈의 스승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프랑스 장미 십자회 우두머리로서 자연 마법과 유대 카발라에 심취되었다.
위 원서의 내용 번역(아래)
1)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ca. 1455-1536)
프랑스 인본주의의 학문 세계에서 철학과 종교의 고전 작품을 가장 다재다능하게 편집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질 수 있다.
(“Jacques Lefèvre d’Étaples can be regarded as one of the most versatile editors of classical works of philosophy and religion from the learned world of French humanism” (—E. Oosterwijk Ritman, ‘Drink from this Fountain’, page 13).”
2) 르페브르(Lefèvre)는, 철학 작품에 대한 수많은 편집본과 함께 룰(Llull)의 "사상"을 담은 책을 편찬하고 루클린(Reuchlin)을 옹호하는 글을 썼으며, 자연 마법과 카발라에 관해 글을 썼다(“Along with his many editions of philosophical works, Lefèvre compiled a volume of Llull’s “thoughts,” penned a defense of Reuchlin, and wrote on natural magic and cabala.”).
3) “그는 로마 가톨릭 신자로 남았지만, 프랑스에서 종교개혁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실제로 소르본 신학부에서 "루터교도"라고 비난받았다.”(“While he remained a Roman Catholic, he is considered a forerunner of Reformation thought in France.
He was, indeed, accused by the Sorbonne faculty of theology of being “a Lutheran.”).
※ 위 1번의 내용의 글에서, 룰(Llull)은 신비주의자, 문학가로 알려진 라몬 룰(Ramon Llull)을 가리킨다. 라몬 룰(Ramon Llull)은 스페인의 카탈루냐 산문의 창시자이자 카탈루냐 최고의 중세 작가 중 한 명으로 신비주의 철학자로 중세기를 전후하여 100년 동안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루클린(Reuchlin)은, 독일 작가로 라몬 룰(Ramon Llull) 또는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 Reuchlin, 1455년 1월 29일~1522년 6월 30일)을 가리킨다. 그는 독일 가톨릭 인본주의자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학자였다. 1474년 젊은 시절 바젤에서 대학을 다녔다.
알려진 저서가 몇 권 있는데, “카발라 예술에 대하여, 1517”(“De Arte Cabalistica 1517)라는 저서가 있다.
카발라는 유대인의 신비주의 사상으로 비성경적,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연금술, 마법, 연금술 수학과 과학, 장미십자회, 시온 기사단, 성전 기사단(템플기사단), 카발라 사상, 알룸브라도스(일루미나티) 등이다.
유럽의 중세 철학을 제대로 연구하고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알게 되는 이단적인 사상들이다. 이 사상들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개신교) 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비밀결사 조직인 장미십자회가 압도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의 제네바 시장인 기욤 파렐이 장미십자회 요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에게 배웠다. 이 내용은 국내 학자가 써 놓은 글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프랑스 출신의 유대인 존 칼빈의 스승도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다. 존 칼빈은 박사 과정으로 법학을 전공하면서 인문주의 학자와 어울렸고 급진주의 장미십자회에서 자신의 스승과 함께 활동하고 후원금을 받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0 ?~1537)은, 기욤 파렐에게 설교를 가르쳤다.
5. 존 칼빈의 스승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생애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0 ?~1537)은, 프랑스 피카르디( Picardy) 의 칼레(Calais) 남쪽 해안 마을 에타플 출신의 프랑스인이다. 그의 성은 종종 파브리(Fabry) 또는 파브리(Fabri)로 불리며, 라틴어식의 이름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Jacobus Faber Stapulensis)이다.
역사가는 그를 프랑스 종교 개혁자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이러한 평가는 겨우 19세기에 이후에 일부 역사가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였으나, 다른 역사 학자는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을 종교 개혁자라는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 두 종교 개혁자가 있었다. 바로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 1384)와 체코의 순교자 얀 후스(Jan Hus, 1372~ 1415)이다.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으로 얀 후스의 신앙 노선을 따르는 왈도파(Waldensians)가 생겼다.
이러한 종교 개혁 운동은 널리 확산되었다. 인문주의자이자 로마 카톨릭 사제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도 이 사실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으나, 종교 개혁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을, 종교 개혁자로 분류하기가 상당히 어려우나, 19세기 이후에 교회 역사가와 프리메이슨 역사가인 필립 샤프에 의하여 위대한 프랑스 종교 개혁가로 높이 평가되었다.
역사가 제임스 앳킨 와일리(James Aitken Wylie, 1808~1890)는, 스코틀랜드의 종교 역사가이자 장로교 목사이다. 그는 다작 작가로 '개신교의 역사'(History of Protestantism)를 저술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개신교의 역사'에서 "프랑스 최초의 개신교 교사"라고 불렀다. 제임스 앳킨 와일리의 '개신교의 역사'를 인터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으로 밝혀진 교회 역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도 제임스 앳킨 와일리와 똑 같이 높이 평가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5-1536)은
기욤 파렐(윌리엄 파렐)에게 바울 서신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가르쳐 주었고, 1512년에 예언적인 태도로 "나의 아들아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요. 너는 그것을 목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욤 파렐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가르침을 받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믿음의 유일한 규칙이며, 로마의 전통과 의식은 인간이 발명한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끌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 중에는 존 칼빈의 사촌형이자 인문주의자인 삐에르 호베흐 올리베떵( 올리베탕, Pierre Robert Olivetan, 1506-1538)은 자신의 스승과 함께 라틴어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려고 하였으나 반대했다. 그 이유는 올리베탕은, 히브리어도 완벽하게 알지 못하였고, 헬라어도 완벽하게 몰랐기 때문에 거절하였으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요청으로 번역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문주의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본을 대본으로 삼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할 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존 칼빈의 사촌형 올리베탕은 프랑스 북부의 피카르디 지역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할 무렵에는 젊은 교사였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몇 년 동안 열심히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히브리어를 열심히 연구했다.
올리베탕은 로마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하여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제네바로 피신하여 온 이유는 한 설교자가 강당에서 마틴 루터를 비난하자 올리베탕은 그 연사의 말을 중단시키고, 그를 논박하기 위해 소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올리베탕은 거의 목숨을 잃을뻔 하였고, 스위스 제네바로 추방되었던 것이다. 올리베탕이 마틴 루터를 옹호했던 것으로 보아 아직 마틴 루터의 사상을 깊이 접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할 때, 자금은 기욤 파렐이 맡아서 조달하기로 했다. 기욤 파렐은 왈도파를 설득시켜 800개의 금 중에서 500개의 엄청난 금액을 지원받기로 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대본 삼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데 2년 걸려서 완성했다.
프랑스어 성경은 1535년에 뇌샤텔에서 처음으로 인쇄되었다. 서문은 존 칼빈이 썼다.
프랑스어 올리베탕 성경이 잘 번역한 구절은 출애굽기 6장 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명을 '여호와(예호바)로 번역한 부분이다. 좋은 번역이다. 그가 잘못 번역한 것은 신비를 '비밀'로 번역했다. 이것은 장미십자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프랑스어 올리베탕 성경은 또
'교회'를. '회중'이라고 잘못 번역했다.
프랑스어 올리베탄 성경(1540년)은 두꺼워서 휴대하기가 불편하여 별로 인기가 없는 성경이었다. 올리베탄 성경은 처음에 천 권 정도 출판하였으나 잘 팔리지 않았다. 유통망을 확보하지 못한 탓도 있었고, 불어 자체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성경의 무게도 11파운드(5kg)나 되는 큰 책이어서 여행자가 휴대하기 어려웠고 은밀하게 숨겨야 하는데 부피와 중량이 많이 나가 독자에게 외면을 당하다.
프랑스어 올리베탄 성경(1540년)은 100년 반이 지난 후인 1670년에 가서 제네바의 특정 서점에서 판매되었다. 이 성경은 제네바 성경이 아니다.
역사 기록에는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0 ?~1537)이 장미십자회 요원으로 유대 신비주의에 관한 책인 카발라 사상에 집착하였고, 마법에 심취되었던 내용도 역사 기록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존 칼빈도 1534년에 노령의 인문주의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을 찾아방문하였고, 존 칼빈의 비서관이자 프랑스 출신의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도 노령의 인문주의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 프랑스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도구로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얼굴을 가진 종교 개혁자들을 현대 시대에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평가 해야 옳은 것인가?
6. 프랑스 인문주의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헤르메스주의자였다.
위 화면을 캡처한 영문의 글을 번역하면, " 프랑스에서는 인본주의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evre d’ Etaples, 1450-1536)이 이상하게도 칼빈의 스승이었는데, 헤르메스주의 문헌을 칭찬했고 각 장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썼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란체스코 파트리지 추기경의 번역이 1591년에 출판되었는데, 그는 헤르메스주의 문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이 아니라 학교와 수도원에서 가르쳐야 할 기독교 교육의 기초라고 주장했다."라고 하였다.
헤르메스주의가 어떤 것인지 이 카페를 방문하는 회원이 구글 등에서 찾아 볼 것 같아서 필요성을 위해 구글에서 제공하는 위키백과 사전에서 그 내용을 발취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헤르메스학 또는 서양의 헤르메스 전통(Western Hermetic Tradition)은 이집트 신인 토트와 그리스 신인 헤르메스가 결합된 신 또는 반신적 존재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저작인 것으로 전통적으로 가정하는, 혼합주의가 널리 행해졌던 헬레니즘 이집트(305~30 BC) 시대와 기원후 1~3세기에 주로 성립된 외경적인 저작들("코르푸스 헤르메티쿰")에 기초하는 일군의 철학적 · 종교적 믿음들[1] 또는 지식들("그노시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는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기욤 파렐도 제자이고, 존 칼빈도 제자이며, 존 칼빈의 사촌형 피터 로버트 올리베탄(Peter Robert Olivetan, c. 1506–1538)도 제자이다. 이 외에도 많은 제자가 있다. 한국 교계의 신학자와 목사는 기욤 파렐과 존 칼빈의 사촌형은 올리베탄만 제자인 줄 알고 있다.
7. 존 칼빈은 비밀결사 장미십자회의 후원금을 받았다.
이 내용을 번역하여 본다.
" 비밀 결사에서 기부금을 받는 것은 배교라고 할 수 없지만 칼빈의 분별력 없는 추종자들이 장미십자회(로지크루시안)의 랏지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확실히 열어 준다. 비밀 결사는 다른 개신교 운동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예를 들어, 칼빈이 스위스에서 시위를 하는 동안 프랑스에서는 종교 전쟁이 격화되었다.
남부 프랑스에서 반란을 주도한 것은 두 명의 개신교도가 이끄는 위그노였다. 가스파르 칼리니 제독(Gaspard de Coligny, 1519-1572, 프랑스제독)과 부르봉 왕가의 콩데 공작 루이 1세 왕자(Prince Louis I, 1530-1569)였다. 1568년 5월 3차 종교 전쟁이 시작되자 위그노(칼빈파)는 영국의 동정적인 장미십자회(로지크루시안)의 지원을 받았고, 그들은 가스파르 제독의 지휘를 받기 위해 개인 선박을 제공했다.
다시 말하지만, 비밀 결사에서 자금을 받는 것은 위그노(칼빈파) 배교를 의미하지는 않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보면 기여자들은 보답으로 무언가를 기대하게 된다. 게다가 역사 기록에 따르면, 장미십자회(로지크루시언)는 교회 기여금을 사용하여 개신교도를 모집하여 랏지에 가입하도록 했다. 많은 사람이 가입했다.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이 배교했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8. 서양의 밀교 전통의 사탄주의적인 사상의 발전
"서양의 밀교 전통은 종교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기원후 1세기 헬레니즘 세계의 영지주의, 헤르메스주의, 신플라톤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문헌의 재발견으로 인해 마법, 점성술, 연금술, 카발라가 학문적으로 부활했다. 종교 개혁 이후 이러한 영적 흐름은 신지학, 장미십자회(로지크루시언주의), 프리메이슨을 낳았고, 현대의 오컬트 부흥은 19세기의 영성주의, H. P. 블라바츠키의 신지학, 의례적 마법 명령에서 루돌프 슈타이너, 앨리스 A. 베일리, 조지 이바노비치 구르지에프와 같은 20세기 밀교주의자, 그리고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 심리학으로 확장되었다."라고 하였다.
9. 기욤 파렐과 존 칼빈의 스승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카발라에 심취되었던 자였다.
"윌리엄슨이 관찰했듯이 뷰캐넌은 "상당히 비밀스러운 유대교적" 환경을 경험했는데, 이는 공개적으로는 "완벽한 가톨릭"으로 보였지만 사적으로는 "유대교 종교와 정체성의 요소에 의해 알려졌다."[67] 뷰캐넌이 왕에게 "유대교 양고기"를 먹으라고 촉구했을 때 비평가들은 그가 제임스가 "유대인이 되어 유대인처럼 살기를" 원했다고 비난했다.[68] 슈샤르트는 이 기간 동안 많은 중요한 스코틀랜드인이 파리에서 공부했고 뷰캐넌의 스승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1450년경~1536년)이 이끈 "룰리즘의 엄청난 부흥"에 참여했으며, 그는 소르본에 룰리즘 연구의 교수직을 설립했다.[69] 르페브르는 이탈리아에서 피코 델라 미란돌라를 만났는데, 그는 룰리즘이 카발라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다.[70]"라고 하였다.
11. 기욤 파렐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이자 친구이다.
영문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 보면, "파리 대학교 학생 시절, 파렐은 학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이자 친구였으며, 그는 파리의 콜레주 카디널 르무안에서 문법과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직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파렐은 곧 콜레지의 섭정자가 되었다. 그는 1521년, 모의 개혁 주교인 기욤 브리소네가 교구 설교자로 임명하기 전 어느 때인가 기독교 인본주의의 교리를 받아들였다."라고 하였다.
12. 기욤 파렐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과 우정을 쌓았고 생각이 같았다.
"1492년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 자크 르 페브르는 인기 있는 신학 박사이자 언어학자로 파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곧 동료들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성경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고 많은 구절에 도전을 받았다. 그는 구절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그의 성경 연구에 끌렸다. 그는 대학에서 17년을 보낸 후 20세의 로마 가톨릭 신자 기욤 파렐을 만났다. 파렐은 파리 사람들의 죄악스러운 생활 방식에 혼란을 느꼈고 르 페브르와 우정을 쌓고 생각이 같았다. 그는 르 페브르의 제자가 되었고 평생 친구가 되었으며 종종 함께 성경을 읽었다."라고 하였다(영문 논문에서 인용).
13. 존 칼빈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제자이다.
존 칼빈의 생애를 연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앙굴렘에 있는 동안 칼빈은 네라크에 있는 노련한 설교자 르 페브르를 방문했다. 르 페브르는 파렐에게 "사랑하는 기욤, 신께서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하실 것이고, 당신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노령자와 젊은 개혁가의 만남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칼빈은 노령의 성인의 성숙함에 감탄했다. 르 페브르는 젊은이의 약속에 매료되었다. 베자는 노령자가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젊은이여, 너는 언젠가 주님의 손 안에서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신께서 너를 사용하여 프랑스에서 천국을 회복하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했다"라고 하였다. 존 칼빈은 프랑스 로마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앙굴렘(Angouleme)이라는 지역에서 도피처로 지냈다.
14. 존 칼빈이 비밀결사 장미 십자회 요원이라는 것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다.
존 칼빈에게서 아주 특별한 것이 발견된다. 비성경적,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존 칼빈이 남겨 놓은 방대한 저서를 모두 세밀하게 읽고 분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부터 현대 시대까지 존 칼빈처럼 성경에 가까운 신학 사상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시편 서문에 나오는 갑작스러운 회심이 진심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듣다.
존 칼빈의 두 얼굴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머리는 보잘 것이 없고, 역사를 기록한 문헌은 방대하여 열심히 연구하면 또 새로운 정보가 발굴되어 우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하거나 실망에 늪에 빠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염려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처럼 감춰져 있는 것들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부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을 위대한 종교 개혁자로 기록하고 있는 문헌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록에 따르면, 자크 르페브르 데타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다는 문헌도 있다. 반면에 반기독교적인 사상도 그에게서 발견된다.
이단 집단들이여! 사이비 집단들이여! 당신들이 모두 일루미나티 조직이라는 증거를 필자는 모두 가지고 있다. 또한 그대들은 모두 비성경적,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다. 존 칼빈이 비밀결사 조직인 장미십자회 요원이라는 것이 확인 되었지만, 존 칼빈은 비도적인은 불법 행위를 바로 잡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다. 존 칼빈처럼만 살아라 온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한국기독교정보학회
카페지기 필레오(안병삼 박사)
첫댓글 오류가 많이 포함된 글로 보입니다.
고대 프리메이슨은 솔로몬 때부터 시작되었겠지만 근대 프리메이슨은 17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칼빈은 절반의 카톨릭이라 할수 있고, 구원 자체가 불분명한 사람으로 판단됩니다.
성직자제도, 유아세례, 침례중생주의, 거룩한 카톨릭교회 등을 말하는 것을 보면, 카톨릭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마리아의 평생동정녀를 믿었습니다. 율법은 유효하다고 보았습니다.공권력에 의한 이단 탄압을 인정했습니다.
기록으로 본다면 존 칼빈이 장미십자회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라고 보여집니다. 전 종교개혁자들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KESLL 종교개혁자들 전부가 그렇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로부터 200년 이후의 사람이니까, 그 부류에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 이전의 많은 오류를 시정한 환경에서 모라비아 형제단의 전도를 받고 개혁했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쯔빙글리는 전사했고, 루터는 마리아숭배와 반유대인 혐오 논문으로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살육당하는 참극을 가져왔습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 참수형을 주장했고 그는 화형당했습니다. 멜랑흐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존 녹스도 문제가 상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