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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4:1-6절)
인간의 이성이 점차 발달하고 첨단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우리가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전혀 불가능했던 일들이 쉽게 해결되고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전기 자동차가 달리고, 물로 가는 수소 자동차 시대가 열렸습니다.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여 일을 하고 IT기술의 발달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미래에 행복한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성경을 대답합니다. 인간은 생로병사라는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이미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만능주의나 유물주의, 인본주의는 현대인일수록 더욱 가중되고 심지어 교회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능력이나 세상의 방법대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의 건축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교회의 부흥을 상업적 방법을 동원하려 하며 교회의 문제를 세상의 법정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영적 회복과 구원의 문제까지도 무의식의 계발이나 훈련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도, 심지어 병고침의 은사나 여러 가지 은사도 훈련으로, 학습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헛것이며, 실망만 더할 뿐입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으로 20년간 공사가 중단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학개 선지자의 외침과 독려로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체험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유명한 헨리 나우엔의 저서 중에 ‘우리들의 가장 큰 선물’이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그 책 중에 공중 곡예사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가장 자랑하는 서커스를 보면 마지막에 공중 곡예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서커스의 극치인데 서커스는 뭐니뭐니해도 공중 곡예가 하이라이트입니다. 공중에 매달려 있는 사닥다리가 있고 그 사다리에 한 남자가 거꾸로 매달려 있습니다.
언제나 이 사람은 거꾸로 매달려 발을 사다리에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어떤 때는 아가씨가 있고, 때로는 남자도 있고, 이렇게 이 사다리에서 저 사다리로 날아다닙니다. 그것도 몇 바퀴를 회전하면서 아주 잘 날아다닙니다.
그 회전을 몇 바퀴를 했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높아지고 사람들의 탄성이 나오고 박수갈채를 받습니다. 마지막이 되면 반대편의 여자가 사다리를 타고 몇 번을 왔다, 갔다하다가 사다리를 잡은 손을 놓고 공중을 몇 바퀴 회전한 뒤 반대편에서 오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1초의 몇 분의 일이라도 착오가 나면 그냥 밑으로 떨어지는데 옛날에는 아래에 그물을 쳐 놓고 하지만 요즈음은 그냥 합니다. 떨어지면 대형사고가 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반대편에서 또 사람이 날아오고, 남자의 손을 붙들었던 사람은 그 반대편의 사람이 잡았던 그 사다리를 잡으려고 돌아섭니다.
정말 가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반대편의 남자가 반드시 자기와 호흡을 맞추어 붙들어 줄 것을 믿고 그 앞에 몸을 회전하면서 날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와 같은 일을 몇 번이나 계속합니다.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사람들은 감탄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날아가는 이 사람, 반대편에서 반드시 자기를 붙들어 줄 것을 믿는 믿음, 문제는 그 믿음입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고 나를 붙들어 준다는 그 확고한 믿음이 허공을 새처럼 날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회나 국가나 단체나 가정이 잘 되든지 망하든지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자본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믿음, 곧 신뢰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는 믿음의 지수가 높고 어떤 사회는 믿음의 지수가 떨어지는데 개인이나 국가나 신용도가 떨어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신용도가 그 삶의 근본이요, 번영에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유럽이나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그렇게 당당했지만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공구권이 공산주의를 하기 전에는 참 잘 살았습니다. 100년 전에 지은 그 건물들이나 시설물을 보면 굉장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를 시작하고부터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물론 요즈음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나서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특히 동독 같은 나라에 가보면 공산주의를 할 때 지은 집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집 앞에 천막을 쳐 놓고 사는데 왜 집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집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공산주의가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쓸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집이 무너지느냐고 물으니 공산주의를 하면서 인간성이 무너졌고 사람이 망가졌다고 합니다.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성이 파괴된 이유가 간단합니다.
첫째, 불신입니다.
공산주의자는 남을 믿지 않습니다. 절대로 안 믿습니다. 마누라도 안 믿고, 남편도 안 믿고, 자식도 안 믿고, 윗사람 아랫사람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명령하면 반드시 감시자를 둡니다.
감시자를 또 믿지 못합니다. 그 뒤에 비밀경찰을 둡니다. 그 뒤에 다른 정보요원을 배치하고, 이렇게 감시를 하다보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것입니다.
러시아를 가보면 차를 타고 하루 종일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넓고 무한한 벌판에 자원 또한 넉넉합니다. 무궁무진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기슬도 있습니다. 지식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왜 못삽니까. 왜 가난합니까. 빵이 없어서 줄을 몇 시간씩 서고 병원에 가면 의약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돈을 벌겠다고 이 작은 나라 한국에 오고 싶어 합니다. 그 넉넉한 나라가 왜 이 모양입니까. 불신의 사회가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대학 총장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불신 사회가 되었습니까.’ 그 분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공산주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을 못 믿으니까 모든 것이 불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최소한 사람들의 기본 양심마저 믿지 못합니다. 진실을 믿지 못하고, 양심과 진실이 없는 사회, 하나님이 없는 사회, 아무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대로 인간성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무책임입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나라가 망해도, 사회가 피폐해져도, 경제가 무너지고 살기가 막막해도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정권을 잡은 사람은 독재를 하고 권력을 내놓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를 하는 사람은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일당 독재를 하면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인권을 억압하고 상대방을 탄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셋째, 게으름입니다.
개인소유가 없으니 사람들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말할 수 없이 게을러지고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동구원에 가서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러니 나라고, 사회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의 저변에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개인을 믿지 못하고 국민이 나라를 믿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살고, 믿음이 없으면 죽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미래에 대한 믿음도, 국가에 대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힘으로도 아니고 능으로도 아니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될 것이다.’
‘힘’이라는 히브리 말‘하일’ 은 군사력을 말합니다. 집단력, 혹은 국가의 힘을 말하는데 이스라엘 국가가 독립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군사력으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능’이라는 말 ‘고아흐’는 인간 육체의 힘을 말합니다. 완력이나 인간의 의지, 삼손이 가졌던 그런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루아흐 크라우마’ 이 말은 성령의 힘, 하나님의 영의 힘, 내적인 힘, 인격의 힘, ‘하나님이 주시는 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 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재건 역사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룹바벨 총독 앞에 있던 큰 산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평지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메시야가 오실 때 골짜기는 높아지고 높은 산은 낮아지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군대를 홍해에서 장사지냈으며, 해와 달을 멈추게 하여 아모리 사람들을 진멸하셨고, 가나안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역사하실 때 성전 재건은 한 치의 오치도 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자 성전 재건을 허락했던 고레스 왕의 칙령이 발견되어 건축을 방해했던 총독들까지 공사를 후원하게 되었고, 성전 건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으로 사탄의 방해를 물리치고 자신의 처소를 건설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문 앞에 나서기만 하면 로마의 군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로마 군인들이 모든 나라를 통치하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영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 군사력을 이길 수 있는 군대를 주십시오. 로마를 이기고 독립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 일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힘과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 그 모든 것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뒤나미스’ 즉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적을 행하시고 많은 병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내쫓고, 바다를 고요하게 하고, 오천 명을 먹이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려냈습니다.
능력으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님은 힘없이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이나 모두 맥이 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다락방에 숨기도 했습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오시고 사람들을 감동하기 시작할 때에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중생을 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서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한 일을 성령으로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수용해서 그저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어서 내가 수용하게 될 때에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믿음이 주어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연합체입니다.
이 연합체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부흥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의 역사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고 기쁨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성령을 통한 교회 부흥의 역사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성도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보면 점점 믿음이 없어져 갑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혜택을 주었다가, 안 주었다가 하면서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한 실정입니다. 중앙정부의 말을 믿어야 할지, 지방자치단체의 말을 믿어야 할지, 국민들이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좀 진실해야겠습니다.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삼가야 합니다. 우리가 정부를 믿어야 하고 지도자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위정자를 믿어야 하겠는데 믿지 못하면 부도가 나고 기초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믿음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회도, 국가도 그렇지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불안합니다.
인간은 항상 문제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등장하고 이제 좀 숨을 돌릴만 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부주의로 생기는 문제도 있고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나아가 사탄이 주는 문제도 우리 앞에 항상 놓여 있습니다. 그 문제들 가운데 쉽게 해결되는 문제들도 있지만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태산 같은 문제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걱정이 태산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들의 삶의 현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산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성령입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문제로부터 태산 같이 큰 문제까지 인생이 직면한 모든 문제들은 인간의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문제 앞에 직면한 이스라엘 총독 스룹바벨에게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큰 산이란 성전 재건을 방해했던 모든 문제들을 말합니다.
큰 산이 성령의 권능으로 평지가 되듯이 태산 같은 문제라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기적이 일어나고 이적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권능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권능을 기대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반드시 도우시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 사도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우고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성령이 오시니 제자들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비겁하던 자가 신령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산헤드린 공회가 무섭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공회에 들어가서 매를 맞고 나오면서도 그리스도를 인하여 고난당한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심령에 충만하니 용기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 하나님의 세계를 알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믿어지고 나 자신이 그 은혜 안에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니 내가 하나님의 아들 즉 양자됨을 확정해 주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리 고난을 당하고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계가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세계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현대 사회가 발생시키고 있는 각종 소외와 질병을 해결하여 삶의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첨단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달이 일시적으로 신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데에 유익할지 몰라도 그것으로 사악하고 탐욕으로 가득한 인생의 심령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이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노력하는 종교로 모든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염려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해방의 감격,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지닌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적 문제의 해결만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고 더군다나 영적인 문제는 전혀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실 때 나도 모르게 내가 달라집니다. 입맛도 달라지고, 성향도 달라지고, 눈빛도 달라지고, 얼굴도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전에 미워하던 사람이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불쌍해 보입니다.
동정해 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생이 참으로 가련해 보이고 무지해 보이고, 미련해 보입니다. 하늘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잠자고 떠드는 동물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나는 불행한 존재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참 행복한 존재입니다. 참으로 복을 많이 받은 존재입니다. 주변 환경이 다 아름답고 보는 것마다 신기하고 새롭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신바람이 나고 즐겁습니다.
이런 인생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전에는 미워 죽겠다고 했던 남편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내게 좀 밉게 대해도 그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못합니다. 다 이해할 수 있고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금일봉을 드렸습니다. ‘무슨 헌금입니까.’ 묻는 질문에 집사님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옷을 사러 가면 한 번에 세 벌은 사야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이 있는 줄 압니다. ‘돈이 부족하면 카드를 사용하더라도 세 벌은 사는데 오늘도 옷을 사러 갔습니다. 골라놓고 보니 이런 것 집에 있는데, 또 하나 골라놓고 보니 이것은 철이 좀 지났어. 다시 골라놓고 보니 이거 너무 비싸잖아.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 그냥 가자.’ 집으로 돌아가는데 문득 생각이 납니다. ‘이 돈을 쓰려고 왔는데 이왕 가지고 나온 거니까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결정하고 목사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이 전에는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목걸이가 있으면 그것이 다이야몬드 목걸이라 할지라도 억지로 남편을 들볶아서 반드시 사고야 만다고 합니다. 그래야 속이 풀리는 사람인데 요즈음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다이야를 보고도 저것은 돌맹이인데, 쇠붙이나 유리 조각과 다를 바가 없는데 무슨 값어치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시시하고 너절하고 거추장스럽고 그래서 관심도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누가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이제는 물질에 매이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성공에 묶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을 의식하거나 사람들의 비평에 담담합니다. 누가 욕을 해도 그만이고, 자랑을 늘어놓아도 별로 관심하지 않습니다.
미워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품어주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적 용기도 얻게 됩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이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있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귀한 영감을 얻어서 작곡을 했습니까.’ 그는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제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지혜를 주셔서 저는 아름다운 곡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제가 작곡한 음악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비엔나에서 그가 ‘천지창조’를 연주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스케일이 참으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신비롭고 위대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한없이 쳤습니다. 지휘하는 분이 그 박수를 받다가 너무 송구해서 하는 말이 ‘이 박수는 제가 받을 박수가 아닙니다.’ 마침 작곡가 하이든이 2층 뒷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분이 받을 박수입니다.’ 지휘자가 하이든을 손으로 가리키자 사람들은 하이든을 향하여 열광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하이든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것입니다.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고 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를 이기고, 교만을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천사가 와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물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순금 등대와 기름과 일곱 잔과 두 그루의 감람나무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힘이 있으면 될 것 같고, 능력이 있으면 될 것 같고, 지혜가 있으면 될 것 같고, 돈이 많으면 될 것 같지만 인생의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그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령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창의력, 하나님의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태산 같은 문제가 평지가 되고 질곡 같은 골짜기가 오곡이 풍성한 황금 들판이 될 것입니다.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고 희망이 춤을 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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