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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포 옷을 입으라(계19:6-8)-2021.8.15
사람에게 옷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복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요. 옷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분을 나타내거든요. 그 신분에 합당하지 않는 자는 그 제복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왕이 아닌 사람이 왕복을 입을 수 없지요. 경찰관이 아닌 사람이 경찰관 제복을 입을 수 없고, 군인이 아닌 사람이 군복을 입을 수 없으며, 법관이 아닌 사람이 법복을 입을 수 없는 거지요. 육신에 입히는 옷도 그러한데 영적으로 입는 옷은 오죽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육신의 겉옷도 입지만 영적인 속옷을 입고 사는 것이거든요. 예수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고, 믿지 않는 자는 더러운 우상의 옷을 입고 살지요.
그런데 육신의 옷은 신분이 안되어도 돈을 주고 사서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옷은 돈을 주고 사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닙니다. 아무데서 구입할 수 있는 옷이 아니에요. 성도는 믿음에 합당한 옷을 입고 사는 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합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3장2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으로 연합된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른바 육신의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산 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지요. 그리스도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에요. 때문에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고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자요,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자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자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자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자입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세상의 더러운 옷을 벗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더러운 옷을 입어서는 안됩니다. 혹은 영적으로 누더기 같은 옷을 입어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입은 옷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하면서 아무데나 분별없이 앉아 있거나, 아무 사람과 구분하지 않고 어울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옷을 입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구원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옷은 우리 주님께서 입혀주신 옷이지요. 하지만 구원의 옷을 입은 자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또 다른 옷이 필요합니다. 겉옷입니다. 겉옷은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옷입니다. 그런데 그 겉옷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옷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하고 가리우기도 하거든요.
이사야61장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 구절에 보면 두 종류의 옷이 나옵니다. 하나는 구원의 옷이고, 또 하나는 의의 겉옷입니다. 본문에는 구원의 옷이 나오고, 의의 겉옷이 나옵니다. 물론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주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옷을 입은 자에게 하나님이 의의 겉옷을 덧입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이 사모를 쓰고 신부가 자기보물로 단장하듯이 말입니다. 한마디로 신랑과 신부가 백년가약을 맺음으로 혼인예식을 합니다. 이미 마음을 주고받으며 결혼하기로 서약을 했기에 혼인예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그들의 혼인이 무효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위해 신랑은 사모를 쓰고 신부는 자기의 보물로 단장하여 신랑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최대한의 예의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이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주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신랑, 나는 주님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신 구원의 옷으로 충분히 입증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결혼식이라는 절차가 없어도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성립된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과 우리 관계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결혼예식입니다. 결혼식은 신랑이나 신부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예식입니다. 이 절차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부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부부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나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만 있거든 신랑되시는 주님께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부로서의 아름다움과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항상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언행심사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여인은 결혼했으니 대충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아무 단장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하지만 신부는 신랑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거든 자기를 단장할 줄 알아야 합니다. 꾸미고 단장하는 것은 나쁘거나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이사야서 61장10절에 나오는 두 종류의 옷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옷이 입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라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옷이 있습니다. 겉옷입니다. 그런데 그 겉옷도 어떤 겉옷이냐가 중요합니다. 더럽고 추한 겉옷도 있고, 아름답고 거룩한 겉옷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겉옷이 의의 겉옷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의의 겉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도 속사람이 있고 겉사람이 있듯이 사람이 입는 옷에도 속옷이 있고 겉옷이 있습니다. 구원의 옷이 속옷이라면, 겉옷은 행실의 옷입니다. 행함의 옷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옷을 입은 자라 할지라도 의의 겉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으로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의의 겉옷을 입고 살아야 하지요.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의의 겉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구원의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겉옷도 역시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겉옷을 입어야 하겠지요. 의의 겉옷은 반드시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옷입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의 겉옷을 입으려면 먼저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합니다.
(2) 더러운 옷을 벗겨주시는 하나님
스가랴서3장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슥3:1). 그런데 그 우편에서 사단이 여호수아를 참소합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장면은 여호수아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쩔쩔 매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순결하고 누구보다 당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옷을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어 입히셨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흉패를 붙이고, 어깨에는 보석견장을 붙이고, 머리에는 관을 쓰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서3장3절은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모든 인간의 모습은 더럽고 추하고 초췌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대제사장의 신분을 가진 여호수아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보여주는 여호수아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영적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상태를 리얼하게 노출하고 있는 거예요.
알다시피 여호수아는 유다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1차 귀환할 때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멤버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귀환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모습도 그러하려니와 자기 백성들의 모습이 더럽고 추한 상태였던 것이지요. 대제사장으로서 여호수아는 자기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보여주셔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고발해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모습을 옆에서 사단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 앞에 선 대제사장이 그 정도밖에 안되냐고 비난하고 정죄했겠지요. 사단이 대적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실 그 모습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모습이거든요. 이처럼 사단은 기회만 있으면 물어뜯고 공격합니다. 틈만 보이면 물어뜯는 이리에요. 우리에게 있는 흠과 점과 티가 보이면 여지없이 공격하지요. 그것이 사단의 주특기예요. 사단은 참소자거든요. 사단은 여호수아를 참소하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십니다.
스가랴서3장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단을 책망하십니다(슥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이라는 불구덩이 속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볼품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소망이 여기 있습니다. 완전히 태워져서 재가 되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불구덩이 속에서 꺼내준 타다 남은 나무입니다. 완전히 태워져 재가 되었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슬린 흔적은 있을지라도 형체는 있습니다. 비록 모양은 그럴지라도 그슬린 자국을 벗겨내고 다듬어서 단장하면 충분히 하나님이 기대하는 나무처럼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아직은 그슬린 나무지만 내가 택한 나의 백성이라고 두둔하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고 보증하실 민족임으로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제한된 기간 동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유다를 바벨론에 붙이신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유다를 완전히 진멸하시거나 없애버릴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징계하시려는 계획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의 죄악을 응징하시려는 심판의 목적을 갖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벨론이 하나님의 의중과는 달리 극도로 자만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스가랴서1장15절을 통해 당신의 의중을 분명히 밝히셨지요.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교만한 바벨론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채 마치 하나님처럼 이스라엘위에 군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진노를 표출하는 도구로 사용됨을 모르고 오만방자했던 것이지요. 이들의 미련함을 이사야서로 확인해 보십시다. 이사야서10장15절을 보면,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할 수 있으며, 톱이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할 수 있으며,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무자비한 칼춤을 춘 셈이지요.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킨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은 보지 못한 채 유다를 짓밟아 버린 거예요. 한마디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내주려고 몸부림을 친 거예요. 손만 봐달라고 부탁했더니 아예 죽을 지경까지 아작을 내버린 거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정해놓으신 경계선을 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무지한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경계선을 넘어가려고 해요. 월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침범하는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단은 바벨론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못된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던 주범이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단을 책망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사단이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겨주십니다. 더러운 옷을 벗겨주셨다는 것은 모든 죄과를 제하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옷을 벗겨주신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셨지요. 새로운 옷을 입혀주신 것이지요. 새 사람은 새 옷을 입어야 하거든요.
이 모습은 마치 원수들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합니다. 또한 범죄한 아담의 벗은 몸에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집을 나간 탕자가 아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좋은 것을 입혀주신 것을 연상케 하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은 누더기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우리의 옷을 벗겨 그리스도께 입히시고, 그리스도께서 입고 계신 의의 옷을 벗기시어 우리에게 입혀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사단이 우리를 정죄할지라도 담대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입니다.
사단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를 정죄합니다. 절대 사단의 꼼수에 말려들면 안됩니다. 사단은 우리가 스스로의 정죄감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라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누가 보더라도 우리는 모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볼품없고 자랑할 것 없는 모습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는 아무도 취소할 수 없고, 변개 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후회하심도 없으시고, 실수하지도 아니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행하신 일이지요.
(3) 세마포 옷을 입으라
믿는 자는 구원에 합당한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그 옷은 어린양의 세마포 옷입니다. 어린양의 세마포 옷을 입고 우리는 이 땅을 사는 자들입니다. 세마포는 아마 섬유로 짠 베옷입니다. 쉬운 말로 모시로 만든 옷이지요. 예전에 시골에서 살 때 어르신들이 더운 여름철에 즐겨 입던 옷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아무나 입었던 옷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동네에서 가진 자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베옷은 일반인들이 입을 수 없는 귀한 천으로서 귀족이나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애굽에서 바로 왕이 요셉에게 입혀준 옷이 세마포 옷이었지요(창41:42). 그만큼 귀한 옷이에요.
물론 세마포 옷은 영적으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세마포는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옷이에요. 그래서 성막 뜰의 휘장을 세마포로 만들었지요(출27:9). 세마포로 제사장들의 속옷을 만들었고, 띠와 관을 만들었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성막에서 봉사할 때 세마포로 만든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띠를 띠고, 세마포로 된 관을 만들어 써야 했습니다. 사실 세마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예복이 세마포 옷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를 당하시고 장사지내실 때 세마포를 썼습니다. 마태복음27장59절을 보면,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마포는 예수님의 장사에 수의로 사용된 것이지요. 물론 그 세마포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대로 무덤에 있었습니다(눅24:12). 이는 예수님이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사실 세마포는 죽음의 옷이에요. 죽음을 통과할 때 입는 수의거든요. 일종의 세상을 버리는 옷이 세마포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마포 옷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옷입니다. 이른바 세상에 대하여 죽은 나를, 죄에 대하여 죽은 나를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입고 살아가는 옷이 세마포 옷이라는 거예요. 가장 핵심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천국백성들이 입고 사는 옷이에요. 또한 이기는 자들이 입는 옷입니다. 계시록 3장5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자기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승리한 사람들이지요. 어떤 환난이나 핍박도 이겨낸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입는 옷이 흰옷이에요. 세마포 옷이지요.
그래서 계시록7장14절은 말씀하기를,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 입는 옷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계7:14). 어린양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자들이 입는 옷이 세마포 옷이라는 말이에요. 또한 이십사 장로들이 입는 옷입니다. 요한계시록4장4절에 보면, 하나님 보좌에 둘려 있는 이십사 장로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흰 옷이 바로 세마포 옷입니다. 한군데를 더 보십시다. 계시록7장을 보면, 어린양의 피로 인 맞음을 받은 십사만사천명의 무리들이 입는 옷입니다. 한마디로 세마포 옷은 구원받은 성도가 입는 옷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준비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신랑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입혀주시는 세마포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세마포 옷을 입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입혀주시는 세마포 옷을 입은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마포 옷은 천국의 드레스입니다. 한마디로 세마포 옷은 천사가 입는 의복이요(계15:6), 하늘의 군대가 입는 군복이며(14절),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 선 장로들(4:4)이 입는 예복입니다.
세마포로 만든 옷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특징은 질기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인내심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는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시록3장10절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칭찬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칭찬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쉬지 않고 기억한다고 증언합니다(살전1:3). 그런 차원에서 세마포 옷은 믿는 자의 인내를 상징하는 옷입니다.
또한 세마포 옷은 흡수성이 좋습니다. 이는 믿는 자는 모든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해주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며, 허물을 덮어주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믿는 자는 적응력이 좋아야 합니다. 우리를 배척하는 자들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거예요. 또한 세마포 옷은 땀이 차지 않습니다. 땀이 차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수고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제사장이 성전에서 봉사할 때 인간의 땀 흘리는 수고로움이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보다 세마포 옷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밝은 빛을 낸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하지요. 물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마포 옷을 입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마포 옷은 깨끗합니다. 이는 믿는 자의 순결함과 정결함을 의미하고, 충성과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더러운 옷이라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면 눈과 같이 희어지고 양털같이 희어집니다.
그러므로 세마포 옷은 영적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입은 옷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입었던 옷이지요. 한마디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만이 입은 옷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는 자는 누구나 세마포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입어야 합니다. 그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와 소유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벧전2:9). 한마디로 세마포 옷은 하나님의 백성이 입는 옷이에요. 그리스도의 신부가 입어야 할 옷이지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필수예복입니다. 세마포 옷을 입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18절에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시기를,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이 말씀은 깨끗하고 정결한 세마포로 된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은 광택 있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양모가 아닌 흰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입는 옷은 보기에는 화려하게 보입니다. 한마디로 음녀들이 입는 옷이 있어요. 요한계시록17장4절에 보면, 음녀들이 입는 옷은 자주 빛과 붉은 빛의 옷이에요.
자주 빛과 붉은 빛의 옷은 비싼 염료로 만들어진 왕의 옷을 표현합니다.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기도 하구요. 그런 옷은 값비싸고 매력 있게 보일지라도 사람들의 눈을 미혹시키고 속이는 옷입니다. 절대 그런 옷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그런 옷을 입어서는 안됩니다. 성도가 입어야 할 옷은 반드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세마포 옷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그 지역에서 유행하는 검은 양모 털로 만든 옷을 입지 말고 흰 옷을 입으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른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이지요(엡4:22-23).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입혀주시는 세마포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역시 세상이 즐겨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에 젖어들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가 주시는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마포 옷을 입고 살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세마포 옷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행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선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의미하지요. 교회된 우리에게 흠과 점과 티가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삶이지요(엡5:27).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입니다.
물론 성도의 옳은 행실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결과물이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성도들이 입게 되는 의의 옷입니다. 한마디로 세마포 옷은 천사들의 의복입니다. 요한계시록15장6절을 보면,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여 말씀드립니다. 세마포 옷은 천사가 입는 옷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군대가 입는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14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십사 장로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러므로 세마포 옷은 하늘의 제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양의 신부된 자가 세마포로 단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옷은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자기 신부된 자에게 입혀주시는 예복이지요. 이른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입어야 할 옷이에요. 본문8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세마포 옷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입혀주시는 옷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입는 거룩한 옷이에요. 세마포 옷은 거룩한 옷입니다. 거룩한 옷은 절대 자기 스스로 입을 수 없고, 아무도 입혀줄 수 없는 옷입니다. 세상에는 결코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의의 옷이라는 말은 자기에게서 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3장9절에서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윤리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의의 옷은 스스로 입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통한 의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의가 더러운 옷 즉 누더기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64장6절을 보십시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고 말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만 완전하고 완벽한 의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입혀주시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옷은 신랑되시는 주님이 신부된 자에게 입혀주시는 거룩한 예복입니다. 주님이 자기 신부되는 교회에게 입혀주시는 옷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옳은 행실 역시 성도가 스스로의 노력이나 공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마포 옷을 입혀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은혜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지는 신앙이지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번에 얻어지는 구원의 은혜와 일생을 통해 성화되어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믿는 자에게 입혀주시는 구원의 옷이든지, 또한 의의 겉옷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입혀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믿는 자는 반드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세마포 옷을 입은 자요, 이 땅에서도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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