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구멍
내가 사는 동네는 몇 개 아파트단지로 어우러졌다. 길 건너 용호동에 일동아파트와 무학아파트가 있다. 길 앞 종합운동장 쪽에는 반송 주공아파트를 재개발한 트리비앙과 노블아파트는 층수가 제법 높다. 교통문화연수원 곁에는 우리 아파트와 건령이나 높이가 비슷한 럭키아파트다. 우리 집은 반송공원 기슭 반림동 현대아파트로 나는 분양 당시 원주민이 아니고 중간에 이사 온 이방인이다.
나는 창원으로 전입 와 명서동의 낡고 낮은 아파트에 살았다. 당시 큰 녀석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작은 녀석은 유치원을 다녔다. 그 사이 흐른 세월 속에 두 녀석은 성인이 되어 객지로 떠났고 큰 녀석은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예전에 큰 녀석이 중학교를 배정 받은 학교가 살던 동네와 멀어 현재 사는 동네로 이사와 지금까지 눌러 있다. 이후 어디 번듯한 곳으로 옮겨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나는 창원 지역만기를 채우고 순환근무를 떠나 김해지역으로 나갔다가 한동안 지냈다. 그러다 지난해 봄에 다시 창원으로 복귀했다. 내가 사는 집은 예전 그대로 변함이 없다. 변두리 시골로 나가 살고 싶어도 내가 차를 운전하지 못하니 제약이 따랐다. 나는 시골 생활에 익숙하나 집사람은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했다. 이러다보니 나한테는 삭막한 도심 아파트도 감지덕지다.
나는 시내 한복판에 살아도 여태 촌놈 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추천할만한 식당이나 그럴듯한 술집이라곤 아는 데가 없다. 어쩌다 집사람과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매장을 들리긴 해도 그때마다 어색하고 갑갑함은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낮이든 밤이든 번화가 진출은 가급적 억제한다. 그저 내가 사는 동네만 뱅글뱅글 돌다가 주말이면 혼자서 훌쩍 교외로 벗어남이 버릇이 되었다.
그나마 올봄부터 기대가 좀 된다. 학교에서도 토요 휴무가 전면적으로 실시되기 때문이다. 사실 내 지난날 사십대는 주말이나 방학이 자유롭지 못했다. 친가와 처가 형제가 많은 집이긴 해도 병석에 오래 계셨던 어른들로 고향을 자주 찾았다. 세월 따라 천수를 다한 친부모 처부모를 선산으로 모시고 나니 오십대 문턱이었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산을 오르고 강가나 바닷가를 나갔다.
내가 산을 즐겨 간다만 여러 사람 무리 지어 오른 적은 드물었다. 단체산행으로 남은 기억은 어느 해 가을 대학 동문회에서 화왕산을 올랐을 때다. 언젠가 초등학교 동기들과 용추계곡이나 백월산을 갔던 날은 가족 나들이같이 오붓한 자리였다. 산악회가 전세버스로 떠나는 산행에 동참하자는 지인의 권유가 있었다만 따라 나서지 않았다. 나는 산을 올라도 언제나 늘 호젓한 길을 혼자 걸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마음과 몸이 바빴다. 신록이 물든 봄날 산기슭에서 고사리나 취나물을 뜯어보았다. 비구름이 걸쳐진 여름 산허리에서 바위채송화와 산나리를 보았다. 구절초가 핀 가을 산자락에서 단풍의 거룩한 소신공양도 목격하였다. 눈 쌓인 겨울 산길에서 점점이 찍힌 짐승 발자국을 보았고 살을 에는 귓불에서 솔바람소리도 들었다. 이러면서 날이 저물고 달이 기울어 해가 바뀌었다.
그간 나는 산을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들판이나 갯가로 나가 하루 종일 걷기도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대체로 도시락을 싸 나섰다. 풍광 좋은 갯가를 지나면 횟집이나 갈비집이 있었지만 내 처지에 들릴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나는 집에서 나설 때부터 도시락을 챙겨갔다. 군대 식단도 일식 삼찬이지만 내 도시락은 된장찌개나 김치조각 뿐이었다. 모르긴 해도 절간의 공양보다 소박하지 싶다.
작고한 어느 재벌 총수는 임직원을 뽑을 때 관상을 참고했단다. 역학에선 관상보다 중요한 것이 심상이라는 얘기도 있다. 나는 관상이나 심상에 관심 없다. 그렇지만 산을 오르거나 골짜기에 들면 지형지물을 살피거나 인문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산나물이나 산열매는 물론이고 땅이름이나 전설까지도. 비바람에도 버티고 선 나무나 풀꽃의 이름도 불러주어야 했다. 그러다 곡차도 한 잔 음미했다. 12.03.07
아래 글은 ‘그리움만으로도 행복합니다’의 한 조각으로 지금 와서 들춰보니 전설로 남은 얘기네요.
못 구멍
도계동엔 내가 가끔 들리는 술집이 있다. 이름 하여 단골집이다. 이곳은 내가 창원 전입해 와서부터 알게 된 곳이다. 당시 마음에 쓰린 상처가 있어 소주로 달랬던 적이었다. 도계동 도랑가에 '가향실비'라는 이름의 허름한 자리였다. 나는 맥주보다 소주를 즐겨했다. 더러 주변 지기들과의 환담도 나누기도하고 혼자 들러 잔을 비우기도 했다.
그 당시 주인의 말씨가 저쪽 목포쯤 짐작 가는 나보다 서너 살 위로 보이는 여자였다. 성씨도 나이도 물어보지 않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참 편안하게 대하고 찌개로 나온 안주도 맛깔스런 솜씨였다. 그런데 이 주인은 가게 세는 오르고 경영에 어려움이 닥쳤는지 언제부터가 영업을 그만두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노래방 도우미로 나간다고 했다.
그 자리에 가게 이름을 '마로니에'라고 바꾸어 달고 새로이 영업을 시작한 여자가 있었다. 인근 고성이 고향이라 했고 나이는 내 또래 정도 되나 싶었다. 마산 쪽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창원으로 옮겨왔나 싶었다. 아직 독신으로 지내면서도 깔끔하고 우아한 품위를 지키면서도 억척스레 사는 여자였다. 손님 관리도 잘 하여 종전보다 장사가 잘 되나 싶었다.
이 주인은 그 자리에서 가게를 '청석골'이라는 민속주점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녀가 직
접 실내장식을 하여 아담하게 새로이 꾸몄다. 고전과 현대를 조화시켜 멋을 살린 솜씨가 좋았다. 출입구 쪽에는 본인이 직접 엮은 이엉을 두르고 함지박엔 수련이나 부레옥잠을 띄워 길렀다. 주로 70년대 청바지 통기타 가수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 가게를 7년 넘게 주인이 바뀌어도 들리고 있다. 내가 찾을 때는 주로 막걸리나 소주를 마셨다. 어떨 때는 지갑이 비어 술값을 외상으로 달아두기도 했다. 술자리를 하다보면 채운만큼 비워야한다. 이 집의 화장실은 문밖으로 나가 건물 뒤를 돌아가야 한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건물 안쪽에 있다. 세면대에 비누도 있어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화장실이 안쪽에 치우쳐 있다 보니 문밖을 나온 이 집의 손님들이 화장실 가는 계단을 두세 개 오르기를 귀찮아했다. 건물 바로 뒤편의 화분들에다 실례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화분은 2층의 건물 주인이 관리하는 것들인가 싶었다. 그 자리가 남의 눈이 잘 띄는 곳이 아니기에 취객들이 바지춤을 내리고 볼일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아마 2층 주인은 이 술집의 주인 여자에게 닦달을 했을 것이다. 손님들보고 제발 화장실에 가서 용무 보라고 나무랐을 것이다. 술꾼들의 오줌 세례로 화분들은 시들어가고 악취가 집안을 진동한다 했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마다 반복되는 이 일에 술집 주인 여자도 참 난감했을 것이다. 주인 여자가 손님으로 온 술꾼 남정네들보고 제발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라고 통사정을 할 처지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 여자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바깥의 화분에다 오줌 누는 취객들을 화장실 안으로 유인했다. 그 여자는 어디서 구했는지 관능미 넘치는 여자의 엉덩이를 클로즈업시킨 사진 액자를 구해 남자 소변기 벽면에다 걸어 두었다. 적당히 취해 가는 술꾼들은 바지춤을 내려놓고 볼일을 보는 사이 그 사진을 보면서 야릇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사진을 걸어 놓고 보니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오줌이 마려운 자는 얼굴은 가려 있었지만 그 미끈한 몸매의 여자 엉덩이가 보고 싶어서도 화장실 안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다녀와서 그 사진 이야기를 하지 않은 손님은 바깥의 화분에다 볼일을 보았음이 분명했다. 연약한 여자가 드센 남자 여럿을 통쾌하게 이겨낸 게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하랴. 한동안 잘 지켜지던 실내 화장실 사용에 덜컥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손님 가운데 누군가가 그만 그 사진 액자를 슬쩍 가져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로는 예전같이 또 바깥 화분이 시들고 악취가 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 집에 들러 화장실에 갈 때마다 벽면에 붙여 걸었던 액자의 자리를 눈 여겨 바라보았다. 바로 그 자리에는 조그마한 못 구멍만 빤히 뚫리어 있었다. 04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