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리 2호 지석묘에서 면소재지 방향으로 200m쯤 내려오면 진동면 사무소가 있다. 진동면 사무소 부근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244호 진해현 관아 및 관사유지(官舍遺址)가 있다.
진해현 관아 및 객사는 조선 순조 32년(1832) 진해현감 이영모(李寧模)가 건립하였다. 동헌은 현감이 공사를 집행하던 곳이며 객사는 왕의 전패 (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 각 고을의 객사에 ‘殿’자를 새겨 세운 것으로, 정조(正朝)·동지·탄일(誕日)에 그 고장의 관원이 배례하여 경의를 표하는 정성을 나타내었음)를 모시고 배례(拜禮: 절하는 예)하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원래 동헌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군령을 출납하는 사령청과 앞쪽에는 말을 사육하는 마방과 지방의 형사를 담당하는 형방소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20년 전에 들어선 면사무소 건물이 동헌옆에 자리잡고 있다.
동헌은 앞면 7칸, 옆면 3칸의 일자형 건물이며 1981년 9월과 1982년 7월에 각각 두차례 보수했다. 객사는 정면 11칸, 측면 3칸으로 75평의 규모인 솟을지붕의 목조건물이었으나 삼진중학교 교사(校舍)로 사용하던 중 1983년 5월2일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어 기단(基壇)과 주초석(柱礎石) 등만 남아있다.
삼진중학교 교문 입구 사주문(四柱門) 앞에는 돌비석 사이에 철비석까지 역대 현감의 공덕비 16기가 즐비하게 서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관들이 떠날때 선정비를 세우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대개 고을 향리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졌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진해현 관아 및 관사유지를 뒤로 하고 광암 방향으로 나서면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옹기종기 시장 좌판들이 모여있다. 작은 배로 직접 바다에서 잡았다는 해산물을 사라며 옷깃을 잡는 할머니의 정겨운 손길도 있고, 양지 바른 언덕에서 금방 캐온 쑥이며 나물들이 봄 냄새를 물씬 풍긴다.
시장을 벗어나 국도 14번을 따라 통영방향으로 잠시 나가면 진북면과 경계지점인 진동면 사동리 237번지에 삼진 의거(義擧)를 기리는 8의사 창의탑(彰義塔)이 있다. 삼진의거는 진전·진북·진동면의 3개 면에서 1919년 4월 3일에 일어난 연합시위를 일컫는 말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긍지 와 자부심을 주는 사건이다. 이 의거는 삼일 독립운동 중 우리나라 각지에서 일어난 을미년(乙未年) 4대의거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치열했다.
창의탑의 비문에는 『1919년 4월4일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양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의 8의사는 수천 군중의 앞장에 서서 우렁찬 조국 독립만세를 외치다 왜병의 총탄에 무참히 쓰러졌다』라고 적혀 있다.
이 위대한 삼진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1963년 10월에 진동면 사동리 현장에 삼진 면민들의 손에 의해 창의탑이 세워졌고, 삼진의거의 진원지인 진전면 양촌리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8의사 묘역이 조성되어 뜻을 기리고 있다.
8의사 창의탑에 잠시 묵념을 하고 8의사 도로를 따라 고현리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다 왼쪽으로 고개 돌리면 넓게 바다가 메워지는 간척지가 보인다. 매립이 되어 간척지가 되기 전에는 하천 주변에 갈대가 우거져 가을이면 데이트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진동면 고현리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가는 길목에 우산초등학교가 있다. 우산초등학교 교문 입구 왼쪽 화단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석불좌상이 사철나무 사이에 있다. 보호시설이 없이 초라하게 방치되고 있다. 좌대(座臺)는 흙 속에 묻혀 있으며 작은 체구의 석불(石佛)은 오른팔과 왼쪽 어깨 부분, 목 위 부분이 파손되었다.
옷의 주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며, 왼쪽 가슴 부분에 매듭을 지었다. 결가부좌한 자세는 왼발을 바깥으로 내었고, 발가락은 전체적으로 보아 세부묘사를 생략하여 둔한 느낌을 준다. 몸통에 비해 결가부좌한 자세가 풍만하여 전체 조화는 떨어지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