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하지 않은 도시, 쟁탈 혹은 탈출
가평군의 가을 들판에 들깨털이가 한창이다. 밭을 지나노라면 깨 향기가 진동한다. 오래간만에 부모님 일손 돕기 위해 온 듯한 자식들과 함께 모여 깨 터는 모습도 정겹다. 이런 정경이 찬란한 가을 햇살과 어우러지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 밝은 모습에 다가가 깨 수확량이 어떤지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어둡다. 수확량이 예년에 비해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가평군 오지 산촌에서는 요즘 토종꿀 채밀이 한창이다. 올 한 해 토종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두 마을을 지원했고, 이제 판매도 지원해주고자 하는데 수확한 꿀의 양이 신통치 않다. 올해 각종 매체에서 벌이 사라졌음을 걱정하는 기사가 넘쳐났었는데 그 영향을 실감하고 있다. 토종벌의 개체수가 줄어서 다른 산촌 지역에서 토종벌을 분봉해오기도 했는데 별 효과를 보질 못했다.
농촌 현장에서 실감하는 기후변화로 인한 수확량 감소
들깨도, 토종꿀도 왜 수확량이 준 것 같냐고 농부들에게 물어보니 답이 똑같다. 기후변화다. 점점 비가 길게 오고, 많이 오다 보니 꽃이 피었을 때 벌이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는 얘기였다. 이른 장마니 늦장마니 하는 말들이 서울에서 살 때는 그냥 조삼모사 같은 느낌이었는데, 생태계에서는 생과 사가 오가는 변화였음을 깨닫는다. 한편 수확량 감소의 원인으로 과학자들은 지구의 온도 상승을 말한다. 즉 기온이 올라가 작물의 성장속도가 빨라지면 작물이 받는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그 결과 꽃의 수나 결실의 수, 그리고 크기도 줄어들어 수확량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지구열대화(global boiling)가 만든 변화라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기온 1도가 올라갈 때마다 식량 생산량은 3~7퍼센트가 줄어든다고 한다. 기후변화의 다른 이름은 곧 식량위기인 것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의 한 장면.
이런 위기의식의 발현이었을까. 최근에 본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식량이 없어졌을 때 인간 군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척 소중하게 또는 열광적으로 좋아했었을 삶의 장식들, 풍요롭게 넘쳐나던 재화와 서비스가 철저하게 파괴됐을 때 결국 인간은 생존을 위해 식량에 광적으로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영화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풀 한포기 나지 않는 콘크리트 세상 도시에서 식량이 모여있던 마트는 식량 쟁탈의 전쟁터가 된다. 모든 먹거리는 마트에 있다고 생각하며 도시의 삶을 살았던 나의 도시 생활을 생각하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도시민의 식량위기를 다룬 또 다른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에서 식량을 구하는 방법은 다르다. 2017년 제작된 일본영화인 이 영화에서의 설정은 갑자기 도쿄의 전기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한 집에 살면서 각각 각자의 전자매체에 매달려 서로 소통 없이 살던 주인공 4인 가족의 일상을 비롯해 도시는 일순간 대혼란에 빠진다. 가전제품이 사용되던 모든 가사 활동은 물론, 교통, 학교, 회사 모두 올스톱이다. 전기가 없으니 물도 안 나오고 냉장고가 꺼지니 음식도 부패하고 배달도 안되니 마트의 식량도 동이 나고 결국 식량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도시, 쟁탈이냐 탈출이냐
이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마트 쟁탈 전쟁이었다면, <서바이벌 패밀리>에서는 도시 탈출이다. 즉 귀촌이다. 주인공 가족의 외가집인 어촌으로 가는 것이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다 사용할 수 없으니 이 가족이 선택한 방법은 자전거다. 그렇게 이동하면서 그들은 농촌에서 일을 돕기도 하며 여정을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깨닫는다. 농산어촌이 식량의 보고라는 것을. 자연이 아낌없이 주는 식량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그런 것도 먹냐며 경계했던 이들은 그런 것을 고맙게 먹으며 자연을 만난다.
결국 외가집인 어촌에서 산과 들, 바다가 주는 식량을 먹으며 살던 주인공 가족은 몇 년 뒤 도쿄에 전기가 다시 공급되면서 도시로 돌아와 삶을 이어간다. 그렇지만 그 삶은 이전의 삶과 달라져 있었다. 폐허 속에서 전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엔딩 샷을 보여줬던 <콘크리트 유토피아>와는 다른 희망적인 결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식량의 보고인 촌에 대한 인식이 부재해 촌을 배제한 것인지 아니면 반생태적, 반생명적인 도시의 삶을 극단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촌을 배제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두 영화 모두 도시가 지속가능한 식량의 땅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촌에서 생산된 식량에 기대지 않고는, 아니 정확하게는 촌을 종속시키지 않고는 도시가 지속가능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농어임산물의 가격을 낮춰서 촌민들이 소득을 좇아 촌을 떠나 도시로 가게 하고, 도시로 온 촌민들이 낮은 임금에도 먹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식재료비는 역시 또 낮아져 있어야 하고, 도시민이 된 촌민들도 이제 도시소비자로서 장바구니 물가가 오르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수입농산물의 싼 가격에 환호하며, 농촌은 없어져도 자동차와 반도체를 팔아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발전(?)해 온 세상, 이런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두 영화는 모두 있을 것 같지 않은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했다. 하지만 그런 가상적인 상황이 아니어도 이미 모든 과학적 증거가, 전 세계의 사건들이 보여주고 있는데도 우리가 외면하는 극단적인 상황아 눈앞에 와있다. 바로 기후재앙이다.
KBS2 다큐 〈지구 위 블랙박스〉의 한 장면.
기후재앙을 버텨 낼 토종씨앗 몸 속의 기억
이런 기후재앙을 심각하고도 심도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정성껏 만든 <KBS2>의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가 얼마 전 방송됐다. 총 4회에 걸쳐 방송된 이 다큐멘터리의 시청률은 참담하다. 1%를 넘나들고 있는 수준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2049년 거주 불능 지구에서 주인공은 “2023년에 인류가 왜 그 수많은 기후재앙의 신호들을 무시했는가” 하고 한탄과 질타를 내뱉지만 그 절규를 들은 시청자는 극소수였다.
나는 아내와 함께 토종씨앗을 기르고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기후재앙이 와서 식량 수입 특히 외국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종자 수입이 안 될 경우 토종씨앗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식량주권 차원에서 토종씨앗은 중요하지만, 토종씨앗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기후의 변화를 자신의 몸속에 기억하며 삶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기후재앙에서도 버텨내는 힘이 클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그래서 최대한 토종씨앗을 공유하기 위해 애쓰지만, 이걸 가져가서 정성껏 증식하는 농부를 만나기가 어렵다. 기존의 거대한 산업시스템이 주는 안락한 방식의 삶이 있으니 토종씨앗은 또 하나의 장식거리쯤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수십 년간의 농정이 토종씨앗을 멀리하게 했다. 이제 행정에서도 조금씩 종자주권을 얘기하면서 토종씨앗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는 하지만 수십 년 동안 토종농법에서 멀어진 농부들에게 토종씨앗은 낯선 이방인 같은 존재다. 그나마 토종씨앗을 지켜오던 농부들도 이제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거나 고령으로 인해 농사를 접고 있다. 그래서 토종씨앗을 기르는 새 농부가 필요하다. 공정귀촌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보이는 도시 속 절망이 아닌 <서바이벌 페밀리>가 보여주는 지속가능한 도시 속 희망을 위해서도 촌은 살아있어야 하고, 그 촌에서 독립적인 지속가능한 먹거리가 자라고 있어야 한다. 토종씨앗으로 씨앗 속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농부, 생태 순환의 삶을 수용하며 불편을 감당할 수 있는 농부, 도시와 소통하며 뚝심 있게 우리 농촌을 지켜낼 수 있는 농부. 공정귀촌인이 담당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