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개봉 / 135분 / 15세 관람가>
=== 프로덕션 노트 ===
감독 : 토드 헤인즈
출연 : 벤 위쇼 & 크리스찬 베일 & 히스 레저 & 케이트 블란쳇 & 리처드 기어 & 마커스 칼 프랭클린
밥 딜런’의 인생과 음악에 흠뻑 취해볼 수 있는 기적 같은 영화
DVD에서만 선보이는 본편 비공개 영상 및 현장 메이킹 수록
케이트 블란쳇, 히스 레저, 리처드 기어, 크리스찬 베일, 벤 위쇼 등
“밥 딜런’ 한 사람의 역할에 캐스팅 된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
제64회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및 여우주연상 (케이트 블란쳇)
제65회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케이트 블란쳇)
<벨벳 골드마인> 토드 헤인즈 감독이 새롭게 선보이는 걸작
[Synopsis]
케이트 블란쳇, 히스 레저, 리처드 기어, 크리스찬 베일, 벤 위쇼, 마커스 칼 프랭클린…
6명의 배우가 노래하는 밥 딜런의 일생
<아임 낫 데어>는 전설적 포크락 가수 밥 딜런 특유의 시적인 가사를 줄기로 삼아 밥 딜런의 7가지 서로 다른 자아의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연달아 진행시키며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렬한 아이콘의 생동감 있는 초상을 완성한다.
음악적 변신으로 비난 받는 뮤지션 ‘쥬드’(케이트 블란쳇), 저항음악으로 사랑받는 포크 가수 ‘잭’(크리스찬 베일), 회심한 가스펠 가수 ‘존’(크리스찬 베일)이 대중에게 주목받는 뮤지션으로서의 밥딜런의 실제 삶을 보여준다면, 영화 속 영화에서 ‘잭’을 연기하는 배우인 ‘로비’(히스 레저)는 밥 딜런이 아니면서도 어딘가 그를 닮은 미묘한 인상을 남긴다.
은퇴한 총잡이 ‘빌리’(리처드 기어)와 시인 ‘아서’(벤 위쇼), 그리고 음악적 스승 ‘우디’는 밥 딜런의 문화적 배경과 영감의 원천을 상징하며 그의 아이덴티티를 농밀하게 완성해낸다.
[Director] 토드 헤인즈 TODD HAYNES
이완 맥그리거,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크리스찬 베일 등이 출연한 락 드라마 <벨벳 골드마인>으로 이미 영화 팬 뿐 아니라 음악 매니아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토드 헤인즈 감독은 4년여에 걸친 기나긴 인고의 작업 끝에 완성된 <아임 낫 데어>를 통해 또 한번 세계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60년대 데뷔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신하여 영향력을 발휘해온 ‘밥 딜런’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토드 헤인즈 감독은 지금까지의 어떤 전기영화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의 접근으로, 깊은 이해에 근거한 선명한 초상을 빚어내고 있다. 밥 딜런은 기존의 미발표 곡이었던 “아임 낫 데어”를 영화에 수록하는 것은 물론,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는 것까지 수락하여, 토드 헤인즈 감독의 연출력과 완성도에 대해 얼마나 깊은 신뢰를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요작품
<아임 낫 데어>_2007, <파 프롬 헤븐>_2002, <벨벳 골드마인>_1998, <세이프>_1995, <포이즌>_1991
[Character and Cast]
쥬드 JUDE _케이트 블란쳇
‘쥬드’는 65-67년 뉴 포트 음악 페스티벌과 영국 투어에 참가했던 시기의 밥 딜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포크락의 고전을 발표하던 밥 딜런은 바로 뒤이어 약물중독을 의심케 하는 허무주의적 면모를 보이며 일렉트로닉 락 사운드를 선보여 기존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그의 새로운 음악은 시인 앨런 긴즈버그, 코코 리빙턴 등 명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반면 언론인 미스터 존스 같은 보수적인 음악향유계층을 분노로 날뛰게 한다.
로비 ROBBIE _히스 레저
뉴욕에서 활동하는 배우이자 오토바이 매니아인 로비는 한 때 포크음악으로 명성을 누렸으나 잠적해버린 전설적 뮤지션 ‘잭’의 인생을 다룬 영화 속 연기로 순식간에 스타로 떠오른다. 클레어와의 10년간의 이야기는 달콤한 만남으로 시작하나 점차적인 별거와 헤어짐으로 발전한다. 딜런의 로맨틱한 인생은 여자친구 수지 로톨로에게 바친 초기 러브 송(“The Freewheelin’ Bob Dylan”, “Another Side of Bob Dylan”)을 비롯, 사라 라운즈 와의 결혼과 이혼의 경험이 담긴 곡들(“Blonde on Blonde”, “Planet Waves”)을 떠올리게 한다.
잭/존 JACK/JOHN _크리스찬 베일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잭은 스스로 쓴 곡과 독특한 퍼포먼스로 자신의 시대를 노래하며 성공에 이른다. 잭은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등으로 60년대 초 전성기를 맞았던 포크음악가수 딜런을 표상한다. 역시 크리스찬 베일이 선보이는 캐릭터인 존 목사는 10년 후의 잭으로, 목사가 되어 가스펠을 위해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경력을 내팽개친다. 존은 ‘Slow Train Coming’, ‘Shot of Love’ 등을 발표했던 70년대 후반의 밥 딜런을 보여준다.
아서 ARTHUR _벤 위쇼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아르뛰르 랭보의 모습을 한 ‘아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원회의 멤버들로부터 끊임 없이 오해 섞인 질문을 받으며 스스로를 변호하며 영화 속 나레이터 역할을 수행한다.
빌리 BILLY _리처드 기어
빌리는 무법자 빌리 더 키드로서의 밥 딜런의 모습이다. 은거하던 리들마을이 곧 양도된다는 소식은 그의 오랜 적수 팻 가렛와의 재회를 부추기고, 빌리는 스스로 안식을 깨기를 강요 당한다. 밥 딜런은 미국의 전설적 총잡이 ‘빌리 더 키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관계의 종말>에서 자신의 영웅 ‘빌리’를 위해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등 음악 전부를 맡으며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우디 WOODY _마커스 칼 프랭클린
젊은 시절 딜런의 음악적 스승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던 우디 거스리를 만난다. 11살 밖에 되지 않은 조숙한 떠돌이 흑인 소년 우디는 고도의 순진함을 갖춘 서부지역의 전형적인 음유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서커스 등의 일화는 밥 딜런의 것. 테크닉에 앞서 음의 자유를 먼저 터득한 뮤지션 밥 딜런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 작품 해설 === <영화평론가 남다은 글>
세계영화작품사전 : 예술과 예술가를 다룬 영화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아임 낫 데어>는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의 전기영화다. 독창적이고 과감한 퀴어 시네마 감독이자, 〈벨벳 골드마인〉으로 이미 음악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했던 토드 헤인즈의 작품이다. 그는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는 밥 딜런이 아니라, 밥 딜런이라는 예술가의 다층적인 결을 여러 인물을 교차시키며 직조해낸다. 이들 중 밥 딜런과 외적으로 가장 흡사한 주드를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교묘하게 오가는 명연기로 주목받았다.
여섯명의 인물이 있다. 기타를 메고 떠도는 흑인 소년 우디 거스리,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는 랭보, 음악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포크 뮤지션 잭(그는 이후 가스펠 가수로 변모해서 존으로 불린다), 잭을 다룬 영화에서 잭 역할을 맡은 배우 로비,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이미지를 버리고 대중의 기대에 반하는 행동을 거듭하는 뮤지션 주드, 그리고 서부 사나이 빌리. 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중첩되고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며 혼돈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와 신화 안에서 밥 딜런이라는 전설적인 뮤지션의 초상이 펼쳐진다.
작품해설
1. 과감하고 독창적인 형식, 토드 헤인즈 감독
196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토드 헤인즈는 브라운대학에서 예술과 기호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 랭보에게 영감을 얻은 영화 〈암살자들 : 랭보에 대한 영화〉(1985)를 만들었고 졸업 뒤 뉴욕으로 건너가 〈슈퍼스타 : 카렌 카펜터 이야기〉(1987)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거식증으로 죽음에 이른 뮤지션 카펜터의 이야기를 배우가 아닌 인형으로 형상화했다. 이 독창적인 영화로 토드 헤인즈는 영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대학 동료와 독립영화사를 설립한다.
1991년에는 전작보다 훨씬 논쟁적인 장편 데뷔작 〈포이즌〉(1991)을 선보였다. 부친살해, 동성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공포, 실험 장르의 틀 안에서 혼종적으로 엮어낸 이 영화는 당대 미국 우익들에 포르노그래피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토드 헤인즈는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과감하고 독창적인 형식으로 이성애 중심적인 문화를 도발하는 그의 작품세계는 〈세이프〉(1995)에서 보다 폭넓어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신경발작, 강박증에 사로잡히게 된 한 가정주부를 통해 현대 서구 사회, 특히 미국의 이성애 중심적인 중산층 가정의 병적인 이면을 보여준다.
3년 뒤, 그는 〈아임 낫 데어〉의 거침없는 상상력을 예견하는 한편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음악영화를 내놓는다. 화려한 글램록 시대를 배경으로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어느 록스타의 상승과 몰락을 형상화한 〈벨벳 골드마인〉은 영화 그 자체로 이미 글램록적인 스타일을 체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2002년에는 〈세이프〉에서 신경쇠약에 걸린 주부로 열연한 줄리언 무어를 주인공으로 〈파 프롬 헤븐〉을 발표했다. 1955년 더글러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의 분위기와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은 이 멜로영화는 동성애뿐만 아니라 인종간의 사랑을 그리며 사회적 편견과 제도의 모순에 대면한다. 이 작품으로 토드 헤인즈는 시대적 공기와 문화적 양식을 자신만의 영화적 리듬과 스타일로 조화시키고 변주하는 능력을 인정받았다.
〈아임 낫 데어〉(2007)는 토드 헤인즈가 전작들에서 보여준 영화적 스타일과 이야기 직조의 재능이 집대성된 작품이다. ‘밥 딜런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밥 딜런을 어떻게 기억 혹은 상상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자유롭게 풀어헤친 뒤, 그 기억과 상상을 엮어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뮤지션의 역동적인 초상을 완성해냈다.
2011년에는 마이클 커티스의 필름누아르인 〈밀드레드 피어스〉(1955)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를 선보였다. 케이트 윈슬럿은 이 드라마에서의 열연으로 에미상, 골든글로브 시상식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줄리언 무어, 케이트 블란쳇에 이어 케이트 윈슬럿까지, 이 정도면 토드 헤인즈를 여배우들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감독으로 인정할 만하다. 이외에도 토드 헤인즈는 미국의 주목받는 여성감독인 켈리 리처드의 〈올드 조이〉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 기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2. 영화의 주제와 기법
밥 딜런 개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냈던 미국의 지난 역사는 하나의 의미로 규정될 수 없는 저항과 배신, 집단적 운동과 개인주의, 무기력과 체념 등으로 점철된 혼돈의 시간이다. 더욱이 밥 딜런은 미국의 전설적인 저항시인으로 호명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대중의 기대를 벗어나는 선택들을 감행해온 뮤지션이다.
밥 딜런조차 미리 알 수 없었을 그 행보의 자유로움과 불확정성을 영화화하기 위해 토드 헤인즈는 색다른 선택을 시도한다. 밥 딜런의 사실을 추적해서 연대기를 만드는 대신, 밥 딜런에 대한 우리의 기대, 상상, 의심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토드 헤인즈는 그런 방식이야말로 밥 딜런이라는 예술가에게 가장 근접하게 다가가는 길이며, 무엇보다 밥 딜런이라는 개별 인간을 넘어서 그로 상징되는 시대, 문화, 예술을 그려볼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영화는 밥 딜런을 실체화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대중과 매스컴이 만들어낸 밥 딜런의 실체를 해체하는 데 몰두한다. 현실의 시대적 배경과 양식적인 장르를 혼용하고, 과거와 현재, 현실의 인물과 신화적 인물을 교차시킨다. 그 위를 관통하는 밥 딜런의 다양한 음악은 그의 세계를 하나의 틀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7명의 캐릭터들의 총합이 밥 딜런이라는 완전체를 구현한다고 보는 건 적절하지 않다. 그 인물들은 각각이 밥 딜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면서, ‘밥 딜런’이라는 세계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아임 낫 데어〉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끝내 몰라야 한다고 믿는 예술가의 내적 세계를 일관된 서사로 규정하는 대신, 영화적 생기로 숨 쉬게 하는 작품이다.
3. 참고할 만한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2005, 마틴 스코시즈) : 〈아임 낫 데어〉에 차용된 밥 딜런의 인상적인 순간들이 흥미진진하게 담겨 있다. 한편의 음악다큐멘터리로서만이 아니라, 스코시즈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주목할 만한 역작. 세 시간 반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1960년대 미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대중음악의 흐름을 역동적으로 넘나든다. 밥 딜런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1966년 7월까지를 다룬다.
〈돌아보지 마라〉(1967, D. A. 페네베이커) : 1965년 밥 딜런의 영국 투어 동행기
〈이트 더 다큐먼트〉(1972, 밥 딜런) : 원래 이 다큐멘터리는 페네베이커가 1966년 밥 딜런의 유러피안 투어에 다시 동행해서 찍은 영화였다. 그러나 촬영기간 중 밥 딜런은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고, 회복한 뒤 그 다큐를 직접 재편집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일반적인 공연 실황과는 거리가 먼, 비일관된 파편들로 구성된 정체불명의 기이한 영화가 되었다. 마치 밥 딜런이 ‘밥 딜런’이라는 신화를 가차 없이 해체해버리려는 시도처럼.
주요 등장인물
우디 거스리(마커스 칼 프랭클린) : 열한살가량의 흑인 소년이 낡은 기타를 메고 기차에 뛰어오른다. 짐칸에 이미 올라가 있던 두 노인에게 스스로를 소개하는 소년의 모습은 조로한 아이 같다. “세상살이에는 성경보다 노래가 도움이 돼요”라고 으스대는 소년의 기타 케이스에는 “이 기계가 파시스트를 죽일 것이다”라고 써 있다. 명석하고 재능 있는 이 소년은 여러 곳을 떠돌며 노래를 하고 자신의 음악관을 설파한다. 그러는 동안 과거의 전설적인 뮤지션들을 흉내내는 소년에게 누군가 “너의 시대를 살아라, 너의 시대를 노래하렴”이라고 충고하기도 하고, 소년원을 탈출한 소년의 과거가 밝혀지기도 한다.
실제로 우디 거스리는 1967년 세상을 떠난 포크 음악의 싱어송라이터로 밥 딜런의 젊은 시절 우상이었다. 우디 거스리가 죽기 전,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을 당시 밥 딜런이 그를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다. 토드 헤인즈는 실존 인물 우디 거스리와 밥 딜런, 흑인 소년을 뒤섞어 이들 셋을 아우르는 인물을 창조한 것이다.
아르튀르 랭보(벤 위쇼) : 흑백 화면 속에서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듯, 시적이고 다소 현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화면을 응시하며 말하는 이 인물은 랭보를 의식하는 캐릭터이며, 토드 헤인즈는 기자회견장에서의 밥 딜런의 모습을 참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 토드 헤인즈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밥 딜런의 곡인 〈아임 낫 데어〉에서 랭보가 쓴 “나는 타자다”라는 시구를 떠올렸다고 한다.
잭(크리스찬 베일) : 밥 딜런의 초창기 행보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잭은 미국 사회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시기에 대중이 원하는 시대의 저항으로서의 아이콘이다. 잭의 이야기에는 그와 함께 공연을 한 적이 있고, 그와 가까웠던 여자 가수가 등장해서 그를 회상한다. 실제 포크 가수 조앤 바에즈를 모델로 한 이 가수 역에 토드 헤인즈는 다시 줄리언 무어를 기용한다.
존(크리스찬 베일) : 대중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잭이 어느 날 사라져버리고, 영화에서 그는 20여년 뒤 목사 존으로 돌아온 것으로 설정된다. 크리스천 베일이 잭과 존 역을 모두 맡아 연기한다. 실제로 밥 딜런의 앨범은 80년대 초 유대교와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둔 적이 있다.
로비(히스 레저) : 영화 속 다른 캐릭터들이 어떤 식으로든 뮤지션으로서 밥 딜런의 행보와 연관된다면, 로비는 토드 헤인즈의 상상력이 보다 가미된 캐릭터다. 로비는 포크 가수 잭을 영화화 한 ‘영화 속 영화’에서 잭 역을 맡은 배우다. 로비의 이야기에서는 그의 가정사가 중심이 되는데, 샬롯 갱스부르가 그와 격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결국 이혼을 하는 화가 클레어 역을 맡았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베트남전쟁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고, 전쟁의 종결과 함께 끝난다.
주드(케이트 블란쳇) : 〈아임 낫 데어〉에서 가장 이슈가 됐던 배우는 단연 케이트 블란쳇이다. 그녀는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를 교묘하게 오가는 연기로, 외형적으로 밥 딜런에 가장 근접한 인물인 주드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주드는 1965년 이후의 밥 딜런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오토바이 사고와 몇년간의 공백, 포크가 아닌 전자음으로 관객에게 야유를 받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현장, 자신을 변절한 뮤지션으로 규정하는 언론과의 냉소적인 대화, 앨런 긴즈버그와의 친분이 포함된 시기다. 대중과 매스컴의 기대, 편견을 철저히 조롱하면서도,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에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는 예술가의 이중적 초상이 케이트 블란쳇의 섬세한 연기로 활기를 띤다.
빌리(리처드 기어) : 이 영화에서 캐릭터나 시대적인 면모가 가장 의아한 인물이다. 추정하자면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에서 밥 딜런은 주인공 빌리 더 키드를 추종하는 앨리아스로 출연했는데, 〈아임 낫 데어〉의 서부 사나이 빌리는 아마도 〈관계의 종말〉의 그 ‘빌리’에게서 영감을 얻은 인물일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임 낫 데어〉의 여러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신비로운 내레이션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관계의 종말〉에서 빌리를 연기했다.
명장면 명대사
이 세상에 노래를 듣고 자신을 변화시킬 사람은 없어요. 필 옥스의 노래가 운동을 지속하게 하거나 피켓시위를 계속하게 하지는 못하죠. 그 노래들도 개인적 양심의 표현일 따름이에요. 징집영장을 태우거나 분신을 하는 것과 같죠. 그저 자기 자신과 청중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일 뿐. 나는 그런 것들과 분리되길 원하지 않아요.
- 주드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주드에게 그의 정치성과 그의 변화와 그의 음악적 정체성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원하자, 그 무엇에도 얽매이기 싫다는 듯 냉소적으로 내뱉는 말.
인간은 모두 자유를 원한다. 자기 방식으로 사는 자유. 그런데 어떤 방식에 맞춰 산다면 자유는 그만큼 줄어든다. 나는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잠에서 깰 때의 나와 자러 갈 때의 내가 다르고 마치 한 공간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내가 있는 것 같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 내레이터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내레이션. 밥 딜런이 자신을 틀 지으려는 대중과 매스컴을 향해 하는 말이자,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관련 정보
수상
• 2007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토드 헤인즈), 여우주연상(케이트 블란쳇)
• 2007년 시카고비평가협회상 여우조연상(케이트 블란쳇)
• 2008년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케이트 블란쳇)
• 2008년 전미비평가협회상 여우조연상(케이트 블란쳇)
음악
밥 딜런의 특정 시기를 연상시키는 인물들의 이야기 위로 그 시기 밥 딜런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흐른다. 이 영화 속 밥 딜런의 명곡들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부각시키고 시대적 공기를 전달해주며, 무엇보다 인물들 사이의 경계를 유려한 리듬으로 이어준다. 그리고 고정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밥 딜런이라는 세계를 풍요롭게 경험하게 해준다.
〈I'm not There〉(밥 딜런) : 이 영화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밥 딜런의 노래가 나온다. 밥 딜런 스스로가 부른 대표곡들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덜 알려진 노래도 있다. 이중에는 미발표곡도 있다. 밥 딜런은 1967년 자신의 백 밴드인 ‘The Band’와 함께 지하 스튜디오에서 엄청나게 많은 노래를 녹음했다. 애초부터 앨범 발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정식 녹음장비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 당시 녹음됐던 음악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75년 The Band의 로비 로버트슨이 이때 녹음한 음악 중 일부를 모아 〈〈Basement Tape〉〉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 뒤로도 당시 녹음한 음악은 계속 음반으로 만들어졌는데, 〈I’m not There〉는 지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결국 밥 딜런의 〈I’m not There〉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다. 한 여성이 남자를 떠나보내며 겪는 감정을 그리는 이 노래는 배우 로비가 클레어에게서 떠나는 장면에 흘러나온다.
〈Stuck inside of Mobile with the Memphis Blues Again〉(밥 딜런) : 영화 시작 부분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경쾌한 노래다.
〈Tombstone Blues〉(리치 헤이븐스, 마커스 칼 프랭클린) : 기차를 타고 이리저리 떠돌던 우디가 두명의 흑인과 함께 부르는 노래.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밥 딜런의 생각이 잘 담겨있다. 우디와 함께 노래하는 흑인 중 수염 난 이는 유명한 가수 리치 헤이븐스다. 우드스톡 공연에서 획기적인 무대를 보여준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처음 만난 우디에게서 심상치 않은 음악적 재능을 느낀다.
〈When the Ship Comes in〉(마커스 칼 프랭클린) : 우디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부인의 집에서 답례 삼아 부르는 노래다. 마커스 칼 프랭클린은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 유일하게 직접 노래를 불렀다. 촬영 당시 11살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밥 딜런에 빙의된 듯 노래해 토드 헤인즈 감독을 감동시켰다. 당시 프랭클린은 밥 딜런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그의 음악을 들으며 밥 딜런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Maggie’s Farm〉(스티븐 말크머스, 밀리언 달러 배셔스) : 잭이 관객의 야유 속에서 전기기타를 메고 부르는 노래다. 이 장면은 밥 딜런이 1965년 6월21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통기타 대신 전기기타를 메고 연주해 파란을 일으켰던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당시 포크음악과 밥 딜런의 팬들은 전기기타가 서정성과 저항성을 가로막는 음악적 도구로 판단했다. 이들은 밥 딜런이 ‘변절’했다면서 심한 야유를 퍼부었다.
〈Ballad of a Thin Man〉(스티븐 말크머스, 밀리언 달러 배셔스) : 전기기타 사건 이후 한 기자가 잭에게 접근해 집요하게 취재를 하는데, 이 노래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 흘러나온다. 실제로 이 노래는 밥 딜런이 한 기자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노래다.
〈Goin’ to Acapulco〉(짐 제임스, 칼렉시코) : 빌리는 괴이한 마을을 유랑하던 도중 축제 무대 위에서 한 밴드가 부르는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때 이 밴드가 연주하는 노래가 이것이다. 밥 딜런의 노래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이지만, 이 장면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어울린다고 판단한 토드 헤인즈의 선택으로 삽입됐다. 빌리가 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장면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구성됐다.
〈Pressing On〉(존 도우) : 기독교에 귀의해 다시 태어난 존이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다. 밥 딜런은 실제로 1979년 가스펠 음악을 담은 〈〈Slow Train Coming〉〉을 발표했다. 그는 이즈음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그의 팬들에게는 전기기타를 들었을 때만큼의 충격을 줬다.
연관 영화
〈라스트 데이즈〉(2005, 구스 반 산트) :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순간. 구스 반 산트의 죽음의 3부작 중 한편.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2005, 마틴 스코시즈) : 밥 딜런과 미국 사회, 나아가 당대 대중음악의 흐름에 대한 마틴 스코시즈의 다큐멘터리.
〈벨벳 골드마인〉(1998, 토드 헤인즈) : 영국 글램록 스타의 화려한 비상과 추락. 토드 헤인즈의 또 다른 음악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세계영화작품사전 : 예술과 예술가를 다룬 영화,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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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1997/10 음악평론가 임진모 글>
밥 딜런 Bob Dyl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까지도 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Rubber Soul>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Another side of Bob Dylan>, <Bring it all black home>, <Highway 61 revisited>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 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 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Blonde On Blonde>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Blood On The Tracks>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 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자유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John wesley Harding>과 <Nashiville Skyline>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Nashiville Skyline>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Basement Tapes>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Self Portrait>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Highway 61 Revisited>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Self Portrait>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Show Train Coming>, <Saved>, <Shot Of Love>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Infidels>, <Empire Burlesque> 그리고 1989년에 나온 <Oh Mercy>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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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0 임진모(jjinmoo@izm.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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