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점] 흰옷(1)
1월도 지나고 어느새 3월에 접어들었다. 날짜로 보면 봄이 왔는데도 영하 20도가 넘는 날도 있었다.
“3월 3일의 히나마쓰리(3월 3일 소녀들의 명절에 열리는 축제. 제단에 기모노를 입힌 인형들을 진열하고 떡, 감주, 복숭아꽃 등을 차려 놓음)에 말이에요.”
학교에서 돌아온 요코가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나쓰에에게 말했다.
“그래.”
나쓰에는 경대 앞에서 얼굴을 다듬고 있었다.
“저 학예회에 나가게 됐어요.”
“그래?”
나쓰에는 무관심하게 대답하고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게이조는 어젯밤에 무라이가 4월부터 다시 쓰지구치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나쓰에에게 말했다. 게이조는 사무장을 만나 안과를 다시 개설하고 무라이를 복직시키는 데 따른 절차를 의논했다. 사무장은 뜻밖에도 신이 나서,
“그래요? 무라이 선생이 돌아오는 겁니까?”
하고 좋아했다. 사무장은 무라이가 올린 과거의 실적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라이가 폐결핵에 걸렸을 무렵에는 안과는 외래 환자와 입원 환자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쓰지구치 병원은 내과, 외과, 이빈인후과만으로도 충분히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지경이었다. 구태여 무라이의 복직을 위해 다시 안과를 개설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그 때문에 병실을 안과에 분배해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안과 일을 볼 수 있는 간호사도 없었다.
“이제 새삼스럽게 안과를 개설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고 일부에서는 반대하기도 했다. 무라이를 알고 있는 의사는 외과의 마쓰다뿐이었다. 대부분의 간호사들도 무라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과 의사들은 안과를 개설하는 것을 찬성했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바제도씨병 등의 환자에게는 안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병원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다소 경제적인 부담이 되더라도 안과를 갖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게이조도 내과 의사 입장에서는 안과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무라이여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게이조는 학창 시절부터 다카기에게 좋은 친구가 될 것을 다짐해왔다. 다카기처럼 게이조를 치켜세워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이조는 한 사람의 당당한 병원장이 된 지금도 다카기에게 언짢은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쓰에와 무라이의 일을 어쩌면 다카기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무라이의 복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다시 무라이와 나쓰에가 가까워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7년 반이라는 세월이 게이조의 불안한 마음을 많이 덜어주었다.
“엄마, 저 말이에요, 학예회에서 흰옷을 입고 춤을 출 거예요.”
요코는 열심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쓰에의 모습을 이상한 듯 바라보면서 말했다.
“흰옷?”
나쓰에는 앵무새처럼 되받아 말할 뿐이었다.
‘무라이 씨가 돌아왔을 때 7년 전과 조금도 달라져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7년 전보다 더욱 젊고 아름답게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쓰에는 손거울을 들어 얼굴에 바싹 갖다댔다. 코밑에 희미한 주름살 하나가 옆으로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나쓰에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보았다.
“엄마.”
“…………”
나쓰에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토닥거렸다. 피부가 부드럽긴 하지만 탄력이 없는 것 같았다.
요코는 자기 얘기를 건성으로 듣는 것 같은 나쓰에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흰옷을 만들어 주실 거죠?”
“흰옷?”
나쓰에는 다시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코밑의 희미한 주름살이 마음에 걸렸다.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요코에 대한 나쓰에의 마음은 이제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전에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요코의 구김살 없는 밝은 성격에 대해서조차,
‘야단을 맞아도 울지 않는다. 개구리 낯짝에 뭐라고 하더니.’
하고 생각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도오루가 신경질적으로 게이조와 나쓰에의 표정을 살피고 있어서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전에는 생선 토막 같은 것도 요코에게 제일 큰 것을 주었으나 지금은 어느새 제일 작은 것으로 주고 있엇다. 도오루나 게이조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요코에 대한 나쓰에의 태도는 변해 있었다.
전에는 요코가 부르면 만사를 제쳐놓고 먼저 요코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은 건성으로 듣고는 한쪽 귀로 흘려 버렸다. 요코를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요코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코가 루리코를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쓰지구치 집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생각이 곧잘 드는 것이었다.
“엄마, 3월 3일까지예요.”
“3월 3일? 뭐가?”
나쓰에는 아사히가와로 돌아오는 무라이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남편은 나를 배신했다. 이번엔 나도 남편을 철저히 배신해 주리라.’
나쓰에는 게이조를 괴롭히려면 무라이와 가까워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요코를 길러 왔어.’
이렇게 생각하고 나쓰에는 요코를 돌아보았다.
요코가 방긋 웃었다.
“만들어 줘요. 네, 엄마.”
“뭘 말이냐?”
“아이, 흰옷 말이에요.”
“뭣하게?”
요코는 나쓰에가 자기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히나마쓰리 학예회에 나가게 됐어요. 흰옷을 입고 춤을 추는 거예요.”
“학예회에서 춤을 춘다고?”
나쓰에는 비로소 요코를 향해 돌아앉앗다.
“그래요, 흰옷을 입고 말이에요.”
“똑같이 맞춰 입는 거니?”
“맞출 수 없는 사람은 입지 않아도 된다고 선생님이 그랬어요.”
“그래? 맞출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 몇 명이서 추는 거야?”
“이시하라 스미하고 노구치 쵸 그리고…….”
요코는 이렇게 말하고 그 다음 아이들을 생각해 내려는 듯이 고개를 숙이더니,
“모두 여섯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래?”
나쓰에는 또다시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썹 근처를 가볍게 마사지했다.
“만들어 주시는 거죠, 엄마?”
“………”
‘학예회에 흰옷을 입고 가는 것은 요코가 아니라 죽은 루리코라야 해.’
나쓰에는 요코에게 흰옷을 만들어 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3월 3일에 입는 거지?”
“네.”
요코는 기쁜 듯이 거울 속에 비친 나쓰에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희기만 하면 어떤 옷이라도 되니?”
“흰 스웨터하고 흰 스커트, 그리고 흰 양말이에요.”
“흰 스웨터와 흰 스커트, 흰 양말이라고? 알았어.”
나쓰에는 양쪽 옷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올리고 로션을 듬뿍 발랐다. 푸른 기가 도는 흰 살결이 손바닥으로 빨려든 것 같았다. 나쓰에는 만족스러운 듯이 양팔을 가볍게 쥐어 보았다.
“엄마, 학예회에 올 거죠?”
“글쎄.”
나쓰에는 이번엔 목덜미를 콜드크림으로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요코는 말없이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다는 것을 요코는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게 되면 가지. 밖에 나가 놀아. 엄마는 바쁘니까.”
나쓰에는 흰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마사지하며 말했다.
혼자 쓸쓸히 방을 나서는 요코의 뒷모습을 나쓰에는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모두가 남편 잘못이야. 어떤 엄마가 자기 딸을 죽인 사람의 자식을 키울 수 있겠어.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친딸처럼 귀엽게 길러온 그 원통함과 허무함을 대체 누가 알아줄 것인가.’
어느새 거울 속의 자신의 눈이 축축히 젖어 있는 것을 그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배고파요. 엄마, 뭐 먹을 거 없어요?”
도오루가 학교에서 돌아와 소파에 뒹굴면서 나쓰에에게 말했다. 나쓰에는 손수 만든 도넛을 접시에 가득 담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좀 늦었구나.”
“네, 학예회 무대를 만들었어요. 6학년이라고 힘든 일을 시키잖아요.”
“애썼구나.”
“내일 엄마도 구경 오는 거죠?”
“글쎄, 엄마는 바빠서…….”
“하지만 요코가 출연하잖아요? 꼭 구경하러 와야 해요.”
“………”
도오루는 도넛을 손에 들 때마다 일일이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았다.
“요코, 얼마나 잘하는데요.”
“그래?”
“아주 멋져 보였어요. 손뼉을 치는 것도 고개를 돌리는 것도.”
“그래?”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어요. 오늘부터 벌써 흰옷을 맞춰 입고 춤을 추었는데, 딴 옷을 입은 사람은 요코뿐이었어요.”
“………..”
“요코도 내일은 흰옷을 입고 가는 거죠?”
“그럼!”
얼결에 대답한 나쓰에의 표정에서 뭔가 예리하게 캐낸 것처럼 도오루는 도넛을 먹던 손을 멈췄다.
“왜 오늘은 입혀 주지 않았어요?”
“학예회 때 입으면 되잖니?”
“흰옷이 있긴 있어요?”
나쓰에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오늘 만들어 올 거야.”
“오늘?”
도오루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아니, 아직 만들지 않았어요? 어디다 맡겼어요, 엄마?”
하고 물었다.
도오루의 눈이 뭔가 살피는 듯이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아사히 빌의 다케다 씨한테. 오늘 가져올 거야.”
“그래요?”
도오루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손수건으로 얌전히 닦았다.
“걱장 마, 도오루.”
“네.”
도오루는 시무룩해져서 방에서 나갔다.
‘요코 혼자 흰옷을 입지 못하게 되면 도오루가 무척 화를 내겠지.’
하지만 나쓰에는 그럴듯한 구실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다케다 씨가 잘못해서 잊어 먹었다거나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되겠지.’
나쓰에는 도오루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엇다. 그러나 그녀는 이젠 요코가 ‘엄마’라고 부르는 것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일부러 옷을 새로 지어 입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요코가 혼자 다른 옷을 입고 학예회에 나가는 괴로움을 맛보아도 싸다고 나쓰에는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다.
아사히 빌의 다케다 양장점에는 도오루도 몇 번 나쓰에를 따라 가본 적이 있었다. 도오루는 자전거를 타고 요코의 옷을 찾으러 가기 위해 거리를 달렸다. 빠릴 요코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아사히가와 역 앞에 있는 아시히 빌은 쓰지구치 집에서 4킬로쯤 떨어져 있었다. 양장점은 건물 이층에 있었다. 도오루는 계단을 하나씩 건너뛰면서 올라갔다. 손님 서너 명이 와 있었고 여점원이 그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도오루는 갑자기 부끄러워져 진열된 옷감들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색깔의 봄 옷감들이 천장에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때 한 점원이 도오루에게 다가오더니 미소를 지었다. 손님이 데려온 아이인 줄 생각한 모양이었다. 도오루는 굳은 표정으로 여점원에게 물었다.
“저, 쓰지구치인데요. 부탁한 옷은 다 되었어요?”
“쓰지구치? 잠깐 기다려.”
장밋빛 뺨을 한 점원은 상냥하게 말하고 장부를 펼쳤다. 도오루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쓰지구치 씨는 1월부터 옷을 맞추지 않은 것 같은데. 잠깐만, 곧 주인 아주머니께 물어 볼게.”
도오루는 약간 불안해졌다.
‘분명히 아사히 빌의 다케다 씨 가게라고 했는데.’
줄자를 목에 길게 늘어뜨린 여주인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머, 쓰지구치 씨 댁 도련님이구나? 주문한 옷을 찾으러 왔다고?”
“네.”
일본 사람 같지 않은 얼굴을 한 여주인은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생긋 웃었다.
“어떤 옷이지?”
“흰색인데요.”
“흰색이라고? 어머니께서는 올해는 우리 집에 한 번도 들르시지 않았는데.”
하고 여주인은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물어 볼까? 어디 다른 상점일지도 모르니까.”
도오루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잘못 알고 왔어요. 안녕히 계세요.”
뭐라고 말하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도오루는 계단을 뛰어 내려왓다.
‘엄마는 거짓말쟁이야!’
도오루는 자전거에 뛰어오르자 페달을 힘껏 밟았다.
‘엄마는 거짓말쟁이야!’
도오루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페달을 힘껏 밟으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숨어 버려 3월의 저녁 바람은 꽤 쌀쌀했다. 눈 녹은 물이 아스팔트 위에 얇게 얼어붙어 있었다. 평소에 도오루는 신경질적이고 매사에 소심했다. 그런 그가 얼어붙은 아스팔트 길이 얼마나 미끄러지기 쉽고 위험한지 모를 리 없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무작정 자전거를 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코가 가엾어. 내일 뭘 입고 학예회에 나간다지?’
도오루는 자신이 차가 붐비는 거리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엄마가 그럴 줄 몰랐어……’
도오루는 엄마를 생각하자 서글퍼졌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훌륭한 어머니라고 도오루는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었다 .그 어머니가 어째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 따윈 내 엄마가 아냐.’
이때 도오루는 거의 2가의 교차로에 접어들어 있었다.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도오루는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엄마는 어째서 옷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그만한 돈은…….’
손등으로 눈물을 막 씻으려는 찰나였다.
“끽.”
급히 밟는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빨간 신호를 보고 달려오던 트럭이 도오루의 바로 앞에 멎어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자전거는 옆으로 쭈욱 미끄러져 길바닥에 쓰러졌다.
“야, 이 자식아, 신호가 안 보여!”
트럭 운전사는 사람을 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으나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길이 얼어붙어 다행이었다. 도오루는 넘어졌을 뿐 다치지는 않았다. 만일 넘어지지 않고 그대로 트럭에 부딪쳤던들 크게 다쳤을 것이다.
도오루는 아픈 무릎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자전거 핸들이 굽어 못쓰게 되어 있었다 도오루는 비틀거리면서 자전거를 밀고 남의 눈을 피하듯히 보도 쪽으로 들어섰다.
‘벌을 받은 거야!’
걸어가는 동안에 무릎이 점점 아파 왔다.
‘엄마가 요코의 옷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게 문제야! 만일 내가 여기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면 그건 누구 탓이지?’
도오루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었다.
‘요코는 이토오 놈에게 돌로 얻어맞아 어깨가 시커멓게 부어 올랐어도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잠자코 있을 수 없어.’
핸들이 못 쓰게 된 자전거는 무척 무거웠다. 5리쯤 되는 길을 도오루는 엄마를 원망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겨우 집에 닿으니 나쓰에가 밖에 나와서 도오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도오루, 넘어졌니?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도오루는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리를 크게 절룩거렸다.
“어머, 자전거도 망가지고…..다친 데 없나 어디 좀 보자.”
“…………”
“이렇게 어둡도록 밖에 있으면 위험하잖니. 일찍 집으로 돌아와야지.”
“엄마! 저 아사히 빌에 갔다 왔어요.”
도오루는 자전거를 팽개치며 말했다.
“아사히 빌에 갔다 왔다구요.”
라고 하는 도오루의 말이 나쓰에의 귀를 때렸다. 나쓰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날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었다.
나쓰에는 도오루가 팽개친 자전거를 일으키면서 물었다.
“어디 갔다 왔다고?”
“아사히 빌에요.”
“어머, 옷 찾으러 갔다 왔어? 수고했구나.”
“………..”
도오루는 앞서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게이조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도오루는 무릎을 다치고 손에도 몇 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도오루는 나쓰에가 걱정이 되어 묻는 말에도 떨리는 입술을 깨문 채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빠의 귀가 오늘은 휴일인가봐.”
요코가 도오루를 위로하듯이 말해도 도오루는 무뚝뚝한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도오루, 그렇게 다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나쓰에는 도오루가 화난 이유를 모르는 체하고 말했다.
“다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도오루는 반항적인 어조로 말했다.
“뭣 때문에 화가 났니, 응, 도오루? 아사히 빌에 가서 옷은 어떡했어? 찾아오지 않았잖아?”
“찾아 왔을 리가 없잖아요.”
“어머, 왜?”
“엄마는 거짓말쟁이!”
도오루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된 거야, 도오루? 엄마보고 거짓말쟁이라니…..”
나쓰에는 부드럽게 말했다.
“다케다 양장점에 요코의 옷을 부탁하지 않았잖아요?”
“뭐야! 다케다 씨가 그렇게 말하던?”
나쓰에는 정말 놀란 듯이 말했다.
“엄마는 올해는 한 번도 다케다 양장점에 오지 않았다고 아줌마가 그러던데요, 뭐.”
나쓰에의 태도에 도오루는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 엄마는 그 키 큰 점원에게 부탁했어. 주인 아줌마가 그때 양장점에 나오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래……”
지금 도오루를 화나게 해서는 큰일이다 싶어 나쓰에는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키 큰 점원?”
“왜, 네 외투를 맞출 때 치수를 쟀었잖니?”
“아, 그 사람? 보이지 않던데. 하지만 장부에도 적혀 있지 않던걸요?”
도오루는 더 이상 엄마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이거 야단났구나. 그 점원이 잊어버렸나 봐. 요코, 어떡하면 좋아? 내일 흰옷을 입고 갈 수 없을 것 같구나.”
“흰옷, 아직 안 됐어요?”
요코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렇다는데 야단났구나.”
나쓰에는 요코가 학예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요코 혼자만 다른 색 옷을 입는다는 건 창피한 일이야. 가엾어서 어쩌지?”
도오루는 민망한 얼굴로 요코를 바라보았다.
“엄마, 그럼 어떤 옷을 입고 가요?”
요코가 고개를 들었다. 결코 나쓰에를 원망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글쎄 말이다.”
‘자기 혼자만 흰옷을 입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저 애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일까?’
요코는 최근 2,3일 동안은 학예회에서 입을 옷이 만들어지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흰옷을 입을 게 아냐? 요코 혼자만 딴 옷을 입게 되면 부끄럽잖아?”
도오루가 힘없이 말했다.
“나 부끄럽지 않아.”
“아니, 부끄럽지 않아? 넌 부끄럽지 않아도 엄마가 부끄러워.”
나쓰에는 요코가 조금도 곤란한 얼굴을 하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어머, 엄마가 부끄러워요?”
“그래, 모두들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요코만 옷이 다르면 엄마는 웃음거리가 될 거야. 어째서 옷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 쓰지구치의 엄마는 구두쇠라고 놀릴지도 몰라.”
“어머, 그럼 어떡하지?”
“돈이 있는데 구두쇠라고 모두들 손가락질을 할 거야.”
도오루는 요코가 옷에 대해 투정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여 농담을 했다.
“요코도 부끄럽겠지?”
나쓰에는 어쨌든 요코가 부끄러워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깍쟁이가 아닌 걸요. 전 부끄럽지 않아요.”
“흠.”
도오루는 감탄한 듯이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쓰에는 초조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는 요코도 정작 내일 학예회 때가 되면 기가 죽을 거야. 아니면 아직 1학년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까?’
하고 생각했다.
“저 배고파요.”
옷 따위는 잊어버린 듯이 말하는 요코가 나쓰에에게는 몹시 얄밉게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