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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의 신앙 생활(1)-초대 교회 예배의 네 가지 핵심 요소-
사도행전 2:42~47
요절:“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4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베드로의 첫 설교가 선포되고 그 날 삼천 명의 세례 신자가 세워짐으로써 형성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여섯 절에 걸쳐 요약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 충만한 교회가 어떠한 모습인가를 비춰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지상 교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가늠해주는 잣대와 같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장차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터인데 어떠한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인가를 짐작해보는 본보기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42절 말씀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 예배의 중점적인 네 가지 요소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는 교회였습니다.
41절과 42절 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를 늘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삼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듣고 보고 배우고 함께 지냈던 예수님에 대하여,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이 받는 지극히 복된 구원의 풍성함에 대하여, 성령의 깨닫게 해주심을 따라 모인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천 명의 세례 신자들은 사도들이 가르쳐주는 말씀을 진심으로 열렬히 듣고 그 말씀을 믿고 받아서 자기 삶 속에서 순종하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참된 생명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듣고 배우고 지키기를 힘쓰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의 특징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교회 강단에 불러 세우신 주의 말씀의 사자의 가르침을 항상 듣고 그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것이 주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이 가장 설레고 기쁜 모습이 성령 충만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시편 119편 기자는 고백하기를,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주의 말씀)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편 119:36)
라고 하였으며,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은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시 119:96)
이라고 하였으며,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3,34)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강단에서 가르치며, 그 가르침 듣기를 무엇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 모이기를 힘쓰며,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차분히 읽고 묵상하기를 그 무엇보다 즐거워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가장 복된 자세입니다. 만약 그 반대로 성도가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을 싫증을 내고 말씀 앞에서 마음이 무감각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는 가장 큰 영적 위기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힘썼던 것처럼, 평생에 주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실천하고자 애쓰는 교회와 성도가 됩시다.
둘째로, 성도 간의 교제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42절 중반에 ‘서로 교제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초대 교회 성도들은 동일한 한 주 그리스도를 믿고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한 영 성령을 모시고 동일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하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도 더 끈끈하고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사랑과 우애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에 그를 믿지 않던 갈릴리 나사렛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육신의 형제들이 찾아온 중에, 마침 말씀을 듣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여쭈기를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길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같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 공동체를 자기의 육신의 부모, 형제, 자매의 가족 공동체보다 더 끈끈하고 더 깊은 유대를 가진 참 가족으로 생각하게 되는 변화는 참 기이한 경험입니다. 가족보다 친구보다도 더 만나서 즐겁고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신앙의 간증을 나누는 성도 간에 행복한 교제 관계를 갖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놀라운 은총입니다.
이는 마치 사울의 큰 아들 황태자 요나단이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쳐서 물리친 다윗을 보고서 갖게 된 기이한 사랑과 같습니다. 황태자와 무명의 시골 목동 간의 엄청난 신분 차이를 뛰어넘고 나이 사십 살과 나이 15살 정도밖에 안되는 홍안 소년 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신비한 우정과 사랑은 성령께서 그 두 사람 사이에 부어주신 거룩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상황과 형편이 바뀐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 간의 신뢰와 우정과 존경, 바울과 디모데 간에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함없는 스승과 제자 간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랑은 하늘에서 부어주신 성령의 교제의 은총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다 해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르고 대단한 권력을 쥐고 세상을 흔든다 해도, 아무리 대단한 재주로 세상을 매혹하여 따르게 한다 해도, 아무리 세상의 사람들의 육신적인 사랑과 즐거움을 누린다 해도, 주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이 사랑의 교제의 은총, 성령 안에서의 신자의 교제의 은총처럼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의 은총이 있다면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 사이의 모든 교제가 불완전하고 힘이 드는 때가 종종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며 교제의 은총을 나누게 하심으로써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서로 기도해줌으로써 세상을 너끈히 살아갈 맛을 느끼며 힘을 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도 한 때 혼자 광야로 나가서 홀로 기도하며 묵상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한 신앙심 깊은 분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그분은 이렇게 조언해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혼자만의 종교는 전혀 모르십니다. 당신은 친구를 발견하거나 새로 사귀거나 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혼자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교제의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중에 같은 성도들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천국에 같이 걷다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6:16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2:9 말씀에서도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모든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도 즐거워하고 혹은 가족들과 교제도 즐거워해야 하겠지만, 그 모든 교제보다 믿음의 성도들 간에, 특히 부르심받은 이 함께가는교회 공동체 속에서의 친밀한 교제를 즐거워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만남과 각종 예배와 성도들 간의 교제 속에서 큰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며 더 자주 모여 교제 나누기를 즐기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떡을 떼는 공동체였습니다.
46절 중반절에 “떡을 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성찬을 의미하고 성찬 전이나 후에 행하였던 사랑의 식탁 교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노예 성도들과 자유민 성도들, 가난한 성도들과 부자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사도들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성찬 예식을 신실하게 거행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거의 주일마다 이 성찬 예식을 거행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그들은 주일 저녁 예배 때에 성찬 예식 후에 식탁 교제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의 대속의 살과 피가 우리 구원을 위하여 드려진 값비싼 희생임을 인정하면서, 그가 주시는 구원의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영원히 기념하는 성찬과 애찬식에 참여함을 통하여 우리 구주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주님의 성찬 곧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영혼을 죄와 저주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불에서 건져내주신 완전한 희생 제물이라는 점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흘린 피만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임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애는 그리스도의 흘린 피와 찢기신 살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그 거룩한 사랑에 의하여 용기를 얻습니다.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모든 살아가는 나날에 교회 공동체에 나와 말씀을 통하여 그의 살과 피에 대한 은혜를 다시금 환기하면서 때에 따라 베풀어지는 성찬식에 함께 참여하여 그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며, 그가 베풀어주시는 완전한 사랑을 기억하고 성도의 사랑 안에서 힘을 얻어서 세상을 향하여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 너끈히 이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기도하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42절 하반절에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은 뜨거운 기도의 열기 가운데 일어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십일을 기도에 전무하였더니 마침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에서 성령이 바람과 불과 함께 임하여 각 성도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 성령은 기도의 영이십니다. 스가랴서 12:10 말씀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라는 말의 ‘심령’은 성령으로 번역해도 되는 말씀입니다. 즉 ‘은혜를 사모하며 자기 죄의 용서를 간청하게 하는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고한 약속의 말씀으로서, 성령께서 우리 심령 안에 부어질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사죄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매달리게 하는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고한 것입니다. 그 결과 성령의 강림 후에 초대 교회는 더더욱 열렬하게 기도 생활에 힘썼으니, 이는 성령이 기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도의 삶에는 활발한 기도 생활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 생활의 열매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뒤따르며, 거룩한 성화의 열매가 맺어지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뜨거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또 혼자 있을 때도 해야 하지만, 함께 기도할 때 더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도회에 자주 나와서 기도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할 때에 성령이 도와주시고 은혜 주실 때 우리 기도는 열렬해지고 불이 붙고 우리 기도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속에 기도의 불이 약해지고 열기가 식어지고 있음을 느낄 때에 우리 스스로 기도의 결의를 다지고 기도에 시간을 들이는 우리 쪽에서의 결단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기도를 게을리하던 자기 제자들에게 명령이자 부탁의 말을 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편지를 통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거듭 거듭 부탁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라”(에베소서 6:18~19)
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 속에서 이르기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고 명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들은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행해왔던 기도 생활보다 더 많이 더 자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이 노예 해방 문제로 남북간의 전쟁이 터졌을 때에 각료들과 회의하는 시간보다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더 오래 더 많이 드리곤 하여 각료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링컨은 대답하기를
“만약 내가 나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능력 많으신 분의 도움이 없이도 산적한 이 나라의 문제들을 처리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능력 있는 삶을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저의 목회 기간을 돌아보면, 어떤 기간에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하여 제 기도 생활이 남다르게 뜨거워지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교회나 제 삶에 어려운 일이 생길지라도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인데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뜻이 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겠지” 하고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서 더욱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영낙없이 그러한 문제들이 가라앉게 되고 더 좋은 결과를 맺게 되고 가장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기도를 젖혀놓고 다른 방도를 많이 힘쓴다 해도 오히려 전혀 해결이 안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시간이 부족하여도 기도 시간을 더 많이 늘리면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일하십시오. 바쁠수록 더 기도하라는 종교 개혁자 루터의 조언을 우리는 기억합시다. 기도의 모은 손과 꿇은 무릎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위대한 지혜와 가장 위대한 능력의 손길이 개입하여 일하게 하는 최고의 길임을 기억하고 더욱 기도에 힘쓰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예루 살렘 초대 교회의 예배에는 네 가지 중점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이 있었고 성도의 끈끈한 형제애, 가족애가 있었고, 주님의 살과 피의 희생의 고귀한 가치를 알고 그 십자가 은혜에 감격하였으며, 성령의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주님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하여, 죽어가는 세상을 품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또한 삶의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지혜의 손이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뜨겁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 결과 초대 교회는 세상을 바꾸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 작은 교회가 온 세상을 살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교회를 시작으로 하여 온 세상에 수많은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영혼들이 교회들을 통하여 살아나고 구원받고 생명의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함께가는교회와 우리 성도님들을 통하여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불이 우리 교회와 우리 각 성도님들 모두에게 임하여 우리 심령이 살아나고 새로워지고 뜨거워져서 주님과 교회를 자원하여 섬기며 영혼들을 살리며 우리의 삶에 주님의 은혜롭고 그 능력 있는 손길이 역사하여서 영광이 주님께 온전히 돌려지는 간증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