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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곡선사 행장
스님께서는 임자년 정월 18일에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의 불심이 매우 깊은 가정에서 탄생하셨으니, 아버지는 김원목이고 어머니는 김적정행이시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절에 가기를 좋아하셨다. 16세에 이미 승려가 된 둘째 형의 옷을 전하기 위해 천성산 내원사로 찾아갔다가, 산천경개의 빼어남이 완연히 전생에 머물렀던 곳과 같음을 느끼고 환희하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머리를 깍고 출가하여 조성월 선사를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법명은 혜림이라 하였다. 그 뒤에 전국의 여러 서원을 다니며 도를 묻고 참선을 하다가, 23세에 범어사 원효암에서 운봉대화상을 친견하고 서로의 뜻이 통함은 기이한 인연으로 여겨 십 년을 하루같이 스님을 시봉하였다. 하루는 운봉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목침을 목침이라 하지 말고 일러 보라" 스님이 바로 일어나 목침을 발로 차 버리자, 운봉화상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만두고, 다시 일러라." "천 마디 만 마디의 말이 모두 꿈 속에서 설함입니다." 이에 운봉화상께서 '법자향곡에 부촉하노라' 하고 전법게를 내려주셨다.
서쪽에서 전래된 무늬없는 인장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일세
전하느니 받느니를 모두 떠나면
해와 달은 함께 동행하지 않으리라.
이후 법력을 더욱 기르기 위해 자성을 보임하시며 적정속에 머무셨다. 36세에 문경 봉암사에서 특별선원 공주규약을 마련하고 도반인 성철화상, 청담화상, 보문화상, 자운화상 등과 용맹정진하였는데, 하루는 성철 도반이 물었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이 말 끝에 문득 무심삼매에 들어가니, 삼칠일 동안 마음이 마치 담벽과 마주한 듯하여 잠자고 먹는 것까지 모두 잊고 정진하였다. 하루는 문 앞을 지나가다 홀연히 당신의 양손을 발견하고 확철대오하여 게송을 읊었다.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무슨 물건이었던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확철대오한 스님은 인연 속에서 자재롭고 당당하게 노닐었으며, 천하 총림에서 사자후를 하시고 진리 속에서 자유자재하시었다. 40세에 부산 선암사의 조실로 추대되어 많은 납자들을 지도하셨고, 그때 다음과 같은 개당설법을 하셨다.
봉암사의 한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웃음 새롭도다
44세에는 '종단정화' 후 제1세 불국사 주지를 맡아 신라불교 최초의 법흥지인 천경림에 흥륜사를 창건하셨다. 48세에는 월내 묘관음사로 돌아와 길상선원를 창건하고 무차대회를 개설하여 전국의 수좌들을 맞이하시니, 그 기봉이 험준하여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고 거두고 놓음을 자유자재로 하셨다. 이후 중앙선학원 이사장과 조실로 추대되어 종문의 일을 크게 일으켰으며, 팔공산 동화사에도 초대되어 금당선원 조실로 계시면서 납자들을 지도하셨다. 말년에는 다시 묘관음사로 복귀하여 선사이신 혜월, 운봉 노화상의 영각을 신축하고 영정을 봉인하였으며, 선산 도리사에 운봉답비를 세우는 등 길이 후에의 본보기가 될 일을 하셨다. 67세 때인 무오년 겨울, 용맹정진을 지도하신 다음 며칠 동안 가벼운 병을 보이시더니, 섣달 8일에 문도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생사의 일은 크고 몸은 마치 물거품과 같은데, 너희들의 공부는 어떠한고? 나는 지금 떠나려 하노라." 그리고 게송으로 이르시되,
목인은 고개 위에서 옥피리를 불고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도다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영원히 밝고 밝아 언제나 수용하리
"알겠는가? 만약 이와 같지 않은 출가라면 각자 노력할지니라" 말씀을 마치고 입적하시니 세수는 67세이시고, 법랍은 50이시다. 제자 혜운, 진제 등이 전국선원장으로 다비를 행하니 영골사리가 찬연하였다. 이를 수습하여 묘관음사 동쪽 기슭에 탑비를 건립하고 선사의 법등을 추모하였다.
1978년 무오년 12월 22일
후생 일타가 쓰옵니다.
향곡선형의 법어에 씀
푸른 바다의 신기한 구슬이요
형산 땅의 보배 옥돌이라
하늘과 땅 비추어 환히 밝히고
해와 달을 삼키고 토하는도다
목인은 노래하고 석녀는 춤을 추니
소나무는 곧고 가시덩굴 굽으며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도다
알겠는가?
번쩍이는 칼 빛으로 빠른 천둥 쫓아내니
수미산 정상에는 피물결이 넘쳐 흐르도다
1981년 4월
도우 성철 화남
향곡대종사의 행화비
'향상의 한마디는 일천 성인도 전할 수 없고 어떻게 하지 못한다'하니, 끓는 가마솥 안의 종발 소리요 귀신굴 속의 덩더쿨이도다. 어느 때의 한마디는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어느 때의 한 마다니는걸터앉은 사자 같고, 어느 때의 한마디는 천하인의 혀를 꼼짝 못하게 하고, 어떤 때의 한마디느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좇음이라. 스님의 당호는 향곡이요, 법명은 혜림이시다. 일만 겹의 조사관문을 두드려 부소 불조의 보금자리를 타파하셨으니, 얼기설기 사시지 않고 고상한 세계를 독보하시었다. 어느 때는 한 줄기 풀로 장육금신 부처님을 만들고, 어느 때는 장육금신을 한 줄기 풀로 만들어 쓰기도 하셨다. 선사께서는 1912년 정원 열여드렛날,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아버지 김원목과 어머니 김적정행 사이에 태어나셨으며, 이름은 진탁이라 하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절에 가기를 좋아하더니, 16세에 둘째 형을 따라 천성산 내원사에 입산하였다. 18세에 조성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혜림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가 1930, 당시 운봉대선지식께서는 내원사의 조실로 계셨다. 스님은 그 슬하에서 시봉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시더니, 늦가을 어느 날 산골짜기의 돌품이 문짝을 때리는 순간, 홀연히 한 가닥 옛길을 확철관통하였다. 의심하던 바 공안과 가슴에 걸려 있던 것이 활연히 사라져 환희스럽기 그지없었다. 스님은 곧 운봉노사를 뵈었으며, 노사께서는 보시자마자 목침을 두고 말씀하시었다. "한마디 일러라." 스님은 즉시 목침을 발로 차버렸다. "다시 한 번 일러라." "천마디 말, 만 마디 이야기가 모두 꿈 속에서 꿈을 설함이요, 모든 불조가 나를 속인 것입니다." 이에 운봉노사께서 크게 기뻐하셨다. 1944년 8월 임제정맥의 등등상속을 기록하여 부촉하시니, 곧 양기, 밀암, 태고, 환성, 율봉, 경허.혜월의 적전이 되었다. 또한 운봉노사는 전법게를 적어주셨다.
서쪽에서 전래된 무늬없는 인장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일세
전하느니 받느니를 모두 떠나면
해와 달은 함께 동행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향곡'이라는 당호를 내려 주셨다.
1947년에 이르러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에 성철이 물었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이에 의심이 생겨 참구하다가, 무심삼매에 들어 삼칠일 동안 침식을 잊어버리고 정진하셨다. 하루는 홀연히 자기의 양쪽 손을 발견하고 활연대오하여 게송을 읊으셨다.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 이 무슨 물건이었던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봉암사의 한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로부터 천하 노화상들의 말 끝에 속지 않게 되었고, 인연속에서 자재롭고 당당하게 노닐었으며, 천하의 총림에서 대사자후를 하시게 되었다. 그 후로 길상선원 창건하여 선방의 문을 여시니, 청풍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또한 제방의 명찰인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지에서 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므로, 20여 년 동안 크게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선양하셨다. 그의 가르침은 너그러우면서도 기봉이 험준하여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기를 자유자재로 하셨다. 1967 여름 안거를 마치는 해제법문을 하실 때, 제자 진제가 여쭈었다. "불조가 아신 곳은 묻지 않거니와 불조께서 알지 못한 곳을 일러주십시오." 향곡대선사께서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가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진제가 예배를 드리고 물러가니, 스님께서도 문득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다음날 진제가 다시 여쭈었다. "불안과 혜안은 묻지 않거니와 어떤 것이 납습의 안목입니까?"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 이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되었도다." 그리고 곧 임제정맥인 태고 - 경허 - 혜월 - 운봉 - 향곡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진제에게 부촉하셨다.
부처님과 조사의 대활구법문은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일세
지금 내가 활구법문 부촉하노니
거두고 놓는 것은 네 뜻에 맡기노라
그 뒤 월내의 묘관음사에 계시면서 후학을 제접하고 지도하시더니,
1978 섣달 보름날 해운대의 해운정사에서 열반게를 지으셨다.
목인은 고개위에서 옥피리를 불고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도다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기
영원히 밝고 밝아 언제나 수용하리
그리고 3일 후인 18일 인시에 입적하시니, 세수 67이요 법랍은 50이시다.
어제 이렇게 한 것도 허물이 하늘에 넘칠 일인데, 오늘 또 이렇게 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제2의 문 앞에서 간략히 유풍을 기록함이로다. 끝으로 게송 하나를 붙이노라.
밝고 밝은 아침 해가 하늘에 비치는 듯
시원스런 맑은 바람 대지에 깔리는 듯
이렇게 해도 옳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옳으니
초목와석은 언제나 광명을 놓고 있도다
이렇게 해도 옳지 않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옳지 않으니
삼세제불이 거꾸로 삼천 리나 물러남이라
애닯다!
밝은 해는 수미산을 감돌고 있고
붉은 안개는 푸른 바다를 꿰뚫었도다.
법제자 진제는 분향하고 삼가 쓰옵니다.
크게 죽어야 다시 사나니
대저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 속에서 삶을 얻어야 비로소 자재무애를 얻게 되느니라. 조주스님이 투자스님께 여쭈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투자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밤길을 다니지 말고 날이 밝거든 올지니라." 또 옛사람은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니라." 이와 같이 완전히 죽어 한번 뒤집힌 다음이라야 돌 사람이 옥피리를 불고 목녀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리라. 만약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차렸다면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문수보현과 천만 성인의 자재로운 수용처를 하나하나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알겠는가? 송하시기를
위음왕불 저쪽 세계 꿰뚫어 바라보니
영원히 변치 않는 별천지의 마을 있네
한번 '할'을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1952년 동안거 선암사에서
한마디 소식
법상에 올라 한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거론하기 이전의 한마디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도 들추어 내기를 꺼리는 것이려니와, 양고와 방과 할 또는 불자를 드는 것 등은 어느 곳으로 떨어지며, 둥근 원과 둥근 원에 둥근 원 안에 평등한 세 점과 둥근원에 둥근 원 안에 위 아래로 세점은 또 무슨 뜻인가? 누구든지 이를 명백하게 꿰뚫는다면 최초구와 말후구와 향상구와 향하구와 제방의 차별삼매를 일거에 모두 꿰뚫어, 모든 대지와 시방세계와 삼라만상과 초개 같은 인간이나 축생, 유정, 무정들이 모두 자기의 가풍을 드러내게 되느니라. 바로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 석가와 달마, 문수와 보현, 마조와 석두, 임제와 덕산, 조주와 운문은 어떠한 사람인가?"
삼세제불도 불 속의 흰 눈이요
역대조사도 백골 무더기로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게 되면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거니와 어떤 때는 하늘을 불러 땅을 만들고 땅을 불러 하늘을 만들며, 어떤 때는 산이라 해도 산이 아니요, 물이라 해도 물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필경 어떠한 것이가? 한참 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봄이 오면 풀이 스스로 푸르도다." 한 번 '할'을 하시고 문득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덕산스님의 탁발
법좌에 올라 한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치고 크게 ‘할’을 하신 다음 이르시기를 “대중은 알겠는가? 오늘 이 산승은 대중을 위하여 하나의 소식을 통하게 하리라.” 그리고 게송을 읊으시되,
수미산이 반 공중에 거꾸로 솟으니
삼세의 불조가 콧구멍을 잃는구나.
“만약 이 일을 논함에 있어 죽이고 살리는 것을 자재로 하는 사람이라야 그야말로 대장부라 이름하리니, 단 한 발에 일만 겹의 관문을 모두 꿰뚫어 대해탈과 대휴식과 대자재와 대안락이 만겁토록 우뚝 솟고 당당하여야 비로소 얻었다 하리라. 요즈음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과 육근의 끝에 나타나는 빛과 그림자의 알음알이로 본래인를 삼고 있으니, 참으로 슬프고 통탄한 일이다. 옛사람은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초탈한 최후의 한마디라야 비로소 구경의 관문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덕산스님 회상에서 설봉스니이 공양주를 할 때였다. 하루는 덕산 방장스님께서 바리때를 가지고 식당으로 내려오시거늘, 설봉스님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저 노인장은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바리때를 안고 어디로 가는고?’
덕산스님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가셨다. 설봉스님이 이 일을 암두스님께 이야기하였던 암두스님이 말씀하셨다.
‘그저 그만한 덕산방장이여, 최후의 한마디를 알지 못하였구나.’
덕산스님이 이 소리를 전해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스님을 방장실로 불러 물었다. ‘네가 나를 옳다 여기지 않느냐?’ 이에 암두스님이 은밀히 속삭였다. 다음날 덕산스님이 상당하였으나 평소와 같지 않은지라, 암두스님이 승당 앞에 이르러 손을 비비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기쁘구나, 노인장이 비로소 최후의 한마디를 알았구나. 이후 천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 비록 이와 같으나 단지 3년은 머물 것이다.’
뒷날 명초스님은 말하였다.
‘내가 만약 당시에 있었다면 애달프다, 갈 곳이 없구나라고 하였으리라.’ 설두스님은 이를 꼬집어 말씀하셨다. ‘명초스님은 원래 한쪽 눈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덕산스님이 이빨 없는 호랑이인 줄은 어찌 몰랐던가? 만약에 암두스님이 알아서 깨뜨리지 않았던들 어찌 어제와 오늘이 같이 않음을 알 수 있었으리오.’ 대중들은 이 이야기 속의 ‘최후의 한마디’를 알겠는가? ‘다만 늙은 오랑캐가 아는 것만 허락하고 늙은 오랑캐가 이해하는 것은 허락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이 한마디를 분명히 투득하면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천차만별한 삼매와 공안를 일시에 꿰뚫어서 천하의 어떤 사람도 그대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며,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도 그대의 뒤에 있게 될 것이니, 대중들은 진중하고 또 진중할지니라.
최고봉에 올라가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허다한 일 알 수 있으리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경술년(1970) 동안거 결제일에
아이고 아이고
법좌에 올라 묵묵히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입을 열었다 하면 벌써 제2 제3의 자리로 떨어지나니, 어떻게 하여야 이를 면할 것인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부처도 말할 수 없나니, 알겠는가? 산승이 오늘 대중을 위해 이 소식을 드러내리라.” 그리고 소리쳤다. “아이고 아이고” 또 “하하” 하며 크게 웃으신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장군의 전마는 지금 어디 있느뇨
달 저문 삼경에 시장 앞을 지나가네
문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두 길을 밟지 않고
법좌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고 이르시기를, “이렇게 이렇게 하니 머리 셋에 팔을 여섯 개 가진 놈이 종횡무진 설쳐대고,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니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르며 하늘과 땅이 빛을 잃는도다. 대중들은 이 두 가지 길을 모두 밟지 않고 어떻게 하여야 도에 이르겠는가?” 대중이 답이 없거늘 게송을 읊으셨다.
손을 털고 위음왕불 저쪽을 바라보니
천지는 영원하고 바다는 다시 깊네
문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무신년(1968) 동안거 동화사에서
혼이 날아가고 쓸개가 없어지네
만약 이 일을 논한다면 삼세제불도 몸을 잃고 목숨을 잃고, 역대조사도 혼이 날아가고 쓸개가 없어지며, 문수와 보현보살도 숨을 죽이고 말을 못하느니라. 나아가 천만 성인 모두가 삼천 리 밖으로 물러가나니, 이 속에 이르러 과연 어떠한 사람이 살아 남을 것인가?
어떤 사람이든 분명히 살아 남기만 하면, 모든 법문고 한량없는 삼매와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묘용과 모든 공안과 불조들꼐서 사람에 따라 보여 주었던 방편과 관문을 꼭대기에서부터 밑바닥까지 확철히 꿰뚫어, 한순간에 대장부의 할 일을 끝마치리라. 그리고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나 걸림없는 방편을 구사하여 한마디의 말씀과 하나의 기연과 한 경계를 나타내면, 전광석화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옛 사람이 이르시기를
앞사람의 애썼던 일 무엇 했나 하지 말라
그 사람은 벌써 최후 관문을 뚫었나니
만일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부득이 90일의 결제 기간 동안 대신심과 대의심과 대용맹심을 더욱 발하라. 문득 무심삼매에 들어가면 목인이나 석녀와 같이 몸과 마음을 모두 잊게 되느니라. 바로 그때 하나의 기연이나 하나의 경계에 부딪치게 되면 활연히 대오하여, 다생다겁 동안의 무명업식이 그 자리에서 얼음 녹듯 풀어지며, 백천만겁토록 생사에 어둡지 않고 만겁토록 자재하여 걸림이 없으며, 억겁토록 두루 통달하고 두루 밝아서 천하를 홀로 거닐게 되느니라. 부디 진중하고 또 진중할지니라. 한번 ‘할’을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건봉스님의 편안히 앉은 곳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잡고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어저께 이와 같이 한 것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요, 오늘날 이와 같이 하는 것도 별수 없는 일이니라. 감히 대중에게 묻노니, 이 대중 속에 산승을 위하여 발을 씻어 줄 자가 있는가? 있으면 나와보라.” 대중의 대답이 없자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옛날에 건봉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법신에 세 가지 병통과 한 가지 빛이 있으니, 모름지기 이를 하나하나 꿰뚫어야함 비로소 편안히 앉을 곳을 알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다시 비춤과 활용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향상의 한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때 운문스님이 나서서 말하였다.
‘암자 안에 있는 사람은 어찌하여 암자 밖의 일을 보지 못합니까?’ 이에 건봉스님은 ‘하하’ 하고 크게 웃으셨다. 운문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그래도 저는 의심 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마음의 작용인고?’ ‘스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운문스님이 답하자 건봉스님이 말씀하셨다. ‘모름지기 바로 이와 같이 되어야만 비로소 편안히 앉을 곳을 알 수 있느니라.’ 이에 운문스님은 ‘예, 예’하고 답하였다. 대중은 알겠는가?
근심하는 사람 향해 걱정스런 말 말아라
걱정거리 말하다간 근심이 사람 잡네
게송을 마치고 문득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정미년(1967) 동안거 동화사에서
만약 이 일을 논하고자 하면
“만약 이 일을 논하고자 할진대, 벽에 천 개의 칼을 세워 놓고 오로지 높은 경지로만 나아가려고 해도 모든 조사와 성인들의 은혜를 저버리게 되고, 오로지 세속에 뛰어들어 머리에는 재를, 얼굴에는 흙을 가득 묻혀 가며 베풀어도 자기를 매몰시켜 버리고 마느니라. 과연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게송을 읊으시길
고요 고요 고요하고 깊고 깊고 또 깊은데
깊은 골짜기 산새는 궁궁궁!
또 이르시길
밝은 해는 수미산을 감돌고
붉은 안개 푸른 바다 꿰뚫네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무신년(1968) 동안거 묘관음사에서
향상의 한 길
법상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대중은 알겠는가?”
대중이 말이 없자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고향 길이 만 리건만 하늘과 땅은 좁고
밝은 해와 달과 별들 어둡고도 아득하네
“설령 ‘방’을 빗발치듯 날리고 ‘할’을 우레와 같이 할지라도, 향상종승의 일과는 당치도 않느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혼자서만 알 뿐이요, 역대조사들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하며, 일대장경으로도 주석을 달지 못하고, 눈 밝은 납자도 별수가 없으며, 부처 ‘불’ 한 글자도 인정에 끄달린 소리요, ‘선’이라는 글자도 부끄러움 덩어리니라. 설령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문수보살와 보현보살과 천하의 선지식과 천만 성인이 미래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설한다고 할지라도 털끝만큼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만 리나 간격이 벌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언어 문자 밖에서 근본을 밝히고 기틀을 넘어서서 종지를 밝혀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느니라.
이 속에 이르러 털끝만큼이라도 ‘불’이라는 소견이나 ‘법’이라는 소견이 있다면 벌서 화살은 서쪽 하늘을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정녕 어떻게 해야 하는고?”
피눈물이 나도록 울어도 소용이 없네
입을 닫고 남은 봄을 보냄만 못하도다
게송을 마치고 문득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알려면 단박에 알아야
법좌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번 치고 이르시기를, “알았다 하면 단박에 알아야지, 생각하고 따지면 벌써 만리나 멀어지고 천 가닥이나 어듯나느니라. 참선을 하면 반드시 조사관을 타파해야만 한다. 생사심을 완전히 타파하면 제8식인 무명근본식이 당장 얼음 녹듯 풀어지고, 지나온 무수한 세월 동안의 무명업식과 번뇌가 일순간에 다하여 맑아지느니라. 또한 이 마음을 깨달으면 보살심과 보리심, 부처님 법문이니 하는 소견이 일순간에 모두 없어져서 적멸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반야의 대지혜가 밝고도 우뚝하여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게 되고, 자체가 여여하여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고 아무리 취하여도 없어지지 않으며, 해탈문을 열어 자유자재한 세계를 수용하게 되느니라. 대중은 알겠는가?
백조는 장강으로 내려오는데
외로운 구름은 먼 산에 피어나네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천경림 흥륜사에서
대법안을 얻도다
법상에 올라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홀연히 대오하면 대법안을 얻고, 무한한 몸을 얻고, 설해도 설해도 다함이 없는 법문을 얻고, 한량없는 백억 세계에 계신 백천만억 제불보살의 깊고 깊은 미묘법문을 얻게 되며, 나아가 천하 노화상의 무궁무진한 법문이 자기 살림이 되어 자유자재하리라.”
활연히 깨달아 가장 높은 관문에 오르니
세 발 달린 사자 새끼 쏟아져 나오누나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화살은 벌써 서쪽 하늘을 지나갔도다.
법상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산승이 이렇게 하는 것도 본고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 설령 ‘방’을 빗발치듯이 날리고 ‘할’을 우레와 같이 할지라도 향상의 일로는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느니라.
삼세제불도 오직 스스로만 알 뿐이요, 역대조사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하며, 일대장경으로도 주석을 달지 못하고, 눈 밝은 납자도 꼬집어 내지 못하느니라. 이 향상의 일로는 일천 성인도 전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언어 문자 밖에서 근본을 밝히고, 기틀을 넘어서서 종지를 밝혀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느니라. 이 속에 이르러 털끝만큼이라도 부처라는 소견이나 법이라는 소견이 있다면, 화살은 벌써 서쪽 하늘로 지나가 버린 것이니라. 그렇다면 정녕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
피눈물이 나도록 울어도 소용이 없네
입을 닫고 남은 봄을 보냄만 못하도다.
게송을 마치고 문득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다섯 가지 삼매법문
“이 도리를 말할 때 잠깐이라도 나와 남, 옳다 그리다가 붙으면 본래인을 잃어버리게 된다. 알겠는가?”
남을 위한 저 길은 나의 손에 맞지 않네
주장자 비껴 메고 가산으로 돌아가리
“나에게 다섯 가지 삼매법문이 있으니, 오늘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대중을 위하여 이 소식을 말하리라.
첫째는 시간과 공간을 꽉 잡고 안정시켜 지극히 조그만한 것초자 빠쪄 나가지 않게 함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이 혀를 댈 수 없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납승의 ‘바른 명령’이니라.
둘째는 정수리에서 방광하여 사천하를 두루 비추고 모든 것 하나하나에 대해 환하게 아는 것이니, 이것은 납승의 ‘금강 눈동자’이니라.
셋째는 쇠를 다루어 금을 만들고 금을 다루어 쇠를 만들며, 갑자기 잡았다가 갑자기 놓아 주나니 이것은 납승의 ‘주장자’이니라.
넷째는 천하 사람들의 혀끝을 놀리지 못하게 하고 숨도 쉬지 못하게 한 다음 거꾸로 삼천 리를 물러가는 것이니, 이것은 납승의 ‘기백’이니라.
다섯째는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천하 선지식이 이 세상에 모두 함께 출현하시어 대광명을 발하고, 한량없는 삼매와 법문과 방편과 신통으로 대법륜을 굴려 한순간에 무량중생을 제도한다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니, 이것은 납승의 ‘특별 수용 경지’이니라.
이상의 삼매 하나하나를 모두 밝게 증득하여 어디에서나 자유자재하여야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되느니라.
건곤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려면
다시 더 최고봉에 올라서야 하리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이와 같이 작용하도다
법좌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시고 법상을 세 번 치신 다음, 크게 한 번 ‘할’을 하시고 말씀하셨다. “과거의 위음왕불과 비바시불도 이렇게 하셨고 석가와 달마도 이렇게 하셨으며 천하의 선지식들도 모두 이렇게 하셨으니, 오늘 향곡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로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고 어떤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도다. 대중은 이 뜻을 알겠는가?
무쇠 소를 거꾸로 타고 황금물을 나섰으니
천상 인간 가운데에 몇 분이나 이러할까
한 번 크게 할을 하면 하늘과 땅이 무너지니
멋진 솜씨 도리어 불속의 연꽃과 같도다.
‘누구든지 이 속에서 알아챈다면, 손을 한 번 들도 발을 한 번 놓음이 격외의 종풍 아님이 없고, 앉고 눕고 걸어감이 모두 다 고불의 향상의 소식이 되는니라. 또한 두두물물이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큰 뜻을 설하는 것이고 진진찰찰 위음왕불의 활구 소식을 선양하는 것이니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한 번 치고 ‘허허’ 웃으신 다음 법좌에 내려오셨다.
기유년(1969) 하안거 동화사에서
남전선사가 고양이를 죽인 까닭
법좌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주장자를 들고는 말씀하셨다. “알겠느냐?”
눈 셋 가진 돌 사람이 법당에서 나오니
여덟 팔의 목녀가 옥루에서 춤추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높고 높은 봉우리에 우뚝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거닐도다
다시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무쇠 소 거꾸로 타고 풀밭에 들어가니
연잎 적신 가을 이슬 무엇보다 아름답다
“대중은 알겠는가? 누구든지 이 주장자의 소식을 알면, 곧바로 크게 살아나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대원각세계를 자유자재로 수용하여 인연 속에서 마음대로 노닐 뿐 아니라, 백천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일시에 증득하여 모자람이 없으리니, 이렇게 되는 날이 곧 크게 해제하는 날이니라. 그렇지 못하다면 다리를 저는 자라나 눈 먼 거북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리라.
예전에 운봉 큰스님께서 나에게 남전스님의 ‘고양이 목을 친 법문’을 하시며, ‘조주선사가 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간 뜻을 일러라.’ 하셨다. 이에 나는 대답하였다.
‘하필 그래야만 합니까?’
‘다시 일러라’
‘아이고! 아이고!’
‘무엇이 아이고냐?’
나는 대답하였다.
‘서쪽 집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동쪽 집 사람이 조문을 하는 것입니다.’ 금일 대중들은 알겠는가? 알면 당장 알 일이요, 우물쭈물하면 벌써 두 국자의 ‘구정물’을 덮어쓰리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태평스런 세상은 본시 장군이 만들었지만
장근운 태평세월을 볼 수가 없었네
문득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공부를 마치려면
“한없는 태허공은 한쪽 눈이요 삼천대천세계는 하나의 길이며, 백억 세계 하늘과 땅은 손가락 하나요 시방세계는 한 개의 털이니, 콧구멍 안에 백억의 화장세계가 감추어져 있고 귓속에 한없는 정토가 담겨 있느니라. 최초 위음왕불 이전에는 동쪽에서 서쪽을 지나가고, 최후 누지 부처님 뒤에는 서에서 동으로 지나가는니라. 나왔다 하면 허공이 분쇄되고 대지가 침몰하며, 들어가면 수미산이 거꾸로 달아나고 큰 바다가 바짝 말라 버리느니라. 이러한 도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의 행리처인가? 여기에서 분명히 안다면 일생의 공부를 마치게 되리라.”
위음왕불 이전 소식 꿰뚫었으니
천상과 인간이 자유를 얻노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분명히 살피고 증득하라
상당하여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목녀는 갓난아기 품에 안고서
어젯밤 은하계로 돌아갔는데
석인은 무쇠 소에 올라타고
오늘 아침 천태산으로 돌아왔다네
“누구든지 이 게송의 뜻을 깨닫게 되면 격외의 도리를 요달해 마쳤다고 인가하리라.”
삼세의 모든 불조 눈동자 속의 꽃이요
대천세계 모든 것이 콧구멍 속의 티끌일세
어떤 이가 나에게 이 소식을 묻는다면
우레같이 할을 하고 빗발치듯 방을 맞으리
“마음속의 망련된 견해를 완전히 끊고 부처와 법에 대한 소견을 일순간에 모두 비워 남음이 없어야만, 온몸의 큰 작용이 눈 앞에 나타나는 시절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때가 되면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 땅을 만들고 강물을 휘저어 최상품의 제호를 만들며, 삼독을 삼취정게로 바꾸어 대해탈의 자재한 기틀을 만들고 육식을 육신통으로 바꾸어 대무애자재하게 쓸 수 있게 되느니라.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때로는 선정에 들어 대우주와 하나가 되고, 때로는 걸림 없이 행동하여 능히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능히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대기와 대용을 나타내어 어느 곳에서든지 으뜸이 되며, 때로는 주인이 되기도 하고 손님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는 등 어디에서나 자유자재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은 까닭으로 임제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한마디 말에 모름지기 삼현을 갖추었고, 일현 중에 모름지기 삼요를 갖추었으며, 진실과 방편이 함께 하며 비추기도 하고 작용도 한다.’ 대중은 이 도리를 분명히 살피고 증득해야만 하느니나.”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바퀴처럼 둥근 달이 주장자 끝에 나타나고
철위산과 도산지옥 털끝에서 무너졌네
세 발 달린 무쇠 소가 허공으로 달아나니
묘수 중의 묘수라야 잡을 수가 있도다
‘할’을 한 번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살인도 활인검
“만약 이 일을 논하고자 한다면, 전광석화처럼 빨라도 통하지 못하고 미치지 못하나니, 할을 하고 주먹질 하더라도 도적이 지나간 뒤에 활을 쏘는 격이요, 묵묵히 앉아 있거나 불자를 드는 일도 이미 죽은 말을 치료하는 격이다. 석가와 달마도 삼천리 밖으로 물러서고, 문수와 보현도 뜰 아래 엎드려 살려 달라고 하는도다. 분명히 일렀다 하여도 모두가 쓸모없는 짓이니, 여기에 이르러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사람을 죽이려면 살인도를 써야하고
사람을 살릴려면 활인검을 쓸지니라
“옛 사람이 이르시기를 ‘말하기 전에 알았다 하더라도 마주 치는 길마다 미친 소견을 면치 못할 것이요, 한마디 아래에서 통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껍질에 막히고 무덤 속에서 헤매게 된다’고 하셨으니, 일일이 사자후를 하여야 비로소 될 것이니라.”
사자의 굴 속에는 다른 짐승이 없고
검은 용이 가는 곳 물결만 도도하다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좌에 내려오셨다.
언네나 이와 같이 쓸지니라
법좌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천 길 되는 소나무에 백학이 높이 날고
만 길 넘는 깊은 못에 진흙 소가 놀라도다
허공이 무너지고 대지가 침몰하니
이로부터 세계가 평화를 이루도다
이러한 시절을 맞이사여서는
한주먹에 수미산을 무너뜨리고
한 번 차서 사대해를 엎어 버리며
부처님을 몰아붙여 무간지옥 보내고
대천세계 밖으로 모든 중생 놓아주네
어떤 때는,
집집마다 문전에서 격외종풍 제창하고
사람마다 발 아래의 고불활로 찬양하리
백억 세계 모두가 장안 안에 있고
집안에는 언제나 고불이 계시도다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어야만 바야흐로 ‘대장부 남아’라 이름할 것이며, 크게 해제를 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용이 사는 굴에서 곤두박질치다가
사자의 발 아래로 굴러떨어졌도다
일만 길 정상에서 잡은 손을 놔 버리고
깊고 깊은 해저에서 살아갈 길 찾는도다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한 자루의 취모검
생이란 한 자루의 취모검이요
죽음 또한 한 자루의 취모검일세
한 자루 취모검의 빛이 이글거리니
그 광명이 사천하를 완전히 부수도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요 조사의 마음이며 또한 일체 중생의 본원인 진심이니라. 이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마치 태허공과 같고 본래 생멸의 상이 없나니, 어찌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리오, 크게 작용하면 능히 법계를 포함하고도 남으면 작아지면 한 티끌 속에 능히 들어가니, 신통묘용이 자재하고 응화신을 나타냄이 끝이 없도다. 이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이로써 육도중생에게 공양하느니라. 오늘날 모 영가여, ‘마음이 곧 부처’인 도리를 알아 얻었는가? 만약에 마음을 알았을진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라. 알겠는가?
바다에 뜬 밝은 달이 처음 생겨 나올 때
바위산 위에서 우는 원숭이 쉴 때이니라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알고자 하는가
물은 강과 호수에 있고 달은 하늘에 있느니라.
불법의 대의
여러 대중에게 보이노라.
대저 불법의 대의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보광삼매에 드시어 실상무상이며 불립문자하고 교외별전하신 심심미묘한 최고무상의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셨다. 그 뒤 거듭거듭 고금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큰 지혜의 성인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스스로가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 걸림 없는 큰 법을 자유자재하게 쓰셨다. 때로는 제왕의 집에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고관대작의 집에 태어나기도 하며, 때로는 장자의 집안에, 때로는 부귀한 집안에, 때로는 빈천한 가정에 태어났고 때로는 여인의 몸을 받아 태어나서, 여러 번 부처가 되기도 하고 조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보살의 몸을 나타내어 세간과 출세간에 머물렀다.
번뇌가 없는 큰 지혜와 원만히 통하고 원만히 밝은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묘용과 자재하고 걸림없는 백천 법문과 무량한 삼매를 본래 스스로 갖추었으니, 본래 스스로 원명하고 본래 스스로 청정하고 본래 번뇌가 없고 본래 생사가 없고 본래 미함과 깨달음이 없으며, 본래 차례가 없고 본래 계급이 없고 본래 범부와 성인이 없고 본래 닦음과 얻음이 없도다.
만법이 원만하고 만법을 갖추었고 만법이 한결같고 만법이 청정일여 할 뿐 아니라 본래 일이 없나니, 시방세계에 빛나고 인연 속에서 당당하게 머물며 삼계 속에서 안락하고 자재하며 걸림없도다. 때를 만나면 병에 따라 약을 주고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고, 물이 넘치면 도랑을 이루나니, 자연히 못과 쇠를 끊고 수만 자루의 칼로 벽을 세우며, 쇠를 녹여 금을 이루고 금을 녹여 쇠를 이룸이 골수에 사무쳐 자재롭고 원통하도다. 또 때로는 향상의 한마디를 나타내고 때로는 향하의 한마디를 나타내며 때로는 여래선, 때로는 조사선, 때로는 최초의 한마디, 때로는 최후의 한마디를 하며, 때로는 큰 기틀과 큰 작용을 보이고 때로는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으며, 때로는 선정에서 나와 마음대로 향하고, 때로는 거두고 놓음을 자유롭게 하느니라. 주고 빼앗음에 짝할 이 없으며, 비춤과 씀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방편과 진실이 자재하고 순과 역에 종횡하여 응용이 걸림이 없도다. 네거리 한복판에서 마음대로 노닐고, 티끌 세상에 묻혀 오른쪽을 마주보며 왼쪽을 바라보고 왼쪽을 마주보며 오른쪽을 보나니, 전광석화로도 통할 수 없고 미치지 못하느니라. 어떠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고 시방세계에 자취를 남김이 없이 대자재하고 대무애하며, 크게 청정하고 크게 당당하고 크게 활발하도다.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가 본래 대해탈의 보리세계요, 백천 항하사 모래알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계가 본래 청정한 대적멸도량이니라. 꽃과 풀들은 모두 부처님께서 몸을 나타낸 것이며, 모든 사람과 물건들은 일천 성인께서 정법을 제창함이며, 모든 국토 속에서 법을 잃고 법을 파하는 것은 모두 도인께서 참괸 법을 마음대로 수용하여 다함이 없는 것을 나타냄이니라. 작용이 무궁하고 취함 또한 끝이 없어서, 영원토록 천하를 홀로 거닐고 영원토록 홀로 삿됨이 없음을 드러내며, 영원토록 자유자재하고 영원토록 생사의 길에 빠지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고요하며 밝으며, 영원토록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으며, 영원토록 뛰어나고 한가로우며, 영원토록 체가 스스로 한결같으며, 영원토록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며, 영원토록 원만히 통하고 원만히 밝으며, 영원토록 장애가 없으며, 영원토록 광대하고 신령스럽게 통하며, 영원토록 밝게 빛나느니라. 저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겁 동안 높고 높으며, 다함 없는 겁 동안 진체가 원만히 밝나니, 마치 손 위에 올려놓은 여의주에 살물의 모든 모습이 순식간에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밝은 거울 앞에 검은 얼굴의 오랑캐가 서면 검게 나타나고 붉은 얼굴의 한인이 오면 붉게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옛 사람께서 말씀하셨다. “향상의 일로는 일천 명의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 하물며 나머지 사람은 말해 무엇 하리오. 이에 이르러서는 삼세제불도 몸을 잃고 목숨을 잃으며, 역대조사도 혼이 날아가고 쓸개가 없어지며, 문수와 보현보살도 숨을 죽이고 말을 못하며, 천만 성인 모두가 삼천 리 밖으로 물러가고, 조주와 운문스님도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느니라. 잠깐이라도 입을 열고 몸을 움직이면 몽둥이를 빗발치듯이 맞으리니, 곧바로 도를 얻어 입 안에 가득 찰지라도 뼈가 쌓임이 저 산과 같고, ‘아이고’ 곡함을 결코 면치 못하느니라. 만일 이 속에서 살아 남기만 하면 능히 대장부의 일을 마치게 되리니, 알겠는가? 애닯도다.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산은 밝고 물 맑으며 해와 달은 영원하네
천상천하 독보하며 짝할 이 없으니
천상과 인간 세상의 으뜸가는 법왕일세
할!
아이고, 아이고!
허허.
훔 탁.
정사년(1977) 정월 15일 향곡이 이와 같이 설하노라.
여래선과 조사선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며 이르시기를, “옛사람은 오직 이 일만을 밝혔느니라.” “어느 곳에서나 오직 이 일만을 거론하였으니라.” “어느 곳에서나 이 일을 여의지 아니하였으니라.” 그러므로 옛사람께서 말씀하셨다. “사해에 낚시를 드리우는 것은 흉악한 용을 낚으려는 것이다.” “격외의 깊은 뜻은 오직 지기를 찾는 것이니라.” 이것이 근본 목적이다. 그러므로 달마스님께서는 이렇게 게송을 읊으셨다.
넓고 넓은 우주에 지기가 없어
만 리 긴 강을 갈대 잎 타고 왔도다
이 게송은 달마스님께서 갈대 잎을 타고 중국으로 오신 것을 말하는데, 게송 속의 지기는 곧 깨달은 사람이다. 이 게송이야 말로 참으로 기막힌 말씀인 것이다.
옛날 향엄스님이 천오백 명 대중을 거느닌 위산스님을 찾아뵙자, 위산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이냐?”
이 물음에 향엄스님은 꽉 막혀 버렸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모두가 그림 속의 떡이었구나.”
그림 속의 떡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이제까지 도를 닦는답시고 허송세월한 것을 생각하자 향엄스님은 분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동시에 용맹심이 천만 길이나 되는 노한 파도처럼 일어났고, 가슴속에서 마구 쏟아지듯이 유출되었다. 스님은 대중과 함께 공부하지 않고 무너져 가는 암자에 들어가 홀로 공부하였다. 하루는 밖으로 나갔다가 기와 조각이 굴어 대나무를 ‘탁’ 치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아 게송을 읊었다.
한 번 ‘탁’하는 소리에 아는 것을 잊었으니
다시 닦고 다스릴 필요가 없어라
얼굴을 움직이면 옛길이 드러나고
고요한 소승의 길에 떨어지지 않도다
어딜 가도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고
소리와 빛깔까지 벗어난 위의로다
도를 통한 여러 곳의 선지식들이
상상의 기틀이라며 모두 다 칭찬하네
참으로 이와 같이 통의 밑구멍이 빠져 나가는 것과 같은 경지를 이루어야만 하리라. 그 뒤 향엄스님이 앙산스님을 만나니 앙산스님이 물었다. “요즈음 사형의 견처가 어떠합니까?” “어떠한 법에도 가히 정을 둠이 없습니다.” 앙산스님이 또 물었다. “어떠한 법에도 가히 정을 둠이 없다고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향엄스님이 또다시 꽉 막혀 버렸다. 과연 깨달음을 얻은 향엄스님은 왜 다시 막혀 버린 것일까? 그 뒤 향험스님은 다시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고 게송을 읊었다.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금년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함이로다
지난해의 송곳을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음이로다
이 게송을 듣고 앙산스님이 말하였다.
“사형이 여래선을 알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향엄스님은 또 다시 게송을 지었다.
나에게 한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짝여 그대에게 보이노라
그대가 깨닫지 못하면
특별히 사미를 부르리라.
이 게송을 보고 앙산스님이 말하였다.
“아 기쁘도다 사형께서 마침내 조사선을 깨달았구나.”
대중아, 앙산과 향엄, 이 두 선사의 용심처를 자세히 살펴보아라. 필경에는 어떠한고? 방으로 돌아가 차나 마실지어다.
산은 산 물은 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산승이 법상에 올라온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를 바로 보고 바로 알면 일대사를 다 마쳐서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느니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라
여기에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 하늘은 하늘대로 항상 무심하게 법문을 설하고, 땅은 땅대로 항상 무심하게 대법륜을 굴린다.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산도 그렇고 물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말씀하셨다. “대지에 티끌이 없어졌거늘 어떤 사람인들 눈을 뜨지 못하겠는냐?” 실로 여기에는 생사도 없고 번뇌도 없고 범부와 성인도 없나니, 삼세제불이나 역대조사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개인 개인이 모두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만나면 밥을 먹으며
가고 싶으면 가고 앉고 싶으면 앉는도다
도리가 이와 같거늘 삼세제불은 어찌하여 이 세상에 나왔으며, 역대조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온 것일까?
‘부처님의 팔상성도는 중하근기를 위해서’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불 한 분만이 법상 위에 앉아 계시지만, 땅에서도 수없는 부처님이 솟아오르고, 허공에서도 수없는 부처님이 내려오시고, 사방팔면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부처님이 와서 석가모니불께서 앉아 계신 주위를 오른쪽으로 무수히 돌고 있다. 어떻게 석가모니불만이 팔상성도를 했다고 할 수 있으리오? 참으로 불법은 깊고 깊어서 생각만으로는 헤아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말씀하셨다. “최초불인 위음왕불 이전에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도 삼십방을 맞는다.”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사찰에 있는 찰간대를 보고 다 알았다고 하여도, 돌아가서는 역시 삼십 방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 방망이를 면할 수 있는 자는 누구있겠는가? 바른 눈을 갖춘 본분종사라면 바로 이때 전광석화와 같이 답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옛 사람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를 모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기 입이 더러워진다.” “약은 병든 이를 낫게 하기 위해서 금병에서 나오고, 칼은 난리를 진압하기 위해 보배갑에서 나온다.” 이렇듯 산승은 하는 수 없이 법상에 올라온 것이니라. 이 법은 대신심과 대의심과 대용맹심으로 공부를 해야 성취할 수가 있다. 이 세가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은 위태로움과 득실을 돌아보지 않고, 천리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선지식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법의 문으로 들어가 일대사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과연 지금도 그렇게 공부할 근기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공부연히 선방을 지어 ‘공부합네’하며 모여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대신심 대의심 대용맹심이 아니면 공부는 백억만 리나 멀어지느니라. 그래서 이 향곡은 월내의 조그마한 곳에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누구든지 찾아오면 나의 안목대로 말해 줄 것인, 전을 펴는 것도 그 물건이 팔릴 만한 곳에 가서 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풍혈선사는 20년을 법문하며 납자를 제잡하였지만, 그 밑에서는 도인이 하나도 배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공부는 티끌처럼 아주 미세한 것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곳이 있으면 다 틀려 버린다. 그리고 ‘공부를 해서 해결한다’는 자세로 그 길만을 밟아 가야지, 그렇지 않고는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옛날 장경스님과 보복스님이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복스님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바로 저곳이 묘봉정이다” 장경스님이 말하였다. “옳기는 옳으나 애석하도다.” 장경스님은 무엇 때문에 ‘애석하다’고 하였는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또 옛 사람들은 ‘관(關)’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썼다. 중국의 취암선사는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하안거 해제날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하안거 한철 동안 대중을 위하여 설법도 하고 대화도 하였는데, 취암의 눈썹이 있는 것은 보았는가?” 대중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답을 하는 이가 없었다. 나중에 장경스님이 그 말을 듣고 답하였다. “생겨나도.” 보복스님도 답하였다. “인심이 허할 때 도둑이 난다.” 그리고 운문스님은 ‘관’이라고 하였다. 이 ‘관’은 알기가 매우 어렵다. 일본의 관산스님은 이 ‘관’자를 가지고 공부를 하여 3년 만에 해결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관산’이라 하였다. 관산스님은 열반 직전에 목욕재계하고 법문을 마친 다음 산문 밖으로 나와, 절 앞의 큰 계천에 놓인 돌라디 위에 서서, 한쪽 발은 땅을 짚고 한쪽 발은 든 채로 열반에 드신 분이다. 실로 이 ‘관’이나 ‘애석하다’고 한 뜻을 안다면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 출가한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견성성불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가람을 짓고 수리하는 등의 모든 불사도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공부인을 위해 해야지, 명예나 욕심이나 다른 생각으로 하게 되면 죄만 지을 뿐이다. 오직 바르고 참된 신심과 용맹심과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만 성과가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못 입고 못 먹어 중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자꾸 늦추어 ‘내생에 하겠다’는 생각을 내면 절대로 안된다.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해결할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옛 스님을 말씀하셨다. “부처를 보고 법을 보았다는 생각을 한 번만 일으켜도 나귀의 태에 들어가고 말의 배에 들어가기가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내생에 하겠다며 미룰 것인가? 공부가 그렇게 쉽사리 되는 줄 아는가? 꿈만 꾸어도 그 속에서 정시늘 못 차리거늘, 죽을 때 정신을 차린다고 하여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말이 말로 보이고 소가 소로 보일 줄 아는가? 정신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데 무엇을 바로 볼 것인가? 모두가 뒤바뀌어 보일 뿐이다. 선방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는 이가 먹고 입는 데 정신이 팔려서는 이 정법을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다. 모름지기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공부해야 하고, 감옥에 갇혀 고초를 받는 사람이 풀려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언제나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편안함과 잘 먹는 것만 생각하면 도심은커녕 망상과 분별과 번뇌만이 일어날 뿐이다. 어떤 사람이 단식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배가 부르니까 온갖 야단들을 하는구나. 명리도 여자도 재산도 다 배가 부를 때 탐이 나는 것일 뿐, 배가 고프니 아무 생각도 없더라.” 이 말과 같이, 다른 것을 일체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부 하나만 하면 안 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예전에 스님네는 하루 해가 지면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데, 그렇게 애써 공부를 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차별삼매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진대지시방세계가 그대로 대반야요 대청정세계요 대적멸세계요 대해탈세계다.”라고 하는 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령 ‘애석하다’든지 ‘관’이라든지 ‘아이고’ 등은 모두 차별삼매에 속하는 것이며, ‘조주석교’라는 유명한 공안 또한 차별삼매를 나타낸 것이다.
조주스님께 한 승려가 찾아와서 말하였다.
“오랜전부터 조주석교의 소문을 들었는데, 와서 보니 보잘것없는 외나무다리뿐이구나.” 이에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 외나무다리만 보고 돌다리는 보지 못하느냐?” “어떤 것이 석교입니까?” 그 승려가 다시 묻자 조주스님이 답하였다. “나귀도 건너가고 말도 건너가느니라.” 그 뒤 조주스님이 수좌와 함께 돌다리를 보고 있다가 수좌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만들었느냐?” “이응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조주스님께서 또 물었다. “만들 때에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는고?” 수좌는 이 질문에 꽉 막혀 답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모든 차별 삼매를 환하게 알아서, 천하 선지식의 말씀에 대해 조그마한 의심도 없어야만 능히 일을 마친 대장부라 할 수 있느니라.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나’라는 것이 있다든지, 그 무엇이 있으면 공부는 벌써 그르쳐 버린 것이다.
용이 소맷자락을 크게 떨치 전체가 드러나고
코끼리 왕이 가는 곳에는 여우의 자취 끊어지네
오리는 물 속으로 닭은 횃대 위로
오리는 추우면 물 속으로 들어가고
닭은 추우면 횃대 위로 올라가더라
어느 날 남전 스님이 소를 타고 승당 안을 돌아보신 일이 있었다. 어째서 소를 타고 승당을 돌았을까? 이것을 알아야한다. 그때 한 수좌가 손바닥으로 소를 한 번 때리자, 남전스님은 소를 타고 돌기를 그만두었다. 이에 조주스님이 풀을 한 다발 묶어 그 수좌 앞에 놓자, 수좌가 답을 하지 못하였다는 법문이 있다. 이 속에 모든 법을 밝히는 뜻이 들어 있는데, 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법문을 듣고 확연명백하게 알면 얼만 좋겠는가?
중국 양무제 당시의 지공선사가 이 거리 저 거리를 다니며 청산유수와 같은 법문을 설하자, 수천 명 군중들이 운집하여 농사를 짓는 것도 잊고 법문을 들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혹세무민죄로 스님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공스님은 여전히 거리를 다니며 설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야단들이었다. 곧 지공스님은 분신을 하는 도인이었던 것이다. 불심천자로 일컬어졌던 양무제는 지공스님을 국사로 추대하였다. 하루는 지공스님께 금강경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반대하셨다. “빈도는 강을 잘하지 못합니다. 금릉에서 고기 장사를 하는 부대사라면 능히 금강경을 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무제가 명을 내려 부대사를 억지로 궁중에 모셨더니, 부대사는 고기 짐을 짊어진 채로 말하였다. “법을 설할 것 없이 설하면 용이요, 법을 설할 것이 있어서 설하면 죽은 뱀이니라.” 그리고는 도망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나오는데, 한 스님이 나타나 말하였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함께 바리때를 펴던 사람이구나.” 그 스님은 급히 사라졌고, 부대사는 장사를 하기 위해 잡아 놓았던 고기들을 물에 놓아 주며 말하였다. “갈 놈은 가고 있을 놈은 있으라.” 어느 날 부대사는 또다시 양무제의 청을 받아 경을 강하게 되었다. 부대사는 법상에 올라가자마자 법상 앞에 놓인 경상을 들어올려 한 번 휘두른 다음 제자리에 놓고 법상에서 내려왔다. 양무제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자,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부대사가 경을 강해 마친 것입니다.” 그 뒤 부대사는 쌍림에 절을 짓고 살았는데, 달이 환하게 밝은 밤에 경행을 하면 칠불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부대사는 미륵불의 후신이라고 한다.
손을 털고 집에 오니 사람들이 몰라보네
둥글고 밝은 달이 창 앞에 걸려 있다.
정사년(1977년) 동화사에서
제일문과 제이문
사부대중들이여,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껌벅이는 ‘양미순목’의 뜻을 알겠는가? 이를 분명히 알면 참학사를 마치게 되느니라. 만약 크게 깨친 사람이라면 주장자만 잡아도 알고 염주만 들어도 알며, 눈썹을 움직이고 눈만 껌뻑하여도 다 아느니라. 그러나 그렇게 하여 알지 못하면 제이문을 향한 법문을 열어야만 한다.
부처님께서는 도리천으로 올라가 석 달 동안 모치늘 위해 설법하시고 인간세계로 내려오셨다. 그때 연화색 비구니가 생각하였다. ‘나는 신통이 있으니, 몸을 변화시켜 가장 먼저 부처님을 친견하고 인사를 드리리라.’ 연화색비구니는 신통으로 전륜성왕의 몸을 나투었다. 전륜성왕은 수미산 주위의 사주를 통솔하는 훌륭한 대왕으로, 몸에 삼십이상을 갖춘 분이다. 그러한 몸을 나투어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지 않으면, 비구니는 비구스님들이 모두 인사 드리고 난 다음 늦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연화색비구니야, 네가 비록 대중의 순서를 어기고 나를 친견하였지만 너는 나의 색신만 보았을 뿐 나의 법신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수보리 존자는 바위 밑에 그대로 안좌해있지만, 오히려 나의 법신을 친견하였느니라.” 곧 연화색비구니는 신통으로 전륜성왕의 몸을 나투었지만, 법에는 외려 깜깜했기 때문에 꼼짝 못하고 방망이만 맞은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이라는 것은 결코 알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사리불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지혜가 제일이다. 어느 날 사리불 존자는 성 안으로 들어가다가, 월상녀라는 보살이 성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디로 가느냐?” “사리불존자처럼 이렇게 갑니다.” “나는 성 안으로 들어가고 너는 성 밖으로 나오는데 어찌하여 사리불과 같이 간다고 하는고?” 월상녀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모든 불제자는 마땅히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합니까?”
“모든 불제자는 마땅히 대열반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사리불 존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월상녀가 말하였다.
“모든 불제자가 이미 열반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저는 사리불존자와 같이 간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법문은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열반의 경지를 알지 못하면 월상녀와 같은 답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연화색비구니보다는 월상녀가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반심은 밝히기 쉽지만 차별지를 밝히기 어렵다.”고 하였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넓게 탁 트인 한없는 경계만 보더라도, 모든 대지와 시방세계가 그래도 청정대열반의 세계요 청정대해탈의 세계이며 청정대원각의 세계요 청정대보리의 세계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털끝만큼도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중생의 갖가지 헛된 환상과 모든 생멸이 다 원각묘심을 좆아서 일어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경지를 옛사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기생들이 사는 곳은 사오백이요
풍류 즐기는 누각은 이삼천일세
이 말은 자칫 잘못 들으면 사람 버릴 소리가 되지만, 모든 대지와 시방세계가 해탈세계요 진여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러한 게송이 나오는 것이다. 또 주체와 객체를 다 잊어버리고 부처를 보고 법을 보는 것조차도 모두 없어지게 되면, 그때는 시방 무진세계 그 어느 곳에이라도 맞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또한 “이사가 불이 하고, 생사가 상주하며, 생불이 여여하다.” 하는 것도 다 같은 법문인 것이다. 정녕 죽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 대무애와 대원명과 대활발의 경지를 얻어야만 한다.
흰 물결이 하늘에 닿은 곳
그곳이 최고의 용심처라네
정사년(1977) 하안거 묘관음사에서
무봉탑은 보기 어렵도다
호랑이의 머리에 용의 몸이여
네거리 복판에서 종횡무진 노닐고
부처님 머리에 나귀의 다리여
하늘은 무너지고 바다는 마르며 일월은 떨어지도다
무쇠 소 머리에 진흙소 꼬리여
비춤과 작용과 손님 주인 따로 있고
뱀의 머리에 귀신의 얼굴이여
아침에는 삼천을 치고 저녁에는 팔백을 치네
이것이 어떠한 시절인고?
돌사람은 삼문 밖으로 뛰쳐 나가고
목녀는 빗자루 놓고 깔깔 웃노라
어느날 혜충국사가 시자를 불렀다.
“시자야!”
“예”
“시자야!”
“예”
이렇게 세 번을 부르고 세 번을 답하자 국사가 말씀하셨다.
“장차 내가 너를 저버리는가 하였더니, 도리어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
이 말은 ‘나는 아직 너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라는 뜻도 된다. 그런데 시자는 이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이 ‘삼환시자’에 대해서 많은 도인들이 송도 하고 염도 하였는데, 지문광조선사는 이렇게 염하였다. “아이를 사랑하다 추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지문선사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일까? 그 까닭을 바로 알면 참으로 최상의 바른 눈을 갖춘 대종사가 될 것이다. 또 말하였다. “몸이 궁궐 안에 있지만 궁궐 안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이 법문도 바로 알면 모든 불보살과 똑같이 볼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똑같은 삼매를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혜충국사가 돌아가실 때가 되자 숙종황제가 국사께 여쭈었다. “백년 후에 스님께 무엇을 바치리오?” “무봉탑을 만들어 주십시오.” “모양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국사께서 아무 말 없이 고요히 앉아 있다가 말하였다.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나으 제자인 탐원이 이 일을 알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뒷날 설두중현선사가 이에 대하여 송하였다.
무봉탑을 보기란 정말 어렵다
맑은 물에 푸른 용이 살지 못하고
층암절벽에 걸린 달 둥글고 밝아
영원토록 누구든지 볼 수 있도다.
대중은 설두스님의 뜻을 알겠는가?
도둑놈! 도둑놈!
천리길 같은 바람 태평한 세상이요
만리길 마음 통하는 벗이 가득하네
사십이장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일체중생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일체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거시 한 보살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일체 보살에게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 한 분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일체 제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무심도인 한 분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낙포선사께 한 승려가 여쭈었다.
“일체 제불을 공양하나는 것이 무심도인 한 분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는데, 삼세제불은 무엇이 모자라며, 무심도인은 어떠한 수승함이 있습니까?” 낙포스님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한 조각 흰 구름이 골짜기 입구를 막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새가 돌아갈 길 몰라 헤맸던고
이러한 법문은 본분종사의 눈을 갖춘 이라야 비로소 바로 볼 수가 있다. 여기에 대해 누가 향곡에게 물으면 게송으로 답하리라.
둥글고 밝은 달이 천지 밖을 비추는데
돌 사람은 여전히 바위 아래 졸고 있네.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으로 치고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새로 날아가니 깃털이 떨어지고
고기가 헤엄치니 물이 흐려지도다
다시 주장자로 법상을 치고 이르시기를
오리는 강물에 머리를 씻고
멧돼지는 뽕밭에서 등을 문지르네
“세존께서는 도솔천을 떠나지 않은 채 벌써 왕궁에 태어나시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 중생제도를 마치셨다.”하였으니 대중은 알겠는가?
그름됨으로 그릇되게 나아가도다
반산보적선사 밑에 보화존자라는 제자가 있었다.
반산스님은 돌아가실 때가 되자 대중을 불러 말하였다.
“나의 화상을 그려 올 사람이 있느냐?”
대중이 모두 화상을 그려 반산스님께 바쳤지만 하나같이 ‘아니다’ 하셨다. 그때 보화존자가 나와서 말하였다. “제가 그려왔습니다.” “어째서 나에게 바치지 않느냐?” 반산스님이 묻자 보화존자가 곤두박질을 한 번 치고는 나가 버렸다. 반산스님이 말씀하셨다.
“저 녀석은 이 다음에 미친놈처럼 사람을 제접할 것이다.”
과연 이 말씀대로 뒷날 보화존자는 항상 네거리 한복판에서 서서 요령을 흔들면서 노래하였다.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으로 치고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으로 치고
사방팔면에서 오면 회오리바람으로 치고
허공 속에서 오면 도리깨로 친다네
이렇게 보화존자는 밤낮없이 사방으로 바쁘게 다녔다. 하루는 임제선사가 하양과 목탑스님을 데리고 승당에 앉아 화룻불을 쪼이다가 말하였다. “보화가 네거리 한복판에 서서 미치광이 짓을 하니 범부인가, 성인인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제 왔는지 보화존자가 임제스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임제스님은 보화존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범부인가, 성인인가?” 보화존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반문하였다. “그대가 일러 보라. 내가 범부냐, 성인이냐?” 임제스님이 갑자기 벽력같이 ‘할’을 하자, 보화존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하양은 새색싱 목탑은 노파선이며, 오줌싸개 꼬마 임제는 도리어 한쪽 눈을 갖추었구나.” 이에 임제스님은 소리쳤다. “도둑놈아! 도둑놈아!” 그 뒤 보화존자와 임제스님이 한 신도 집에서 함께 공양을 받게 되었다. 임제스님이 보화존자에게 물었다. “가는 털이 큰 바다를 삼키고 조그마한 겨자 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간다 하니, 이것이 신통묘용인가? 본체가 그러한 것인가?”
보화존자는 공양상을 뒤엎어 버렸다. “크게 거칠구나.” 임제스님이 나무라자 보화존자가 말하였다. “이 속에 무엇이 있기에 거칠다 부드럽다 할 것인가?” 이튿날 보화존자와 임제스님은 또다시 공양청을 받아 함께 신도 집으로 가게 되었다. 임제스님은 또 물었다. “오늘 공양은 어제의 것과 같은가?” 보화존자는 또 어제처럼 공양상을 뒤엎었다. 그것을 보고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옳기는 옳지만 크게 거친 사람이로다.” 보화가 크게 소리를 치며 말하였다. “이 눈 먼 놈아! 불법 어디에 거칠고 부드러움을 설하였더냐?” 이 말을 듣고 임제스님은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
임제스님은 어째서 혓바닥을 내밀었는가?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분들은 모이면 언제나 이와같이 대기대용을 희롱하였고, 조금도 막힘이 없이 모든 삼매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대로 한번 걸어보기도 하고 덮어 보기도 하고 묶어 보기도 하였지만, 그 어떠한 것에도 걸리지 않고 덮이지 않고 묶이지도 않았다. 이렇듯이 임제와 보화존자는 안목이 참으로 높은 조사들이요, 이런 스님들께 공양을 올린 신도들은 참으로 진공양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문을 베풀어 빛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며, 몇천 년이 지나도록 그 법문이 그대로 남아 참공양을 빛나게 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 뒤로도 보화존자는 항상 거리에서 요령을 흔들며 노래하였다.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으로 치고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으로 치고
사방팔면에서 오면 회오리 바람으로 치고
허공 속에서 오면 도리깨로 친다네
하루는 임제스님이 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네가 가서 보화가 한창 요령을 흔들며 말을 할 때에 꽉 끌어 안고는 ‘모두가 오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물어보아라.” 시자가 임제스님께서 시킨 대로 하였더니 보화존자는 전혀 엉뚱한 답을 하였다. “내일 대비원에서 공양이 있다.” 시자가 임제스님께 그대로 이야기하였더니,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이전부터 저 녀석을 의심하였노라.” 이 법문에서 ‘저 녀석을 의심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화선사와 임제선사 같은 도인들은 법을 써도 써도 다함이 없었기 때문에 몇백 년 몇천 년이 지나도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보화존자는 네거리 한복판에 서서 평소와는 달리 말하였다. “누가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사람들이 정성껏 장삼을 만들어 드렸지만 원하는 옷이 아니라며 받지 않으므로 임제스님께 그 이유를 물었다. 임제스님은 원주를 시켜 관을 하나 짜 오게 하였고, 때를 맞추어 보화존자가 찾아오자 말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주려고 직철 한 벌을 만들었노라.” 보화존자는 그 관을 짊어지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임제가 나에게 직철을 만들어 주었으니, 나는 동문으로 가서 열반에 들리라.” 사람들은 보화존자의 열반을 보기 위해 앞다투어 동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하루종일 기다려도 열반에 들기는커녕, 다시 관을 짊어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오늘은 일진이 나쁘니 내일 남문에 가서 열반에 들리라.”
이튿날 사람들은 남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날도 열반에 들지 않았고, 또 관을 짊어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내일 서문으로 가서 열반에 들리라.” 사람들이 또 서문에 갔더니 그날도 역시 열반에 들지 않고 또 다시 “내일 북문에 가서 열반에 들겠다.”고 하였다. 삼 일 동안을 이와 같이 하니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게 되었고, 나흘째 되는 날에는 사람들이 전혀 모이지 않았다. 보화존자는 아무도 없는 북문에서 스스로 관 속으로 들어간 다음, 지나가는 사람에게 단단히 못을 박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관에 못을 쳐 준 사람은 성 안으로 들어가 소문을 퍼뜨렸고,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갔지만 때는 이미 지난 뒤였다. 열반에 든 보화존자께서는 몸을 이미 벗어 버렸고, 공중으로부터 평소의 그 요령소리만 은은히 들려올 뿐이었던 것이다. 응화성인 보화존자께서 이 세상 중생들에게 보여주신 이와 같은 모습들! 누구든지 공부를 하여 깨닫게 되면 보화존자와 같은 자유자재함을 얻어서 마음대로 쓸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는 결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예전의 능행파, 유철마, 태산파자, 영조 같은 이들은 모두 여자였지만, 깨달음을 얻어 예리한 기봉을 마음대로 썻던 것이다. 누구든지 공부만 하면 안되는 사람이 없고, 이 자리에서 능히 자재로워질 수가 있다. 왜 스스로 중생이 되어 몇천만 겁토록 생사윤회를 거듭하며, 대자유를 잃은 채 밤낮으로 한없는 고만 받고 있는가? 중생성불이 찰나 사이에 있으니, 부지런히 애를 써야만 한다.
천만 마디 말을 해도 아는 이가 없으니
바람 따라 비로 변해 앞산을 지나간다.
이빨을 세 번 부딪침과 ‘하필’
주장자를 들어 선상을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옛사람이 말씀하셨다. “내가 오로지 우리 종문을 잇는 일만을 거량한다면, 법당 앞의 풀이 한 길이나 무성하리라.” 또 조주스님은 말씀하셨다. “잠깐이라도 시비를 하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어버린다.” 이 법문에서 ‘어지러이 본심을 잃어버린다’는 말 속에 매우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참으로 본분종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이 말씀에 이어 조주스님은 대중에게 물었다. “답은 명확히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낙보스님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윗니와 아랫니를 세 번 부딪쳤고, 운거스님은 ‘하필’이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말하였을까? 또한 조주스님은 낙보와 운거스님의 답을 듣고 말씀하셨다. “오늘 여러 사람이 몸과 목숨을 모두 잃는구나” 이 말씀의 뜻을 바로 사무쳐 알면 불조의 근본처가 바로 해결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여, 밖으로 색성향미촉법 육진의 경계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그 어떠한 물건도 보지 못하고, 안으로 육근과 육식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려서, 육근과 육식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경계에 이르러 보라. 자연히 밖으로 삼라만상을 다 잊어버리고 안으로 육근과 육식의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과 희로애락이 다 없어져서, 돌 사람과 같고 나무 사람과 같아져야 문득 무심삼매에 들어가게 되나니, 이 경계에 들어가면 깨닫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 경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모든 분별과 망상과 번뇌가 백천 가지 생멸을 일으켜 안팎에서 동시에 분연히 일어나지만, 이러한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경계에 들어가면 무진세계가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며, 또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좁고 좁은 이곳에서 홀연히 한 기틀 한 경계 위에 광활하고 끝이 없는 대천세계가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허공도 용납할 수 없는 굉장한 경지를 투과하고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발심하여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시방의 허공이 모두 사라진다’ 하였고, ‘몸과 마음을 요달하여 남을 없으면 시방의 법왕신에 원만히 통하리라’ 하였다. 곧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건이 홀연히 우주에 가득 찰만한 큰 물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머리 셋에 여섯 개의 팔을 갖춘 대력지인이 되어 네거리 한복판에서 종횡무진하게 되나니, 그 앞에는 누구도 감히 서 있을 수가 없게 된다. 덕산스님을 말씀하셨다. “오묘한 말을 모두 다 하더라도 한 가락의 털을 태허공에 두는 것과 같고, 세상의 중요한 것을 다 하더라도 한 방울의 물을 큰 골짜기에 던지는 것과 같다.” “오늘 이후, 천하 노화상의 말씀에 대해 다시는 의심하지 않으리라.” 우리가 이러한 경지를 얻을 것 같으면, 일생을 수용하고도 다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가 다하도록 수용하여도 다함이 없게 되는니라. 이와 같은 까닭으로 산승이 늘, ‘만겁토록 홀로 천하를 누비며, 지극히 밝고 지극히 빛나고 두루 통하고 두루 밝은 경지와 가히 설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를 취하여 마음대로 수용한다.’고 한 것이다. 일찍이 황벽스님은 게송으로 이르셨다.
티끌 세상은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긴히 마음을 잡아서 한바탕 애쓸지어다
만약 찬 기운이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매화의 향기가 코에 가득하리오
백억 세계 모든 나라 장안 속에서
마음대로 뛰어노니 모두 다 즐겁도다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존체 만복을 누리소서
운문스님이 말씀하셨다.
“평지에서 죽은 사람 헤아릴 수 없어라. 가시밭을 지나가야 좋은 솜씨라 하리.” 부처님과 조사들이 만들어 놓은 백천 개의 관문이 가시밭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 가시밭을 뚫고 지나가야만 대장부의 일을 능히 마칠 수 있게 되느니라.
예전에 임제스님의 제자인 삼성스님이 설봉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그물을 뚫고 나온 금붕어는 무엇을 먹습니까?”
“네가 그물을 뚫고 나오거든 그때 너에게 일러 주리라.”
“천 오백 명 대중을 거느린 선지식이 화두도 알지 못하도다.”
“노승은 주지 일이 너무 번거롭도다.”
그 뒤 설봉스님은 삼성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원숭이를 보고 말하였다.
“저 원숭이가 각각 옛 거울 하나씩을 짊어지고 있다.” 이에 삼성이 여쭈었다.
“몇 겁을 지내도록 이름조차 없는데 어찌하여 옛 거울이라고 하십니까?”
“티가 생겼도다.”
이에 삼성은 또 말하였다.
“일천 오백 명 대중을 거느린 선지식이 화두도 알지 못하는도다.” 설봉스님도 역시 말하였다.
“노승은 주지 일이 너무 번거롭도다.”
또 조주스님은 어린 사미 시절에 은사스님과 함께 천 리 밖에 계신 남전 스님을 친견하러 갔었다. 남전스님 처소에 이르러서 조실방으로 들어갔을 때 남전스님은 누워계셨다. 스님은 어린 사미 조주를 보고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에서 왔습니다.”
“그럼 서상을 보았느냐?”
“서상은 보지 못하였지만 누워 계신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네가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습니다.”
“너의 주인은 누구인고?”
이에 조주스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한 다음 본래 서 있던 곳으로 가서 말하였다. “첫봄이 오히려 춥습니다. 원컨대 화상께서는 존체 만복을 누리소서.” 그리고 절을 하자, 남전스님께서 기특하게 여기고 말하였다. “이 아이를 별채에 머물도록 하라.”
이와 같이 조주스님은 조금도 미함이 없이 자유자재하였다. 십세 미만의 어린 나이로 도를 닦은 바도 없이 다 알았으니, 다시 ‘깨닫는다’ 하여도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뒤에 조주스님은 남전스님의 법을 이었다. 조주스님은 팔십세가 넘도록 행각을 하여, 마조스님을 비롯한 80여 선지식을 다 친견해도 ‘개개작가’라고 하였다. 그 80여 선지식은 모두 사숙뻘이 되거나 노덕스님들인데도 조금도 속지 않고 막히지도 않았으며, 날카로운 선문답으로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기를 자유자재로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방에서는 조주스님을 모두 ‘조주고불’이라고 불렀다. 또 어느날 조주스님은 국청사에 있는 한산과 습득을 찾아갔다. 한산과 습득이 부엌에 앉아 불을 쪼이고 있는 것을 보고 조주스님은 말하였다. ‘한산과 습득이라고 널리 이야기하더니만, 와서 보니 두 마리 수고우水牯牛로구나!
수고우란 야생의 들소로 걸림 없이 제 마음대로 다니며 풀을 뜯는 소이다. 한산과 습득은 그 말을 듣고 부엌에서 나와 소 싸움을 하듯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들이밀었다. 이를 보고 스님은 혀를 찼다. 이에 대해 향곡이 착어를 하자면 “두 도둑놈!”이라고 했을 터인데, 조주는 어째서 혀를 찼을까? 이어서 한산이 눈을 부릅뜨고 조주스님을 바로 보자, 조주스님은 겁먹은 모습을 지으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산과 습득은 뒤따라 들어와 물었다. “조금 전에 우리가 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주스님은 손바닥을 치면서 웃었다. 이 가운데에 다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음이 있는 것이다. 또 조주스님이 운거스님 회상에 찾아가니 운거스님이 말씀하셨다. “다 늙은 사람이 어찌하여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는고?”
“어떤 곳이 제가 머물를 곳입니까?”
“산 앞에 옛 절터가 있느니라.”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그곳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운거스님이 답을 하지 않고 그만두었다.
이 법문에서 ‘산 앞의 옛 절터’는 어떤 곳인가? 또 운거스님은 수백명을 거느린 스님이라 머무를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조주스님은 왜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그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까?라고 물은 것일까? 이와 같이 조주스님은 모든 기봉을 항상 구름과 같이 비와 같이 썼고, 모든 것에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구십 일의 결제 해제 둘 다 잊어버리니
금빛 고기의 한 소리는 하늘 밖을 날아가네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따도다.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 내리치고 ‘할’을 한 번 하신 다음 이르기를, “알겠는가?”
십 년을 법중대에 앉아 있더니
위음왕불 이전까지 꿰뚫었도다
무한한 건곤천지 옛 국토 속에
백화는 향기롭고 자고새는 울부짖네
한 승려가 조주스님 회상에 올래 머물러 있다가 하직 인사를 하러 가니, 조주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처 있는 곳에서 주하지 말고, 부처 없는 곳은 급히 지나가 삼천 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그릇된 일을 말하지 말지니라.” “그렇다면 가지 않겠습니다.”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따는구나.” 또 방거사는 초암에 홀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말하였다. “어렵고 어렵도다! 백석이나 되는 참깨를 나무 위에 폄이로다.” 방거사의 아내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쉽고도 쉽도다! 백 가지 풀마다 조사의 뜻이로다.” 방거사의 딸 영조가 듣고 있다가 말하였다. “어려움도 없고 쉬움도 없도다! 배 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잔다.” 이 두 법문은 삼천 리 밖에서 편안히 독립하여, 동쪽을 좇아 서쪽을 지나가고 서쪽을 좇아 동쪽을 지나가며 마음대로 하는 시절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을 다 마친 대장부가 되어 어떠한 법이든 마음대로 쓸 수가 있게 되느니라.
구름은 고갯마루에 한가로이 머무는데
바위 틈 새 흐르는 물 무척이나 바쁘구나
문수보살의 청정도량
대지에 티끌이 없어졌는데
어느 누가 눈을 뜨지 못하겠는가
여윈 학은 고목위에 한쪽 다리 들고 섰고
까부는 원숭이는 고대古臺에서 울고 있도다.
해제일은 자자를 하는 날로 여러 곳에 흩어져 안거한 제자들이 부처님 회상으로 모여들게 된다. 문수보살도 다른 곳에서 안거를 한 다음, 자자에 참여하기 위해 부처님 회상으로 왔다. 그때 가섭존자가 물었다. “어디서 안거를 하고 이제 오십니까?” “나는 백정의 집에서 한 달 있었고, 기생의 집에서 한 달, 술 집에서 한 달을 있다가 왔노라.” “그대는 해제에 참석할 수 없소. 나쁜 곳으로만 돌아다니다 왔으니 여기에 있을 자격조차 없고, 여기는 청정일여하여 조금도 동함이 없는 대중들이 머무르는 대보리도량이오. 어떻게 그대 같은 이가 여기에 있을 수 있겠소.” 가섭존자는 이렇게 꾸짖고 백퇴를 들어 문수보살을 쫓아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문수보살이 백억문수로 변하여 부처님 회상을 가득 채워 버리는 것이었다. 이에 세존께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가섭아, 어느 문수를 쫓아내려고 하느냐?” 이 말씀은 “어느 문수가 참문수냐?”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깨닫고 보면 무진세계가 다 원각세계이다. 원각세계에서 보면, 중생이 춤추고 술먹고 놀고 살생하는 등의 잘못은 전혀 볼 수가 없고, 어느 곳이나 대청정보리도량 아닌 곳이 없다. 그러므로 3조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네
버릴 것은 오직 간택심뿐
밉다 곱다는 마음 없으면
탁 트이어 도리어 명백하리라.
이와 같이 확연명백하면 곧 결정된 무변대도이다. 거기에는 생사도 없고 티끌도 없고 멀고 가까움도 없고 노소가 없다. 그야말로 백억 무진세계가 대청정적멸법당 아닌 곳이 없기 때문에, 예부터 “문을 열면 석가를 만나고 발을 거두면 미륵을 만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나무나 돌이나 흙으로 만든 석가나 미륵상이 아니라, 여래의 청정신법신을 친견한다는 말이다.
백조는 긴 강물 위에 내려앉고
외로운 구름은 먼 산에서 일어나네
부처님의 말없는 법문
법좌에 올라 한동안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사부대중은 알겠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어복을 벗어 놓고 폐구의를 입었노라.” 이 법문 속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참으로 높은 뜻이 담겨 있다. 진어복이란 천자가 입는 보배 옷인데 상상근기인을 두고 말한 것이요, 폐구의는 중하근기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의 적멸상은 가히 말로써 설명할 수 없도다. 나는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들어 버릴까보다.” 이법은 바로 보여주어도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까마득하기만 하고 막연하다는 생각만 일어날 뿐이다. 마치 광대무변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가나?“하며 어렵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하근기인을 위한 방편문을 열어 49년 동안 설법하셨으니, 이 일대시교가 팔만대장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에 산승이 법좌에 올라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사부대중은 알겠는가?’ 하고 말한 것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나 문자로 설한 교법에서는 이를 보리라고도 하고 원각이라고도 하고 도라고도 하고 묘각이라고도 하고 심지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많고 많은 이름과 술어가 있는데, 이와 같은 이름과 술어를 취하지 않고 법문을 하면 중하근기인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조주스님께는 연왕과 조왕이 자주 와서 법문을 청하였는데, 하루는 시자가 아뢰었다.
“대왕이 옵니다.”
조주스님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왔느냐?”
“대왕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또 왔는냐?”
여기에서 “또 왔느냐?” 하는 이 말을 바로 알면 법문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왕이 정말로 도착하였을 때 조주스님은 선상 위에 가만히 앉은 채 접대를 하며 말하였다. “상근기인이 오면 선상에 앉아 영접하고, 중근기인이 오면 문 밖으로 나가 영접하며, 하근기인이 올 것 같으면 저 산문밖에까지 나가서 영접합니다.” 그러자 조왕과 연왕이 그 뜻을 알고 절을 하며 좋아하였다. 참으로 입을 열어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 것보다는, 아무 말 없이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꿰뚫어 보면 대장부의 일을 다 마치게 되는 것이다.
산승이 항상 하는 법문인데, 부처님 당시에 어떤 외도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법문을 청하였다.
“유언으로도 묻지 않고 무언으로도 묻지 않나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계셨고, 이때 외도는 부처님께서 묵묵히 앉아 계신 뜻을 깨달았다.
“세존께서는 대자대비로 저의 미운을 열어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습니다.” 외도는 크게 기뻐하며 떠나갔다. 이 법문에서, 부처님께서는 법을 다 설하였고 외도는 그 법문을 모두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때 부처님 옆에는 아난존자가 있었다. 아난존자는 언제나 부처님 곁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한량없는 법문을 모두 들었다. 매우 총명하였던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49년동안 설한 일대시교를 하나도 잊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다문제일이라 칭하여지고 있다. 그러한 아난존자였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부처님께서 묵묵히 앉아 계셧던 까닭을 알 수가 없었고, 또 외도가 그렇게 말한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외도는 무엇을 증득하여 도를 이룬 것입니까?” “아난아,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갈 길을 아느니라.”
이 말씀처럼 구태여 입을 열어 광장설을 한다고 하여 법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특한 봉황은 바람 따라 천리를 날아가고
어리석은 뱁새는 여전히 울타리 밑을 맴도네
울타리의 마른 가지는 아무 소용도 없는데, 뱁새처럼 거기에 머물러 무엇을 찾을 것인가? 더욱이 부처님의 ‘정법안장과 열반묘심과 교외별전은 모두 불립문자라 하였으니, 49년 동안 설한 것과 참된 법문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면 부처님께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신 그 뜻을 알게 될 것이요, 조금 전에 산승이 묵묵히 앉아 있었던 까닭도 알게 될 것이며, 앞에서 말한 조주스님의 상상근기법문도 알게 될 것이다.
정녕 이러한 법문은 공부를 하여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지 못하면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애써 공부를 하여 언제라도 해결이 되어야만 한다. 해결만 되면 바로 알고 바로 보고 바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이 법은 깊고 깊은 뜻이 있어 생각으로는 가히 헤아리지 못한다. 오직 이 법을 깨달아야만 법법이 원통하고 원명하며, 법법이 다함없는 세계를 빛나게 하며, 일을 끝마친 사람이 될 수 있느니라.
만고의 푸른 못에 비친 허공계의 달
두서너 번 건져 보면 비로소 알리라.
이 뜻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공부를 잘 해 가기를 부탁하고 또 부탁하노라.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정사년(1977) 5월 4일 묘관음사에서
도는 알고 알지 못하는 데 속하지 않는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또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비구니는 원래 여자가 되는 것이니라”
또 다시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시기를,
“구부러진 다리 속에 바른 다리가 있느니라.”
알겠는가? 이를 분명히 알면 이 자리에서 바로 해제를 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백천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과 다함이 없는 무진삼매를 한꺼번에 다 얻어 천상과 인간 세상에서 무애자재하고 어떠한 인연 속에서도 마음대로 노닐 수 있게 된다. 또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천하의 노화상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경지에서 행주좌와하고 어묵동정하며, 동서남북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밝고 빛나고 뛰어나고 당당할 뿐 아니라, 만겁토록 홀로 나타내고 바탕을 스스로 한결같이 하여 영원히 어둡지 않게 되느니라. 이전에 어떤 이가 나에게 물었다. “깨닫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동지에서 한식까지는 백오일이니라.” 이 ‘동지에서 한식까지는 백오 일’이라고 한 뜻을 알지 못하면, 불법의 참된 골수는 꿈에서도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누가 나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견성을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동지에서 한식까지는 백오 일이니라.” 그러자 물은 사람이 말하였다. “저는 스님의 답이 다르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대는 동지에서 한식까지는 백오 일이라고 한 뜻을 아느냐?” “제가 물을 때에 저를 때릴 줄로 알았는데, 동지에서 한식까지가 백오 일이라 하니 정말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면 부처와 법에 대한 견해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만약 티끌만큼이라도 부처나 법에 대한 견해가 있게 되면 크게 편안한 자리에 앉는 사람은 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바른 법문과 바른 눈을 갖추어야만 참된 종사가 될 수 있고 불법을 제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옛 스님은 말씀하셨다. “깨달음이 없지는 않으나 이두에 떨어져있다.” “이야기해 주는 것은 사양하지 않으나 후손을 상하게 할까 두렵구나.” 이러한 말씀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나니,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제1구에서 얻으면 불조로 더불어 스승이 되고, 제2구에서 얻으면 인천으로 더불어 스승이 되며, 제3구에서 얻으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고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느니라. 이에 대하여 옛 스님은 평을 하셨다. “제1구는 도장을 가지고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제2구는 도장을 가지고 물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으며, 제3구는 도장으로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한 까닭을 아는 사람은 모든 도를 환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옛 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도는 알고 알지 못하는 데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면 능히 제1구와 제2구와 제3구를 판단할 수가 있다. ‘이와 같다’고 하여도 옳지 않고 ‘이와 같지 않다’고 하여도 옳지 않으며, ‘이와 같고 이와 같지 않은 것 모두가 옳지 않다’고 하면 진금이 금색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다’고 하여도 옳고 ‘이와 같지 않다’고 하여도 옳으며, ‘이와 같고 이와 같지 않음이 모두 옳다’고 하면 흙 속에서 금을 얻게 된다. 우리가 깨달으면 삼라만상 하나하나가 밝고 밝으며 하나하나가 참될 뿐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면 자유롭게 거두어들이고 놓아 버리며,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며, 어디에서나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로 주고 빼앗을 수가 있다.
조주스님은 어릴 때 깨달아서 팔십이 넘도록 행각을 하셨다. 제방의 선지식과 겨루어 참된 안목을 갖추기 위해 행각한 것이다. 이러한 조주스님이 한 암자에 가서 물었다.
“암주는 계시는가?”
암주가 말없이 주먹을 바로 들어 보이자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물이 얕아서 이곳에는 배를 대지 못하겠노라.”
그리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조주스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전광석화와 같이 알아차린다.
조주스님은 다시 다른 암자로 가서 물었다.
“암주는 계시는가?”
암주가 말없이 주먹을 바로 들어 보이자 이번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능히 주기도 하고 능히 빼앗기도 하며, 능히 죽이기도 하고 능히 살리기도 한다.”
두 암주가 똑같이 주먹을 들어 보였는데 어찌하여 한 사람은 긍정하고 한 사람은 긍정하지 않았는지 대중은 알겠는가? 발밑을 잘 살펴보아라! 한 번 ‘할’을 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정사년(1977) 하안거 동화사에서
법왕의 법은 이와 같도다.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대중은 알겠는가? 석가와 달마도 다시 30년을 참구하여야 비로소 알 수가 있느니라.
어느 날 부처님께서 법상에 올라 정좌하고 계셨다. 그때 문수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백퇴를 친 다음 대중에게 말하였다. “자세히 법왕의 법을 관찰하라. 법왕의 법은 이와 같노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부처님께서는 법상에서 내려와 본처로 돌아가셨다. 이렇게 하여 법문을 다해 마친 것이다.
중국의 약산스님도 원주의 청에 못이겨 법상에 올라 갔으나,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시다가 문득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원주가 뒤쫓아 가서 여쭈었다. “화상께서는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기를 허락해 주시더니, 어찌하여 한마디의 가르침도 내려 주시지 않으십니까?” “원주야, 경에는 경사가 있고 논에는 논사가 있으니 노승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아라.” 법문이라는 것은 입을 열어 이야기하는 것만 법문이 아니다. 언어 이전에 알아 버리면 더 설할 것이 없느 것이니, 더 설할 것이 있으면 오히려 시원찮은 법문이 되느니라. 금강경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마침 공양 때가 되어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바리때를 들고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 차례로 밥을 빌어,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다음, 가사와 바리때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를 마련하여 앉으시었다. 때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의 옷을 벗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꿇어 합장 공경하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존자는 어째서 ‘희유세존’이라 하였는가? 부처님께서 아무 말 없이 앉아 게셨는데 무엇을 보고 ‘희유하다’ 한 것인가? 수보리가 본 것을 그대로 보기만 하면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것을 다 알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장부가 할 일을 다해 마쳐서, 백천 법문과 무량한 묘의와 다함이 없는 무진삼매를 한꺼번에 다 갖추게 되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시방의 보살과 모든 조사의 경지를 이루게 되며, 연화장세계와 상적광토와 일체 모든 세계를 한꺼번에 보고 요달하여 다시 더할 것이 없게 되는니라. 모름지기 참선 공부를 하는 까닭은 이것 하나 해결하는데 있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언제나 법을 끊임없이 설하고 있기 때문에, 항항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모든 보살이 미래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입으로 설하고 또 설할지라도 법은 역시 조금도 건드려 보지 못하나니, 곧 설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입을 열어 설하는데 설함이 없다고 하며, 입을 열어 설하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는가? 또 설하지 못하고 설할 수 없는데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49년을 설하셨는가?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산승은 항상 ‘말해 보아도 그저 그렇고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꼭 맞아 들어가나니, 마치 거울 앞에 검은 얼굴의 오랑캐가 오면 검게 나타나고 붉은 얼굴의 한인이 오면 붉은 것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열거한 볼조의 의지를 알겠는가?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원앙새 수를 놓아 그대 보라 한 것이니
황금 침을 가져다가 남에게는 주지 마소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화로 속의 한 점 눈
여기 한 기틀이 있으니 최초의 위음왕불 이전에는 동쪽을 좇아 서쪽에 섰고 마지막 누지불 이후에는 서쪽을 좇아 동쪽에 선다. 대중은 알겠는가?
이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면 일체의 한량없는 묘리와 무수한 삼매를 모두 증득하여, 거울 앞에 검은 얼굴을 오랑캐가 오면 검게 나타나고 붉은 얼굴의 한인이 서면 붉게 나타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걸림이 없다. 또 아무리 많은 백천만억의 경계가 다가오더라도 거기에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여여부동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경게가 어떻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은 불법은 누구든지 깨달아야만 알 수 있다. 깨닫지 못하면 천 권의 경전과 만권의 논서를 외우고 쓸지라도 오히려 큰 힘이 되지 못한다. 실로 부처님의 법을 깨닫고 나면, 여의려야 여읠 수가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가 없다. 또 모로 구르거나 뒤로 가거나 앞으로 가거나 항상 밝고 빛나며, 더욱 더 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연꽃은 물속에서 자라난다. 높은 언덕이나 마른 땅에서는 나지도 않고 자랄 수도 없다. 그러나 천 도 만 도나 되는 뜨거운 불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은 아무리 없애려 하여도 없어지지 않고 언제든지 피어 있다. 이 세계가 다 타서 없어져도 그 연꽃은 더욱 빛나고 더욱 향기가 나며, 어느 곳이든 다다르는 곳마다 향기가 더욱 분분하다.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얻고 자기의 안목을 확실하고도 밝게 갖추면, 불 속에서 피어나는 화중생련과 같아서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정녕 이 도리를 능히 해결하여 깨달을 것 같으면, 최초의 위음왕불 전이나 최후의 누지불 후에도 다함이 없이 항상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허공은 다함이 있을지언정 이 도리는 다함이 없나니, 한 번 깨달으면 영겁토록 미하지 않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셔서 일대장교를 설하신 것을 눈 밝은 종사의 안목으로 보면, 오히려 모래를 뿌리고 흙 가루를 뿌린 것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 마치 수미산보다 몇천만 배나 더 크고 많은 진수성찬이 가득히 있어, 일체의 모든 사람이 미래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배부르게 먹고도 남는데, 공연히 석가모니불께서 오셔서 쉰 밥이나 찌꺼기 밥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달마대사가 동토에 법을 전하러 왔다고 함도, 물을 해변가로 짊어지고 와서 파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공부를 하기 전이나 공부를 한 이후라도, 자기의 근본이나 정법안장이나 공겁 이전으 자기는 항상 스스로 드러나 있고 조금도 모자람이 없나니, 여기에 이르러 누가 무엇이라 할 것인가? 그 앞에는 백천 법문과 한량없는 묘리도 ‘화로 속의 한 점 눈’과 같은 것이다. 참으로 최상의 바른 눈으로 보면 몸 전체가 그대로 손이요 그대로 눈이다. 여기에서 말한 ‘몸’은 조그마한 이 육신, 이 몸뚱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덮고 땅도 덮고 대천세계를 덮을 만한 안목을 갖춘 큰 몸을 말하는 것이다. 또 전체가 눈이요 손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보고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이름하여도 저절로 꼭 맞아 들어가서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조사들처럼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재하고 거두어들이고 놓아버리는 것이 자유로우며, 기용이 무애하여 살활종탈과 기용제시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는니라.
한 줌의 버들가지 거두어 잡지 못해
봄바람만 옥난간에 걸어 두도다.
큰 보배 거울의 방광
높은 누각 위에서 옥피리를 연주하니
온 세상 모두가 노래하고 춤을 추네
여기에 무슨 생사가 있겠는가? 우리가 이러한 소식을 알고 또 이렇게 되기 위해 밤낮으로 정진을 하고, 또 이렇게 되게 하고자 법문을 설하는 것이다. 모든 육도중생 각각에게는 보배 거울이 하나씩 있는데, 무념무상인지라 형상도 없고 장단도 없다. 이 보배거울은 한량없는 세계가 모두 멸하여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체제불과 육도중생은 한 치도 벗어남이 없이 항상 이 거울 가운데에서 살고 있으며, 여기에 모인 중생들도 다 이 거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 거울만 깨달아 알면 부처가 있는 곳을 환하게 알게 되며, 또 이 거울을 행주좌와와 어묵동정 속에서 자유자재로 수용할 수 있게 되는니라. 그렇게 되면 어느 세계가 극락 아닌 곳이 있겠는가! 만약 금일 대중이 이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백천만억 겁에 조금도 오고 감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는 대보경삼매를 이루어,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만억 겁을 지내기도 한다. 이것을 자수용삼매라고도 하고 모든 부처님의 안심입명처라고도 하느니라.
옛날에 천태지자선사는 법화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나서 말씀하셨다.
“영산회상이 엄연히 흩어지지 아니한 것을 보았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다 이렇게 될 수가 있다. 공부를 하여 깨닫는 것은 여자라고 하여 못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요연 비구니는 공부를 하여 깨달은 다음 오도송을 남겼다.
오온의 망상 무더기 그대로 고불당이요.
비로자나불 밤낮없이 백호광명 놓고있네
여기에서 같고 다음이 없음을 안다면
화엄세계가 그대로 시방세계에 두루하리
이 오도송의 ‘백호광명을 놓고 있다’는 말은 깨달은 사람이라야 알 수가 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인데 항상 광명을 놓고 있으며, 그곳이 바로 적광토이다. ‘광명을 놓고 있다’고 하지만 달이나 해처럼 때에 따라 환하게 뿜어내는 광명이 아니다. 항상 고요하고 청정하고 한결같이 방광하나니, 그곳이 바로 일체 무명의 업식번뇌가 없고 생사가 영원히 끊어진 상적광토인 것이다. 그곳에는 언제나 적광삼매가 가득하다. 또한 화엄세계는 모든 부처님과 중중무진의 보살이 계신 불가사의한 불세게이다. 누구라도 공부하여 깨닫기만 하면, 요연비구니의 오도송과 똑같이 될 수 있느니라.
천만 마디 말을 해도 아는 이 하나 없고
지난밤 비 지나간 연못에 가을이 깊었네
청정진여의 참부처님
옥마는 거북 털로 만든 집에서 울부짖고
철우는 토끼 뿔로 만든 다리 위로 달아나네
돌 사람은 수미산에서 금으로 만든 북을 치고
바다 밑 목녀는 술에 취해 춤추고 노래하네
이 게송을 분명히 알 것 같으면 불조와 더불어 꼭 같이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조그마한 티끌도 없어서 극락세계 상적광토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만약 이것을 바로 알게되면 견성을 했다고도 하고 해탈을 했다고도 하며, 성도를 했다고 하고 생사를 초월했다고도 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이 몸이 없어지면 죽었다고 슬퍼하고, 태어나면 이 세상에 왔다며 즐거워하는가? 오고 감이 있고 나고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명이 중생의 눈을 가려 생멸이 없는 경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명이 마음의 눈을 가리면 가지가지 번뇌가 일어나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신심과 용맹심을 내고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공부를 하면, 자기 마음이 청정진여의 참부처님을 알 수 있게 되고, 다시는 생멸이 있는 경계를 보려야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백천만겁토록 고통을 받고, 또 생사윤회의 세계를 끝없이 돌도 돌게 되는니라. 옛 스님은 말씀하셨다.
“참선을 하는 이는 모름지리 조사관을 뚫어야 한다.”
조사관을 뚫게 되면 모든 대지와 시방세계 모두가 거북의 털이요 토끼의 뿔이거늘, 어찌 세계가 있고 생사가 있게는가? 중생은 과거의 시작 없는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고 가고 가고 오며 한없이 윤회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는 것은 과거에 지은 바를 기억하고 있는 제8식을 인으로 하여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8식을 종자식 또는 여래장식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제8식은 근본 무명을 없애야만 해결이 된다. 근본 무명을 없애지 못하면 나기 싫어도 나야만 하고 나고 싶어도 뜻과 같이 나지 못하며,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육도를 돌고 또 돌며 윤회하게 된다. 곧 일념착오로 인해 생사 속을 윤회하면서 여러 가지 몸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장졸수재라는 거사는 노래하였다.
광명이 모든 세계 고요하게 비추니
영을 지닌 생명들은 모두가 한 집안
한 생각 나지 않으면 전체가 드러나고
육근이 움직이면 저 구름에 가려지네
번뇌를 없애려 하면 병만 더욱 심해지고
깨달음만 추구해도 이 또한 삿됨일세
중생의 뜻을 따라 걸림이 없으니
생사열반 모두가 허공 중의 꽃이더라.
이 게송이 보기에는 수수해 보이지만 참선의 요긴한 뜻이 잘 담겨져 있다. 참선은 만법의 근원을 찾는 것이니, 근원만 찾으면 지엽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지엽적인 물질만을 좇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제 죽는 줄 모르고 불 속으로 달려드는 불나비와 같은 것이다. 파도가 없는 고요한 바다에서 배를 타는 것을 누가 못하랴. 흰 파도가 하늘에까지 이르고 큰 물결이 넘실거리는 속에서도 미하지 않는 것이 조사선이며 활구선의 경계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크게 쓰고 완전히 통하는 시절을 맞이해야만 한다. 정년 공부를 잘 하면 전5식을 굴려 성소작지를 이루고 제6식을 굴려 묘관찰지를 이루며 전7식을 굴려 평등성지를 이루고 제8식을 굴려 대원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사지가 원만하게 밝아 크게 쓸 수 있고 완전히 통하게 되며, 백 번 제련한 진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달마스님이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언면벽하고 있을 때, 헤가스님은 도를 구하지 위해 소림굴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서 있었다. 밤에 눈이 많이 내려 무릎까지 쌓였을 때, 달마스님께서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은 묘한 도는, 무수한 세월동안 부지런히 닦되 난행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아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덕과 지혜가 부족하며, 가볍고 교만한 마음을 가짐을 지닌 네가 어떻게 도를 구할 수 있단 말이냐?” 이 말씀을 들은 혜가스님은 도를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칼로 팔을 끊어 달마스님께 바쳤다. 그 후 공부를 성취하여 백 번 제련한 진금이요 불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되어 동토에 전등 제2조가 되었던 것이다. 옛 스님 또한 말씀하셨다.
생이란 한 자루의 취모검이요
죽음 또한 한 자루의 취모검이다.
한 자루 취모검은 시방세계에 혁혁한 빛을 뿜어내나니, 가는 곳마다 빛이요 힘이요 믿음이 된다. 이와 같은 경계에 들어서게 되면 생사를 꿈에서조차 보지 못하게 되나니, 사생육도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공부 하나 해결하는 것!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것이니, 무수한 세월 속에서 천 번을 태어나고 만 번을 죽을지라도 오직 일 길 하나만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다. 형상이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없나니, 이 지구도 삼천대천세계도 필경에는 다 무너지고 만다. 하물며 잠시 왔다가 가느 이 몸뚱이가 어찌 실다운 것이겠는가? 그렇다면 필경 어떠한 것이 견고한 것인가?
바람이 불어도 들어오지 못하고
물을 뿌려도 묻지 않음이라
호랑이 울음 같은 바람이 나고
용의 트림 같은 안개가 일도다
진흙 소는 바닷소에서 해를 토해내고
나무 말 크게 울자 서천의 달 떨어지네
산호의 가지 위로 해님이 날아가고
마노석 계단 아래 달님이 달아난다
이러한 법문은 그냥 알기가 어려운 것이니, 각자 자기를 위해 자기 자성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알 수가 있다. 그러기에 옛 스님이 노래하였다
길에서 검객 만나면 검을 주면 되지만
시인이 아니거든 시를 읊지 말지니라
한 번 ‘할’을 하신 다음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한주먹에 황학루를 뒤짚고
주장자를 잡고 이르시기를,
주장자 끝에 있는 눈은 밝기가 해와 같아
부처님의 정법안장 드러내어 보인다네
대중은 최후의 관문을 타파하여 향상일로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원오극근선사는 말씀하셨다.
종전에 의기 많았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다른 집은 벌써 최후의 관문을 타파했노라
최후의 관문을 타파하지 못하면 차별삼매를 조금 안다 하더라도 어디엔가 허물이 하나 남아 있어 전광석화와 같이 보지를 못하게 되니다. 그러나 최후의 관문을 타파하여 참으로 향상일로의 경지가 있는 것을 바로 알면, 비로소 모든 법문을 알 수 있게 되느니라.
백운단 선사께서 게송으로 이르셨다.
한주먹에 황학루를 거꾸러뜨리고
한 번의 발길질로 앵무세계 뒤집네
의기가 있을 때에 의기를 더하니
풍류가 없는 곳에 또한 풍류 있도다
이것은 임제종의 종풍송으로, 임제스님의 경지를 밝힌 것이다. 이 게송은 천하 종사들은 칭찬을 하며 말하였다. “임제종에서 정문정안의 종사가 났다.”그때 황룡남 선사 밑에 진정문선사가 있었다 그의 공부가 미숙했을 때, 조실인 황룡스님이 말하였다. “백운단스님의 송이야말로 임제종의 골수와 안목을 그래도 드러내어 보였다.” “저도 백운단스님의 견처와 같습니다.” “네가 백운단스님고 같다고 하니 한번 일러 보아라.” 그러자 진정문스님은 백운단스님의 게송을 그래도 외우는 것이었다.
한주먹에 황학루를 거꾸러뜨리고
한 번의 발길질로 앵무세계 뒤집네
황룡스님은 몽둥이로 때리면서 그를 꾸짖고 내쫓아 버렸다.
“백운단은 옳거니와 너는 옳지 않다.”
대중은 알겠는가?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이르시기를,
“황룡이 종사의 수단은 있지만, 머리 위로도 넘치고 발 아래로도 넘치는도다.”
‘할’을 한 번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한 손은 올리고 한 손은 내리니
홀연히 깨달아 정문정안 활짝 열리면
무량광겁 생사해를 영원히 뛰어나네
바른 눈이 활짝 열리면 다시는 생사고를 받지 않나니, 이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앞길이 멀고도 아득할 뿐 아니라 올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 갈 때는 어느 곳으로 향해 갈 것인지, 마냥 캄캄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깨닫게 되면 모든 세계 모든 국토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모두 조사의 참된 기틀이요 모든 부처님의 가풍을 이루며, 산천초목 모두 다 보리가 되나니, 보리는 곧 불이라, 생사가 영원히 없어지게 되는니라.
서쪽에서 온 한마디 법문
삼천대천세계에 빛이 혁혁하다
이 한마디 요달해 알면
만겁토록 길이길이 밝고 밝으리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쾌활한 즐거움은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공부를 진지하게 하려는 사람이 드물다. 혹 공부를 할지라도 동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고, 서로 가라하면 동쪽으로 가는 등 자꾸 어긋난 짓만 저지르게 된다. 그 까닭은 아득한 옛적부터 생사의 바다 속에 빠져 너무나 오랫동안 미하고 또 미하여 업장이 매우 두텁고 캄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다시 발심하고 또 발심하여 대용맹심으로 공부를 한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해결할 수가 있다. 옛 스님은 말씀하셨다. “설봉雪縫, 설봉, 설봉한데 설봉 속이더라.” 눈이 가득 내려 어디를 가든 눈 아닌 것이 없건만, 눈眼이 미하여 눈雪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눈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월만月滿, 월만, 월만한데 월만 속이더라.” 중추보월 같은 밝은 달이 떠 있으니 천지가 온통 달빛이요 달인데, 그 달빛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달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모름지기 우리는 공부를 애써 하여 어떻게 하든 깨달아야만 한다. 깨닫기만 해 보라!
비로자나 정상에서 금피리를 거꾸로 부니
대천세계 어디에나 태평성세 이루더라
술에 취한 돌 사람은 춤을 추며 은하계로 돌아가고
나무로 된 여자는 범을 타고 천태산으로 오더라
이 법문을 깨달으면 하나하나 모두를 내질렀다 두드렸다 할 수가 있느니라.
그리고 요즈음 ‘알았다’고 하는 납자가 더러 있다. 그러나 오히려 ‘알았다’는 이것은 어딘가에 병통이 붙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과 소소영령한 것을 조금 알았다고 하여, 이것을 ‘나다’, ‘주인공이다’라고 한다면 크게 그르치고 만다. 이를 일컬어 ‘적을 자식으로 삼는다’고 하나니, 비유를 하자면 녹이 낀 무쇠를 진짜 금이라고 고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누구나 육근과 육식이 나누어지기 이전으로 꿰뚫고 들어가야만 한다. 미혹된 마음으로 분별하여 아는 것을 가지고, 또 고요해진 듯 맑아진 듯 깨끗해진 듯 감각기관 앞에 어른거리는 알음알이를 가지고 ‘나의 본래인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꿈에도 불법을 보지 못한 자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정법안장은 고사하고 무정물이 설법하는 경계도 알지 못하느니라. 옛날 동산양개화상은 경 율 논 삼장을 모두 통달하였으나, “약방문은 약이 아니다.”하시고 사교입선하여, 당대의 유명한 고승 혜충국사를 찾아갔다. 혜충국사는 백애산에 40년을 내려오지 않고 계셨는데, 나중에 현종, 대종, 숙종 세 황제가 차례로 청하여 국사로 모셨던 분이다. 동산스님은 국사를 찾아가 무정설법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혜충국사의 법문을 들으면서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인연이 없는가 보다’ 하고, 천오백 명 대중을 거느린 위산선사를 찾아갔다. 거기에서도 무정설법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역시 캄캄 절벽을 대하는 것처럼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운암선사를 찾아가 거듭 무정설법을 물었더니, 운암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는 아미타경을 보았는가?” “예 보았습니다.” “아미타경에 보면, 극락세계에 팔공덕수가 있어 항상 염불, 염법, 염승하며, 앵무새나 가릉빈가 같은 기묘한 잡색의 새들이 주야로 화아음을 내어 염불, 염법, 염승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가득 차 있는 보행수와 보라망들도 미풍이 불면 모두 미묘한 소리를 내어 염불, 염법, 염승을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동산스님은 이 말씀 끝에 무정설법을 깨달았다. 이 법문에서 불과 법은 체가 되고 승은 용이 되는 법의 경지가 있다. 이와 같은 무정설법은 극락세계에서만 이루지는 것이 아니다. 이 사바세계의 삼라만상과 유정무정과 모든 존재와 물건들이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무정설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정설법의 경지를 깨달은 동산스님은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기특하고 기특하도다
무정설법은 부사의로다
귀로 들으려 하면 결코 들을 수 없지만
눈으로 들으면 능히 무정설법을 듣나니
하지만 무정설법을 안다고 하여 공부를 다해 마친 것은 아니다. 그 후 동산스님이 운암스님께 여쭈었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백 년이 지나 누가 와서, ‘어떤 것이 스님의 참면목입니까?’ 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합니까?” 운암스님은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시다가 말씀하셨다. “다만 이러하니라.” 동산스님은 이 말씀에 꽉 막혀 버렸다. 비록 무정설법은 알았지만 ‘다만 이러하다’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여 3년 동안 고심하였는데, 하루는 돌다리를 건너가다가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그 뜻을 깨달아 마쳤다. 그리하여 운암스님의 법을 이었고, 운암스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를 맡아 지냈다. 하루는 운암스님의 진연 앞에 공양을 올리고 있는데, 어떤 승려가 와서 여쭈었다.
“운암스님께서 ‘다만 이러하다’고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당시에 나는 선사의 뜻을 미처 알지 못했었노라.”
동산스님의 대답에 그 승려는 다시 물었다.
“미심쩍도다. 운암스님이 알습니까, 몰랐습니까?”
“만약 운암스님께서 알지 못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이 일렀으며, 만약 알았을진댄 어찌 이와 같이 이르기를 즐겨 했으리오.” 이 뜻은 만약 알지 못했으면 ‘다만 이러하다’고 하지 못했을 것이요, 만약 알았다면 ‘다만 이러하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인데,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다시 이에 대한 법문이 있다.
백운단 선사에게 남방에서 온 한 승려가 말하였다.
“알기도 밝게 알았고 얻기도 밝게 얻었습니다.”
그러자 백운단선사가 말하였다.
“그렇기는 그렇지만 아니다.”
여기에서 ‘그렇지만 아니다’라는 이것을 바로 알면 앞의 동산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을 알게 되느니라.
부처님과 조사들께서는 이와 같은 법문을 거듭거듭 베풀어 1700공안과 갠지스 강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법문을 남겨 놓으셨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법문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예를 든 몇 가지 법문만 확실히 알면 모든 법문을 다 알 수 있게 된다. 곧 일기를 꿰뚫어 얻으면 저절로 천기만기를 투득하게 된다. 하나를 깨달으면 일체를 깨닫고 하나를 증득하면 일체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법문에는 법의 기용 또는 체용이 있고 수방이 있으며, 활구와 사구가 있고 종탈이 있다. 한 가지를 예를 들어 보자.
암두스님이 덕산스님을 찾아가 한쪽 발은 방안에 들여놓고 한쪽 발은 바깥에 둔 채 여쭈었다. “이것이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 이에 덕산스님이 크게 ‘할’을 하자, 암두스님은 방으로 들어가 덕산스님께 절을 올렸다. “만약 암두가 아니었다면 크게 알아내기 어렵지.” 이 말이 다시 암두스님의 귀에 돌아오자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동산노한이 좋고 궂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잘못 말씀을 하셨도다. 나는 그 당시에 한쪽 손을 올리고 한쪽 손을 내렸었도다.” ‘한쪽 손을 올리고 한쪽 손을 내렸다.’ 바로 이러한 법의 경지에서는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고 잡고 놓아 줌이 자유자재한 것이다.
장안은 만리 길 삼천대천세계에
푸른 버들 맑은 꽃 세월은 길도다.
옛 조사의 도를 얻은 기연
먼저 게송을 읊으시되
부처님과 조사가 나오시기 전에도
본체는 유와 무에 떨어지지 않았더라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 치고 “알겠느냐?” 하신 다음 또 게송을 이르시기를,
돌로 만든 사람은 옥피리를 불고
술에 취한 목녀는 춤추고 노래한다.
알겠느냐?
이러한 두 가지 법문을 바로 알아 깨달으면 천하 선지식의 수용처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되고, 그 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쳐 천상 인간과 한량없고 가히 설할 수 없는 세계에서 언제나 인연 따라 당당하고 쾌활하고 자유롭게 노닐며, 어느 곳에서나 항상 대법륜을 굴리고 대작불사를 이룩하게 되느니라.
옛날 중국 천태산에는 풍간, 한산, 습득 세 분의 성인이 계셨다. 하루는 습득이 마당을 쓸고 있는데 그 절의 사주가 물었다. “너는 풍간선사가 주워왔기 때문에 이름을 습득이라 하였다. 너의 본래 성은 무엇이냐?” 습득이 마당을 쓸던 비를 땅에 내려놓고 차수를 하고 서있자, 그 스님이 거듭 물었다. “너의 본래 성이 무엇이냐?” 습득이 땅에 내려놓았던 비를 집어들고 가 버렸다. 또 명주 땅에는 포대화상이라고 하는 응화성인이 있었다. 항상 온갖 물건을 넣은 자루를 어깨에 메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포대화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느날 포대화상에게 한 승려가 찾아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포대화상은 포대를 땅에 내려놓고 차수를 하고 서 있었다. 그 승려는 다시 물었다. “다만 이것뿐입니까? 따로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포대화상은 포대를 어깨에 메고 가 버렸다. 이렇게 습득과 포대화상은 똑같은 모양을 해 보였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방거사의 딸 영조가 혼자 집에 있을 때 단하선사가 찾아왔다. 단하선사는 자주 방거사를 찾아와 법을 서로 묻고 답하며 항상 무생화를 설하였던 터였다. 그날 영조는 나물을 씻어 바구니에 담아서 이고 가다가 단하스님을 만났다. “거사님 집에 계시느냐?” 단하스님의 질문에 영조는 이고 있던 나물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고 차수를 하였다. 단하스님은 또다시 물었다. “거사님 집에 계시느냐?” 영조는 나물 바구니를 이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와 같이 모든 불보살과 조사들은 항상 정법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이 뜻은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불법은 매우 깊고 광대하다. 범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깊은 뜻이 있다. 하지만 깨달으면 불이요 조사요 선지식이 될 수 있다. 다만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이요 범부인 것이다. 곧 누구나 미하면 번뇌요 깨달으면 보리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로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한 말씀 한 구절의 법문을 듣고 척 깨달으면 생사를 초월하고 무생보리를 증득하게 된다. 예컨대 육긍대부라고 하는 이는 남전스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하였다. “천지가 나로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이 나로 더불어 한 몸이라 하니, 심히 기괴합니다.” 그때에 남전스님이 뜰 앞의 한 송이 꽃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대부야, 세상 사람들은 이 한 송이 꽃을 보기를 마치 꿈과 같이 하느니라.” 이 말을 듣고 육근대부는 크게 깨달았다. 또 양대년이라는 거사는 자명스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아 오도송을 지었다.
여덟 모난 마반이 허공에서 날아가니
금털 난 사자도 문득 개가 되는구나
북두칠성 그 속에 숨으려고 하거든
남쪽의 십자성에 합장한 뒤에 하라
이 오도송에서 무엇을 ‘팔각형의 소반’이라 하였으며, 금모사자는 또 무엇인가?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모든 조사나 거사들이 도를 깨달아 제창한 깊고 깊은 뜻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 자기 소견대로 말하고 판단해 버린다면 크게 그리치게 되느니라.
수많은 세계의 서울 장안 속에서
석인과 목녀는 마음대로 노닐도다.
이 일을 논하고자 하면
만약 이 일을 논하고자 한다면, 위음왕불 이전 소식을 바로 얻었더라도 두 번째 자리에 떨어지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라.
최선의 바느질
스님께서 젊은 시절 행각하실 때였다. 하루는 누더기를 깁고 있는데 박고봉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느질은 어떻게 하는거냐?” 스님은 곧바로 고봉스님의 다리를 바늘로 찔렀다.
“아야! 아야!” 이에 스님이 한 번 더 바늘로 찌르자, 고봉스님은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 녀석, 바느질을 아주 잘하는구나!”
암두스님의 밀계
때는 갑오년(1954) 가을, 서울 대각사에서 스님이 전강스님께 여쭈었다.
“암두스님 밀계의 뜻이 무엇입니까?”
“일천 성인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아이고, 아이고.”
스님이 곡을 하며 문을 열고 나오자, 전강스님이 불러 말씀하셨다.
“자네가 긍정하지 못하겠다면 다시 일러 보라.”
“죽은 말에 침을 놓고 뜸을 뜨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할 짓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떠나 오셨다. 뒷날 스님께서는 제자 진제에게 물었다.
“암두스님 밀계의 뜻을 어떻게 보는가?”
“마조스님은 천하인을 밟아 죽였지만 임제스님은 아직 대낮의 강도가 못 됩니다.”
이에 스님께서는 더 묻지 않으셨다.
기사회생
스님께서 하루는 대중에게 이르시기를,
“여기에 크고 큰 송장 하나가 있으니, 머리는 비비상천 꼭대기에 닿아 있고 다리는 아비지옥 밑바닥에 버티고 있으며 몸뚱이는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다. 이 대중 속에 바로 이 송장을 살려낼 자가 있는가?” 이때 한 수좌가 나와서 말하였다. “큰스님!” 스님께서 응답하시자 수좌는 예배를 드리고 물러났다. 스님은 말하였다. “사자 새끼가 사자후를 잘하는구나.”
일 배 또 일 배
스님께서 하루는 법좌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시는데, 한 수좌가 앞으로 나와 예배를 드렸다. 이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아냐!” 수좌가 다시 예배를 드리고 물러가자, 스님은 아무 말씀 없이 문득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남전스님의 물소
스님께서 남전스님의 ‘물소가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한 승려가 여쭈었다. “어떤 것이 분수에 넘치지 않게 거두어들이는 잔잔한 도리입니까?” “풀을 만나면 풀을 먹고 물을 만나면 물을 먹느니라.” 그 승려는 예배를 드리고 물러났다.
석간수 찬 샘물
어느 날 스님께서는 대중에게 물었다.
“석간수 찬 샘물이 졸졸 흐를 때는 어떠한고?”
한 승려가 나와 답하였다.
“삼삼은 구입니다.”
스님께서 다시 물었다.
“마시는 자는 어떠한고?”
그 승려가 답하였다.
“삼삼은 구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거니, 과연 우리 대중은 안목이 저울대 같구나.”
많은 새가 꽃을 물어
스님께서 어느 날 대중들에게 물었다.
“우두법융스님이 4조 도신대사를 만나기 저네 어찌하여 여러 날짐승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던고?” 한 승려가 답하였다. “서로 따라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4조스님을 친견한 후에는 어찌하여 꽃을 물고 오지 않았는고?” “서로 따라온 것입니다.” 이에 스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드러내기 어려움과 온전히 드러냄
하루는 스님께서 제자 진제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법안문익선사가 말 못하는 아이를 보고 게송을 읊으셨다.
여덟 살 먹은 아이 물어도 말 못하니
이는 말 못함이 아니라 큰 법을 드러내기 어려움일세
뒷날에 백운단선사는 이 일을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어찌 말 못함이 바로 이르지 못함이랴! 대도를 온전히 잘 드러내었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드러내기 어려움일세’라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온전히 잘 드러내었네’라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일러보라!“ 진제스님이 답하였다.
“저는 모두에게 삼십방을 때리겠습니다.”
“필경 어떻게 할 것인가?”
“동지부터 한식까지는 백오 일입니다.”
“옳고 옳도다.”
한 번의 사자후
춘성스님께서 대중에게 물었다.
“깊은 산 굴 속에 청사자가 한 마리 있는데, 산에 갔다가 갑자기 그 사자를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그때 대중 속에서 노스님 한 분이 나와 말하였다. “시자야, 절을 한 번 올려라.” 그 뒤 춘성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가지고 스님께 물었다. 스님께서 곧바로 벽력같은 음성으로 ‘사자후’를 터뜨리자, 춘성스님께서 찬탄하였다. “과연 남방의 선지식이로다.”
만인을 눈멀게 한다.
고봉스님께서 법상에 올라가려 하시는데 금오스님께서 나와 옷자락을 잡으며 말하였다. “올라가기 전에 한마디 이르고 가시오.” “놔라! 놔라!” 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가지고 제자 진제엑 물었다.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진제가 문득 ‘할’을 하였다. “네가 정말 그렇다면 만인을 눈멀게 할 것이다.” 이에 진제가 말하였다. “소승의 허물입니다.” “노승의 허물이니라.”
스승과 제자의 문답
어느 날 제자 진제가 스님 앞에 나와 여쭈었다.
문 : 스님께서는 뉘 집의 노래를 부르시는 것이며, 누구의 종풍을 이루었나이까?
답 : 운봉스님 일구를 이어받았나니, 영겁토록 쓰고도 다하지 않느니라.
문 : 그 밖에 별다른 한마디가 있습니까?
답 : 허리춤에 십만 관의 돈을 두둑이 차고, 하늘 땅 저 밖을 마음대로 노닌다네.
문 : 스님의 일구는 어떠합니까?
답 : 진흙 소 한 울음에 천지가 깜짝 놀라, 부처고 조사고 모두 죽었더니라.
문 : 기특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를 들먹이면 일곱을 얻는니라.
문 : 어떤 것이 최초의 한마디입니까?
답 : 석가와 미륵이 도탄에 빠졌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최후의 한마디입니까?
답 : 번갯불 속에 곤두박질치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여래선입니까?
답 : 눈 밝은 납자가 깊은 우물에 빠짐이니라.
문 : 어떤 것이 향상의 한마디입니까?
답 : 부처님과 조사가 불 속의 하늘로 물러갔느니라.
문 : 어떤 것이 향하의 한마디입니까?
답 : 돌 사람이 무쇠 소를 잡아타고 벽옥의 세계로 달아났느니라.
문 : 어떤 것이 몸을 바꾸는 한마디입니까?
답 : 머리 셋에 팔을 여섯 가진 놈이 삼키고 뱉음을 자재로 하느니라.
기연어구
문 : ‘대도는 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답 : 쉬! 쉬!
문 : 쉬! 쉬!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답 : 동서가 백억 세계요 남북이 십억 국토니라.
문 : 조주스님꼐서 말씀하신 ‘뜰 앞의 잣나무’의 뜻이 무엇입니까?
답 : 맹호의 입 속에다 살림을 차리고, 푸른 용의 굴 속에서 곤두박질치느니라.
문 : 조주 ‘무’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마구니는 넘어지고 부처는 달아나고, 손과 발이 덜덜덜 떨리느니라.
문 : 운문스님 ‘마른 똥 막대기’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밝은 해가 한밤중에 하늘에 뜨니,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 짝할 이 없도다.
문 : 동산선사 ‘마삼근’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무쇠 소가 놀라서 서천으로 달아나고, 수미산이 한밤중에 항하를 건너가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스님의 경계입니까?
답 : 문수보살의 집 안에는 해가 날고, 관음보살의 집 안에는 달이 달려가느니라.
문 : 어떤 것이 스님께서 평소에 하시는 일입니까?
답 : 쇠망치로 청룡을 굴을 쳐부수니 금모사자가 개로 변해 버렸다.
문 :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답 : 돌 속의 불 같은 얼굴이니라.
문 : 어떤 것이 조사입니까?
답 : 불꽃 속의 돌 같은 얼굴이니라.
문 :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답 : 불 속에다 토마를 굽느니라.
문 :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출신처입니까?
답 : 토끼 뿔로 만든 다리 위로 무쇠 소가 달음질치느니라.
문 : 선정이란 무엇입니까?
답 : 동하는 가운데 동하는 모양이 없느니라.
문 : 대해탈은 어떤 것입니까?
답 : 진흙 소가 항하를 건넘이니라.
문 : 대적삼매가 무엇입니까?
답 : 옛날에 금색 봉황이 북두칠성 속으로 들어가더니, 지금까지 까마득히 소식이 없다.
문 : 어떻게 하여야 근본신을 밝게 알 수 있습니까?
답 : 금강의 눈동자 속에는 보검이 감춰져 있느니라.
서쪽에서 온 한마디
서쪽에서 온 한마디 법문
삼천대천세계에 빛이 혁혁하도다
이 한마디 요달해 알면
만겁토록 길이길이 밝고 밝으리
둥근 모양의 불성
둥근 모양의 원상을 불성이라 한다면
맑고 빈 그것은 일심이라 이름할까
성품과 마음을 다 잊은 그곳에서
진흙 소는 물 위로 달아나리라
건곤은 타파하고
건곤을 타파하는 법문 한마디
천백억 화신을 방출하도다
낱낱이 자세히 살피고 보니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
뜰 앞의 잣나무
조주스님 ‘뜰 앞의 잣나무’
만고토록 초심자가 참구하나니
팔만장경 어디에도 있지 않던 일
예와 지금 하늘과 땅 깜짝 놀라네
이어 노래하다
누구든지 이것을 문득 얻어 알아채면
하늘에나 땅에서나 짝할 이 없다네
서쪽의 호수에선 청풍이 솔솔 불고
동쪽의 하늘에는 기러기가 나는 걸
남쪽을 향해 북두를 볼새
동서의 많고 많은 성스러운 스님들
남쪽으로 향하여 북두칠성을 바라본다
교법 밖의 현지로 상상근기 제접하고
방편문 다시 세워 미한 중생 접인하네
오대산 적멸보궁
우연히 오대산에 들어왔더니
몸은 이미 보봉정상 올라서 있네
‘할’을 하자 적멸궁은 무너져 버렸고
발길질에 비로해는 뒤집혔도다
삼천세계 손가락으로 튕겨 버리고
입으로는 백억 화신 토하였노라.
도리사 사리
아도스님 모신 사리
만법이 이 속에 밝다
수미산 정산인가
대해의 파심인가
도리사의 오고 감
와도 옴이 없음이여, 도화와 오얏꽃은 천추에 희고
가고 감이 없음이여, 낙동강은 만년을 푸르도다
무쇠 나무에 꽃이 피고 나무 말이 세 번 우네
장강의 백조
백조는 장강으로 내려오는
붉은 노을 먼 하늘에 피어오르네
밝은 달 한쪽 끝을 손으로 잡고
먼 하늘가 나는 학을 바라보도다
달은 서쪽 하늘로 떨어지고
홀연히 한밤중에 종소리를 듣고서
돌아보니 삼경이라 벌써 늦어 버렸네
선상 위에 꼿꼿하고 단정히 앉았더니
가을 달이 서쪽 하늘 저 너머로 떨어지네
강물 위의 흰 구름
밤이 가고 아침이 밝아오니
태양은 떠오르고 달빛은 사위어 간다
흰구름은 강물 위로 떠 가고
푸른 물은 바위 앞에 흘러오누나
홀연히 두 손을 보고(오도송)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이 무슨 물건이었던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다시 읊음
봉암사의 한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홀연히 활짝 열려
홀연히 지혜의 눈 활짝 열리더니
광겁의 생사해를 완전히 벗어났네
주장자 꼭대기에 번갯빛 기틀있고
불자 아래에도 살활기용 또한 있네
허공이 부서지다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없어졌네
다함 없는 세계들은 눈 속의 허깨비요
한마디 분명한 위음왕불 이전 소식
유와 무에 걸리지 않고 영원토록 밝다네
허공의 뼛속에서
허공의 뼛속에서 돌 사람이 장작 패고
타오르는 불 속에서 목녀는 물을 긷네
수미산 동쪽에서 늙은 원숭이 휘바람 불고
바닷속 소나무 위 학이 달을 물고 있네
한 자루 주장자
한 자루 주장자를 청산에 걸어놓고
마음도 부처도 물건 또한 아닌 것을
누구든지 이 속을 꿰뚫어 얻게 되면
언제나 우너명하고 길이길이 밝으리라
조주 ‘무’자 화두
조주스님의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
또렷또렷 제기하여 참의시을 발하여라
의심하고 의심하고 몸과 마음 잊게 되면
세 발 달린 금붕어가 하늘 밖을 나아가리
진정한 참선객
진정한 참선객이 조주에게 물었더니
‘뜰 앞의 잣나무’라 가르쳐 주시었네
불조를 뛰어넘는 이 말씀 한마디는
선지식 종장들의 안심입명처일러라
홀연히 타파하다
홀연히 최상의 관문을 타파하니
일천만 겹 관문 모두 의심이 사라지네
태양의 광명 앞에 별과 달은 없어지고
천자의 궁전 속엔 가난한 아이 없네
다시 읊음
일만 겹의 가시덤불 뚫어 낸 다음
눈썹 곤두세우고 어디를 가노
한 자루 주장자를 청산에 걸어놓고
백운심곡 속에서 한세상 보내리라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다
꽃이 붉고 버들 푸른 춘삼월 호시절에
나무 위의 꾀꼬리는 분명히도 지저귀네
벽옥루에 걸터앉아 금피리 비껴 부니
오월 강바람에 낙화가 훨훨 나네
도리사에 대한 감회
아도스님 눈 속에서 도화꽃을 나투셨고
운봉스님 참선 기연 도리에서 보이셨다.
두 어른 계시다가 엄연히 떠나신 다음
붉은 도화 흰 오얏꽃 조사의 뜻이로다
치악산을 노래함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보고 들음 아니도다
그 나머지 소리 빛깔 모두 네게 줄 것 없네
이 가운데 아무 일 없음을 요달하면
체와 용이 상관없네 나누거나 말거나
가야산의 노래
가야산의 모습은 고금에 우뚝한데
도를 깨친 밝은 스님 몇 분이나 계셨던가
가득 찬 송백나무 하늘과 이어 있고
굳게 솟은 기암괴석 용과 거북 모양일세
사대가 본래 공하니
사대가 본래 공하니 병은 저절로 없어지고
육식 분별하지 않으면 한 가지 법도 없다
삼계 또한 꼭두각시 본래 체가 없는 것을
자성은 머무름도 가고 옴도 없느니라
분명히 이런 이치 요달해 버렸다면
나고 죽고 가고 옴이 언제나 원명하리
당당한 한마디
한마디 당당하여 백억 화신 넘어섰고
미진겁에 한결같아 항상 홀로 드러났네
산호나무 가지 위로 금까마귀 날아가고
마노석 층계 아래 옥토끼가 달아난다
세 눈 가진 돌 사람
세 눈 가진 돌 사람이 무쇠 소를 잡아타고
해와 달을 손에 잡고 수미산을 돌고 있네
구름 속의 나무 여자 둘 호랑이 잡아끌고
천 길 깊은 해저에서 묘한 노래 부르도다
누구든지 이런 뜻을 알아차려 얻는다면
천상천하 자재롭고 마음대로 가고 오리
머리 셋에 팔이 여섯
머리 셋에 팔이 여섯 신통자재한 놈이
구름 배에 용을 타고 술에 취해 노래하니
용의 춤에 봉의 노래 정취 또한 각양각색
비단결의 맑은 강은 만리 길을 흘러가네
진귀한 보물들
진귀한 보물들이 이 세계에 가득하니
하나하나 그 모두가 영산회상이로구나
백억 세계 어디에나 이 몸을 나타내어
여래의 정법안장 가르쳐 주리라.
진사겁을 부동하니
진사겁을 안 움직여 언제나 여여한데
어찌하여 인간들의 분주 속에 있을 건가
분주한 그 자체가 텅 비고 머묾 없어
돌 사람이 한밤중에 나무 닭의 소리 듣네
누구든지 이 가운데 다시 의심 없다 하면
모든 세계 그대로가 상상선이 되올 것을
돌 사람이 문득 듣다
홀연히 돌 사람이 금계 소리 들을 적에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꺼지도다
위없는 대정각을 일순간에 증득하여
광대하고 가없는 보궁전에 머무르며
영겁을 쉬지 않고 묘한 법문 설하시니
한량없는 청중들이 무생법인 깨달아서
장안 만리 백억 호의 가정마다 집집마다
하나같이 방 안에는 일만 보살 가득하여
모든 세계 다하도록 무상법륜 전하올새
집집마다 문전마다 수명장수 하오리다.
달마조사 1
평화로운 이 세계에 모래를 뿌림이여
무한한 인간 천산 둘러 꺼짐 당하였네
이로부터 그 바람이 천하에 두루차서
해마다 의구하여 그칠 날이 전혀없네
달마조사 2
판치의 늙은이가 동쪽 사람 속였다네
만리 길 푸른 물결 갈대 잎을 타고 와서
구 년 동안 소림에서 뜻 이루지 못하더니
어리석은 바보 녀석 팔을 끊게 하였도다
달마조사 3
만리 길 푸른 물결 갈대 잎을 타고 와서
구 년 만에 소림에서 본래 뜻 전하신 후
웅이산 가운데다 신발 하나 남겨놓고
총령 고개 마루턱에 전신을 나투셨네
만남 없는 탑 속에서 삼처전심 마치시니
영축산 봉우리에 웃음 소리 하하로다
소로시리 훔 탁
달마조사 4
주장자 한 번 들어 고갯마루 내려치니
한량없는 저 세계가 주장자 속에 있네
전신이 돌아간 곳 어디인지 모르지만
구름은 고개 위에 달은 하늘에
천심의 밝은 달(혜가대사를 노래함)
묵묵히 소림굴에 구 년 동안 앉았더니
눈 속의 파초나무 만 세에 놀랐다네
팔을 끊고 한 번 뒤쳐 깨달음을 얻은 다음
천심의 밝은 달은 뉘 집을 찾아갈고
운문스님 가신 곳
오늘이 이월 그믐날인가
가실 길 떠나가신 운봉노스님
범부니 성현이니 아랑곳없이
비로정산 저 밖에서 자재하시네
애닯도다, 호로시리훔
선사이신 운봉대선사의 영을 찬함
삼세의 부처님은 눈 속의 꽃이요
시방 정토는 콧구멍 속 먼지 티끌이로다
주장자를 들어 올림이여! 산이 무너지고 바다 마르며 마구니는 도망치고 부처는 거꾸러지도다. 불자를 걸어 둠이여! 꽃은 붉고 버드나무 푸르르며 꾀꼬리 지저귀고 제비는 춤추도다. 오는 돌 사람은 비록 정상에서 금북을 치고 가는 나무 계집은 벽옥루 전에서 취해 춤추도다. 왼쪽에서 피리부니 오른쪽에서 박수 치네 아침에 삼천이요 저녁에 팔백이로다. 쯧! 쪽배가 이미 동정호를 지나갔도다
불기 2495년 신묘(1951) 2월 28일
법을 이은 향곡 혜림이 두손 모음
선사이신 운봉대선사께서 모습을 남기심
뱀과 전갈의 심정이요
표범과 이리의 마음이로다
모든 부처님은 무간지옥 가운데로 쫓고
모든 중생을 대천세계 밖으로 놓아 주었도다
손을 듦이여! 시체가 쌓인 산은 높디 높고
발을 내디딤이여! 피바다가 넘쳐 흐르도다
누가 먼 하늘 뇌성벽력 치는 것을 올려다 보며
누가 감히 광야를 재 날리는 것을 내려 보겠는가
따로 말하노니 나귀 뺨 말 턱이 홀로 달리도다
오역죄를 지은 성철이 삼배를 드림
묘관음사 조사전에 퇴옹당 성철대선사께서 운봉대선사께 바치는 영찬이 보전되어 있는데 명문이어서 함께 싣는다.
일타상인에게 탑하노라
홀연히 편지 한 장 뜰 앞에 날아왔네, 받아 보고 기쁜 마음 비길 데 없었다네. 손바닥 한 번 치며 ‘하하’ 대소하였으니, 원래로 구구는 팔십일이도다. 글을 씀에 점 하나 더할 것 없이, 해가 뜨니 달이 지고 걸어가니 팔 흔들고 물이 차니 배가 높고 바람 부니 풀이 눕고 물 흐르니 도랑이 패는구나. 낱낱이 만 길 되는 절벽 앞에 서 있는 듯, 범부도 성인도 초월했으니, 무쇠 뱀은 옛길에 가로누웠고 아름다운 봉황새는 하늘에서 춤을 추네. 비록 이와 같기는 하나, 이 일은 문자상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언어상에 있는 것도 아니니, 경솔히 여기지 말라.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니라. 이 몸과 목숨을 놓아 버린 다음 죽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경지를 거쳐야만 비로소 될 것이니라. 그러므로 조주스님은 투자스님께 여쭈었다. “완전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 어떠합니까? 투자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밤길을 다니지 말고, 밝을 때 올지니라.“ 이에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원숭이가 희다더니 다시 검은 것도 있는가?“ 만약 투자스님께서 답하신 뜻을 철저히 발혀낸다면, 문득 대장부의 살림을 마쳐 삼천 리 밖의 대활로를 얻으며, 일체법에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게 되느니라. 생사 속에 있어도 생사가 아니요, 화탕 속에 있어도 화탕이 아니며, 지옥이 지옥 아니고 천당이 천당 아니며, 극락세계, 사바세계, 욕계, 색계, 무색계가 모두 다 아니며, 듣는 소리, 보는 빛깔, 삼라만상 그 모든 것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다 아니니라. 이러한 까닭에 옛 스님은 말씀하셨다.
삼라만상 속에 홀로 드러난 그 몸이여
누구든지 긍정만 하면 곧 친해질 것을
옛적에는 길 못 찾아 헤매었지만
오늘날 발견하니 불 속의 얼음일세
이렇게 되면 매우 밝고 당당하며 매우 높고 낙낙하여, 천상과 인간 세상에서 쾌활자재하리라. 또한 이미 대법왕이 된지라, 저 법에 자유자재하여 전광석화와 같이 서쪽에서 전해 온 종풍을 제창하나니, 어떤 때는 어무동정과 눈썹을 찡긋하고 눈을 깜박이는 것을 모두 옳지 않다 하고, 어떤 때는 네거리 한복판에서 종횡무진 설쳐대며, 어떤 때는 높은 산 정상에서 입성하고 방선하며, 어떤 때는 천하인의 혀를 꼼짝 못하게 하고, 어떤 때는 물결을 따라가고 파도를 좇아 가며, 어떤 때는 같이 살고 같이 죽으며, 어떤 때는 같이 살되 죽지 아니하며, 어떤 때는 머리를 숙이고 방장으로 돌아가며, 어떤 때는 진흙 속에 들어가고 물 속에 들어가 자비를 베풀기도 하며, 어떤 때는 티끌을 뿌리고 모래를 흩는 지혜를 쓰기도 하나니, 배가 가는 것은 노를 잡은 사람에게 매인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비록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일타 선화자는 이미 세계일주의 여행을 마치고 태백산중으로 들어가 도솔의 주인이 되어있으니, 이 밖에 더 나은 일이 어디 있으리오. 모름지기 영특하고 용맹스런 힘으로 사자아 같은 옛 조사들을 필적하여 이겨 낸 다음, 태백의 주장자를 잡고 내려와 산승의 흠 있는 곳을 지적해 주기를 지극히 빌고 지극히 바라노라.
을묘년(1975) 정월 20일
묘관음사 토굴에서 향곡은 꿈 속에서 답을 하노라
운봉선사어록 서문
운봉선사는 운문암 중에서 홀연히 향상의 관려자(오도의 깊은 뜻)를 타파하셨으니, 허공이 부서지고 건곤이 침몰하여 시방 세계에 털끝만큼도 막히거나 걸림 없고, 털끝도 얽혀 집착하심 없으시었다. 문득 죽음 속에 크게 살아나 비로자나의 정상에서 서래의 무늬 없는 인장을 얻으시니, 불조사의 백천 가지 공안과 천하 노화상의 깊은 삼매 수용하시는 곳을 낱낱이 환히 밝히시어 백천 세계 대하기를 깨끗한 명경을 대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시었다. 정문에 정안을 구족하심에 위음왕불 이전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번갯불도 못 통하고 석화도 못 미치는 기틀을 쓰시어서, 일천 성인의 정수리를 밟고 서시서 직하에 사심 없는 대용을 쓰셨으니, ‘방’도 주고 ‘할’도 하고, 거머쥐기도 놓기도 하고, 죽이고 살림과 주고 빼앗음과 거둬들이고 벌려 놓기도 하시었으니, 앉으려면 앉고 서려면 서고, 올라타려면 타고 내리려면 내렸으며, 혹은 열 십자로 큰 길에서 ‘하하 대소’를 하기도 하고 혹은 천봉 중만 높은 곳에 자유자재하셨었다. 어떤 때는 그렇고 그러하시며 어떤 때는 그렇고 그렇지 아니하시며, 어떤 때는 자비를, 어떤 때는 위엄을 베푸셨으니, 금강왕의 보검 같고 걸터앉은 사자 같고, 석화 같고 번개 같아 어리대었다가는 목숨을 잃게 되고 입을 벙긋 했다가는 아예 늦어 버렸었다. 그리고 귀신의 굴 속에 살지 말라 하시니, 마음으로 생각하고 따져 보는 분별로는 발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옛사람이 게송에,
여덟 모난 마반이 허공에서 날아가니
금털 난 사자도 문든 개가 되는구나
북두칠성 그 속에 숨으려고 하거든
남쪽의 십자성에 합장한 뒤에 하라
하시었으니, 바로 이것이 선사의 뜻이라고나 할까?
선사께서 가신 지 스물여덟 돌 계축년 2월 그믐
제자 혜림 향을 사르며
금오집 발간 서문
선사의 행적을 보았는가? 어떤 때는 평상에 올라가 앉고, 어떤 때는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불자를 들기도 하고, 또 ‘아이고 아이고’, ‘허허’ 소리를 치고, 어떤 때는 방을 휘두르고 할을 하며, 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혹은 놓아 주기도 하고 잡아당기기도 한다. 또 기와 용을 보이고, 정에 들기도 하고 경행 하기도 하며, 당전에서 가가대소 하기도 하며, 또는 묵묵히 방장으로 돌아가고 홀로 산을 걷기도 하고 골짜기를 왔다갔다 하였다. 그리고 앉아야 할 때면 앉고, 가야 할 때는 가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무르고, 일어나야 할 때면 일어났다. 밥이 있으면 밥을 먹고 차가 있으면 차를 마시고, 어떤 때는 마음을 설하고 성품을 설하며 현을 설하고 묘를 설하였다. 구름과 같고 비와 같이 기를 당해 걸림이 없고 주고 빼앗음이 자유롭다. 이와 같이 중생을 제접한 40여 년은 오직 불조의 심인을 전한 금오대선사의 행적이다.
1978년 8월
후학 향곡 삼가 씀
묘관음사에서 벽암록을 발간함에 그 서문을 씀
향상종승의 일을 거량할진대, 입을 열었다 하면 본분에서 멀어진 자리에 떨어지니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을 면할고? 쯧! 이곳에 이르러서는 석가모니불이나 달마도 다시 30년 참구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역대의 조사스님네들도 잠꼬대하는 이라는 딱지를 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설사 몽둥이를 빗밧울 수처럼 휘두르고 억 하는 소리가 천둥벼락 소리 같아도 또한 꿈에서조차 보지 못한 것이며, 조주무자 화두와 정전백수자 화두와 동산의 마삼근 화두는 이 무슨 똥 묻은 막대기인고? 공부인들은 이곳에 확연하여 의심이 없어야만 문득 노호(늙은 오랑캐로 석가불이나 달마대사를 지칭함)의 앎을 허락하고 노호의 앎을 허락하지 않음을 밝게 알 것이며, 또한 설두, 원오 두 큰스님의 용심처를 문득 알 것이다.
해저의 진흙 소 우는 곳에
바위 앞 돌 호랑이 은하로 돌아가네
향곡은 불 속에서 토끼 뿔을 그리노라
향곡 형을 곡하며
슬프도다 이 종문의 악한 도둑아
하늘 위 하늘 아래 너 같은 놈 몇일런가
업연이 벌써 다해 훨훨 털고 떠났으니
동쪽 집으 말이 되든 서쪽 집의 소가 되든
애닯고 애닯도다, 갑을병정무기경
도우 성철
부처님의 심등을 전하고 법운 가득하식 향곡당 혜림대종사의 비
고요 고요 고요하고 깊고 깊고 또 깊어라. 적막한 깊은 산에 ‘궁궁궁’ 하며 우는 새소리뿐이로다. 푸른 산 그림자 속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여, 샘에서 솟는 달콤한 물은 스스로 밝게 흐르도다. 구름 걷힌 하늘의 해와 달의 밝음이여, 만고의 광명은 스스로 법의 등불을 밝히도다. 종사의 법호는 향곡香谷이요 법명은 혜림惠林이며, 법사는 운봉성수雲奉性粹대화상이요 은사는 조성월趙性月선사이시다. 1912년 임자 정월 18일 경북 열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아버지 김원묵과 어머니 적정행의 세 번째 아들로 탄생하셨으며, 이름은 진탁이라 하였다. 16세에 둘째 형을 찾아갔다가 천성산 내원사에 입산하였다. 그때 산천의 신령스런 기운을 흠뻑 느꼈고, 참선법문을 듣게 되자 환희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스님은 밤낮없이 정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함께 잊었으니, 조실인 운봉스님께서도 “참으로 기이하도다. 숙세에 선근 종자를 심은 까닭이로다.” 하시며, 옆에 두고 지도하셨다. 20세에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으시고 그 자리에서 크게 발심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시더니, 나이 24세 되던 늦가을 어느 날, 돌연히 강한 솔바람이 선방 문을 때려 문짝이 닫히는 순간 한 가닥 옛길이 홀연히 눈앞에 나타나면서 백천 가지 공안이 얼음 녹듯 완전히 풀렸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이치가 아주 분명하게 밝아졌다. 곧 조실인 운봉화상께 나아가 법문을 청하자, 운봉스님께서 한번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 목침에 대해 한 마디 일러 보아라.”스님은 바로 일어서서 목침을 발로 차 버렸다. “다시 한 번 일러라.”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꿈 속에서 꿈을 설함이요, 불조께서 설법한 것이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이에 운봉스님은 크게 웃으시며 종문의 정맥을 전법하여 부촉하시고 전법게를 주셨다.
서쪽에서 전래된 무늬 없는 인장은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일세
전하느니 받느니를 모두 떠나면
해와 달은 함께 동행하지 않으리
이로부터 선의 기틀이 크게 생동하여 제방에서는 스님으리 ‘선의 창 끝’이라고 칭찬하였다.
1947년 정해년에 희양산 봉암사에 안거하셨다. 그때 함께 있던 도반이 말하였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 놓아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 그 말씀 아래 문든 무심삼매에 들어 21일 동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였으니, 가히 한 망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는 문 앞을 지나다가 홀연히 자기의 두 손을 보고 확철대오하였으니, 일순가에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져버렸다. 이에 스님은 오도송을 읊으셨다.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무슨 물건이었던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봉암사의 한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로부터 천하 총림에 몸을 던져 사주후를 터뜨렸으며, 인연속에서 뜻과 같이 자유자재로 임하셨다. 제방에서 스님을 청하여 모셨으므로,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의 조실로 주석하시며 크게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선양하였으니, 그 가르침은 너그러우면서도 기봉이 험준하여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고 거두고 놓음이 자유자재하셨다. 스님께서는 말년에 이르러 신라불교 최초의 법흥지요 이차돈 성자께서 순교하신 천경림의 흥륜사지에 토굴을 짓고, 크게 원력을 발하시어 4년을 머물며 설법 교화하시고 법륜을 굴리셨다. 그리고 절터 5천여 평을 마련하여 신라 십성을 모신 십성각과 선원을 복원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셨다. 그 뒤 표연히 이 곳을 떠나 옛적에 살던 월내 묘관음사로 은거하여 수좌들과 더불어 함께 무생화를 노래하니, 문 앞에는 망망한 푸른 바다요 귓가에는 풍경 소리가 가득하였다. 이때 스님은 노래하셨다.
남을 위한 저 길은 나의 손에 맞지 않네
주장자 비껴 메고 가산家山으로 돌아가리
1978년 무오년 섣달 15일에 미질을 보이시어, 법제자 진제 등에게 뒷일을 부촉하신 다음 열반게를 지으셨다.
목인은 고개 위에서 옥피리를 불고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도다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영원히 밝고 밝아 언제나 수용하리
그리고 사흘 뒤인 열여드렛날 새벽에 입적하시니, 세수는 67세요 법랍은 50이셨다. 조계종단 전체가 스님을 기리며 다비하고 사리를 수습한 다음, 월내의 묘관음사 동쪽 기슭에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때 가장 절친했던 도우 성철스님은 이렇게 게송을 지었다.
푸른 바다의 신기한 구슬이요
형산 땅의 보배 옥돌이라
하늘과 땅 비추어 환히 밝히고
해와 달은 삼키고 토하는도다
목인은 노래하고 석녀는 춤을 추니
소나무는 곧고 가시덩굴 굽으며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도다
알겠는가?
번쩍이는 칼 빛으로 빠른 천둥 쫓아내니
수미산 정상에는 피물결이 넘쳐 흐르도다
후학 사문 동곡비구 일타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