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德川) 시대를 연 세키가하라 전투
-미쓰나리(三成), 이에야스(家康)와 한판 붙다
필자는 무모한 야욕(野慾)으로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을 일으켜 조선 땅을 무참히 짓밟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고향 나카무라(中村: 구 尾張)를 뒤로하고 세키가하라(関ヶ原)로 향했다. 필자의 일본 친구 '이토 슌이치(伊藤俊一·61/ 전 TV아이치)'씨는 운전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 가도 특별히 볼거리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역사의 흔적들만 남아 있을 뿐...."
그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15년 전의 일이 아닌가. 그래도 필자가 오래전부터 한 번쯤 가보고 싶었기에 이토(伊藤)씨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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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 하라' 전투장의 표지석 |
나고야 시내를 벗어난 차는 붉은 색 교각의 긴 다리로 진입했다. 기소강(木曽川) 대교(大橋)였다. 기소강(木曽川) 위에 놓인 폭 70m, 길이 858m의 긴 교량이었다. 다리의 중앙에서 승용차의 내비게이션은 "지금부터 기후켄(岐阜県)입니다"고 멘트를 했다. 다리 한 복판에서 아이치켄(愛知県)을 넘어 기후켄(岐阜県)으로 땅을 바꾼 것이다.
나고야를 떠난지 1시간 30여 분만에 기후현(岐阜県) 후와군(不破郡) 세키가하라조(関ヶ原町)에 도착했다. 멀리 산 위에는 하얀 눈이 구름과 맞닿아 있었다. 415년 전의 광풍(狂風)을 재현하려는 듯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동서로 4km, 남북으로 5km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에서 일본의 역사를 뒤엎는 대하드라마 같은 큰 전투가 있었으렷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비서실장(治部少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결전장이었다. 이 싸움에서 정작 도요토미 가(家)는 팔짱을 끼고 관망 자세로 일관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일단 워 랜드(War Land)를 구경하시죠. 그 당시 상황을 모형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동군·서군은 후세 사람들이 붙인 명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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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랜드(War Land) 진입로의 모습 |
'워 랜드(War Land)'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축소판이었다. 1964년에 세워진 '워 랜드'는 1만 여 평의 부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200여 개의 콘크리트 상(像)이 곳곳에 서 있었다. 이 모두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그 당시의 상황을 모형으로 재현한 것이다. '워 랜드(War Land)'의 자료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를 엮어서 정리해 본다.
"히데요시(秀吉) 전하가 남긴 아들. 히데요리(秀賴)의 세상이 영원할 것을 사람들이 바라고 있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직후 어느 날. 미쓰나리(三成)가 오사카(大阪) 성 천수각에서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저 번창함을 보라! 돌아가신 다이코(太閤) 전하의 위대함을 알 수 있지 않은가....사람들은 날마다의 생활을 즐거워하고, 내일도 역시 도요토미 가(家)의 보호 아래 그러하리라고 기원하는 것 같도다."
망상과 착각 속에서 미쓰나리(三成)는 부하들에게 간접적인 압력을 넣는다. 과연 그럴까. 그의 책사 '시마 사콘(島左近)'은 "인간은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것이지 정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면서 주군 미쓰나리의 오판(誤判)을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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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세이카의 초상(야후재팬) |
한편, 그 당시 명성을 날리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는 히데요시를 폭군으로 간주하고 전쟁의 필연성을 예견했다. 그는 조선의 문인이자 의병장이었던 강항(姜沆, 1567-1618)과도 교류했던 학자이다.
"이 전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오. 폭군(暴君)의 세상이 끝나고 천명이 새로워지려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중국에서도 보통 있었던 일이야."
"폭군이라니요?"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가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있는 군자의 나라를 침략하고...이 나라의 백성들까지 도탄에 빠트렸어. 그러니 폭군이 아니고 무엇인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후지와라(藤原)'가 미쓰나리의 여인 '하쓰메'와 나눈 대화다. '후지와라'는 대화의 상대가 미쓰나리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 물론, 이 여인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가공인물이다.
자료를 종합하면 미쓰나리는 면도날이었지 도끼는 아니었다. 면도날은 아무리 잘 들어야 수염을 자를 뿐이다. 이에 반해 도끼는 거목을 베어서 어떠한 대공사라도 할 수 있다. "과연 면도날 '미쓰나리'가 도끼 '이에야스'를 이길 수 있을까?" 그 당시 의식 있는 다이묘(大名)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동군(이에야스)과 서군(미쓰나리)이 포진을 마친 것은 1600년 9월 15일(음력) 오전 7시 30분. 일본 역사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앞두고 동군 7만 5천명과 서군 8만 4천 명이 세키가하라(関ヶ原)에 집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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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장수들의 조각상 |
이 대목에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본다. 오다 노부니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치 어린애 같았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애늙은이 같았다. 소설은 그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점잖은 미소를 띠고 있는 정도의 상태이면 이 남자의 마음속에는 즐거움이 파도치고 있을 것이다. 그토록 여유 만만하던 이에야스도 이번의 전쟁에서는 초조했다. 각본은 잘 썼으나 배우가 그대로 연기를 해 줄 것인지는 하늘만이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이에야스였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더없이 초조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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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진지의 모형 |
"저기가 바로 사사오산(笹尾山)입니다. 사사오산에 진을 치고 있던 미쓰나리의 서군은 지형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지형적인 조건을 이용해서 동군을 끌어들인 후에 이들을 격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필자와 동행한 이토(伊藤)씨의 말이다. 이토씨는 높이 268m의 사사오산(笹尾山)의 이름은 "사사(笹) 즉, 조릿대(작은 대나무 종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고 했다. 415년 전. 북으로는 사사오산, 남으로는 마쓰오산(松尾山), 남동으로는 난구산(南宮山)이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분지에서 일촉즉발의 대 전쟁이 초읽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의 안개, 어떻게 안 될까?"
이에야쓰의 넋두리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는 전투의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었다...이 때 짙은 안개 속으로 적을 향해 나아가는 동군의 보병 부대가 있었다. 300명 정도의 보병을 이끌고 남몰래 앞지른 부대장은 이에야쓰의 넷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松平忠吉, 1580-1607)'였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고 적의 깃발과 인마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안개 때문에 적진 앞까지 다가간 것이다. 이 때 뒤쫓아온 동군(黑田長政, 1568-1623) 측에서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1572-1655)' 부대를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이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최초로 울린 총소리였다.
"틀림없이 총소리가 났어. 소라 고동을 불어라. 함성을 지르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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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당시의 총잡이들(좌), 최초의 총성이 울린 개전지(우) |
히데아키(秀秋)의 배신·무저항·도망...그리고 승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 3만 명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서군이 우세했다. 모모쿠바리 산의 이에야스는 긴장의 강도가 더해져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1602)'의 배신을 기대했다. 히데아키(秀秋)의 배신은 그의 부장(副將)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어르신은 도요토미 가를 멸망시킬 셈인가. 그것을 아시면서 배신을 한다는 말인가. 나는 무사로서 받아들일 수도 참을 수도 없어."
"배신이 패덕(悖德)인 것은 사실이지만, 히데아키 님은 일개 사무라이가 아니올시다. 우두머리올시다. 우두머리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무략(武略)이라오."
히데아키(秀秋)의 배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로 인해 미쓰나리(三成)의 서군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