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8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독서: 요한1서 4,7-10
<하느님의 유전자, 사랑>
자녀가 부모를 닮지 않을 수 있을까요?
거부하고 싶어도 남들이 보면 반드시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닮았을 것입니다.
분명 유전자를 부모에게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은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와 어떤 면이 닮았을까요?
박보영 목사님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었는데 그때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보영 목사의 아버지가 예배를 드리는데 뒤에서 한 여인이 미니스커트에 빨간 립스틱에 긴 속눈썹을 붙인 한 여자가 껌을 쩍쩍 씹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치마가 무릎 위에만 올라와도 경찰들에 의해 제재를 받던 때였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몸을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은혜를 받았는지 집회 중 앞으로 나와 뒤집어져서 실신을 할 정도로 울더랍니다.
자신이 삶을 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빚을 워낙 많이 졌기 때문에 그 다음날이면 계속 몸을 팔러 나가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매우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한 장로와 그의 아들이 그 여자가 매우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는 자신이 가진 땅을 팔아서 그 여자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박보영 목사의 아버지의 주례로 그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녀가 자신을 구해 준 한 사람의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 집에서 땅을 팔아서 여자의 빚을 갚아주면서까지 그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계속 이전의 모습을 하고 다녀야 할까요?
이전에 하던 행동을 계속 해야 할까요?
만약 이전의 삶을 계속 살아나간다면 그 집안에서도 계속 그 여인을 며느리로 인정하며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장로의 집에서 이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면 그래서 그 집안의 딸로 인정했다면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주어야만 그 집의 며느리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 창녀보다 더 깨끗한 사람이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지으면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해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땅을 파신 것이 아니라 당신 외아드님을 제물로 바쳐 그 피로 우리를 닦아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창녀 짓을 하는 것보다도 훨씬 하느님께 큰 아픔을 드렸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죽음의 값으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당연히 변화되어야만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성모님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로부터 태어나서 그분들과 당연히 닮아야 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본성이 사랑이신 분이라 사랑에게서 난 자녀 또한 그 본성인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그 안에 미움과 시기, 질투 등이 있다면 아직도 이전의 죄 속에 살면서 겉만 자녀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 본 대학의 마르틴 로이터(Martin Reuter) 박사는 COMT 유전자의 특정 변이형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선을 베풀 가능성이 2배나 높다고 밝혔습니다.
대학생 100명으로부터 구강면봉으로 구강점막세포를 채취, DNA를 분석해 COMT 유전자의 두 변이형 중 COMT-Val 그룹이 COMT-Met 그룹에 비해 기부하는 돈이 2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랑도 분명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DNA를 통해 이타적인 마음까지 유전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기면서 아무 유전자도 안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맺히게 하는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8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인간 측의 기여를 원하시는 하느님>
교회 역사 안에서 AD 30년~70년은 기적의 시대라고 칭할 만큼 예수님과 사도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적들이 행해졌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 마귀를 쫒아내는 기적, 죽은 사람조차 소생시키는 기적, 그리고 빵을 많게 하는 기적...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기적 앞에서 신앙을 갖게 되고 마침내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대대적인 회심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배경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 서두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굶주린 군중을 향한 가엾은 마음’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 기간에 접어든 AD 30년경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목자들은 양들에게 거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도움은커녕 양떼를 잘못 인도해 독초를 뜯다 죽게 한다든지 이리떼 근처로 인도해서 잡아먹히게 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어떤 목자는 차라리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눈에 즉시 들어온 것은 ‘가엾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 측의 결핍, 우리 인간들의 죄악, 우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살아가는 한계와 나약함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군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개별적으로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우리 인간 측의 나약함과 한계, 죄와 비참함입니다.
그렇다면 안심이 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 앞에 엄청나게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리 많이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 순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으로 부르고 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에서 우리가 눈여겨 바라볼 특징적인 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협조 없이도 속전속결로 엄청난 일을 다 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빵을 많게 하시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협조를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정말 작은 기여 손때 묻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반으로 만 여명의 사람들을 배불리는 사랑의 대 기적을 일궈내십니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사도직이 교회나 사회에 별로 큰 기여가 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사도직이라 할지라고 그 일을 하느님과 연결시키고 교회와 연결시키면 그 일이 곧 하느님의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웃들에게 행하는 작은 친절 하나, 해맑은 미소 한번, 환한 인사 한번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엄청나게 큰 사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월8일 [공현 후 화요일]
복음: 마르 6,34-44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들었다. 한때 굶주리셨던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이 지금 많은 사람을 먹이신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을 우선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빵은 “외딴곳”에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그곳은 외딴 곳이었지만 세상을 먹여 살리시는 분이 함께 계시고 시간이 이미 늦었지만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분이 함께 계셨다.
그분은 전에 빵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으로서 승리하셨다(참조: 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배고픔도 겪으셨지만 수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참조: 마태 14,20-21; 15,37-38; 마르 6,42-44; 8,6-9).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참조: 요한 6,51). 목마름도 느끼셨지만(참조: 요한 19,28),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보이는 인간이신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으로서는 우리처럼 잡수셨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지만(참조: 히브 4,15), 하느님으로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참조: 마태 14,17-21; 마르 6,38-44; 루카 9,14-17; 요한 6,10-13).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37절) 하신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38절)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 놓았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풀밭에 앉도록 명하신다. 사람들은 백 명의 식탁에, 쉰 명의 식탁에 둘러앉는다. 말씀의 식탁, 성찬의 식탁에서 그들은 양육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 받는 선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는 순간 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이루셨다. 그러고도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 두 광주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빵의 기적의 신비는 이것이다.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빵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열매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더라도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기적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천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오천의 영적인 의미는 대담하게 행동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갈 용기를 지닌 사람은 천상 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오천 명이 상징하는 의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