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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건국의 비밀, 나정 발굴!~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조금 떨어진 곳.
경주시 외곽에서 이루어진 한 발굴은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다.
신화로만 여겨왔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정은 과연 베일에 가려진 신라 건국의 비밀을 풀어줄것인가?
"안녕하십니까 HD 역사스페셜의 고두심입니다.
오늘은 신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경주가 생각나구요, 불국사나 첨성대 같은 뛰어난 문화재가 떠오르는데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금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 놓여 있는 이것은 신라 금관입니다.
아름답고 정교하게 참 잘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순금으로 만들어진 고대 금관은 전 세계 단 열점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 여섯점이 신라 금관이라고 하는데요, 놀랍지 않습니까?
세계가 감탄한 신라 금관은 모두 왕족의 무덤에 부장되어 있었습니다.
여기가 신라 금관이 부장되어 있던 왕족의 무덤인 경주 대릉원입니다.
무덤의 크기가 어마어마하죠?
무덤이 마치 작은 산처럼 보이는데요,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무덤안에서 금관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 찬란한 문화를 이룬 신라의 시조가 바로 박혁거세입니다.
신라의 건국 신화는 <삼국사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나정 숲 사이에서 말이 울어 가 보니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깨어난 이가 박혁거세이고, 커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니 선뜻 믿어지지 않습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건국 신화에는 이렇게 믿어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건국 신화는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다,
박혁거세도 실존 인물이 아닐 것이다라고 의심해왔습니다.
그런데 박혁거세의 탄생지 나정이 발굴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숲에 둘러싸인 우물'이라는 나정(蘿井)은
그 이름대로 경주시 외곽에 소나무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나정 발굴은 지난 2002년에 시작되어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나정에선 예상치 않은 흔적들이 드러나고 있다.
건물의 기단이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네모 반듯하게 잘 다듬었다.
기단 안쪽에는 기둥을 세운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기둥 주춧돌은 40여 개나 된다.
기단 밖깥쪽에는 담장을 두른 흔적도 보인다.
이 흔적들은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에 거대한 건물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원래 나정에 비각과 돌담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비각의 낙수가 계속 돌담을 치고 있어서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비 차원에서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제가 조사를 하다보니까 이와 같은 형태의 기단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단을 따라 조사하다보니까 현재와 같은 팔각 건물채가 노출이 된 것입니다."
- 이문형 연구원, 중앙문화재연구원
돌담을 두른 거대한 팔각 건물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팔각 건물터의 한변의 기단은 8미터, 폭은 20미터나 되었다.
전체 면적이 무려 90평이나 되는 대형 건물터이다.
원래 박혁거세가 탄생된 우물이라고 전설로 전해져 왔던 나정은
조선 시대 사적으로 지어 탄생지로 모셔져 왔다.
우물이라고 전해져온 곳에는
사각형의 화강암을 덮어 우물 표지석을 해놓았었다.
그런데 화강암을 들어내고 발굴했을 때
화강암의 구덩이만 확인되었을 뿐, 우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우물이라고 전해져 왔던 우물터는 발굴 결과 우물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로운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깊게 판 우물터 바닥에는 평평한 강돌까지 깔아놓았다.
원래 우물터라고 여겨왔던 곳에서 4~5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운 우물터가 확인된 것이다.
원래 우물터라고 여겨왔던 곳보다 우물의 크기도 훨씬 크고 깊다.
새로 확인된 우물터는 우물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 보시면 이 우물에 강돌을 깐 이유가
물이 솟았을 때 1차적으로 물을 정화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까지 조사 결과로는 우물이 맞는 거 같습니다."
상징적으로 조성해놓은 우물터 옆에 실제로 우물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정을 발굴한 결과 우물터가 드러났고,
우물이라고 여겨져왔던 옆에서 실제 우물이 발견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실제 우물터 바깥쪽에선 기둥 구멍이 나타났다.
우물가로 기둥 구멍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도대체 뭘까?
"우물지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 곳곳에 기둥 구멍들이 확인되고 있는데요
이런 구멍들은 이 우물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상부에 어떤 구조를 했던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 이문형 연구원
새로 확인된 우물터 주변에는 예사롭지 않은 흔적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우물 바깥쪽으로 도랑을 두른 흔적이 보인다.
우물에서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도랑이 파져 있다.
도랑 깊이는 1.5미터, 폭은 2미터에 이른다.
"이 도랑에 물을 가뒀던 흔적들이 확인이 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미질 점토들이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도랑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물을 가뒀던 곳으로 판단됩니다."
- 이문형 연구원
도랑의 벽면은 끈끈한 점액질의 미질 점토로 되어 있다.
도랑안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는 증거다.
도랑은 우물을 보호하는 해자인 것이다.
우물 시설로 보이는 것은 건물 시설 자리와 도랑,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
도랑 바깥쪽에서 발견되는 구멍 자리.
이것은 나무 기둥을 세운 흔적이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목책 흔적인 것이다.
울타리 구멍은 우물에서 14미터 거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둥근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새로 확인된 우물터의 우물가에는 건물 기둥 구멍이 있고,
우물을 가운데 두고 해자와 목책이 동그랗게 둘러져 있다.
"새로 확인된 우물지를 중심으로 도랑과 목책이 둘러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설은 우물지를 보호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이러한 보호 시설로 봐서 우물지를 상당히 신성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문형 연구원
발굴 결과 나정에는 실제 우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물에는 도랑을 파서 물을 채운 해자와 목책 울타리로 이중 보호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예사롭지 못한 우물의 발굴.
그것은 신라 건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2. 우물을 덮고 세운 대형 팔각 건물터는 제사터!~
기원전,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 우물!~
"발굴 도면과 고건축 전문가의 도움을 바탕으로 복원한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입니다.
이렇게 숲속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목책이 가로막고 있군요.
우물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바깥에 이렇게 울타리를 쳐놓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출입문을 이용해야 하는데 한번 들어가 볼까요?
목책안으로 들어오면 또 이렇게 큰 도랑을 만나게 됩니다.
도랑의 폭은 2미터 정도 되구요, 깊이는 1.5미터 정도 파서 물을 채워놓았습니다.
이 도랑과 저쪽에 방금 지나온 목책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시설입니다.
우물로 가려면 여기 도랑 사이에 난 작은 길을 이용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쳐놓은 이런 움막 한가운데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 깨끗하게 관리한 듯 합니다.
우물을 참 신성시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사람들은 왜 이런 우물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그 의문에 대한 단서를 대형 팔각 건물터에서 찾을 수 있다.
대형 팔각터는 우물을 덮고 그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형 팔각 건물터의 정체는 뭘까?
중앙문화재연구원.
나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200여 점에 이른다.
기와와 토기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철기류와 자기류도 나왔다.
그 중 팔각 건물터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는 토기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팔각 건물터에서 발견된 토기류는 대부분 깨진 채 발견되었다.
의례용으로 쓰고 버린 제기다.
등잔 역시 제사용품이다.
"지금 여기 보시는 유물들이 팔각 건물터에서 출토된 토기류입니다.
제사 관련 토기류로는 등잔, 잔, 잔받침 등이 있습니다."
- 오재진 연구원, 중앙문화재연구원
그렇다면 팔각 건물터는 제사와 관련된 유적인 것일까?
삼국시대 산성인 경기도 이천에 설봉산성.
이곳에서 팔각 건물터가 발견됐다.
설봉산성 팔각 건물터에서도 신장상을 비롯해 의례용 제기들이 발견되었다.
팔각 건물터는 제사 시설인 것이다.
"토기로 만들어진 작은 병의 파편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병편들은 다른 제사 유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으로 미뤄봤을 때 이 설봉산성 팔각건물터는 제사용이나 제의용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이태호 학예연구사, 경기이천시립박물관
그렇다면 제사 시설인 팔각 건물터는 과연 언제 만들어졌을까?
팔각 건물터에서 출토되는 기와에 그 해답이 있다.
연꽃 무늬와 사자 무늬는 신라 왕실과 관련된 기와에 주로 사용되던 것이다.
'의봉4년(儀鳳四年)'이라고 새겨진 기와는
팔각 건물터가 왕실 관련 건물이라는 것과 함께
축조 연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의봉'은 당 고종이 반포해 사용한 연호로
의봉4년은 679년, 통일 신라 문무왕 19년에 해당한다.
"'의봉4년 기와'는 이제까지 월성이나 안압지 동궁 같은 신라 왕실 유적에서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의봉4년 기와가 나정에서 나왔다는 것은 왕실하고 깊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 김성구 관장, 국립경주박물관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9년에 왕실 관련 시설을 크게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팔각 건물터는 개축한 건물일까?
팔각 건물터에서는 '생(生)'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백여 점 출토되었는데
'생'자 명문의 기와가 그 의문을 풀어준다.
"생자 명문의 기와는 아직까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역시 탄생적인 상징의 의미가 내포되지 않았나 이렇게 추정되고 있고,
출토지가 나정 뿐이기 때문에 나정 유적하고 깊은 관련이 있는 문자 기와로 볼 수가 있겠고,
담장에서 많이 출토된 수막새를 보면 8세기 중엽경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나정에서 출토된 '생'자 명문 기와나 담장 기와가
8세기 중엽경에 크게 확장되지 않았겠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김성구 관장
그렇다면 개축하기전 처음 팔각 건물터가 지어진 건 언제일까?
새로 확인된 우물터에 단서가 있다.
팔각 건물터는 우물을 단단하게 메우고 그 위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우물을 메울 때 흙 뿐만 아니라 다른 재료를 섞어 넣었다.
바로 숯이었다.
"황토와 숯을 섞어서 다진 그런 흙으로 그것을 채워 메웠어요.
숯을 섞어 단단하게 메운 것은
벌레나 세균이나 지렁이, 두더지 같은 것이 땅을 파고 들어가지 못하게,
신성하게 웅덩이를 보호하는 그런 시설로 메웠던 겁니다."
- 정재훈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팔각 건물은 우물을 메운 뒤에 세운 것이다.
우물이 메워진 때를 알면 팔각 건물이 세워진 때를 알 수 있다.
우물을 메울 때 사용한 숯의 절대 연대를 측정해보기로 했다.
"이 목탄 시료의 연대는 400년부터 600년 사이의 확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중앙값은 서기 500년으로 나타났으며,
더 정확한 중앙값은 50년 플라스, 마이너스,
즉 450년부터 550년 연대로 해석하면 무난하겠습니다."
- 김종찬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
삼국사기는
'소지왕 9년(487년) 2월, 나을에 신궁을 지었는데, 나을은 시조가 태어난 곳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소지왕9년 487년은 절대 연대 결과와 그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팔각 건물 이전 이 우물터는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새로 발견된 우물지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 기둥 자리에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두형 토기가 바로 그것이다.
두형 토기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후까지 유행하던 제사용 그릇이다.
원래는 굽이 긴 다리에 사발이 얹어진 형태다.
이 두형 토기는 우물지가 기원전후에 사용된 제사용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다리가 길어지고 접시가 얕아지는 두형 토기는 대략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후 사용한 토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나정에서 출토된 두형 토기 역시 그런 범주의 토기로, 기원전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윤형원 학예연구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삼국사기는 '제2대 남해왕 3년 봄에 시조 혁거세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해왕 3년은 기원후 6년에 해당한다.
이것은 두형 토기의 편년과 일치하는 시기다.
우물 건물은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인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나정 발굴!
그것은 신라 건국 신화를 역사로 다가서게 하고 있다!
3. 기원전 57년!~고인돌 문화의 토착 세력을 통합하고
박혁거세, 우수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신라를 세우다!~
"발굴을 토대로 고건축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팔각 건물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해?는데요
이 팔각 건물 아래 서니 제가 굉장히 작게 느껴집니다.
크기를 보면 동서로 20미터, 남북으로도 20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3층 건물로 추정이 되구요,
당시에 이런 건물을 짓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신라의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기 위해 이런 팔각 건물을 지었던 것입니다.
신라의 왕들은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직접 주관을 하고 빠짐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시조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 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조를 받들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통성을 보장받고,
그와 더불어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나정에서 시조를 모시는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과장된 것은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생각이 듭니다.
삼국사기에 신라 건국 신화에 의하면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했다고 하는데요,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입니다.
그때 과연 박혁거세는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을까요?"
우물 건물터 외곽 가장 아래층에서 새로운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사각형의 집자리 유적이다.
바닥의 가장자리에는 집기둥을 세운 흔적도 보인다.
배수를 위한 외부 돌출구도 확인된다.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에서 전형적인 청동기 집자리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청동기 집자리는 박혁거세 이전에 이곳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증거다.
"지금 보시는 게 청동기 시대 주거지입니다.
이런 주거지가 담장 하부와 북쪽에서 다섯동이 모두 확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정 주변에 청동기 시대 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 이문형 연구원
반달모양 돌칼, 방추차, 토기.
이들 청동기 유물은 박혁거세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나정 일대에는 발달된 농기구와 농경 문화를 가진 농경민들의 정착 마을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정 근처에 그 시대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존재는 기원전 2세기,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1세기경에 박혁거세 집단이 등장해서
새로운 하나의 소국인 사로국, 또는 서라벌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그 증거가 되겠습니다."
- 이종욱교수, 서강대 사학과
경주 전역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고인돌.
경북 경주시 내남면 상신리.
경북 경주시 강동면 오야리.
지배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고인돌은
신라 건국 이전에 이미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정치적인 토대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박혁거세는 경주 전역에 퍼져 있는 청동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해 신라를 건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혁거세) 이전에 조선 유민이 산골짜기에 초원을 이루고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전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1977년 경주 조양동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여기서 절개된 면에서 토광묘 흔적이 보여서 80년대부터 발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흔적이 보였던 토광묘에서 처음으로 동경도 나오고, 철구도 나오고,
와질계 토기도 상당히 많이 출토가 되었습니다."
- 이상구 학예연구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했다고 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당시 신라 건국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갈증은 조양동 고분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철제 농기구를 비롯한 철기류와 함께
신라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기원전 1세기경의 각종 유물들이 조양동 유적에서 쏟아져 나왔다.
청동기 무문 토기에 이은 새로운 형태의 와질 토기가 새롭게 등장했다.
토기의 모양도 매우 특이한데 양쪽에 소뿔 모양의 손잡이를 붙인 이 와질 토기는
무문 토기와 결합된 과도기적 성격의 토기로 기원전후에 만들어졌다.
수정, 관옥.
조양동 유적은 경주 지역 문화가 이미 기원전 1세기경 고도의 문명 단계에 들어섰음을 입증한다.
"1980년대에 조양동 유적이 발굴 조사됨으로써
경주의 청동기 시대와 4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 그 사이에 해당하는
공백기를 메울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양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기록에서만 보이던 신라 초기의 모습을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서 잘 보여줄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윤형원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라리, 황성동, 구정동, 입실리.
조양동 유적에 이어 경주 각 지역에서 보여주는 기원전 1세기에서 3세기의 유물들은
당시 경주가 국가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조양동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 전한 시대의 청동거울은
기원전 1세기 신라가 중국과 무역을 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것이 중국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그런 물건이기 때문에
이것을 교역 집단이 아니면, 서로 주고 받는 정치 집단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유물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유물들이 조양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봐서
이미 강력한 집단 체제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조유전 교수,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선진 문물인 철기 문화를 지닌 집단이었을 것이다.
철기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박혁거세는
청동기 문화를 지닌 지배 세력들을 통합하고 신라를 건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혁거세 집단이 이 경주 지역으로 이주했을 때
이런 지석묘를 구축한 세력이랄까 권력 구조가 없었다면 아마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지석묘 권력 구조위에, 혁거세 이주민 집단은
한단계 더 높은 권력 구조를 장악함으로써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죠."
- 이종욱 교수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웠다는 기원전 1세기,
경주에는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강력한 철기 문화의 힘을 가진 세력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북방 이주민 박혁거세 세력!~
알영과 혼인을 통해 사로국을 세우다!~
"나정의 발굴로 우리는 신라의 건국 신화가
상당 부분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에는 건국 신화가 있는데요,
공통점을 보면 모두 주인공을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어떤 것은 너무 과장되고 황당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역사적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화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 로마신화죠.
그리스, 로마신화로 국제관을 꾸며 봤습니다.
신들의 왕 제우스, 그리고 태양의 신 아폴론도 보입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없는 부분들이 많죠.
그런데 여기를 보시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쌍둥이 형제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쌍둥이는바로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강물에 버려진 쌍둥이를 암늑대가 발견하고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는데요
늑대가 젖을 먹여 사람을 키웠다니 역시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대리석에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가 커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싸우는 장면을 조각해두었습니다.
결과는 형인 로물루스가 이기고 로마를 건국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로마 건국 시기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마가 건국되었다'고 정확하게 날짜까지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 로마 건국 초기 왕궁 유적이 발굴되었는데요,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왕궁은 기원전 8세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화가 말하는 기원전 753년과 일치하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과장되는 이야기를 빼고 보면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신라로 돌아오죠.
신라의 건국 신화에는 박혁거세가 왕이 되는 과정을 자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박혁거세가 왕이 되기전 6촌장이 있었는데
어느날 나정옆 숲 사이에서 말이 울어 가봤더니 큰알이 있었고
그 알을 깨고 나온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라는 것입니다.
박혁거세가 13살이 되자,
6촌장들은 그를 왕으로 모십니다.
어떨까요?
이것도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양산재가 있다.
양산재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모신 6촌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알천양산촌장...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6촌)의 촌장의 신라 건국 공로를 기리기 위해
각기 성(姓)을 정해주었다고 한다.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배(裴)씨, 정(鄭)씨, 설(薛)씨.
여섯 성씨가 바로 그것이다.
'유리왕 9년 봄에 6부(6촌)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내렸다.'
지금도 여섯 촌장의 후손들은 각기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알천양산촌장은 경주 이씨의 시조다.
시조 제사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씨의 시조, 알천양산촌장이 하늘에서 내려와 정착한 곳이라는 표암지.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여섯 촌장들이 회의를 하는데 나정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가보니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를 데려다 키워 열세살 되던 해 임금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섯 할아버지들이 다같이 박혁거세 임금님을 데려다 이쁘고 곱게 잘 키워가지고
열세살 잡숫던 해에 신라를 건국하시고 개국을 하면서 임금으로 모셨다는
그것은 신라 사기나 유사에, 또한 저희들의 고서에 그대로 나옵니다."
- 이종택, 경주이씨 표암화수회장
그렇다면 여섯 촌장들은 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의 건국 기사에 주목할 대목이 있다.
"나정 숲에서 말이 울고 있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6촌 사람들이 그 출생을 신기하게 생각해 높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박혁거세와 말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다.
신화를 통해 민족의 이동 루트를 연구하고 계신 김화경 교수.
그는 박혁거세가 북방에서 이주한 세력이라는 것을 말이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박혁거세 신화에 말이 나오거든요.
말이라는 것은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매개해주는 그런 동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결국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 천당 신화를 가진 그런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은 대개의 경우 동북아시아에서는 유목, 수렵 문화를 갖고 있었던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박혁거세는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유목, 수렵 문화를 가진 그런 민족이었다고 볼 수 있죠."
- 김화경 교수,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나정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선도산.
이곳에서도 박혁거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성모사.
선도산 정상에는 선도산 성모를 모셔놓은 사당이 있다.
이 선도산 성모가 바로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라는 것이다.
박혁거세가 이주해온 세력이라는 것을 성모에 대한 전설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성모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성모는 원래 중국 황제의 딸이었는데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성스런 능력으로 아들을 한분 두었는데, 그 아들이 성장해서 박혁거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박씨 집안의 따님들이 모여서 이곳 성모사에서 한달에 두 번씩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 채무기 사무국장, 경주문화원
박혁거세와 관련된 신화들은 그가 북방에서 이주해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북방 이주 세력이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설명이 된다.
박혁거세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구정동, 조양동, 경주의 여러 고분에서는
철제품과 철제 무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중 주목할 철기가 있다.
말모양 허리띠 장식, 철제 마구가 바로 그것이다.
경주에서 마구는 청동제 유물로는 없던 것이다.
이것은 경주 지역에 기마 세력이 등장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를 건국하는 박혁거세가 6부 촌장의 추대를 받는 것이 기록에 나옵니다만,
그런데 이 세력이 말과 결부된다면 첫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기마, 말을 탈 수 있는 집단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은 보병과 기마는 천양지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을 탄 집단이 등장한 걸로서도 볼 수 있는데,
철기와 더불어 기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봐 가지고
신라 사회에 있어서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고,
나아가서 이런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될 수 있는 소지가
이런 기마 집단과 관계가 있지 않는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 조유전 교수
그렇다면 북방 유목 민족이었던 박혁거세가 경주에 정착한 뒤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나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알영정.
알영정은 박혁거세 왕비인 알영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박혁거세 왕비 알영도 우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영의 탄생지 알영정에는 우물이라고 전해져 오는 곳에 화강암을 덮어 우물 표지석을 해두었다.
알영의 탄생 신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알영정에서 용이 나타나 오른쪽 갈비뼈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알영 왕비라는 것이다.
용에서 태어난 알영은 먼저 정착한 선주민 세력으로 해석된다.
"알영정에서 용이 나타나 오른쪽 갈비뼈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불렀다.
자라면서 덕기가 있으니 왕이 이를 듣고 왕비를 삼았다."
- 삼국유사
"나정 마을 세력하고 알영정 마을 세력하고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 나정 마을과 알영정 마을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이웃한 마을이었습니다.
두 마을 세력들이 혼인을 통해 힘을 모으고
그 힘을 바탕으로 경주 지역에 있던 6촌 세력들 위에 군림하면서
새로운 정치 발전 단계인 국가 단계로 성장을 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만들어진 나라가 사로국 또는 서라벌이라는 나라가 되겠습니다."
- 이종욱 교수, 서강대 사학과
강력한 철제 무기와 기마 문화를 가지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박혁거세.
그는 경주의 육촌장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고 새로운 국가의 시대를 열었다.
신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5. 박혁거세의 왕궁, 창림사터!~
사로국은 현재 경주 지역의 소국에서 출발했다!~
"박혁거세 집단이 경주로 이주해서 정착한 마을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을 중심에 이렇게 우물이 있구요, 그 뒤에는 집들이 있습니다.
고대에는 우물이 마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우물 파는 법을 알고부터 사람들은 강가에서 벗어나
넓은 들로 나아가서 농경이나 목축을 하고 마을을 이루어 살 수 있었습니다.
박혁거세의 이주 집단 역시 나정 우물이 있는 이곳에 정착해서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박혁거세는 또한 나정에서 신라의 건국 기반을 잡았던 것입니다.
2천여 년전 박혁거세가 나라를 건국했다면 왕궁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실마리는 삼국유사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남산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 박혁거세와 알영를 길렀는데 그것이 지금의 창림사라는 것이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에 궁실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박혁거세와 알영) 를 길렀다" - 삼국유사
그렇다면 창림사(昌林寺)는 어디에 있을까?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유적들을 조사해 그린 지도에 따르면
신라 초기 유물들은 나정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여기가 경주 시가지입니다. 여기가 남산이구요,
여기가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이구요, 여기가 박혁거세가 묻혔다는 오릉입니다.
그 옆에 신라 초기에 도당 토성, 박씨 왕조의 무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지역이 박씨 왕조의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오춘영 학예연구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삼국유사는 창림사가 남산 서쪽 기슭에 있다고 했다.
나정에서 불과 2백미터 떨어진 곳, 바로 창림사가 있다는 남산 서쪽 기슭이다.
그런데 남산 기슭 초입부터 예사롭지 않는 돌들이 발견된다.
바로 주춧돌이다.
이 거대한 주춧돌들은 숲속 여기저기에 수없이 흩어져 있다.
주춧돌은 이곳 남산 기슭에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흔적이다.
"주춧돌입니다. 보시다시피 주변에 굉장히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
가공된 주춧돌을 가만히 보면 다른 지역의 주춧돌보다 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초석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높이가 7미터에 이르는 삼층 석탑이다.
이 절이 아주 공을 들여 만든 큰규모의 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춧돌이 흩어져 있는 근처에는 거대한 석탑 하나가 서 있다.
절터에서 이 절의 이름을 밝히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절터의 이름을 밝히는 명문 기와다.
창림(昌林)'
바로 창림사다.
박혁거세가 궁실을 지었다는 바로 그곳인 것이다.
"혁거세가 왕위에 오를 때 머문 장소가 나정 그 근처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창림사도 불과 얼마 안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초기 혁거세가 축조한 궁실이나,
혁거세가 자랐던 궁실이나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 이종욱 교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사자무늬 비석 받침.
연꽃무늬 석등 하대석.
창림사는 통일 신라 시대에 지어진 절이다.
창림사터에서 발굴된 유물만 보더라도 창림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창림사가 들어서기전
그곳엔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가 거처했던 궁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궁실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웅장한 규모의 건물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고구려 건국 신화를 보면, 처음 주몽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말을 세우고 초막을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예로 미루어서 혁거세가 지은 궁실도 큰집은 아닐 것이고
청동기 시대 주거지보다 약간 더 크고 띠를 이은 초가집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이종욱 교수
그렇다면 박혁거세가 건국한 왕국은 어디서 어떤 규모로 시작된 것일까?
신라의 고대사를 추적하는 이종욱 교수.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박혁거세의 왕국을 밝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웃하고 있는 소국들과의 경계를 찾아내면 사로국의 영역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다.
우선 현재의 영천 지역에 있던 골벌국, 그리고 청도의 이서국, 그 다음에 현재의 울산 지역에 있던 우시산국,
이러한 소국들의 영역을 생각하면 현재 경주시 지역이 대체로 사로국 또는 서라벌 영역이 되겠습니다."
- 이종욱 교수
음즙벌국(안강), 골벌국(영천), 압독국(경산), 이서국(청도), 우시산국(울산), 사로국(경주).
기원전 1세기 박혁거세가 세운 사로국의 모체는 현재의 경주시 전체 지역을 합친 정도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울 당시 경주 지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자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
이 지명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던 여섯 촌락의 이름이다.
"신라가 개국전에 진한, 마한, 변한 삼국이 있었지 않습니까.
여긴 진한 땅이예요.
그때 이미 지역이 정해져서 어느 지역은 손씨가 맡고, 어느 지역은 최씨가 맡고 해서 살았습니다."
- 이종택, 경주이씨 표암화수회장
여섯 촌장이 나누어 다스렸다는 여섯 촌락.
그 촌락을 찾으려면 현재 경주 지역의 지형과 지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경주에는 명활산, 알천이라고 불리는 북촌이 있구요, 소금강산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쪽 지역들이 금산가리촌, 알촌, 양산촌, 또 명활촌, 고야촌과 연관이 있지 않나 봅니다."
- 채무기 사무국장
알천, 명활산.
그 옛날 지명의 이름이 경주 지명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두 개의 촌락이 찾아졌다.
또 경주의 지명을 보면 산, 또는 내와 같은 자연 조건에 의해 크게 여섯 개 지역으로 나뉘고 있다.
위성 사진으로 보면 그 경계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섯 개의 산골짜기에 촌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다.
남아있는 지명과 기록를 근거로 산골짜기를 중심으로 이룬 여섯 촌락의 위치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공간이 현재까지는 1,000 평방킬로미터 정도, 직경으로 따지면 30킬로 또는 40킬로 정도 된다고 보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사방 100리라는 영역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구는 대체로 1만 명 정도 사는 걸로 보면 좋겠습니다."
- 이종욱 교수
이교수가 30~40킬로 안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인구는 1만 명.
그것은 소국의 인구가 1만 명이라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신라는 경주의 작은 소국으로 시작된 나라다.
그 나라를 세운 시조 박혁거세는 나정을 근거로 세력을 넓혔다.
여섯 촌장이 다스리던 촌락을 장악하고 그들 위에 강력한 왕으로 군림한 박혁거세.
신라인들은 그런 그를 신화로 그리며 기억해 온 것이다.
" 일본의 학자들이 주동이 되어가지고 신라의 건국 신화라든지 이런 걸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알에서 나온 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일본의 일급 학자들이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매우 과학적인 답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들이 신화를 해석하는 능력이 없거나
악의적인 의도로 한국의 건국 신화를 못믿을 것으로 만들어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정이 발굴되면서 신라 건국 신화의 현장이 그대로 드러난 거죠.
그러니까 조선 시대까지 유지 되어오던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런 책이랄까 원래의 역사가
이번 나정이 발굴되면서 다시 살아나게 된 겁니다."
- 이종욱 교수
나정 발굴로 박혁거세와 그가 세운 나라 신라는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나정에서 시작된 신라 건국 이야기, 그것은 이제 역사가 되어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 신화를 포함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상당 부분을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나정 발굴로 삼국사기에 기록한 신라 건국 신화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이를 계기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한국 고대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2천여 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혁거세의 나정,
나정을 통해 우리 고대사가 한층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길 기대해봅니다."
- 고두심의 역사스페셜을 보고(늘 편안하세요!~~)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요즘 많이춥지요?오작교선생님~이럴때 건강 잘챙기세요 편안한밤 되시구요 늘 감사합니다...
芝香 님 !! 안녕하세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예~감사합니다 파파선생님~많이 추우네요 감기조심 하세요...
재미있네요. 잘 봤어요
반가워요 춥죠? 감기조심해요...
역사를 전공한 저이지만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초기의 신라역사 늘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런 얘기를 숨죽이고 읽었다고 할까요. 감사할 뿐입니다.
예~그러셨군요...저도 감사합니다...안온한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