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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반이 지나갑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뭘 했을까 싶습니다. 하기야 뭐 특별나야 인생이겠습니까? 평범한 사람, 별 탈 없이 살았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감사하지요. 여기저기 무너져 죽고 떨어져 죽고 날벼락 같은 사고들이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세상에서 소위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 힘없이 쓰러지는 일들입니다.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고 어쩌면 하소연할 마땅한 곳도 없이 살다가 맥없이 세상을 뜨는 것이지요. 대한민국 자랑거리가 온 세계에 들썩이는 것 같은데도 그 이면에서 속앓이 하는 백성이 있음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 할까요? 아무튼 이 꼰대세대가 지나가야 이루어질까요?
코로나19를 이겨내는 듯한데 이제는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하고 있답니다. 그놈들도 진화하는가 봅니다. 지금 접종하고 있는 백신이 그 놈들에게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아직은 얼굴을 가리고 사는 것이 지속되어야 할까 싶습니다. 날씨는 더워지는데 답답해지네요. 작년에는 멋모르고 버텼지만 또 당하려니 속이 탑니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야 낫습니다. 확실하게 이길 때까지는 참고 버텨야 합니다. 이 여름, 여전히 쉽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래도 정부는 숨통 좀 열어주려 애쓰고 있는 듯싶습니다. 서로 조심하며 눈치껏 벗었다 썼다 하는 거지요. 그리고 아직 멀쩡할 때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이제 곧 반환점을 돕니다. 무사히 지나온 것을 감사하며 다시 남은 반도 건강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서로에게 격려의 원자탄을 쏘아주기 바랍니다. 일단은 건강합시다. 그리고 보지 못해도 인사 많이 나누기 바랍니다.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1년 6월 26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6-20주일설교(구원에 이르는 지혜)
성경 디모데후서 3 : 13 - 15 2021년 6월 20일
설교 : 구원에 이르는 지혜 김종우 목사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천국 가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구원과 영생이 우리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방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한창 구원에 대한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 구원 받았습니까? 언제 받았습니까? 성도들이 이 질문 앞에 당황하였습니다. 감히 대답을 못하였지요.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면서도 자기 생활을 돌아보니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감히 자신 있게 나는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 약점을 파고든 이단종파가 있었습니다. 그 후 교회마다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애썼습니다. 요즘은 좀 잠잠해졌지요. 그들의 활동도 미진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성도들의 믿음은 확실하게 서있을까요?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는 성도들도 어쩌면 자기 최면에 빠져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 흔들리지 말자, 그 최면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분에게서 결재가 나야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구원 받았다고 주장해도 정작 하나님은 ‘너는 아니야,’ 하신다면 어쩝니까? 천국 문의 열쇠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까, 납니까?
우리가 무어라 말하고 주장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딤후 3 :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악한 자들, 속이는 자들, 그들은 더욱 악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고 속이고 한답니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난다고 합니까? 그 처음으로 가봅니다. 1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그렇습니다. 지금 말세 때의 일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속이고 속고 하는 걸까요? 성경이 세상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야 그런 일이 꼭 말세라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요.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인데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라고요? 예, 하나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경계심을 일으키기 위해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도 경계하셨습니다. 마 24 :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미혹한다’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쉬운 말로 하면 속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누구를 속인다고요? 택하신 자들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사기 쳐서 돈이나 재산을 뺏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요. 성도들의 영혼을 빼앗으려 하는 겁니다.
왜 속습니까? 모르니까. 알고서야 속겠습니까?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 무게를 달아줍니다. 그런데 저울 눈금을 볼 줄 모른다면 어찌 됩니까? 맞는지 틀리는지 어찌 압니까? 그냥 주는 대로 가져오는 거지요. 눈금을 볼 줄 모른다면 속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속이는 자가 없으면 속는 자도 없겠지요.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육적인 세상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성경은 영적인 세상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속여서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지옥 자식으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딤후 3 : 14절에서 무어라 말씀합니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합니다. 배워서 똑바로 알고 그것을 믿고 행하라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속는다는 말입니다. 속으면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서 육적인 일이라면 돈 잃고 재산 빼앗기는 정도이지만 영적으로는 멸망으로 즉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소홀할 수 있습니까? 문제는 재산 날아가면 울고불고 야단인데 자기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영혼을 속이는 자입니다. 처음 누구를 속였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속였잖아요. 하나님은 분명 먹으면 죽는다, 하셨는데 마귀는 뭐라 했습니까? 먹어라, 먹어도 절대 안 죽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지요? 죽음입니다. 육적으로 속는 거야 돈 날아가는 거 또는 재산 빼앗기는 거 정도지만 영적으로는 죽음입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입니다. 어느 쪽이 더 무섭습니까? 우선 알 것은 이 말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육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하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기꾼 사건 정도로 아는 거지요. 성경이 그런 수준밖에 안 됩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세상일을 가르쳐주려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의 구원과 영생입니다. 죄 가운데 멸망당할 인생들을 어떻게든 구원하여 영생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 제사장으로 세워 세상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 왜 속는다고요? 모르니까. 왜 마귀에게 속아 넘어갑니까? 모르니까. 무엇을 몰라서 속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모르니까. 전에는 전도하며 그런 소리 종종 들었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어봐.’ 덮어놓고 믿으면 ‘맹신’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까막눈으로 믿는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믿는 것이지요. 하기야 몰라도 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 그대로 ‘덮어놓고’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마귀의 아주 쉬운 먹잇감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는 신앙생활 아주 잘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집까지 있으면 못 말리는 신앙인이 되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교과서가 되는 거지요. 자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잘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잘 가고 있지요. 어디로? 지옥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평생 애쓰고 수고한 것이 물거품 정도가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눈 똑바로 뜨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경계하였습니다. 고전 10 :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아멘!
자기는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구원 받았다고 믿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을 가고 있으니 염려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옳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어찌 압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의 열두 정탐군이 가나안을 돌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10 : 2로 갈라집니다. 과반 이상, 10명이라는 족장이 가나안을 악평하였습니다. 겨우 두 사람만이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니 염려하지 말고 들어가자고 주장하였지요. 백성이 어느 쪽을 택하였습니까? 많은 쪽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등지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태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였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아픈 일은 약속하신 땅을 구경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는 사실이지요. 불쌍한 일 아닙니까? 우리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알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 있는 곳에 줄을 서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해야 합니다. 딤후 3 : 14 - 15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아멘! 성경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칠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기본 상식으로 스스로 알 수 있는 말씀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 정도는 구태여 자질구레한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등의 말씀을 꼭 길게 설명해야 합니까? 말씀 그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사실 성경의 교훈도 우리가 몰라서 지키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육신의 욕망이 너무나 커서, 아니면 연약해서 지키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꾸준히 자기와 싸우며 노력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수준이 그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보의 신앙도 아닙니다. 육신에 매여 사는 세상 사람들의 도덕 윤리 수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백성은 육신을 가지고 있으나 육신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한 자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세상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7 :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수준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도 세상 사람들 수준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정도의 말씀은 기본이고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목적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지요. 딤후 3 :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바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디모데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겠지요. 바울이 디모데를 가리켜 뭐라 합니까?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딤전 1 : 2)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받은 말씀으로 양육하였으니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딤후 1 : 5) 그러나 그 때의 믿음과 디모데의 믿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복음으로 디모데를 양육하여 아들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단순히 교훈의 말씀 정도로 아는 성경은 해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지키면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행 8 : 26 - 31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자, 에디오피아의 권세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갑니다. 그가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야의 글이었지요. 즉 예언서란 말입니다. 어디를 읽었는가 보니 사 53장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메시야’ 장이지요. 제자 빌립이 물어봅니다. 내용을 아십니까? 안답니까, 모른답니까?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읽어도 모르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누가 필요하답니까?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다는 것이요, 곧 하나님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언이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그 시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언제 알게 되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 전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사실 그래서 어려움이 생깁니다. 즉 이루어질 때 그것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그 예를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경을 끼고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고 이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예언이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여 당신 백성에게 주셨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약속을 믿고 그래서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셨습니다. 갈 4 :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때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 백성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증거하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지요.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말은 곧 ‘내가 너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 하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따라주는 자들이 지극히 적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고 예언이지요. 역시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알까요? 마찬가지로 이루어질 때 알게 됩니다. 문제는 같습니다. 다시 오셔도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도 오신 그 분이 스스로 증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면 도대체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면 다시 오실 때도 누가 증거하겠습니까? 오신 분이 스스로 증거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누가 믿어주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처음 오셨을 때도 ‘내가 바로 너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 하니까 뭐라 했습니까? 귀신 들렸다고 했지요. 다시 오셔서 또 ‘내가 그다,’ 한다면 뭐라 하겠습니까? 또 다시 미친놈이 나타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지요. 그냥 막연히 믿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날짜야 모른다 치고 그러면 어떻게 오시나요? 그야 구름 타고 오시지요.(마 24 : 30, 계 1 : 7) 그렇습니까? 그러면 무슨 구름을 타고 오시나요? 무슨 구름이라니? 구름이면 구름이지 무슨 구름은 무슨 구름이야? 아니 구름의 종류가 많잖아요? 뭉게구름도 있고 양떼구름도 있고 새털구름도 있고 등등.
우리는 여태 천국 가기만을 바라고 신앙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다녀가신 후 여태까지 천국이 오기를 기도한 사람은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로지 천국 갈 생각만 하고 기도하였겠지요. 그런데 성경의 약속과 예언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계 21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보십시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켜 무엇이라 말합니까? 천국,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 그리고 땅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전’ 오늘날 ‘예배당“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영계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천국이 하늘에서 내려온답니다. 어디로? 땅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상으로 내려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나라이 임하옵시며‘ 무슨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십니까? 세상 살기 좋은 유럽의 어느 나라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고 기도하고 각자 알아서 기도할 때는 ‘천국 가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까?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오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오라고 부르시겠습니까? 헷갈리지요? 우리는 가기를 바랍니까, 오시기를 바랍니까? 아이고, 하나님, 불편하게 뭐하려 여기까지 오십니까? 그냥 우리가 여기서 살 때까지 살고 가지요, 뭐 그럽니까? 거 신앙 복잡하게 만드네, 그렇습니까? 모르면 복잡합니다. 알면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구원의 길을 복잡하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쉽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알아야 하고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본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가르쳐주기를 고대하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행 17 :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처럼 성경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잠 8 :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세상에서 돈을 벌려는 그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알고자 한다면 분명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물론 나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말한 것처럼 가르치는 자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계시 곧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루시는 그 분이 와서 가르쳐줄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약속 곧 예언을 이루시고 증거하였듯이 이제 약속하신 그 분이 오셔서 신약의 약속, 예언을 이루시고 증거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오신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르쳐주신답니다. 15 :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마찬가지입니다. 그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이라 하십니다. 성령은 말 그대로 ‘영’이고 천사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직접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서 가르쳐주십니까? 천사가 찾아오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나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만났다가 심장마비로 곧장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계 1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계시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출발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말씀의 출발, 바로 하나님이시니까요. 그 말씀은 하나님의 손에서 예수님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다음 천사에게 넘겨집니다. 이 천사가 앞에 말씀한 ‘보혜사 성령’입니다. 여기까지 영계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2천 년 전에 예언으로 주실 때는 ‘요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날 때, 마지막 때는 2천 년 전의 그 요한이 부활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 요한 역할을 하는 목자가 나타나리라는 뜻입니다. 그가 종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이 마지막 때라면 우리는 누구를 찾아가서 배워야 합니까? ‘요한’ 역할을 하는 목자나 그 요한에게서 전달을 받은 종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초림 때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예언을 풀어주실 때 하나님 백성이라 칭하던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반대하고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오셔서 신약의 예언을 풀어줄 때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분고분 받아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걱정스럽게 미리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 곧 마지막 때 세상에 믿음이 있겠는가 하시는 겁니다. 아마도 초림 때와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을 증거하는 목자가 나타나서 증거할 때 모든 반대와 핍박을 무릅쓰고 찾아가서 배우려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알려주는데 그것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인지, 그 목자가 나타났는지 어찌 아는가? 처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하는 말씀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이게 하늘의 말씀인지 세상 이야기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
킬러에게도 윤리의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살인청부업자라면 일단 사람을 해하는 직업(?)인데 사람을 해하는 자체가 이미 비윤리적인 일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런데 윤리의식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살인청부업자를 보호해주는 경호원은 옳은 일을 하는 건가요? 경호원의 윤리의식이란 것도 있습니까? 경호원의 해야 할 일은 의뢰 받은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의뢰하는 사람은 본인일 수도 있고 제 삼자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요구를 받은 경호원은 자기가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가부를 결정합니까? 그런 경우도 있지만 다만 명령으로 전달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국가 고위인사 경호에는 오직 명령이 있을 뿐이지요.
물론 사회 저명인사를 경호하는 경우와 그가 누구이든 경호를 의뢰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요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위직 인사가 아니라면 유명 연예인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냥 경호 없이 다닙니다. 사실 가장 안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하고 괴팍한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 유명해지면 안전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의 이름을 빌어 얼굴 좀 알리려는 심보를 가진 사람이 있지요. 그래서 경호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국가 요직의 사람들을 경호하는 사람들은 일반 사립 경호원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직분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며 사고를 당할 경우에 해당하는 보장도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립 경호원이라며 혼자 알아서 대처해야 합니다. 자연히 대가가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호원도 직업이라면 그에 합당한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위험한 직종입니다. 어쩌면 목숨까지 담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과 의뢰인을 지킬 만한 무기도 소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야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경우 총기 소지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직업이라 여겨집니다. 아무튼 외국의 경우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위험 요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사립경호원이라면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받고 응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무엇에 기준을 둘까요? 의뢰인의 사람됨? 아니면 경호해주는 대가? 예를 들어 악명 높은 살인청부업자가 경호를 의뢰한다면 그것도 상상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주는 조건을 건다면 응할까요, 사람됨을 이유로 거절해야 할까요?
작은 악으로 큰 악을 제거한다, 옳은 일입니까? 경호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도 무술 실력이 대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그만한 사람이니까 그런 직업을 택할 수 있다 싶습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치안을 맡은 경찰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경찰에도 특수기동대원이 있기는 합니다. 보다 더 특별한 경우라면 특수부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남다른 훈련으로 다져진 군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립 경호원의 직업을 그런 사람들이 퇴직하고 택한다고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사립경호원은 남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의뢰인이 믿고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보장이 없는데 큰돈을 지불하겠습니까?
경찰도 감당하기 어려운 범죄조직의 커다란 테러를 감지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경찰이란 대단위 조직이 움직이는 것도 부담이 되고 또 쉽게 노출되기에 작전을 펴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사립경호원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단한 킬러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대단한 사건을 해결해준 덕에 그의 과거 범죄경력을 모두 삭제해주었습니다. 물론 이제는 그 직업에 종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용하고자 합니다. 군에서도 특별한 작전을 수행함에 범죄자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공하면 범죄 경력을 지워주는 조건이지요. 그들 입장에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게 그거니 도전해볼 만합니다.
이미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시 필요하여 투입됩니다. 아마도 대단한 대가가 뒤따르리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사립경호원 자격증을 상실한 ‘마이클’이 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대단한 킬러 ‘다리우스’와 버금가는 연인 ‘소냐’까지 합류합니다. 사실 다리우스와 소냐의 신혼여행 중 사고가 발생함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들과 다시는 재회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마이클도 면허 회복을 위해서 도리 없이 껴들기는 합니다. 그렇게 하여 경찰과 연결되어 국제적 위난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분노의 질주’ 식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비슷하게 주인공은 아무리 두들겨 맞거나 총에 맞아도 죽을 수 없고 결국에는 일촉즉발 앞에서 문제는 해결됩니다. 한 마디로 해피엔딩이지요.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들의 사정없이 쏘아대는 입담입니다. 그것도 ‘청소년입장불가’의 딱지를 붙이지 않을 수 없도록 쏘아대는 속 깊은(?) 성담(性談)이지요. 사실 요즘 아이들이 영상은 보았어도 말은 듣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더 위험(?)할 수도 있지요. 영화 ‘킬러의 보디가드2’(Hitman's Wife's Bodyguard)를 보았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악한 자를 사살하는 자가 선한 자입니까, 악한 자를 보호하는 자가 선한 자입니까? 참으로 까다로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둘 다 선한 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악한 자라도 누구에게 그를 살해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 사람 역시 살인자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살인자를 선한 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 사람의 목숨을 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요즘 사형제도까지 불법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가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을 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람들의 생명을 해한 사람을 처단한다는 것도 허락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을 보호해준다는 것도 선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보디가드는 선하고 악하고 그런 것은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의 직업일 뿐입니다. 그러니 상당한 보수를 받으면 그에 따라 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것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의뢰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지요. 보디가드는 그것을 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따집니다. 왜 그런 사람을 보호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잡아서 경찰에 넘겨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직업인으로서 그것을 일일이 찾아내고 알아보고 따지고 그래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그만큼 유명인사(?)라면 쉽게 알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가능할까요?
서로 앙숙처럼 된 대단한 실력자들이 만납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죽이려고 맞닥뜨렸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서로 죽을 뻔하다 피했습니다. 그러니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 묘한 처지가 됩니다. 이번에는 한 쪽이 다른 쪽을 보호해서 목적지까지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서로 못 죽여서 한이 된 사이인데 어떻게 보호하고 보호를 받으면서 갈 수 있습니까?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그만한 조건이 주어져 있기에 임무로 수행해갑니다. 가는 과정이 순탄할 수 없습니다. 런던에서 바다를 건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겨우 이틀도 되지 않습니다. 가능할까요?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아 무시무시한 독재를 행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 살인광 독재자 ‘두코비치’를 국제사법재판소가 재판을 하여 무거운 중형을 내려야 합니다. 문제는 증인으로 택함을 받는 사람마다 살해당하는 것입니다. 재판 기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무혐의로 풀려날 지경입니다. 어떻게든 증인을 확보하여 재판을 진행해야 합니다. 웬만한 증인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경찰이나 인터폴보다 강력한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독재자의 권력은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 가능성은 악명 높은 살인자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킨케이드’를 증인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옥살이를 하고 있는 그 아내를 석방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해줍니다.
역시 이송 중에 습격을 당합니다. 운송 책임자 ‘루셀’이 간신히 피하여 자기네 안전가옥으로 부상당한 킨케이드를 데리고 피합니다. 그리고 옛 파트너요 애인이었던 ‘브라이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유명한 보디가드였는데 한 번의 실수로 그 대열에서 물러난 사람입니다. 그래도 실력만은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옛 명예를 찾아줄 조건으로 도움을 청해 부릅니다. 브라이스와 킨케이드의 만남, 말 그대로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할 때가 아닙니다. 경찰에도 쫓기며 범죄단에게도 쫓기는 상황입니다. 일단 피해야 합니다.
원수지간이 공동운명체가 됩니다. 어떻게든 목적지 암스테르담 국제사법재판소까지 시간 안에 가야 합니다. 경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두코비치를 두호하려는 범죄단입니다. 무시무시하게 막무가내로 쫓아옵니다. 어떻게 알고는 길목마다 지키고 따라오고 공격합니다. 그러니 길목마다 사고가 터집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대단한 실력자들입니다. 위기 때마다 용케도 벗어나며 헤쳐 나갑니다. 특히 암스테르담 도시에 도착해서 막바지 재판소까지 시간에 쫓기며 당도하는 당면이 압권이지요. 보트로 오토바이로 도시를 가르고 질주합니다. 대단한 액션입니다. 어느 쪽이 보호자이고 어느 쪽이 피보호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사실 재미는 액션보다도 두 사람의 떠벌리는 입담에 있습니다. 그 속에는 특히 킨케이드의 삶이 묻어있는 속된 말로 ‘개똥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일단 생존을 위하여 합력하게 되고 서로 각자의 대가를 얻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갑니다. 천하의 악질 독재자 살인마 두코비치를 죄인으로 확실하게 감옥에 쳐 넣어야 하는 목적을 달성함으로 속이 후련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희한한 동행이 더욱 신나지요. 그렇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눈도 즐겁지만 귀가 한결 호강합니다. 킨케이드, 조금 과장하면 총보다 입이 더 셉니다. 영화 ‘킬러의 보디가드’(The Hitman's Bodyguard)를 보았습니다. 2017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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