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헌법 좀 바꿉시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태어났다. 올해 74살이다. 헌법은 나라의 바탕을 이루는 기본법이며 국민들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국가의 기본 통치 원리와 조직은 물론 국민의 기본권 등 규칙이 담겨 있다. 국회에서 제정되는 모든 법령은 헌법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 헌법은 그동안 아홉 차례의 개정 작업을 거쳤지만,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본 이념은 변하지 않고 지켜왔다.
현행 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제9차 개정 헌법이다. 당시 ‘민주화’라는 대의(大義)와 이를 막으려는 공권력으로 6·10항쟁을 낳았고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국민들의 간절한 열망이 개헌을 통해 역사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후 35년간 대한민국의 높아진 국격과 시대의 가치에 부응하는 국민들의 헌법 개정 열망과 요구는 번번이 정치권에서 막혔다.
개헌하면 국민들은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를 바꿀 권력 구조 개편만을 떠올린다. 또 각종 여론 조사도 대통령 임기와 개헌 시기만을 묻는다.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할 것인지, 의원내각제로 할 것인지 언제 개헌을 할 것인지에만 매달린다. 그러다 보니 개헌은 정치인만의 전유물이 됐다. 헌법 개정은 역대 대통령과 국회의장의 취임 단골 일성이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엔 정책과 비전 실현을 이유로 집권 말기엔 대선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졌고 정당과 정파 간 이해가 엇갈리면서 헌법 개정 작업은 흔적만 남기고 늘 사라졌다.
개헌의 최종 결재권자인 국민은 지금 개헌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각종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헌법 개정 그 자체와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절반을 훨씬 넘고 있다. 그러나 권력 구조 개편 이외에도 개헌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1987년 이후 가장 많이 변화된 현실은 인간의 기본권인 생명과 자유, 평등권의 확대이다. 지금 헌법이 확장된 인권과 기본권 침해를 둘러싼 수많은 다툼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실제로 1988년 헌법재판소 개소 이래 법률의 헌법 위반 여부를 가리는 위헌성 결정만도 1900여 건에 이른다. 또 각종 법률이 헌법 정신을 위배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는지를 가리는 헌법소원도 올 들어 지금까지 1360여 건이 처리됐다.
35년 전 개헌은 거리로 나선 국민이 이루었다. 윤석열 정부는 개헌을 공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민들의 열망을 받들어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 사회 갈등 해소와 국민 통합의 열쇠가 헌법 개정에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임기 등 권력구조 개편은 나중에 하더라도 2018년 국회 헌법개정특위에서 여야 간 합의한 초안을 토대로 우선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 2년 후인 2024년 총선에서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시행하면 될 것이다.
2018년 개헌특위가 내놓은 개정 헌법 초안에는 변화된 ‘인권’의 현실과 가치가 반영돼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의 인권 문제를 담기 위해 기본권 조항인 제10조의 주어를 ‘모든 국민’에서 ‘모든 사람’으로 바꿨다. 또 평등권을 강화해 차별금지 범위를 인종, 언어, 장애, 나이, 지역, 고용형태까지 확대했다. 11조에는 생명권이 신설됐고 사형 폐지가 명시됐으며 헌법 전문에도 ‘생명 존중 추구’가 처음으로 추가됐다. 따라서 초안이 공포된다면 현재 헌재의 심판대에 오른 사형제 존폐 문제와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국회에서 방치되고 있는 낙태죄 개정안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아울러 국회에 발의된 이른바 ‘조력 자살법’은 발의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헌법에 인권, 평등, 생명의 새로운 버팀목이 추가될 때 사회의 근본 질서를 흔드는 각종 법안은 자취를 감추고 제헌절 노래의 가사처럼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춘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