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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새벽설교 스크랩 새벽설교 종합편3
주님의숲 추천 0 조회 147 16.11.22 18: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시 사신 예수  마태복음 28장 1 ~ 10절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인 동시에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견 패하는 것 같으나, 승리하고야 마는 것이 기독교요, 죽어 소멸되는 것 같으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야 마는 것이 또한 기독교입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한 방울 이슬처럼 사라졌던 예수님의 생명은, 부활의 날 아침, 무덤 문을 열고, 사망의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 사심으로 생명의 영원함을 자증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미명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 앞에는 큰 난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무덤이 큰 돌로 막아져있었고 그 돌문은 인봉되었고, 힘센 병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눅16:3)

그들은 걱정하며 무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을 살다간 모든 유한한 인생들의 비탄의 소리입니다.

인생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를 무덤에 묻으면서, 누가 이 죽음이라는 도살자를 물리칠 수 있으며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이 거대한 돌문을 옮겨 놓을 수 있을까? 염원하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야 말로, 인간이 풀어야 할 영원한 대 명제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도, 어떤 철학도, 수많은 현인, 제왕도, 이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날,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이 문제의 해답을 받았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했습니다(마28:2). 무덤의 돌문이 굴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

이 시간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Ⅰ. 다시 사신 예수님은 사망의 돌문을 열었습니다.

죽음의 집을 큰 돌로 굳게 막아 놓았습니다.

죽음의 문을 세상 권력이 인봉했습니다.

그리고 힘센 병사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열릴 수 없는 문을 누가 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문은 조금 열린 것이 아니고 “굴려 내었다” - 아주 문 앞에서 치워진 것입니다. 문이 없는 무덤은 죽은 자가 누워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열려있는 무덤은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을 가둘 수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곳이 죽음이 잠깐 머물다가 가고 영생으로 가는 현관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의 돌문을 굴려 내고, 죽음의 문빗장을 꺾으셨습니다. 주님은 얼마동안 인간의 죄 때문에 잠시 그 곳에 볼모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값이 주님의 보혈로 속량된 후에는, 누우셨던 자리를 박차고

돌문을 굴려내고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이 누우셨던 무덤문이 옮겨진 것은 바로 우리의 죄 짐이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고, 용서 받았다면, 사탄의 사망권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지금도

예수님은 그 돌무덤 안에 누워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돌문은 굴려지고,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도의 죽음은, 사망의 형벌이 아니라, 수고한 영혼이 잠시 쉬는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 13절에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시대 그러하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부활의 권능을 받고, 영생하는 천국의 후사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2천년 전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예수 부활사건은 위대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베스도 총독에게 말했습니다(행26:26).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는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다”라고 했습니다(벧후1:16).

기독교가 그렇게 엄청난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소멸되지 않고 날로 날로 번성하고 흥왕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 가운데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고 “내가 죽은 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확실히 믿은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했습니다.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내고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고향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다는 말을 들은 도마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요20:25).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고, 그런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으니,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런데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20:27).

“주여! 내가 주를 믿나이다.” - 그 후의 도마는 어떻게 되었는가?

인도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많은 주의 제자들이 칼에 맞고, 창에 찔리고, 톱으로 켜고, 불사름을 당하면서도,

모두 순교한 것은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직접만나고, 직접보고, 직접 만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의를 위하여 죽는 자는 더러 있어도, 거짓말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 역사적 부활 사건에 토대를 두고,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생명의 종교입니다.

Ⅲ. 다시 사신 예수님은 개혁과 변화의 능력입니다.

엠마오로, 실의 중에 낙향하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낙망 중에 고기 잡으러 갔던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고는, 다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비겁하고 무능했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사자와 같이 용감해졌습니다. 그들은 귀중한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고, 예수님의 부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다가 순교의 피를 뿌리고, 모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세계 인류의 소망은 살아계신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데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내게 오시면, 내가 삽니다. 내 가정에 오면 가정이 삽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라에 임하시면 그 나라가 살고, 교회에 임하시면 그 교회가 삽니다. 부활의 예수가 바울에게 임하실 때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고, 세계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가 마르틴 루터에게 임하실 때, 기독교가 탄생되고,

리빙스턴에 임하실 때, 아프리카가 복음을 받고, 토마스 선교사에게 임하셨을 때, 한국이 복음을 받고, 민족 근대화의 여명이 비쳤습니다.

예수 부활의 능력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창출하는 능력입니다.

기독교 교육헌장  에베소서 6장 4절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나라 민족의 5천년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가장 편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은 세계의 열강들과 어깨를 겨누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도덕 - 위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가야할 우리 자녀들의 교육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청소년들의 탈선이나 비행이 증가일로에 있고, 가출 청소년들의 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 되고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는가?

성경은 자녀 교육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교육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가?


성경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지혜를 모아 보기를 원합니다.


Ⅰ.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노엽게 하다”란 말은 자녀를 “화나게 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은 어느 때 화를 내는가?


1.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할 때입니다.

우리들은 종종, 어른 위주로 생각하고, 어른 위주로 결정하고, 어른 위주로 행동합니다. 아이들의 기분이나, 아이들의 의견은 “애들이 뭐 안다고” - “애들은 가만히 있어” - 하는 식으로 묵살 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린이 날 같은 때 아이들은, 동네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거나,

야구를 하고, 떡볶이를 사먹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전시회를 가자! 갈비를 먹자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어린이날은, 우리들의 어린이날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오디하만”이라는 사람 얼굴처럼 생긴 만두를 빚어서 먹는 다고 합니다. 그것은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을 씹어 먹는 다는, 민족의 대적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킨다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자녀들은 하룻동안,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되어 최고의 서비스를

가족으로부터 제공받고, 부모는 하룻동안, 하인처럼, 자녀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린자녀들에게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인격이 있고,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살 당하고, 무시당할 때 자녀들은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2. 부모님들의 편견과 편애입니다.

이삭의 가정의 불행은 어디서 왔는가?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가정의 불행이 싹텄습니다.


야곱의 가정의 불행은 어디서 왔는가?

야곱이 열두 아들 중 유난히 요셉을 사랑해서 그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힌 데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열 자식이 꼭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저울은 항상 청평 저울 이어야합니다.


3.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입니다.

사람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가장 좋은 것을 한 사람에게만 몰아주시지 않으십니다.

공부를 조금 못하면 부지런하고, 인물이 좀 못하면 심성이 착하고, 몸이 좀 뚱뚱하면 건강하고, - 가만히 생각하면 각자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받은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여 우열과 경중을 구별하는 것은

현명치 못합니다. 자녀의 단점을 보완시키고, 장점을 부각시켜주는 것입니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그 만이 갖은 것이 있고, 그 만이 할 수 있는 너무 귀한 달란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Ⅱ.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해야 합니다.

본문 4절에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교양”은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행위적 훈련을 뜻합니다.

교육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적 모범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실로 부모는 군대에서 흔히 말하는 숙달된 조교입니다.

자식이 누구한테 배우겠습니까? 부모한테 배웁니다.

그래서 부모는 가장 훌륭한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아기에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히브리인의 혼을 주입받았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의 교육의 결과였고,

이율곡 선생이 위대한 학자요, 정치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훈육의 결과 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13:14~15).

우리는 자녀를 가르치되, 주님의 교훈 따라 가르치고, 우리가 자녀들을 훈련시키되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실천교육이 필요합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군대에는 “앞으로 전진!”이라는 구령은 없다고 합니다.

오직 “나를 따르라”는 명령만 있다고 합니다.


Ⅲ. 훈계와 책벌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잠 29장 17절에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잘못 쓰는 글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성능력이 연약한 우리 자녀들에게 얼마나 많은 착오와 과오가 있겠는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녀들의 실수와 과오를 묵과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잘못을 깨우쳐주고, 책벌하고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 대한 징계와 책벌을 그 부모에게 위탁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탁 받은 부모는, 늘 자녀를 사랑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부모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책벌이 부모의 감정을 해소하는 방편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가 똑같은 아픔을 느껴야 책벌의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훌륭한 임금 다윗도, 훌륭한 제사장 엘리도,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는 성공했지만 아버지로서는 실패한 예를 보았습니다.


우리들의 귀한 자녀!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잘 양육하여,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서 쓰임 받는 자녀로 양육하고, 부모로서 성공하는 귀한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효도강령   에베소서 6장 1 ~ 3절


부모님 살아계실 때, 섬기기를 다하여라!

부모님 떠나신 후 애닯다 어이할까

평생에 두 번 다시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이조 선조 때, 정치가요, 학자요, 문학가인 송강 정철의 훈민가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열 계명 가운데 제 1계명에서 제 4계명까지는 대신

계명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공경하라”입니다(마22:37).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까지는 대인계명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22:39)입니다.

그리고 그 대인 계명의 첫째 계명인 제 5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부모 공경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도 세상에 두고 가는 육신의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고 요한을 가리키시고, “보라, 네 어머니니라”고 세상에 두고 가는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함으로 자식의 부모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로부터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孝百行之本).

求忠臣 孝子之門”이라고 하여 충신을 구하려거든 효자의 가문에서 찾으라고 했습니다. 효도야 말로 천륜의 근본이요, 인륜의 근본입니다.

이 시간에는 자녀의 부모 섬김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Ⅰ. 기독교의 효는 부모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되, 예수님 사랑 안에서 효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먼저 예수님 사랑, 다음이 부모 사랑입니다.

하루는 공자의 제자 맹의자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효도입니까?" 공자는 "무위(無違)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맹무백이 똑같이 물었습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근심하느니라”

- 부모의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도라고 했습니다.


자하라는 제자가 물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자식이 노고를 대신하고, 부모를 먼저 공양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 자식이 아무리 어긋남이 없이 부모를 섬기고, 부모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의 어려운 일을 대신해 주고, 지극 정성으로 봉양해도, 육신은 70년 강건하면 80년이요, 100년, 200년 사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영혼은 천년, 만년, 억만년, 아니 영원히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영생하느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영생하고, 홍포 입은 부자는 유황불 속에서 영생한다고 했습니다(눅16:20).

그렇다면 진정한 효도는 무엇이겠는가?

몇 십 년 살다가는 부모의 육신을 사랑하는 것인가?

영생하는 부모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인가?

제일 큰 효도는 부모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Ⅱ.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본문 1절에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어느 때 평안한가? 자식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 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잘먹고, 잘입고,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좋은 옷,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은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드리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순종은 맹종이 아닙니다.

무위(無違) -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 주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 무위(無違)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한다 하여 하나님의 법까지 어겨서는 않됩니다.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섬긴다고, 주일도 범하면서 부모에게 달려가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부모가 예수 믿지 말라고 한다하여서, 교회 다니는 것 그만 두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고, 부모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ηυπακυο, 후파쿠오”입니다. “ηυπο, 후포”란 “밑에서(under)”라는 뜻입니다. “ακυο, 아쿠오”는 “듣다(hear), 이해하다(under sta -nd)”란 뜻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말씀을 밑에서 겸손히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Ⅲ. 부모의 몸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본문 2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공경이라는 히브리어는 “ד

ꔨכ, 카베드”입니다. “무겁다”란 뜻이고, ‘간’이라는 뜻이 있습니

다. 자녀가 부모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간처럼 무겁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생명처럼 여기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경외와 공경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경외란? 아버지의 자리에 서지 않고, 아버지의 자리에 앉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경이란 그에게 의식주를 제공해주고 들고날 때 부축하고 받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부모 공경은 입술만의 효도가 아니고, 물질과 마음과 몸을 동원한 보은의 삶인 것입니다.


Ⅳ. 부모의 효도에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 3절에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법을 어기면 벌을 받지만, 법을 지켰다고 상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도, 어기면 벌을 받지만 지켰다고 상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제 5계명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효도하는 자녀에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는가?

자식의 부모 공경이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에 순종하여 번제단위에 올라갔던 이삭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해에 농사하여 100배나 얻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600년 동안 동행한 에녹의 자녀 무드셀라에게 969년을 사는 장수의 복을 주셨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풍성하게 받으시는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시 편 128편 1~4절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함께한 가장 오래된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실 때 세상에 가정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생활공동체 인것입니다.

이 가정에서 인간은 태어나고, 이 가정에서 자라고, 이 가정을 중심으로 살다가,

이 가정을 떠나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몇 년 전만하드라도 한국의 가족제도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회복지제도라고

서양의 학자들이 부러워했습니다.

그것은 노인이 손자 손녀를 무릎위에 앉히고 즐거워하는 것을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이 아름다운 미풍양속도 급격히 몰아닥친 주거환경의 서구화와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제도로 인하여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환경은 시대 따라 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의미와 가정의 목적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인가?


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정의 존재 이유입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 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과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은 작은 하나님의 교회요, 가정 기초석은 신앙공동체 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정에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가정에는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무릎 꿇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정의 머리가 되시고, 가족은 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이 예수님을 향하여 바로 설 때, 가정의 어두운 그림자는 내 등 뒤로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예수님을 향하여 돌아 설 때, 가정의 어두운 그림자는 우리들의 앞에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가운데 몰아닥친, 이혼의 문제, 청소년의 문제, 가정 파탄의 문제 등은 우리 가정에서 예배가 사라진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없어서 슬퍼하던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고, 기도하면서

자녀를 양육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양육했습니다(삼상1:28).


복음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는 신령한 능력을 체험했습니다(행16:26)

사울 왕이 악신에 들려 고통 할 때, 다윗이 수금을 타므로 악신이 떠났다고 했습니다(삼상16:23).


오늘날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도 기도가 필요하고, 예배가 필요합니다. 부

부기 손을 잡고 기도하고, 부모와 자녀가 손을 잡고, 엎드려 기도할 때,

그들 사이에 막혔던 담장이 허물어지고, 그들을 얽매고 있던 사슬과 착고가 풀려지는 줄 믿습니다.


또 한 그리스도의 가정에는 언제나 믿음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임금님과 선생님과 아버지는 한가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임금과 같은 위엄이 있었고, 선생님에게 하나님과 같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 권위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부모가 자녀에게 본을 보이지 못한데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머무르면서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 왔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다’고했습니다.

40일 동안 하나님 앞에 있던 모세의 얼굴에 눈부신 광채가 나타났다면 매일 매일 하나님 곁에서 말씀을 받는 부모의 얼굴에는 어떤 광채가 나겠는가?


가정에서 예배가 회복되어야합니다. 찬송과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 앞에서 엎드리고, 찬송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신앙의 본을 보일 때 우리들의 가정은 회복되는 줄 믿습니다. 예배의 회복은 곧 삶의 회복인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열심히 일하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활용하여 일하고, 그 소산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물질만능주의가 활개를 치면서 가정의 고유한 미덕인 청빈이라는 아름다운 덕목은 사라져 버리고, 어느덧 소유와 소비가 미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축복은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도, 상급과 칭찬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열심히 일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공장에서 일하던지, 농사를 짓던지, 공부를 하던지, 사업을 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자기의 일 자체에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한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이고, 추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에 지족하면서, 수고의 땀방울을 흘릴 때, 우리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수고한 열매를 누리고 사시는 평범한 축복이 가정에 충만하길 바랍니다.


Ⅲ.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화평하고 단란한 가정이어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바른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가정은 성실하고 아름답게 성장해 갑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정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열매를 많이 맺는 아내가 있습니까?

또한 생명력과 소망으로 가득찬 젊은 자녀들이 자라고 있습니까?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몰아닥친 감당할 수 없는 물질의 풍요로운 홍수는, 많은 병든 포도나무를 양산하고, 집나간 현대판 “노라”를 많이 생기게 했습니다.


병든 감람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년 범죄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집은 나무와 돌기둥과 석 가래로 짓지만, 가정은 천년가는 사랑으로 짓는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사랑의 산물입니다.

사랑하는 두 부부가, 사랑으로 자녀를 잉태하고, 사랑 안에서 나고, 자라는 것이

가정입니다.


바울은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엡5:22).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하나님의 법도와 교양으로 가르치고,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탁받은 청지기 사명으로 양육해야합니다.

진실로 크리스천의 가정은 결실한 포도나무같이, 푸르른 감람나무같이, 소망스러운 단란한 가정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교 명령   마태복음 28장 16~20절



옛날 헬라인들의 잠언 중에는 “횃불을 가진 자는 빛 가운데로 지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헬라인들의 이 잠언은 복음의 횃불을 들고 어두운 세계로 나서는 우리 모든 복음 운동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타당한 말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헬라인의 잠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선교 명령입니다.


Ⅰ. 가라(Go)는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가라’는 명령입니다. 이는 명령인 동시에 격려이기도 합니다.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 나라와 방언과 족속들의 영역입니다. 제자들의 선교 영역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도 됩니다.

유다도 됩니다. 사마리아도 됩니다. 물론 땅 끝까지입니다.


그것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눅14:21), 사거리로 가라는 말입니다(마22:9).

저 북방 얼음산과 또 대양 산호섬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저 남방 모든 나라 뭇 백성 사는 데로 가라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이유는 복음은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이유는 땅 위의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Ⅱ. 제자를 삼으라(Make Disciples)는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했습니다.

여기 제자로 삼는다는 ‘마데튜오(μαθητεύω)’는 가르치고 훈련시켜 학습자,

혹은 생도로서 명부에 올리라는 뜻입니다.

여기 ‘마데튜오’란 단어는 신약에서 네 군데에만 나오는 특수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2절에 “천국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국의 명부에 올라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에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할 때 쓰였습니다.

그는 벌써 예수의 명부에 등록된 자란 말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1절에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라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는 핍박을 당한 후

더베로 가서 전도하여 많은 생명을 등록시켰다는 말입니다.

신약 성경 대부분의 경우 제자란 말은 ‘아콜루데오(ἁκολυθὲω)’ 즉 ‘따른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본문의 제자 ‘마데튜오’는 ‘제자를 만들다’, ‘학습자가 생도로서 명부에 완전히 올린 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선교의 두 번째 명령은 완전히 이적을 시키는 호적 변경을 의미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천당 교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등록시켜야 될 제자가 ‘모든 족속’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Ⅲ. 세례를 주라(Baptize)는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례를 준다 함은 ‘씻다’라는 뜻입니다.

주 예수의 보혈로 씻어 주라는 말입니다.

또 ‘잠그다’라는 뜻으로서 예수의 보혈에 잠김을 의미합니다.

또 ‘목욕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예수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뿌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의 보혈을 뿌려 주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 어원적인 뜻을 합쳐서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인을 치라’는 것입니다. 인을 친다는 말은 소유의 확보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소유물로 확보됩니다. 또한 자기 권리 행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변개치 못하게 하는 권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의 권위가 아닌 성부이신 아버지와 성자이신 아들과 보혜사이신 성령의 이름으로 인을 치라는 말입니다.


Ⅳ. 교훈하라(Teach)는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가르치다’라는 말 ‘디다스코(διδασκώ)’는 ‘자라가게 하다’, ‘성장시키다’라는

말로서 양육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선교 명령은 사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먼저 가야하고, 두 번째로 등록을 시켜야 하고(명부에 올림), 셋째로 등록시킨 자에게 세례(인침)를 주어 소유를 확보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영화에 이르도록 양육해야 된다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선교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대 사명의 명령이라고 하였습니다(마28:18).

그러므로 이 명령을 받은 우리야말로 실로 영예로운 자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이 사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 예수 선교 명령을 성공시킬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 마지막의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한 약속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교 사명에 보장되어진

임마누엘의 표시입니다. 참으로 축복의 싸인입니다.

여기 ‘세상 끝 날까지’라고 한 말 ‘아이온(ἀιων)’은 지구나 인간의 종말이 아니고

예수 복음이 완성되는 재림 시기까지를 말함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지구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내세까지 계속됨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영원히’란 뜻입니다.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 ‘파스 타스 헤메라스(πας τὰς ἠμερας)’는 ‘매일’, ‘날마다’ 란 뜻입니다.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겨울이나, 여름이나, 어느 때를 막론하고 언제든지 임재함, 즉 무시무종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가라!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주라! 교훈하라!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 교회가 받은 선교적 사명입니다.

현재 우리 교단은 00명의 선교사들이 선교 현지에서 교회 개척을 비롯한 각종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몇몇 곳에서는 21세기의 목사인 제자를 키우는 신학교 사역이 전개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101곳)가 세워지고, 많은 성도가(12,677명)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선교지 교회에서 자신의 민족을 위한 사역자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활발히 추진하고 있는 러시아 모스크바와 브라질, 베트남 등지의 선교지 확장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의 인생   고린도후서 1:20~22절



세상의 약속들은 종종 실현되지 않음으로서 무가치한 것으로 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말과 행동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며, 혹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불일치를 요구하는 환경에 대항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무능이고, 연약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영구불변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 성경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마5:18).


2천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로마 총독이 배에서 내리던 에베소 선착장은 변하여 육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나도 한 말씀도 변하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했습니다. 원문에는 이 ‘예’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특별히 강조하시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원문에는 “아멘 아멘, 에고 에이미-”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만’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이 부사는 “진실하다, 변치 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 있습니다(계22:20, 3:14).

맹세의 뜻이 있습니다(신27:15). 간절한 소망을 바라는 기원의 뜻이 있습니다(롬15:33, 갈6:18). 그러므로 감화를 받을 때, 은혜를 체험할 때, 간절한 기도 중에

성도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독교 언어가 바로 “아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아멘의 인생입니다. 무엇이 아멘인가?


Ⅰ. 하나님의 약속은 아멘입니다.

본문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되니-”라고 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아멘이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아멘입니다.

성경 말씀의 커다란 줄기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또한 그것을 성취하시어, 자신의 경륜과 섭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습니다.

사라가 90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하셨습니다(창13:15).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진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웃었습니다(창18:1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었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18:14).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 세상의 법칙으로는 않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른 장작개비 같고, 꺼진 화롯불 같은 그들 사이에서 이삭이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다윗이 나고,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그를 믿어 구원에 이른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오늘날 실로 바다의 모래와 같이 수다하고 하늘의 별과 같이 중다한 무리가 되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멘이십니다. 기독교는 아멘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꽉차있는 구원과 축복의 언약은, 아멘으로 화답하는 자에게 실상으로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11).


Ⅱ. 예수 그리스도는 아멘이십니다.

본문 19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 앞에 아멘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께서 아멘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38~39).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언제든지 아멘 이셨습니다.

그는 율법 앞에서도 아멘 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능동적인 순종으로 율법을 지키셨습니다(마5:17).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앞에서도 아멘 이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막10:45).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아니 하시고(마27:4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요1:29).

그리고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약속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4:25). 예수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영원한 미래에도,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아멘이십니다.


Ⅲ.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믿는 아멘입니다.

본문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다이너 마이트 같은 힘을 얻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나,

아무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를 듣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강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거리로 뛰어나가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고, 하루에 3천명 5천명의 회심자를 얻고,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여 많은 병든자를 고쳤습니다.


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자들이 초대교회를 세우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다가 장열하게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오늘 날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너는 내것이라” 구별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인처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대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무슨 일에든지 성령의 역사하심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 4:13~17절


기독교는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역설적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2:24).


주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만 인간의 죄를 다지시고,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땅에 떨어져 죽으시고,

약속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셔서 많은 열매를 맺으신 것이 바로, 오늘 교회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교회는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오는 사․ 활․ 의 진리위에 세워졌습니다.


一死覺悟(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이 짧은 한 마디는 자기 민족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한 에스더의 비장한 결단을 나타낸 말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여러 가지 위험과 시험이 닥쳐왔습니다.

때로는, 국가적인 위기와 시험이, 때로는 교회적인 위기와 시험이, 때로는 개인적인 위기와 시험이 닥쳐왔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성도의 승리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승리하였는가?


Ⅰ. 용기 있는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했습니다.

본문 16절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은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절대 의존적인 신앙입니다.

아달월 13일 곧 12월 13일은 바사 왕국의 영토 안에서 모든 유대인을 죽이는

“죽음의 날”로 결정되었습니다.


총리대신 하만은 모르드개와 그의 동족인 유대인을 죽이기 위하여 아하수에로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를 받아서 127도 전국의 각도에 공포했습니다.

특히 바사의 법은 왕의 어인이 찍힌 칙령은 왕자신도 결코 변개할 수없는 절대권위를 갖는 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절대 절명의 민족적 위기 앞에서, 에스더는 일사각오의 신앙적 결단을 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용기는 사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는 용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느부갓네살의 어인이 찍힌 칙령을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다니엘의 용기는 어디서 왔는가?(단6:10)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왔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하지 아니할지라도 왕이요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랄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단3:18).


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믿음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을 붙잡고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이삭을 모리아 산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이 믿음을 붙잡은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히11:26).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히11:38).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벧후1:6).

만일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자처해도 용기라는 덕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능력이 없는 죽은 믿음이 될 것이고 신앙에 근거하지 아니한 인간적인 덕만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덕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믿음인데, 이 믿음 위에 꼭 한 가지 더할 것은 ‘용기’라는 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용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고 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용기 있는 믿음은 위경에 처한 유대인의 생명을

건지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Ⅱ. 기도하는 신앙으로 승리했습니다.

본문 16절에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행위의 예비 동작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손을 잡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로부터 힘을 공급 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395장에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기도를 통해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침을 받고, 기도를 통해서 질병을 고침 받고,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았습니다.


에스더가 금식하고, 기도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왕 앞에 섰을 때,

왕은 금 홀을 내밀어 에스더를 영접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그의 뜻대로 왕을 움직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빌4:7).


Ⅲ. 일치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했습니다.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이 삼일동안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고 기도하였습니다(에4:16).

어려움이 닥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적 단결로, 외부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모든 수산에 있는 유대인이 - 안으로는 에스더와 에스더의 시녀들이 삼일동안 금식기도 했습니다.


모을 ‘합’자는 인변에 한일자, 입구자입니다.(人一口)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모을 ‘합’(合 !) 자 ‘합’은 입을 다물어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쿵 저렇쿵 입이 열리면 합해지지 않고, 뭉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공략 때,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수6:10).


마귀는 항상 우리를 흩어지게 하고, 성령께서는 모아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20).

바울과 실라가 모여서 기도할 때, 빌립보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행16:25).


교회가 모여서 기도할 때, 베드로를 가둔 예루살렘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행12:5). 오순절 날 120문도가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행2:2).

유대인과 에스더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유대인들을 결박한 죽음의 사슬이 풀린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비결은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기도입니다.

일치단결하여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수6:20).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마가복음 6:30~44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 이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행1:6).


이스라엘의 회복은, 제자들의 알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능력 받고, 내가 은혜 받고, 내 문제를 내가 알고 대처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시급한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영혼이 병들고, 궤도에서 이탈해 있는 나의 삶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 자신을 바로 아는 知分(지분)의 삶입니다.

그리고 나의 분수를 지키는 守分(수분)의 삶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들의 어그러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오늘 예수께로 나아가야 하는가?


Ⅰ. 예수 안에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1절에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집으로 가니 무리들이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고 했습니다(막3:20).


본문 31절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삶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의 빈

그물 인생처럼, 소득 없는 삶을 살면서도,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 뛰고, 뛰고 또 뛰고 -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늘 피곤하고, 늘 지쳐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쉬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안식일, 휴식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휴식은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인간은 휴식을 통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길을 가는 나그네는 잠시 머물 수 있는 객사를 찾고, 항해에 지친 선원은 항구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노동을 명하셨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라고 하셨습니다(창3: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 4계명인 안식일 계명을 주시면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하셨습니다(출20:10). 그리고 안식일을 축복하셨습니다(사58:14).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엿새는 일하고 하루는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의 빗나간 열심은, 이 생의 질서를 스스로 파괴함으로, 곤비한 가운데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일어도 안전한 포구”라고 했습니다(찬464장).

수고의 짐, 무거운 죄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곳은 오직 십자가 앞입니다.


Ⅱ. 예수 앞에 나아갈 때 영혼의 양식을 받습니다.

본문 34절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양은 어떤 짐승인가? 스스로 꼴을 찾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스스로 방어할 줄 모르는 짐승입니다. 비가 와서 몸이 물에 젖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두워져도 제 집을 찾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벳새다 광야에 모인 군중들을 “목자 없는 양 같다”하셨으니, 그들은 목말라 있고, 굶주려있었던 것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의 말씀에 “보라 날이 이른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벳새다 광야에 왜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는가? 영혼이 갈증을 느껴서-, 영혼이 기갈을 당하여서 예수님 앞으로! 예수님 앞으로 모이다 보니 5천명이 모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마4:4).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의 갈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셨습니다(요14: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48).


예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생명을 받고,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 것 다 가졌는데 만족이 없습니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공허함이 있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하십니다(사55:3).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영혼의 생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Ⅲ. 예수님 안에 만족이 있습니다.

본문 42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소유는 얼마나 되는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한 사람의 한끼분 양식입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너무나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요6:9).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소유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물질 뿐만이 아닙니다. 건강이 그렇습니다.

감기겠지, 소화불량이겠지, 그래서 동네 의원에 가보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합니다. 지식이 그렇습니다. 무엇 좀 아는 가 했더니, 어느 날엔가 돌아보니 아무 쓸모없는 케케묵은 낡은 정보입니다.

마치 창고 구석에 팽개쳐져 있는 타이프라이터 같은 것입니다.


실로 끈기 없는 보리떡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고 쓸모없는 것이 예수님의 손에 넘겨지니 5천명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넘치도록 남았습니다.

예수 안에 만족함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기쁨도, 축복도, 사랑도 풍성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천명이 배부르게 만족하게 먹었습니다.

그러면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치는 풍성한 양식은 누구의 몫입니까?

아마도 그것은 예수님을 수종든 종들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것 드려 충성하시고 바구니에 차고 넘치게 거두시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땀 드려, 몸 드려 충성하시고, 풍성한 건강을 거두시는 성도님 되시기 바랍니다.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치는 은혜와 축복이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의 몫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담대한 신앙인이 되라  요한복음 20:19~23절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시기 전에 수차에 걸쳐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고 감람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고 하셨습니다(마26:32, 막14:28).


또한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했습니다(마28:5~8).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 되기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어느 집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너무나 처참하고, 비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고, 너무나 큰 절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이렇게 인간이 나약해지고, 무능해질 수 있는가?

믿음을 잃어 버렸을 때입니다. 소망을 잃어 버렸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캄캄한 절망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저앉은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어느 때에 인간은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1. 평강의 은혜를 입을 때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19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평강이란 히브리어 "shalom"입니다.

이 말은 "평화와 평안" 또는 “화평”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위험이나, 두려움과 공포에 쌓여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배가 항해하는 중에 조난을 당하게 되면 식량이나, 화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배의 안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타고 로마로 가던 배가 유라굴로 폭풍을 만났을 때 선원들은 곡식과 배의 도구들을 모두 바다에 버렸습니다.


사람이 위기를 만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마음의 평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불과 10초 남짓 걸리는 100M 경주에서 승패는 출발점에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선수가 출발점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릴 때, 마음이 평안하면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야구 선수가 홈런을 치려면, 어깨에 힘을 빼야합니다.

복싱선수가 주먹에 힘을 주고 휘두르는 펀치는 십중팔구는 허공을 치는 미스브로가 됩니다.


마음에 평강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라도 차근차근히 풀어나갈 지혜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면,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그르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을 잃고, 믿음을 잃고 확신을 잃은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오직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주님의 죽으심에 불안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요14:27).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의 마음이 점점 성장하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극한의 고통이 닥쳐도 능히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신앙의 힘은 바로 평화의 힘입니다.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는 이 신앙의 힘만이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평강의 은총을 입은 자만이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Ⅱ. 투철한 사명감이 담대한 신앙인이 되게 합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교회나 수도원에서 사색이나 하고 명상이나 하고 자기 수양을 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보낸다”란 말은 라틴어로 “Missio”란 말로, 영어로는 “Mission",

이 말을 우리 말로는 ”선교“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 갈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삶이 선교적 삶입니다.

모세의 삶이 그랬고, 아브라함의 삶이 그랬고, 예수님의 삶이 그랬고,

바울의 삶이 그랬고, 오늘 제자들의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보내진 자’로 살았으니,

나도 너희들에게 보내진 자의 삶을 살아가라고 사명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골방에서 문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라고 부르셨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8:28).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내가 보냄을 받은 사명자의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은 곧, 하나님의 주신 사명 위에 굳게 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Ⅲ. 성령 충만을 받아야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성령 시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가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행1:4).


아버지가 약속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말세에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탄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셨습니다(행1:8).

권세와 능력은 성력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권세 충만, 능력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만이 사탄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이 권능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라고 했습니다(행2:38).

그러므로 오늘 사탄에 눌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 충만을 받고, 일어서야 합니다.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길은 오직 성령 충만을 받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 ! 성령은 - 승리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   이사야 55:6~13절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9장 11절 이하의 말씀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환난과 고통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가까이에서 부르실 때 즉각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답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목마름은 육신의 물이 없어서 받는 갈증이 아닙니다.

육신이 주려서 받는 고통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영혼의 기갈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자 하나님을 떠난 상태는 물이 없어 사막에서

죽어가는 가련한 실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로뎀 나무 밑에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던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물과 떡을 공급하시고 천사를 파송하시사 위로하고 힘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 죄의 짐에 눌려 허덕이는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 오셔서, 복과 은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성도가 받는 은혜고, 복인가?


Ⅰ. 하나님을 찾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73편 28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움을 받는 자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롬4:7~8).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약1:12)고 했고,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벧전3:14).

요한은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계1:3).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계16:15).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계19:9).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계20:6).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 할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유대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지혜의 왕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교훈하기를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대상28:9).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과 그들의 사이를 내었고 그들의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희를 듣지 않으시게 하였습니다(사59:2).

그들이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림으로서 복이 변하여 저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삶의 회복을 원한다면,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백성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회복은 경건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안에 계시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멀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축복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본문 7절 말씀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심과 우상숭배가 습관화된 유다 백성들이 그 삶을 청산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회개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 시작된 회개는 손과 발을 통하여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회개가 종교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성도의 삶 전체에서 일어나는 혁신적인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회개한 사람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일대 변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살던 악인은, 그 삶의 방향을 180〫〫도 전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마치 누가복은 15장의 탕자처럼,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떠났을 지라도,

가산을 탕진하여 거지가 되었을 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려 돼지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을 지라도,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아버지는 신발을 신겨주고, 반지를 끼워주고, 비단 옷을 입혀주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벌리면서 아들의 옛 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는 자를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7절).


죄의 용서함을 받는 자가 복 있다고 했습니다(롬4:7).

하나님을 떠난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Ⅲ.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요, 은혜입니다.

본문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과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억압 받는 삶에서의 해방입니다. 포로된 바벨론의 삶에서의 해방입니다.

죄악과 탐심과 허무주의 적인 인본주의에서 해방 받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평안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본문 12절).

두려움은 악인의 형벌이요 죄인의 징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고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창28:13~15).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말씀대로 성취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성도의 복입니다.

성도가 받은 축복중의 축복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의 현장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복중의 복이요,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맥추절을 지키자   출애굽기 23:14~17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매년 3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하나님에 의하여 구속 받았으며, 이제껏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왔고, 앞으로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할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날마다 그를 섬겨야하지만 특별한 날을 정하여

절기를 지키는 것은, 그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절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과 종교적 구심점이 되는 행위 인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가?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과 장자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그날에 어린양의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는 백성은 구원 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이 지나고 7일 동안 지키는 무교절을 지키고, 50일째 되는 날이라 해서 오순절이라고 부르고, 가나안에서 처음 수확한 보리를 드린다 해서 초실절

또는 맥추절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곧 당신의 성도를 거두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유월절 전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감람산 위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행1:4~5).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붙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유월절이 지나고, 50일이 되는 날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시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행2:2~4).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초실절 날, 맥추절 날,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맥추절의 의미가 분명히 부각되는 것입니다.


이 날은 육적으로는 하나님께 가나안의 첫 수확인 밀의 첫 열매를 드리면서 감사하는 날이요,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속의 은총을 감사하는 날이요,

신약 교회의 탄생을 기뻐하는 교회의 크리스머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함으로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보리농사를 짓지 않는데 무슨 맥추절을 지키느냐? 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므로 오늘 날 교회에서

이 맥추절의 의미가 점점 퇴색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뜻 깊은 맥추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Ⅰ. 제물을 드리며 지키라고 했습니다.


본문 15절 “빈손으로 보이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신앙생활의 시금석이며, 신앙 성숙도의 잣대가 되며,

자급자족의 감사이며, 우리의 신앙심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의존적 생활이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만나로 살았습니다. 모세를 의지하고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40년 동안 옷이 낡지 아니하고,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드리지도 아니하고, 수고도 하지 않는 미숙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고, 그들이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만나가 그쳤다 고 했습니다(수5:10~12).


자급자족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수확의 기쁨과 감사를 안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자의 하나님이시고, 드리는 자에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내게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면 서도 “너희 손에 있는 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요6:11).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과 가루통을 축복하시면서 “먼저 내게 떡을 가져오라”하셨습니다(왕상17:13).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기 전에 “내게 별미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창27:4).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받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축복을 받읍시다.


Ⅱ. 있는 대로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8장 12절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대상29:14).


나에게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열 손가락을 다 거두어 가시고, 팔뚝만 남았어도,

팔뚝을 삽자루에 붕대로 묶고, 교회의 마당을 가래질할 수 있습니다(소록도 견문록)


폐가 1/4만 남고, 양 눈은 실명하고, 한 주에 두 번씩 신장투석을 하고, 고혈압으로 시달려도 목소리 하나! 그것 하나만 남겨주셨음으로 그 목소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김미경 집사).

있는 것 ! 받은 것 ! 남아 있는 것 ! 그것을 드립시다. 드리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빈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Ⅲ.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에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 3절에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 지어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 지어다”라고 했습니다(신16:15).


고린도 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하셨습니다..


사명의 짐은 부담 없이 가볍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기쁨으로 지면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감당하도록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짐은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마11:30).


힘대로 지고 풍성히 받으시는 맥추절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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