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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1827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독일어: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었고, 결국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의 생애 말기에 그가 위임한 초상화는 그의 음악적 유산의 부적으로 그의 손자의 방에 남아 있었다. 루트비히에게는 같은 음악 기관에서 테너로 일하면서 그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와 바이올린 레슨을 한 외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이 있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의 딸이었다. 베토벤은 현재 본, 본가세 20번지의 베토벤 탄생지로 알려진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의 가톨릭 교구에서의 그의 세례 기록은 존속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년월일이 12월 16일이라는 합의(베토벤 자신이 동의 한 바 있음)가 있지만, 이에 대한 문서로 된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베토벤 전기 작가인 알렉산더 휠록 세이어(Alexander Wheelock Thayer, 1817–1897)는 일곱 개의 바가텔, 작품번호 33과 가곡 여덟 개의 노래, 작품번호 52 등으로 추측하고 있음)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번째 음악 교사는 그의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되는데, 이는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ir George Grove, 1820–1900)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인식하고 베토벤에 대한 음악 교육을 같은 궁정의 동료들을 포함한 다른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양도했다; 베토벤은 후에 질 판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궁정 오르간 연주자),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건반 수업을 한 가족의 후원자),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그의 친척), 그리고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 등 다른 지역 교사를 가졌다. 그의 수업료는 5년차에 시작되었다. 체제는 엄하고 철두철미해서 종종 그는 눈물을 흘렸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의 개입으로 젊은 베토벤이 침대에서 건반으로 끌려가는 비정기적인 심야 세션이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나이에 분명했다. 요한은 이 지역에서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성공을 알고(아들 볼프강, 딸 나넬과 함께)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베토벤이 여섯 살(그는 일곱 살이었다)이라고 주장하며 아들을 "신동"으로 선전하려고 했다. 여하튼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80–1792 : 본
교사
크리스티안 네페 (1780년 경, 고틀로브 아우구스트 리베에 의한 초상화)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레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등장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무급(1782년)으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궁정 예배당의 유급(1784년)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의 첫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 von Königsegg-Rothenfels, 1708–1784)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Kurfürst ("선제후")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783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인정받았는데,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 같은 해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인쇄된 언급이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실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BWV 846-893이다 ..."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약간의 지원을 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을 위해 돈을 지불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베토벤은 몇 년 동안 그의 인생에서 중요해진 몇몇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폰 브로우닝(von Breuning) 가문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우닝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우정을 제공받았다.
여기서 그는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폰 브로우닝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를 만났다. 폰 브로이닝의 가족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그의 가정 생활에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본 시대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궁정악단
발트슈타인 백작: 1800년 경, 안토닌 마체크에 의한 초상화
1785–90년에는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은 그의 초기 출판물이 끌었던 미지근한 반응과 베토벤 가족의 지속적인 문제 때문일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베토벤이 1957년 빈을 처음 방문한 동안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궁정에서 알콜중독의 결과로 강제 퇴위되었고, 그의 연금 절반을 가족 부양을 위해 베토벤에게 직접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연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었고, 가르치는 일과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으로 가족의 수입에 더 기여했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 글루크, 파이시엘로의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인 요세프 라이하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작곡가, 플루티스트,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톤 라이하(Anton Reicha, 1770–1836)와도 친구가 되었다.
1790년부터 1792년까지 베토벤은 성장 범위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음)을 작곡했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일련의 변주곡에서 그의 교향곡 3번과 유사한 주제를 확인했다. 베토벤이 그의 첫 번째의 의뢰를 받은 것은 아마도 네페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1790년 본의 문학 협회는 선제후에 의해 요제프 2세의 사망 기념으로 칸타타, WoO 87을 의뢰하고, 이후 레오폴드 2세의 신성로마 황제 즉위 축하 기념으로 추가로 칸타타, WoO 88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두 황제 칸타타는 그 당시에 연주된 적이 없었으며 1880년대까지 요하네스 브람스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베토벤", 그리고 그의 음악이 고전주의의 전통과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는, 그러한 양식의 예언자로 묘사될 때까지 길을 잃어버린 채로 남아있었다.
베토벤은 아마도 1790년 말에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을 시기의 크리스마스 무렵 본에 들렀을 때 처음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들은 1년 반 후인 1792년 7월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본에서 다시 만났고,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두 곡(황제 요제프 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WoO 87과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에 대한 칸타타, WoO 88)의 악보를 하이든에게 보여준다. 하이든은 감명을 받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짜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베토벤은 고데스베르크의 무도회에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했다. 그 당시 베토벤은 나이든 스승과 함께 공부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발트슈타인은 베토벤이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당신은 오랫동안 좌절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빈으로 갈 것입니다. 맹렬한 노동의 도움으로 당신은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1792–1802 : 빈 – 초기
하이든과의 만남
열아홉살의 베토벤 (1791년, 작자 미상)
베토벤은 1792년 11월 프랑스에서 전쟁이 퍼졌다는 소문이 있는 가운데 선제후의 도움으로 본을 떠나 빈으로 갔다. 그는 빈에 도착 직후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최근 사망한 모차르트의 후계자라는 널리 퍼진 감정에 대해, 그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고 뚜렷하게 모차르트적 풍미를 가진 작품을 쓰면서 화답했다.
그는 즉시 작곡가로 자리 매김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와 연주에 전념했다. 하이든의 지시에 따라 일하면서 그는 대위법을 마스터 하려고 했다. 그는 또한 이그나츠 슈판치히(Ignaz Schuppanzigh, 1776–1830) 밑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이 시기의 초기에 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로부터 주로 이탈리아 성악 작곡 형식에 대하여 이따금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이 관계는 적어도 1802년까지, 그리고 아마도 1809년까지 계속되었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의 두번째 여행을 떠나면서 베토벤은 선제후에 의해 본으로 귀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는 빈에 남는 것을 선택했고, 요한 알브레흐츠베르거 및 다른 스승들과 함께 대위법 공부를 계속 했다. 여하튼, 그 즈음에는 1794년 10월에 그랬던 것 처럼, 본이 프랑스에 함락되는 것이 고용주들에게는 분명하게 보였을 것이며, 사실상 급료나 복귀의 필요성 없이 베토벤은 남게 되었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작,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작,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심록은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 이 공연 직후, 그는 작품번호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작품번호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
유명세를 타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작(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작품번호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9년 베토벤은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뷜플(Joseph Johann Baptist Woelfl, 1773–1812)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라이스(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인 비창, 작품번호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Barry Cooper, 1949–)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베토벤은 1798년과 1800년 사이에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Joseph Franz von Lobkowitz, 1772–1816) 공작의 요청으로 첫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18을 작곡했다. 그것들은 1801년에 출판되었고 역시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그는 1799년에 그의 생애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였던 칠중주, 작품번호 20을 완성했다. 1800년과 1803년에 그는 교향곡 1번과 2번의 초연으로 하이든, 모차르트에 이어 젊은 작곡가 세대 중 가장 중요한 세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멜로디, 음악적 발전, 변조 및 조화의 사용, 감정의 묘사는 모두 그를 그의 영향으로부터 차별화 시켰고, 그의 초기 작품들 중 일부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생겨났던 영향을 고조시켰다. 그의 첫 교향곡의 초연을 위해 1800년 4월 2일 부르크 극장을 고용하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칠중주, 교향곡 1번, 그리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후자의 세 작품은 모두 미발표)을 포함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렸다.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이 "오랜만에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표현한 이 연주회는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주자들이 굳이 독주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1800년 말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사로부터 많은 수요가 있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작품번호 16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피아노와 목관 5중주)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임), 무치오 클레멘티(이탈리아어: Muzio Clementi, 1752–1832)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그의 초기 작품들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의 것들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이 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펜슬 미니어처 (1804년 이전, 작자 미상)
1799년 5월 헝가리 귀족인 안나 브룬스비크(Anna Brunswik, 1752-1830)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작은 딸 요제피네(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요제피네는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베토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요제프 다임(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 백작과 얼마후 혼인을 했다(베토벤은 이후에도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다.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 요제피네와 베토벤은 다시 인연을 이어 나가지만, 역시나 브룬스비크 가족의 압력으로 그들의 관계는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1801년 후반에 베토벤은 브룬스비크 가족을 통해 젊은 백작부인 줄리에타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를 만났다. 그는 1801년 11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줄리에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신분의 차이를 느끼게 되면서 그것을 추구할 생각이 없었다. 1802년 그는 현재 일반적으로 "월광 소나타"로 알려져 있는, 피아노 소나타 14번, Op. 27-2를 출판했다. 이 소나타는 줄리에타에게 헌정되었다. 그에게는 그 밖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 1784–1838)를 가르쳤는데, 작곡가가 된 리스는 베토벤이 사망한 지 11년 후, 어린 시절 친구에 관한 중요하고 철저하게 신뢰할 수 있는 기억들을 모아놓은 Biographische Notizen über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전기적 노트")를 프란츠 베겔러와 함께 공동으로 썼다. 후에 스스로 유명한 음악 교사가 된 젊은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7–1857)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도 있다.
1801년 봄 그는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작품번호 43을 완성,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고 같은 해 빈에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연주되었고,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 버렸다(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안 데르 빈 극장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도 같이 연주되었다. 평가는 제각각 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 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802년 이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스파가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최근에 작곡된 작품에 대해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하는 것 외에도 카스파는 베토벤이 이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베토벤의 선호에 반하여) 형에게 그의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거나 개작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순순히 응하고 있는데, 이유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그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02–1812 : ‘영웅적’ 시기
1803년의 베토벤 (크리스티안 호르네만에 의한 초상화)
1815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Charles Neate, 1806–1879)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Carl Friedrich Amenda, 1771–1836)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라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 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영웅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 나폴레옹의 이름이 베토벤에 의해 긁어내져 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 그리고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이라는 부제목과 함께 출판되었다("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
요제프 빌리브로르도 멜러가 그린 1804년의 베토벤
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트슈타인과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4번부터 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프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대공 삼중주, 작품번호 97 (1811년) 및 장엄미사, 작품번호 123 (1823년)도 포함된다.
교향곡 5번, 작품번호 67 (1악장)
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우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작품번호 86)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런 인정만으로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1808년 12월에 조직하여 널리 광고된 대규모 자선 공연의 초연에는 교향곡 5번과 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미사곡 C 장조, 소프라노를 위한 셰나와 아리아, 아! 못 믿을 이여, 합창 환상곡 c 단조 등에서 발췌한 것이 포함되었다. (체르니와 어린 이그나츠 모셸레스를 포함한) 많은 청중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습이 부족했고, 많은 중단과 시작이 수반되었으며, 환상곡이 연주되는 동안 베토벤이 음악가들에게 "나쁜 연주, 잘못된 연주, 또 다시!"라고 외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재정적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808년 가을, 왕립극장에서의 자리를 거절당한 후, 베토벤은 카셀 궁정의 카펠마이스터라는 좋은 급료를 받는 자리를 당시 웨스트팔렌 왕이었던 나폴레옹의 세 번째(막내)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었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Georg Ludwig Kinsky, 1882-1951) 백작, 그리고 로브코비츠 공작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 만이 베토벤에게 합의된 날짜에 주기로 한 연금에 대한 자신의 몫을 지속적으로 지불하였다. 장교직 복무로 소환된 킨스키 공작은 1812년 11월 말에서 떨어진 후 사망했다. 로브코비츠 공작은 그의 연주실을 만들고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였는데,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산,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그는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빈에서 도망쳐야 했다. 베토벤은 다시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는 몹시 괴로워하며 가난하게 죽었다. 베토벤은 법률에 의지하였고, 1815년에 그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
빈에 도달하는 전쟁의 임박한 순간은 1809년 초에 느껴졌다. 베토벤은 4월에 피아노 협주곡 5번 E♭ 장조, 작품번호 73의 작곡을 마쳤다. 음악학자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베토벤의 음악을 "밀리터리풍의 극치"로 묘사했다. 루돌프 대공은 5월 4일에 황실과 함께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베토벤은 훗날 프랑스어 제목 Les Adieux ("고별")로 출판하게 되는 피아노 소나타 26번 E♭ 장조, 작품번호 81a의 초안 작업에 들어갔다(이 작품은 독일에서는 독일어 제목 Das Lebewohl ("고별")로 제목이 붙여졌으며, Das Wiedersehen ("재회")는 루돌프의 1810년 1월 30일 귀향 날짜와 함께 원고에 기록되어 있다). 5월 프랑스의 빈 폭격 때 베토벤은 형 카스파의 집 지하실로 피신했다. 이후의 빈 점령, 문화생활의 차질, 그리고 1809년 말 베토벤의 건강이 악화된 것과 함께 베토벤의 출판사는 이 기간 동안 현저하게 줄어든 생산량을 설명한다. 올 해의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에는 현악 사중주 10번 E♭ 장조, 작품번호 74 ("하프"), 그리고 요제피네의 언니인 테레제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24번, F# 장조, 작품번호 78 ("테레제를 위하여”) 등이 있다.
1809년 말에 베토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희곡 에그몬트의 부수 음악을 작곡하도록 의뢰받았다. 1810년에 등장한 결과물(작품번호 84, 서곡과 9개의 악곡으로 구성됨)은 베토벤의 "영웅적" 양식에 잘 들어맞았고, 베토벤이 괴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괴테의 시 세 편을 설정으로 하여 노래를 만들었다(작품번호 83). 괴테의 친구이자 안토니 브렌타노의 사촌인 베티나 브렌타노(Bettina von Arnim, 본명: 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 1785–1859)로부터도 시인에 대해서 배웠다(또한 이때 베티나는 베토벤에 관하여도 괴테에게 글을 썼다). 비슷한 맥락의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사중주 세리오소"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현악 사중주 11번 F 단조, 작품번호 95와 "대공 삼중주"라는 별칭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후원자 루돌프에게 헌정한 피아노 삼중주 7번 B♭ 장조, 작품번호 97이 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작품번호 117과 아테네의 폐허, 작품번호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작품번호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 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베토벤보다 열 살 아래인 안토니 브렌타노는 베토벤의 가족 소개를 제공했던 베티나 브렌타노의 이복 동생 프란츠 브렌타노의 아내였다. 안토니는 베토벤과 짧은 시기 동안(1811-1812년) 바람을 피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토니는 1812년 말에 남편과 함께 빈을 떠나 베토벤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또는 그와 서신 왕래가 분명했다). 말년에 그녀는 베토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친절하게 말했다.
1813–1822 : 찬사
1813년 초 베토벤은 어려운 감정적 시기를 겪은 것 같았고 그의 작곡의 결과도 떨어졌다. 그의 개인적 모습도 퇴화되었다—일반적으로 깔끔했었다—공공장소에서의 그의 태도, 특히 식사할 때 그의 태도가 그랬다. 가족 문제가 이것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베토벤은 1812년 10월 말에 그의 둘째 동생 요한을 방문했다. 그는 요한이 이미 사생아를 가졌던 테레제 오버마이어와의 동거 생활을 끝내기를 바랬다. 그는 요한에게 관계를 끝내도록 설득 할 수 없었고 지역 시민 및 종교 당국에 호소했지만 요한과 테레제는 11월 8일에 결혼했다.
그의 동생 카스파의 결핵으로 인한 질병과 궁극적인 죽음은 점점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카스파는 한동안 아팠다. 1813년에 베토벤은 그에게 1500 플로린을 빌려 주었고 그 상환금은 결국 복잡한 법적 조치로 이어졌다. 1815년 11월 15일에 카스파가 사망한 후 베토벤은 당시 아홉살이었던 아들 카를의 양육권을 놓고 카스파의 아내 요한나와 오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베토벤은 카스파에 대한 성공적인 지원으로 소년의 유일한 후견인으로 지명되는 것에 성공했었다. 카스파의 유언장에 대한 늦은 유언 보충서로 그와 요한나는 공동 후견인이 되었다. 베토벤은 1816년 1월에 조카를 양육권에서 빼내는데 성공했고, 1818년에 그를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는 동안 다시 카를 주변의 법적 절차에 몰두했다. 귀족 계급(the nobility), 란트법(Landrechte)에 대한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면서, 베토벤은 자신이 고귀한 출생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고, 그 결과 1818년 12월 18일에 빈의 민사관으로 사건이 옮겨져 단독 후견인 자격을 잃었다. 그는 1820년에 격렬한 법적 투쟁 끝에 양육권을 되찾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카를이 위압적인 태도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조카의 삶에 자주 간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