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공자께서 자산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군자의 도리가 네 가지가 있으니, 자기의 행실은 공손하였고, 윗사람을 섬기기는 공경하였으며, 백성을 기르는 것은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리기는 의로웠다.”라고 하셨다.
子産, 鄭大夫公孫僑. 恭, 謙遜也. 敬, 謹恪也. 惠, 愛利也. 使民義, 如都鄙有章, 上下有服, 田有封洫, 廬井有伍之類. 자산은 정나라 대부인 공손교이다. 恭이란 겸손한 것이고, 敬이란 삼가는 것이다. 惠는 사랑하고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백성을 부리는 것이 의롭다는 것은 마치 도시와 시골에 휘장이 있고, 상하에 복식이 있고, 논밭에 두렁과 도랑이 있으며, 마을에 행정조직가 있다는 부류다.
慶源輔氏曰 首篇釋恭爲莊敬 此又釋爲謙遜者 恭敬謙遜 皆禮之端 緣此下文有事上也敬 故以謙遜釋恭 謹恪釋敬 蓋謙遜 乃恭之實 而於行己爲切 謹恪乃敬之實 而於事上爲宜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첫편에서 恭을 莊敬으로 풀이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다시 謙遜으로 풀이한 것은 공경과 겸손 모두 禮의 단서이기 때문이다. 이 아래 글에 ‘有事上也敬’이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謙遜으로 恭을 풀이하고 謹恪으로 敬을 풀이했던 것이다. 대체로 겸손은 곧 恭의 실질이어서 行己에 절실한 것이고, 근각은 곧 敬의 실질이니 일 위에서 합당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左傳襄公三十年 鄭子皮授子産政 子産使都鄙有章 上下有服 田有封洫廬井有伍 杜氏註 國都及邊鄙 車服尊卑各有分部 公卿大夫服不相踰 封疆也 洫溝也 廬舍也 九夫爲井 使五家相保 춘추 좌씨전 양공 30년에, 정나라 子皮가 子産에게 정치를 맡겼다고 한다. 자산은 도시와 시골에 휘장이 있도록 하고, 상하에 복식을 갖추게 하였으며, 논에는 경계와 도랑이 있도록 하고, 마을에는 伍가 있도록 하였다. 두씨가 주석을 달기를, 도읍과 도시, 그리고 변방과 시골, 수레와 복식, 그리고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에게 각자 구분이 있었고, 공경대부는 그 복식이 서로 뛰어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封이란 경계이고, 洫는 도랑이며, 廬(려)는 舍이다. 아홉 장정이 하나의 井을 이루었고, 5家로 하여금 서로 보증하도록 하였다. 朱子曰 有章是有章程條法 有服是貴賤衣冠各有制度 鄭國人謂取我田疇而伍之 取我衣冠而褚之 是子産爲國時 衣服有定制 不敢著底 皆收之囊中 故曰 取而褚之 又曰 有章是一都一鄙 各有規矩 有服是衣冠服用 皆有等級高卑 義字有剛斷之意 其養民 則惠 及使民 則義 惠與義相反 便見得子産之政 不專在於寬 就都鄙有章處 見得義字在子産上 不在民上 주자가 말하길, “有章이란 章程과 條法이 있다는 것이고, 有服이란 귀하고 천한사람의 의관에 각자 제도가 있는 것이다. 정나라 사람들이 말하길, ‘내 밭두렁을 취하여 伍를 만들고, 내 의관을 취하여 쌓아두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자산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의복에 일정한 제도가 있어서, 감히 입을 수 없는 것은 모두 거두어서 자루 안에 쌓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취해서 쌓아놓았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有章이란 도시 하나마다 시골 하나마다 각자 법제가 있다는 것이고, 有服이란 의관과 복식의 사용에 모두 등급의 높고 낮음이 있다는 것이다. 義라는 글자에는 굳세게 끊어버린다는 뜻이 있다. 백성을 기름에 있어서는 은혜로우며, 백성을 부림에 미쳐서는 義롭다 하였는데, 惠와 義는 서로 상반된 것이기에, 곧바로 子産의 정치가 오로지 관대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도시와 시골에 각자 법제가 있다는 부분에 나아간다면, 義라는 글자가 子産 위에 있는 것이지, 백성 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或問四者亦有序乎 曰 行己恭 則其事上非有容悅之私 而能敬矣 惠於民而後使之以義 則民雖勞而不怨矣 혹자가 묻기를, “4가지 중에도 또한 순서가 있을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行己(몸가짐)가 공손하면, 그 윗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기뻐하는 용모로 아첨함의 사사로움이 없으면서 능히 그를 공경할 수 있는 것이다.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연후에 의로움으로써 부린다면, 백성은 비록 수고롭지만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事上之敬 卽行己之恭之所推 使民之義 又所以濟其養民之惠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윗사람을 섬기는 공경은 곧 行己의 공손함을 미루어간 것이고, 백성을 부리는 의로움은 또한 그 백성을 기르는 은혜에 소용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 吳氏曰: “數其事而責之者, 其所善者多也, 臧文仲不仁者三, 不知者三是也. 數其事而稱之者, 猶有所未至也, 子産有君子之道四焉 是也. 今或以一言蓋一人, 一事蓋一時, 皆非也.” 오씨가 말하길, “그 일을 세어서 나무라는 자는 그가 잘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장문중에게 어질지 못한 것이 셋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셋이었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 일을 세어서 칭찬하는 것은 미치지 못한 바가 있다는 것과 같다. 자산에게 군자의 도가 넷이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지금 혹자는 한 마디 말로써 한 사람을 덮으려 하고 한 가지 일로 한 때를 덮으려 하는데, 이 모두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張氏存中曰 左傳文公二年秋八月丁卯 大事于大廟 躋僖公 逆祀也(僖是閔兄 嘗爲臣 位應在下 今躋居閔上 故曰逆祀) 仲尼曰 臧文仲不仁者三不知者三 下展禽(展禽柳下惠也 文仲知其賢而使在下位 不與立於朝也) 廢六關(寒關陽關之屬 凡六關所以禁絶來遊而廢之) 妾織蒲(以蒲爲席是與民爭利) 三不仁也 作虛器(謂居蔡之室而山節藻梲也 有其器無其位 故曰虛) 縱逆祀(聽夏父弗忌躋僖公) 祀爰居(爰居海鳥也) 三不知也 又按家語顔回篇曰 置六關王肅云 六關關名 魯本無此關 文仲置之以稅行客 故爲不仁 傳曰 廢六關 未知孰是 姑並錄之 장씨존중이 말하길, “춘추좌씨전 문공 2년 가을 8월 정묘일에, 태묘에서 대사가 있었는데, 희공을 위로 올렸으니, 이는 逆祀다(희공은 민공의 형이지만, 일찍이 신하였던 적이 있으므로 그 자리는 마땅히 아래에 있어야 한다. 지금 올려서 민공의 위에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역사라고 말한 것이다). 중니가 말하길, 장문중은 어질지 못한 것이 세 가지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이 3가지라고 하였다. 전금을 아래에 놓은 일(展禽은 유하혜다. 장문중은 그가 어진 것을 알았으나, 아래 지위에 있도록 하여 조정에서 그와 더불어 서지 않았다), 육관을 폐한 일(한관이나 양관 등의 따위다. 무릇 육관은 내방객과 여행객을 금지하고 끊기 위해서 폐한 것이다), 첩으로 부들 방석을 짜도록 한 일(부들로 방석을 만든 것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다), 이것이 3가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헛된 기물을 만든 일(거북이를 두는 집을 만들고 山節藻梲한 일을 말한다. 그 기물은 있지만 그에 합당한 지위가 없기에 헛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逆祀를 하도록 방종한 일(夏父不忌의 말을 듣고서 희공을 높였다), 원거에게 제사를 지낸 일(원거는 바닷새다)이 세 가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또한 공자가어 안회편에 따르면 말하길, ‘六關을 설치하였는데, 왕숙은 육관이 관문의 이름이라고 한다. 노나라에는 본래 이 관문이 없었는데, 장문중이 이를 설치함으로써 다니는 손님에게 세금을 받았다. 그래서 어질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은 육관을 폐하였다고 말했으니, 어떤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이에 잠시 나란히 기록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自其立謗政作丘賦制參辟鑄刑書言之 其所未盡者 誠多也 自春秋之時言之 知君子之道者 誠寡也 聖人之言 褒不溢美 貶不溢惡 稱其所長之多而所短自不能揜耳 후재풍씨가 말하길, “그가 비방 받을 정치를 세우고. 丘賦法(丘는 16井인데, 구에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지으며, 3법을 제정하고, 형법서를 주조한 것으로부터 말하자면, 그가 미진한 것은 정말로 많다. 춘추시대인 점으로부터 말하자면, 군자의 도를 아는 것이 정말로 적은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좋다고 칭찬해도 넘치도록 찬미하지 않으며, 폄하해도 넘치도록 미워하지 않으니, 그가 잘하는 것을 칭찬함이 많지만, 못하는 바도 자연히 숨길 수가 없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集註於使民義 獨跡其實而言者 子産爲政三年輿人頌之曰 我有子弟 子産敎之 我有田疇 子産植之 及其卒也 孔子聞之曰 古之遺愛也 先儒云 子産精神全在義字上 夫民之所以頌之 夫子所以取之者 以其惠而能義 孟子所謂惠而不知爲政 姑指濟人一事而言爾 운봉호씨가 말하길, “집주에서는 백성 부리기를 의로써 한다는 것에 있어서만, 유독 그 실체를 쫓아 밟아서 말한 것이다. 자산은 정치를 한 지 3년 만에 수레꾼들이 그를 칭송하여 말하길, ‘나는 아들과 동생이 있는데, 자산이 가르쳐주었고, 나는 밭두럭이 있는데, 자산이 심어주었다.’고 하였다. 그가 죽는 지경에 이르자, 공자께서 이를 듣고서 말하길, ‘古之遺愛(옛날에 살았다던 德政으로 후세에 은택을 남기는 사람)이로다!’라고 하였고, 선유들은 ‘자산의 정신은 온전히 義자 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저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고, 공자께서 그를 취하신 것은 그가 은혜로써 하면서도 능히 의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한 이른바 ‘은혜롭지만 정치를 할 줄 모른다’고 한 것은 잠시 사람을 구제하는 일 한 가지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