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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먼, 『객체지향 존재론: 새로운 만물 이론』(2018)
Graham Harman, Object-Oriented ontology: A New Theory of Everything (2018)
정말, 실재란 무엇인가?
인간은 비인간 객체보다 더 특별하거나 중요한가?
이 책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가?
차례
서론
1장 새로운 만물 이론
2장 미학이 모든 철학의 근원이다
3장 사회와 정치
4장 간접적인 관계
5장 객체지향 존재론과 경쟁 이론들
6장 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
7장 객체지향 존재론 개요
더 읽을거리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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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2016년 11월 8일, 이 책을 거의 다 썼을 무렵, 미합중국의 유권자들은 추문에 시달리는 사업가이자
리얼리티 텔레비전 스타인 도널드 J. 트럼프(Donald J. Trump)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놀라운 결과는, 공개된 비디오 증거가 무색하게도 다양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을 딱 잘라 부인하는
다수의 사건을 비롯하여, 선거운동 기간 내내 물의를 일으킨 트럼프의 수백 가지 발언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
사실상, 그 선거의 여파는 매우 광범위한 충격을 초래하여 공공지식인들이 이례적으로 많은 생각을
반추하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반골적인 입장 중 하나는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의 견해였는데, 지젝은 클린턴(Clinton)이 선출되면 더 신자유적인 평범한 국면이 이어질 뿐이지만
열망을 품은 스트롱맨 트럼프가 선출되면 새롭고 놀라운 정치 연합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자신의 선거 전 주장을 끈덕지게 되풀이했다.
하지만 더 일반적인 반응은 트럼프의 선출을 두고 진실을 더는 존중하지 않는 세상의 징후라고 규탄
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발을 정교하게 주도한 것은 그야말로 권위 있는 『옥스포드 잉글리시 딕셔너리(OED)』였는데,
요컨대 OED는 '탈진실(post-truth)'을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면서 그 단어를 "객관적 사실이
감정과 개인적 믿음에의 호소보다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작은 환경과 관련되어 있거나 그런
환경을 나타내는" 용어로 정의하였다.
누구나 이 사태가 최근에 등장한 미합중국의 특정 정치인을 암묵적으로 가리킴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OED의 정의를 믿는다면, 이른바 탈진실 조건에 대한 최선의 치유책은 '객관적 사실'일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파악한 상태는 흔히 지식으로 불리고, 게다가 지식은 인간의 진실 인식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일반적으로 지식과 진실은 짝을 이루게 된다.
우리 시대에는 대체로 과학의 발견 결과를 지식과 진실의 표준으로 인정하는데, 그 역할을 예전에는
교회의 가르침이 담당했고 어쩌면 미래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른 제도가 담당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지식 생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과학과 그것의 기술적 응용
의 성공이 진실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궁극적인 기준이고,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의 "감정과 개인적
믿음에의 호소"에 대항할 수 있는 열쇠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권력에 진실을 말하기"라는 구좌파의 금언처럼, 선동가는 오로지 지식으로 침묵시
킬 수 있을 뿐이다.
그 선거가 치러지기 몇 달 전에 천체물리학자 닐 드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 유사한
견해를 공표했는데, 그는 논란을 초래한 다음의 발언을 트위터에 올렸다.
"지구는 가상 국가가 필요하다. #Rationalia(#이성의 나라).
모든 정책은 증거의 무게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단 한 줄의 헌법을 갖춘 나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정치에 과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때에만 부조리한 인간 갈등이 마침내 제거될 것이고, 과학혁명
이후 4세기 동안 물리적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보한 만큼 정치도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실과 지식은 트럼프 대변인 켈리앤 콘웨이(Kellyanne Conway)의 이미 악명 높은
어구인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하여간 제멋대로 꾸며내는 상대주의(전에는 좌파에 귀속
되었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우파에 편안한 태도)에 대한 해독제로 제시된다.
하지만 아무튼 기적의 치료제로 권장되는 진실과 지식을 어디서 찾아내야 하는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예술과 건축학 같은 분야들에서 특히 명백한데, 이 분야들은 계산 공식이 아니라 오히려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의 흐름이 지배한다.
이런 차이는, 대중이 보기에, 과학이나 공학, 의학처럼 실제 지식을 생산하는 듯 보이는 분야들에 비해서
그런 분야들이 낮게 평가되는 결과를 대체로 낳는다.
합리적 증거에 기반을 둔 정치체에 대한 타이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누가 정치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지도 불분명하다.
예를 들면,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 같은 이례적으로 효과적인 정치인들의 절차는 그들의 계승자들이 쉽게 반복할 수 있는 공식 요령들의 목록
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또한 과학 지식이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지도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과학 이론은 지적 반란의 시기 동안 어김없이 전복되어 교체되고, 더욱이 영구적인 수학적 핵심이 이
모든 혁명에도 불구하고 과학에서 지속한다고 주장하는 자칭 '구조 실재론자(structural realist)'들의
노력은 지금까지 전적으로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한 역사학파의 확고한 진실은 다른 한 역사학파에 의해 부르주아 경건성으로 일축당한다.
유명한 공업 기업은 바다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를 죽음에 밀어넣는 계산 오류를 저지른다.
다양한 종교의 신봉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수백만 명의 이교도들을 학살하는데, 우리는 그런 학살 행위가
스탈린과 폴 포트, 다른 무신론자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충분히 필적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진실과 지식을 어디서 입수할 수 있는지 안다면 그것들로 감정과 믿음에 대항하기 더 쉬울 것
이다.
그리고 서양이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의 과학적 전통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정당
하지만, 어쩌면 그 초창기의 가장 위대한 지적 영웅은 소크라테스(서기전 469-399)일 것인데, 그는
하여간 아무 지식도 주장하지 않았다.
사실상,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결코 누군가의 선생이었던 적이 없었고,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이라고 솔직히 주장하는 장면이 흔히 나타난다.
자신의 직업을 가리키는 소코라테스의 유명한 명칭인 필로소피아(philosophia)도 지혜의 소유라기
보다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런 태도는 지식을 그저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지식을 획득하고 싶어하는 수학과 과학의 태도와 근본적
으로 다른데도, 철학이 과학의 확실한 길을 따라가도록 재촉하는 많은 사람―철학의 내부자와
외부자―은 이 차이점을 무시한다.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이 책의 주제는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약어는 OOO이고
"트리플 오"로 발음된다)인데,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비교적 새로운 철학 학파다.
지식이나 진실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없으므로 지식이나 진실은 정치나 어떤 다른 것의
타락을 방비하는 우리의 방책이 될 수 없다.
OOO의 시각에 따르면, 사유에 대한 진정한 위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관념론이고, 그래서 우리를 괴롭
히는 것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진실/지식 쌍(이것은 4장에서 더 자세히 고찰될 것이다)이 아니라 실재다.
실재는 우리의 다양한 배가 항상 부딪쳐서 가라앉는 바위인데, 요컨대 실재가 아무리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더라도 우리는 실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최초의 교전으로 변경되지 않는 작전 계획은 전혀 없다고 군 사령관이 말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철학
자는 감정과 믿음을 극복하기 위한 절대 실패할 여지가 없는 절차를 제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와 최초로 접촉함으로써 변경되지 않는 이론도 전혀 없음을 떠올려야 한다.
더욱이, 실재는 항상 그것에 대한 우리의 표명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우리가 살 속에서 직접 대면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에 우리는 실재에 간접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렇게 사물이 직접적인 접근에서 물러서 있거나 또는 보류되어 있다는 것이 OOO의 주요 원리다.
이 원리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의견은 그것이 파악할 수 없는 실재에 관한 쓸모없는 부정적 진술밖에
남기지 않는다는 불평이다.
하지만 이런 반대 의견은 오직 두 가지 대안, 즉 명료한 산문적 진술 아니면 모호한 시적 몸짓이 있을
뿐이라고 가정한다.
오히려 나는 대부분의 인지는 이 두 가지 형태 중 어느 것도 취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인데, 이 상황은
미학과 비유, 디자인, 수사학이라는 현저히 비난받는 분과학문 같은 영역들과 철학 자체에서 명료하다.
철학은 비록 지식의 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여기에 나열된 모든 분과학문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인지적
가치가 있다.
그리하여, 지식을 모든 질환에 대한 치료제로 재빨리 환기하는 현대와 같은 시기에, 인간의 진보에
대해서 과학과 대단히 다른 의제를 갖춘 철학은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힘이 된다.
한편, 정치를 비롯한 모든 권역에서 협잡꾼에게는 사실상 누구에게도 없는 진실에의 권리 주장이 아니라
그에게 실재를 대면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함으로써 가장 잘 대항할 수 있다.
우리가 지식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감지해 볼 수 있느냐가 이 책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10년 전에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객체지향 존재론은 최근에 예술과 인문학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도발적인 철학 이론 중 하나로 부상했다.
지젝은 그 학파의 모형에서는 인간 주체를 위한 어떤 여지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공격했고, 지젝의 열성
추종자들은 대체로 단결하여 OOO를 거부한다.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더 열렬히 그 운동에서 차용하는데, 이를테면 그가
최근에 출간한 존재 양식에 관한 주저에서 '객체지향 정치'라는 어구를 사용한다.
더욱이, OOO는 『아트 리뷰(Art Review)』에 의해 국제 예술계에서 가장 유력한 100가지 영향력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OOO가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건축학일 것인데, 건축학은 새로운 철학적
추세를 일찍 도입하는 것으로 유명한 분과학문이다.
건축학의 주요 학술회의 조직자 중 적어도 두 사람이 OOO는 저명한 프랑스 탈근대주의 사상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이전에 건축학에 미친 영향을 능가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진술했다.
한편, 예일대학교의 건축대학 부학장 마크 포스터 게이지(Mark Foster Gage)는 이렇게 적었다.
"OOO가 ... 건축학자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보다 생성을 강조하는 들뢰즈주의에
대한 해독제로 작용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자신의 독자적인 성질들이 아니라 자신의 관계들―자신의
과정, 자신의 내적 복잡성, 자신의 맥락적 관계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건축에 대한 해독제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학파의 강한 매력은 다른 분야들의 명사들도 인지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유명한 뮤지션
비요르크(Bjork)는 OOO 저자 티모시 모턴(Timorthy Morton)과 서신을 교환하였고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는 2014년 런던의 한 개인 저택에서 행해진 내 강연 중 하나를 주의
깊게 경청했다.
객체지향 존재론(또한 '객체지향 철학'으로 알려진 것)의 기원은 199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어림잡아 그것의 포괄적인 영향력은 2010년 4월에 애틀랜타의 조지아 공과대학에서 개최된, 그 주제에
관한 첫 번째 학술회의로 시작되었지만 말이다.
내 자신의 저작들과 더불어 OOO의 취지로 저술된 가장 두드러진 저작들은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단위 조작(Unit Operations)』과 『에일리언 현상학(Alien Phenomenology)』, 티모시 모턴의 『실재론적 마법(Realist Magic)』, 『초객체(Hyperobjects)』가 있으며, 그리고 자신의 사고방식을 전환하기 전
레비 R. 브라이언트(Levi R. Bryant)의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가 있다.
철학처럼 오래된 분과학문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OOO의 관념들이 모두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새롭게 조합되어 전개되면서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흔히 무시한 주제들에 적용된다.
후속 장들에서 상세히 논의될 OOO의 몇 가지 기본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인 것이든, 현실적인 것이든 허구적인 것이든, 객체
들은 모두 똑같이 주목받아야 한다.
(2) 객체는 자신의 특성들과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특성들과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 긴장 관계가
바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원인이 된다.
(3) 객체는 단지 두 가지 종류로 나타나는데, 요컨대 실재적 객체(real object)는 그것이 현재 어떤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존하지만, 감각적 객체(sensual object)는 어떤 실재적 객체와
관련될 때에만 현존한다.
(4) 실재적 객체들은 서로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객체를 거쳐 간접적으로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5) 객체의 성질 역시 단지 두 가지 종류로 나타나는데, 또다시 실재적 성질과 감각적 성질이 있다.
(6) 이런 두 종류의 객체와 두 종류의 성질은 네 가지 기본 배열을 낳는데, OOO는 이 배열들을 본질과
형상(에이도스)으로 알려진, 밀접히 관련된 두 항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근원으로 여긴다.
(7) 마지막으로 OOO는, 철학은 일반적으로 수학이나 자연과학보다 미학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방금 나열한 관념 중 일부는 도발적이거나 심지어 터무니 없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들을
가능한 한 명쾌하게 설명하려고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내 희망은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독자가 주목할 만한 새로운 지적 풍경이 드러났음을 알아채리라는 것이다.
OOO는 철학 자체뿐 아니라 미합중국 흑인학과 고고학, 건축학, 무용학, 디자인학, 생태학, 교육학,
여성주의, 역사학, 문학 이론, 매체 연구, 음악학, 정치 이론, 정신분석학, 사회 이론, 신학, 비디오게임
이론, 시각 예술 같은 분야들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한 반응을 촉발했다.
한편, 이렇게 광범위한 영향은 익숙한 노래처럼 들릴 것인데, 그 이유는 철학의 대륙적(주로 프랑스-독일)
전통에서 비롯된 수많은 철학 방법이 지난 50년 동안 영어권 세계를 이미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들은 흔히 '탈근대주의' 또는 간단히 '이론'이라는 일반 명칭으로, 얼마간 부정확하게, 뭉뚱그려
졌고, 게다가 몇몇 진영에서는 화려한 사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폄하되었다.
이 상황과 관련하여 우선 떠오르는 몇몇 유명 인사는 자크 라캉과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뤼스 이리가레, 슬라보예 지젝, 주디스 버틀러, 마르틴 하이데거, 브뤼노 라투르인데, 이 집단에서
끝의 두 사람은 내가 개인적으로 애호하는 철학자들이다.
하지만 대체로 이련 사조들은 실재는 언어나 권력, 인간의 문화적 실천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
였지만, OOO는 노골적으로 실재론적인 철학이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OOO는 외부 세계가 인간 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함을 뜻한다.
이런 관점이 아무리 단조롭고 상식적인 것처럼 들릴지라도, 그것은 20세기 대륙철학의 경향을 거스
르면서 놀랍도록 상식에 이질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OOO가 새로운 독자도 C++나 자바 같은 객체지향 컴퓨터 언어에 관한 관념은 익숙할 것이다.
애초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나는 그 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연관된 점이 전혀 없다고 진술할 것이다.
OOO는 컴퓨터 과학에서 '객체지향'이라는 어구만 차용했을 뿐이지, 그 분야의 발달에 직접 고무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컴퓨팅 전문가는 객체지향 프로그래밍과 OOO를 더 자세히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여태까지
이런 일이 불필요한 것으로 판명된 이유는 OOO가 컴퓨터 세계의 세부에서 영감을 취하기보다는 그
세계에서 '객체지향'이라는 어구만 차용했을 뿐이기 떄문이다.
그런데도, 컴퓨터와 철학 둘 다에는 '객체지향'이라는 어구의 의미에 공통된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있다.
구식의 컴퓨터 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은 자신의 부분들이 모두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통합된 체계적이고
전체론적인 것인 반면에, 객체지향 프로그램은 각각의 내부 정보가 서로에게서 은폐된(또는 '보호된')
채로 다른 프로그래밍 '객체들'과 상호작용하는 독립적인 프로그래밍 객체들을 사용한다.
그 부분들의 독립성을 고려하면, 컴퓨터 프로그램이 더는 매번 새롭게 작성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른 용도로 이미 작성된 프로그래밍 객체들을 사용할 수 있기 떄문인데, 요컨대 각 개체의
내부 구조를 바꿀 필요가 없이 그것들을 새로운 맥락에 처하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매번 새로운 프로그램 전체를 창작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별개의 프로그래밍 객체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용도의 새로운 집합체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요컨대 새로운 용도를 창출하기 위해
객체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나는 이 객체들이 사용자에게 불투명할 뿐 아니라 서로에게도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것은 이런 관념이 서양 철학의 역사에 낯설다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상가가 사물의 실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테면 임마누엘 칸트의 '물자체'와 하이데거의 '존재', 라캉의 '실재계'는 지성사에서 나타난 이런 경향의
세 가지 사례일 뿐이다.
OOO를 이런 사조들과 다르게―하지만 객체지향 프로그래밍과 유사하게―만드는 것은 객체들이 인간
마음과 완전히 접촉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완전히 접촉하는 경우도 절대 없다는 관념이다.
이것이 OOO가 독창적이지 않다는 혐의들이 대부분 놓치고 있는 핵심적인 논점이다.
객체들의 상호 암흑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 덕분에 OOO는 우리 시대에 인기 있는 몇몇 전체론적 철학에
저항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철학들은 만물은 순전히 그것의 관계들로 규정되고 세계는 이런 관계들의
전체 시스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OOO는, 그런 이론들에 맞서서, 객체들―실재적이든 허구적이든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인간이든 비
인간이든 간에―은 서로 자율적이어서 가정되기보다는 설명되어야 하는 특수한 경우들에만 관계를 맺는
다는 관념을 옹호한다.
이 주장을 제기하는 전문 방식은, 하이데거(1889-1976)에게서 차용된 용어를 사용하여, 모든 객체는
서로 '물러서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식과는 어긋나게도, 객체들은 서로 직접 접촉할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접촉이 일어나려면 제3의 항,
즉 매개자가 필요하다.
OOO의 '객체지향' 부분을 논의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존재론(ontology)을 나타내는 OOO의 세 번째 O를
고찰하자.
여기서는 앞에서 차용한 관계가 반전되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컴퓨터 과학에서 '객체지향'이라는 어구를
차용한 한편으로 컴퓨터 과학이 철학에서 '존재론'이라는 용어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존재론'과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들은 매우 친숙하여 (이 책의 저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그것들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를 선호한다.
그 두 용어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 예술철학이 다루는 더 특정한 영역에 관여하기보다는 실재 자체의
구조에 관여하는 철학 분야를 가리킨다.
'형이상학'이라는 낱말의 널리 수용된 역사에 따르면, 그 낱말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저작들의 고대 편집자들이 고안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못지 않게 자연과학을 정초한 위인 중 한 사람이고, 그의 『자연학』은 자연의 작동
방식을 상세히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과 더불어 자연에 관한 쟁점들 바깥에 또는 그것들 너머에 놓여 있는 철학적
쟁점들에 관한 또 하나의 저작을 저술했는데, 이를테면 코스모스의 구조에서 신이 담당하는 역할뿐
아니라 개체(또는 '실체')가 자신의 변화하는 성질(또는 '우유적인 것')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방식이 고찰되었다.
이 어려운 저작의 명칭을 확신하지 못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집자들은 전집에서 그 저작의 위치를 『자연학』[Physics] 바로 뒤에 두었을 뿐이고, 그리하여 『형이상학』[metaphysics], 즉 'physics 다음의' 저작
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접두어 '메타'는 '너머'를 뜻할 수도 있기에 형이상학은 물리적 세계 '너머'의 세계
를 다루는 분과학문으로 널리 이해되었다.
하이데거와 데리다(1930=2004) 이후 대륙 전통에서 '형이상학'은 이 대륙 사상가들이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의 전형적인 소박한 형태로 여기는 것에서 철학을 추구하는 적들을 비난하는 대단히 부정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존재론의 경우에, 몇몇 철학자가 그리스 낱말 온토스(ontos)와 로고스(logos)의 의미를 섬세하게 해석
하느라고 많은 에너지를 투자했지만, 이 책의 목적을 위해서는 존재론이 '존재에 관한 연구' 같은 것을
뜻한다고 말하면 충분하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존재론이 그리스 철학에서는 꽤 이른 시기에, 그리고 인도에서는 훨씬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존재론'이라는 낱말 자체는 철학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분야에서는 사실상 어제에 불과한 1613
년이 되어서야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형이상학'과는 대조적으로 '존재론'은 더 엄밀하고 역사적 짐이나 신화적 짐이 덜 적재된, 상당히 고상한
용어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나의 다른 저작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경멸적인 의미
로 사용하지 않을 것인데, 요컨대 내게는 고전 철학에서 유래된 가치 있는 용어를 망가뜨릴 좋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나는, 반복을 피할 수 있도록,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동의어로 사용할 것이고, 그리하여
독자의 귀를 너무 빨리 무디게 하지 않게 하는 데 중요한 문체적 자원을 획득하게 된다.
여러분이 이 책을 다 읽었을 무렵에, 나는 OOO의 기본 개념들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설명했기를 바라는
동시에 내가 이런 양식의 철학에 대해 흥분하는 이유를 전달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둔 모형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강의』인데, 그 강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프로이트가 빈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시행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는 명실공히 어려운 관념들을 문자로 탁월하게
표현한 작가이고, 적어도 그 점에 대해서는 모방할 가치가 충분하다.
바로 그 세련된 입문서에서 프로이트는 말 실수를 설명함으로써 시작하여 꿈의 해석으로 옮겨간 다음에
신경증 이론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사용된 내 방법도 유사할 것인데, OOO의 가장 단순한 양태들로 시작하여 더 복잡한 세부 내용
으로 옮겨간다.
1장("새로운 만물 이론")은 객체에 관한 관념을 소개하는데, OOO의 경우에는 오직 두 가지 유형의 객체,
즉 실재적 객체와 감각적 객체가 나타난다.
또한 나는, OOO가 생각하기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와 특히 칸트(1724-1804) 이후 근대
철학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논의할 것인데, 어떤 의미에서 칸트는 OOO의 중요한 선조이지만 말이다.
2장("미학이 모든 철학의 근원이다")은 철학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보다 과학과 더 적게 공유하고 예술과
더 많이 공유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서는 비유의 핵심적인 인지적 역할을 다루는데, 나는 철학자들이 매우 흔히 이론의 모형으로
여기는,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 "금은 황색 금속이다", 또는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와 같은
논변적인 명제적 진술보다 비유적 표현이 철학에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3장("사회와 정치")은 이런 분야들에서 OOO가 갖는 몇 가지 함의을 논의한다.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약간 설명되는데, 그 이유는 OOO가 사회 이론의 문제에서는 이
유력한 학파와 매우 다르면서도 정치에 관해서는 그것의 많은 통찰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이론에서 OOO는 사물의 행위보다 사물의 내적 본성에 관심이 더 많고, 어떤 객체가 성장하고
성숙하고 쇠퇴하고 죽기 전에 겨우 대여섯 건의 중요한 사건이 그 객체에 들어닥칠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에서, OOO는 프랑스 혁명 이후 지속한 정치 담론의 좌/우 양극화를 피하고 오히려 진실 정치와
권력 정치의 차이에 집중하는데, 결국은 이것들 둘 다 교체되어야 한다.
더욱이, OOO는 비인간 존재자들이 인간 정치체를 안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의 발견을 따른다.
4장("간접적인 관계")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명백하고 흔한 일처럼 보이는 객체들의 상호작용이
보기보다 더 역설적인 이유를 보여준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여긴, 오래 되었지만 부분적으로 가려진 전통이 이미 존재하는데, 먼저 중세와
초기 근대 시대 아랍과 유럽의 기회원인론자들이 있었고, 그 뒤에 칸트와 중요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이 있었다.
나는 이 명사들이 모두 인과율의 작동에 대해서 잘못된 가정을 공유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하여 우리는 OOO의 방법론적 기둥 중 하나로 쓸 수 있는 객체의 네겹 구조에 관한 논의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한 나는, OOO가 문자주의와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거부하는 여파로 지식에 남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것이다.
2장에서 이미 철학은 과학보다 예술과 공유하는 것이 더 많다고 주장했으므로, OOO는 우리가 어떤
현실적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채로 내버려 두면서 철학을 '미학화'한다고 불평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OOO는 지식을 실재 자체의 직접적인 현전으로 여기는 관념을 거부할 뿐이지 지식 그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5장("객체지향 존재론과 경쟁 이론들")에서 나는, OOO의 객체 취급법을 어쩌면 지난 반 세기 동안
가장 지배적인 두 명의 프랑스 사상가인 데리다와 푸코의 관점들과 구별함으로써 OOO의 본성을 더욱
더 분명히 하고자 하는데, 그 두 사상가는 OOO 자체가 요구하는 정도로 객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6장("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은 지금까지 OOO 어법으로 작업했고 지금도 여전히
작업하는 핵심 저자들, 즉 이안 보고스트와 레비 R. 브라이언트, 티모시 모턴을 논의한다.
또한 그 장은 이 학파의 정확한 전제나 방법을 수용하지 않은 채로 OOO 가까이에서 작업한 두 명의
동반자, 즉 제인 베닛과 트리스탄 가르시아도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건축학 분야에서 OOO의 역할에 관해 설득력 있게 저술한 몇몇 젊은 건축가와 건축
이론가, 즉 마크 포스터 게이지와 에릭 게노이우, 데이비드 루이, 톰 위스콤의 작업을 간단히 고찰할 것
이다.
7장("객체지향 존재론 개요")은 OOO 운동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몇몇 격률을 요약하면서 마무리한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두 가지 주요 목표를 염두에 두었다.
첫 번째 목표는, 끝까지 계속해서 읽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OOO를 소수의 노련한 베테랑 이외의 어떤
사람만큼이나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 책을 읽는 일이 가능한 한 즐거운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이 매우 많고, 게다가 독서 외에 할 수 있는 일도 매우 많으므로 눈 앞에 있는
화제를 여타의 선택지보다 더 흥미롭게 만드는 일은 언제나 저자가 짊어질 짐이라고 내가 생각하게
된지는 오래 되었다.
나는 내 집에서 여는 파티에 온 손님들을 지루하게 한다면 굴욕감을 느낄 것이고, 더욱이 이 책을
읽느라고 시간과 돈을 선의로 투자한 수천 명의 독자를 지루하게 한다면 굴욕감을 훨씬 더 크게 느낄
것이다.
[...]
객체지향 존재론 개요
Object-Oriented ontology in Overview
여러분은 이제 일반 독자를 겨냥한, OOO에 관한 최초의 포괄적인 책의 말미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제시된 관념들을 모두 숙달했다는 느낌은 아직 들지 않겠지만, 여러분은 OOO의 비판가들
대부분보다 그 주제에 관해서 더 많이 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각각의 독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듯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역사적 견지에서 OOO의 의미를 바라
보는 몇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한 가지 방식은, 지금까지 '아래로 환원하기' 방법과 '위로 환원하기' 방법의 과도한 점에 반대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발생한 암암리에 객체지향적인 경향의 부활로 여기는 것인데, 이를테면 역사상 핵심적인
몇몇 국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칸트의 물자체, 화이트헤드와 라투르의
존재자/행위자의 평평한 존재론, 후설(지향적 객체)과 하이데거(사물)의 객체지향적 충동이 있다.
OOO를 바라보는 다른 한 방식은, OOO가 칸트 이후 갈림길에서 독일 관념론(헤겔, 피히테, 셸링)이
택한 길과는 다른 길을 택한다는 것인데, 요컨대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물자체를 제거하면서 모름지기
철학은 사유와 세계의 상호작용에 관해 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편견을 지지함으로써 인간과는 별도로
일어나는 어떤 객체-객체 상호작용도 자연과학의 수학화 방법에 내맡겼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OOO는 물자체를 승인하면서 오히려 칸트가 물자체를, 불과 면화 또는 빗방울과
타르 사이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의 파악할 수 없는 관계항으로 여기기보다는 인간의 유일하고
비극적인 짐으로 여긴 이유를 묻는다.
세번째 방식에 따르면, OOO의 학제적 성공 덕분에 오히려 우리는 OOO를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정신에 걸맞는 대단히 광범위한 방법이지만 모든 객체의 비관계적 핵심을 구출하는 방법으로 여길 수
있고, 그래서 미학적 사물 구상을 위한 길을 닦게 된다. 이런저런 기분에 따라 나는 이런 구상 중 어느
하나를 선호하는데, 독자 역시 자유롭게 선호할 수 있다.
이제, 앞에서 다루어진 OOO의 주요 원리 중 몇 가지를 간략히 검토함으로써 이 책을 마무리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이것들과 관련된 수많은 공헌은 먼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래서 나는 맞춤 사례들을
나타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평평한 존재론(1장).
이것은, 철학은 만물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열망하면서 가능한 가장 넓은 그물을 던짐으로써 시작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평평한 존재론의 주적은, 세계는 소수의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자 유형들로 분할되어야 한다고 미리
가정하는 분류학적 편견이다.
중세 철학은 이쪽에 있는 신과 저쪽에 있는 여타의 것 사이의 차이를 둘러싸고 선회했다.
근대 철학은 신을 인간의 사유로 교체했을 뿐인데, 요컨대 하나의 특별히 중요한 존재자 유형이 여타의
것과는 엄청나게 달라서 존재론의 절반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관념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근대적 분류학은 오늘날에도 지젝과 바디우, 메이야수 같은 선도적인 유럽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지속한다.
이런 까닭에, 라투르의 용어를 사용하면, OOO는 자신을 '비근대적' 철학으로 부르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전근대 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우주를 양분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이른바 근본적인 구별짓
기로서의 사유/세계 또는 인간/비인간을 거부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OOO가 '평평한 존재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고무한 사람은 데란다인데, 이 어구가 서술하는 경향은
철학사 전체에 걸쳐, 특히 인간과 동물과 식물은 다를 것이지만 인간이 인간인 것에 못지않게 식물이
식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둘 다 마찬가지로 실체다.
환원하기에 반대한다(1장).
무엇이든 객체는 두 가지 기본적인 종류의 지식, 즉 무언가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지식과
무언가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지식 중 어느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양의 너무 많은 철학자가 객체는 단지 이 두 가지 중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아니면 둘 다
일 뿐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려고 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OOO는 반(反)직해주의(anti-literalism)객체관을 강하게 고수하는데, 직해주의란
우리가 객체를 마치 그것이 바로 성질들 또는 영향들의 총합과 정말로 같은 것처럼 서술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현대 철학과 관련하여, OOO는 덧없는 객체를 그저 일시적으로 생성하는 소용돌이치고 역동적인 전체의
모형(앙리 베르그송, 제인 베닛)을 '아래로 환원하기'의 일종으로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런 모형이
개별 존재자를 근본적인 통일체에 비해 얕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OOO는 행위 또는 사건의 철학을 승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런 철학이 단지 객체를 '위로
환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다른 방식으로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논변적 사건이 객체에 앞선다는 푸코의 이론,
아무것도 자신(자기-현전으로 알려져 있는)과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은 산개되어 존재한다는
데리다의 견해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몇 년 전에 나는 인터넷 댓글에서 그런 이론들의 다른 한 변양태를 보았는데, 그 글에서 익명의 OOO
비판자는 카렌 바라드와 도나 해러웨이가 "관계항 없는 관계"을 옹호한다고 이유로 오히려 그들을 높이
평가했다.
바라드와 해러웨이의 글에는 가치 있는 것이 많이 있지만, 나는 관계항을 무에서 생성하는 관계에 관한
관념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는데, 마치 결혼이 두 배우자를 결합하여 변화시키기보다는
허공에서 생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형태의 '위로 환원하기'를 상상하기는 어려운데, 우리가 이해한 대로, 이것은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OOO는 유물론의 일종이 아니다(1장).
모든 새로운 이론은 다양한 오해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OOO와 관련된 가장 흔한 오해는 그것이 '유물론'의 일종이라는 주장이다.
사실상, OOO는 유물론은 커녕 '물질'이라는 개념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형상이 각인될 수 있는 무정형의 물리적 질료로서의 물질이라는 관념은 경험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고,
이론적 견지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다.
말과 상상의 말, 일각수의 차이는 전자는 물질 속에서 '존재하고' 후자의 둘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차이는 실제의 말이 상상의 말과 다른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고, 게다가 실제의 말과
일각수는 확실히 형상이 다르다.
이 사실이 함축하는 의미 중 하나는, 우리는 어떤 사물에서 어떤 형상을 '추출'하여 이 형상을 수학적
어휘나 다른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어휘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거나, 아니면 우리는 이런 행위
를 실행할 수 있지만 그 형상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 손실이 없는 번역은 전혀 없기에 무언가를 완전히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객체는 인간 접근에서 물러서 있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서도 물러서 있다(1장).
이것은 OOO가 칸트와 다를 뿐 아니라, 하이데거 같은 칸트의 중요한 후예들과도 다른 중요한 방식이다.
칸트 이후 대부분 철학은 칸트에 대한 독일 관념론 비판의 어떤 판본을 수용했는데, 요컨대 사유 바깥의
사물을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사유 너머에 있는 물자체라는 개념은 비정합적이다.
반면에, OOO는 칸트의 물자체를 전적으로 수용하는데, 단지 그것이 인간 사유만을 괴롭히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뿐이다.
불과 면화 역시, 그것들이 인간이나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불투명하다.
사회학자로 가장하는 두 명의 위대한 현대 철학자(라투르와 루만)를 고려하면, 소통이 라투르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관계는 사물을 구성하는 질료라기보다는 사물의 삶에서 우발적인 것이고, 게다가 모든 관계가 관계를
맺는 관계항들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소통은 루만이 생각하는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회 및 정치 시스템과 상호작용할 수 있고 그것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여기서도
그런 상호작용들이 모두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객체들의 소통은 쉽지도 않고 불가능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어렵게 가능하다.
사물의 내부 균열(2장).
실재론에 관한 대부분 논증은 실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표상 사이의 단일한 간극에 집착한다.
OOO는, 사유하는 인간이 이런 표상의 유일한 현장이 더는 아니도록 이 문제를 확대하는 것과 더불어,
그 문제에 다른 한 요소를 가미한다.
사물의 내부에도 간극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객체/성질 균열이라고 부른다.
감각적 객체도 실재적 객체도 그저 성질들의 다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객체는 성질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더라도 자신의 성질에 앞선다.
조합하면, 이처럼 세계를 가르는 두 가지 별개의 축(물러서 있음/현시됨과 객체/성질)은 적절히 관련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OOO 방법의 기초를 이루는 네겹 구조을 산출한다.
제1철학으로서의 미학(2장).
미학적 경험은 객체에 대한 비직설적 접근 형식으로서 OOO에 중요하다.
미학적 경험은, 감각적 성질이 자신의 일반적인 감각적 객체에 더는 속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접근에서
반드시 물러서 있는 실재적 개체로 전이될 때 일어난다.
이런 까닭에 사라진 실재적 객체는 미학적 관객 자신에 의해 감각적 성질을 지지하는 새로운 실재적
객체로 교체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학적 경험의 필연적 연극성에 관해 말할 수 있는데, 예술 비평가 마이클 프라이드
(Michael Fried)가 연극을 강력히 비난했음에도 말이다.
객체는 작용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작용한다(3장).
사회 이론은 객체의 작용이 아니라 그것의 실재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객체의 작용이
객체 자체를 '위로 환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평생 동안 맺는 수많은 관계 중에서 단지 소수의 관계만이 중추적이며,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공생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생은 흔히 비호혜적인데, 이는 사물 A와 사물 B 사이에서 사물 B는 사물 A와 관계를 맺지 않는데도
사물 A는 사물 B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황을 뜻한다.
더욱이, 모든 공생은 비유와 같은 방식으로 비대칭적인데, 이를테면 포도주-어두운 바다는 바다-어두운
포도주가 아니다.
정치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3장).
정치 이론은 지식에의 주장에 근거를 둘 수 없는데, 그 주장이 필경 최선의 정치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이든, 아니면 지식은 단지 권력 투쟁일 뿐이라는 한낱 냉소적인 주장에 불과하든 말이다.
정치 이론은, 자신을 비지식으로 인식해야 함과 더불어, 이전에 그랬던 것보다 비인간 존재자들에게
훨씬 더 큰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OOO는 여전히 활발한 이론 운동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운동이 계속해서 새로운 발견을 하기를 확실히
바란다.
내가 이 책에 거는 희망은, 그것이 이 학파가 이미 이룬 실질적인 진보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