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의 장미 2023.12.28
12월 초 뮤지컬 콘서트로 <베르사유의 장미>를 관람했습니다. 원작은 일본의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가 프랑스대혁명을 모티브로 1972년부터 1년여 간 그린 장편 만화로 전 세계에서 2,000만 부 이상이 팔린 세기의 명작입니다. 일본에선 간단히 <베르바라>라고 하는데요. 세계 초연을 향한 이번 창작 뮤지컬 콘서트는 리요코의 작품이 기반이었습니다. 그의 만화는 또 오스트리아가 낳은 세계적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쓴 평전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토대로 했답니다.
만화의 주인공인 가공인물 오스칼은 딸만 여섯인 왕실 근위대장의 막내로 태어나 남장으로 키워지고 그 또한 왕실 근위대로 앙투와네트 왕비를 지키지만 하급부대로 자원했다가 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가담해 바스티유 감옥의 공격 도중에 최후를 맞게 됩니다.
◇뮤지컬 콘서트 <베르사유의 장미> 포스터.
내가 몇십 년 전에 본 40부작의 애니메이션은 자물쇠를 좋아하는 루이 16세와 화려함을 즐겨 ‘적자 여왕’ 불명예가 붙은 마리 앙투와네트를 둘러싸고 대혁명 전후의 프랑스 역사를 박진감 있게 풀어간 대작이었습니다. 만화에 심취한 어느 국내 팬은 박경리의 <토지>나 최인훈의 <광장>처럼 웅장한 서사(敍事)가 좋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팬은 어린 시절 본 <베르사유의 장미>가 연이 돼 프랑스에 관심을 갖고 전공을 택했으며 프랑스 항공에 근무한다고 SNS에 올렸습니다. 혹자는 프랑스 역사를 왜 일본에서 배워야 하냐고 말합니다. 나는 주제곡의 마지막, “장미는, 장미는 아름답게 진다.” 薔薇(ばら)は、ばらは美つしく散る>를 기억합니다.
뮤지컬 콘서트의 이성준 음악감독은 몇 달을 2~3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작곡에 정성을 쏟았다고 무대에서 말했습니다. 단원들은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연습했답니다. 이틀뿐이었던 공연의 첫 관람은 만석은 아니었지만, 꽤 많은 젊은이들이 공연을 응원했습니다. 아마 나는 최고령 관객이었을 건데 이런 현실에 실망했습니다. <베르바라>를 싫어해야 하는 나이인 거냐고요.
푸치니나 베르디의 오페라를 떠올리며 이 뮤지컬이 프랑스대혁명과 루이 16세, 마리 앙투와네트, 그의 연인이라고 알려진 스웨덴의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 근위대장 오스칼을 어떻게 그릴지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특파원으로 200주년 혁명기념일을 취재했던 필자로서 더 기다려졌죠.
LG아트센터 앞을 지나면서 아내에게 꼭 한번 가보자던 약속을 지키려고 “바로 이거지.”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한 <베르바라>를 고른 것입니다. 손녀들에게도 가자고 꾀었지만 한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중요한 세계사라고 말해도 고개를 저었죠. 로베스피에르가 1790년 연설에서 처음 강조한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 정신은 손녀들과는 아득한 거리에 있나 봅니다.
공연장은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년 9월 13일 ~ )가 설계했죠. 트럭운전사, 복서 출신의 그가 노출 콘크리트를 강조해 설계한 강원도 횡성 소재 <뮤지엄 산>의 물에 떠 있는 듯한 건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디바인 비운의 오스칼 역에는 핑클의 멤버였던 옥주현이 5음계를 넘나드는 독창곡 <넌 내게 주기만>을 열창했죠. 김지우와 더블캐스팅이었습니다. 그를 연모하는 2명의 남자, 앙드레는 이해준, 플로리앙은 정백선이 맡았습니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은 국왕이 국가재정의 건전화를 위해 귀족과 교회에 과세하려고 175년 만에 3부회의를 소집하자 제3신분 의원들이 부별 심의에 반대하여 국민의회를 만들고 이에 왕이 군대를 동원해 탄압하려 들면서 발단이 되었죠. 3부회의는 국민의회에 이어 제헌의회를 창설했습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졌고 교회 토지는 국가관리가 되었습니다. 1791년 페르센의 도움으로 파리를 탈출한 국왕은 국경 근처 바렌에서 체포됐고 프랑스는 반혁명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죠. 파리 코뮨이 설치되었고 국민공회는 1792년 왕정폐지와 공화제를 선포합니다. 혁명재판소는 루이 16세를 반역죄로 1793년 1월, 왕비는 10월에 처형합니다. 1785년 앙투와네트가 받지도 않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았다고 뒤집어씌우고 목걸이를 중도에서 가로채 영국에서 팔고 이 못된 음모를 책으로까지 낸 사기 사건은 국고 낭비로 몰아가 왕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고 재판에서도 불리했습니다.
◇궁정화가 비제 르브룅 부인이 국모의 역할을 강조해 그린 앙투와네트와 아이들. 무릎에 차남 루이 샤를이 있고 황태자 루이 조셉이 빈 요람을 가르키고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안위원회로 공포 통치하지만 1년 뒤인 1794년 그 또한 유죄가 선고돼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로베스피에르가 구체제 인사 1만 명을 처형한 단두대는 1981년 폐지되었습니다. 쇠 날이 위에서 밑으로 떨어져 고통을 단축한다는 자동 참수 도구였죠.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정부의 원동력은 덕과 공포다. 덕 없는 공포는 유해하고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다”고 한 명언은 부메랑이 되었습니다.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한 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정정부를 수립한 뒤 황제에 오르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로 실각하고 1814년 왕정이 복고돼 루이 16세의 친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죠.
뮤지컬 콘서트에서는 사회자가 주요 등장인물들을 불러내 인터뷰하면서 그의 역할과 복잡한 상황을 설명시켜 맥이 끊겼습니다. 100분 정도의 공연에 춤과 노래 몇 곡으로는 대혁명도, 비운의 러브라인도 스토리텔링 하기엔 버거운 듯했습니다. 세기에 걸쳐 다듬어진 오페라의 스토리에 익숙했던 나는 이질감을 맛봤습니다.
그러나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로 세계 초연을 노리는 시도에 박수를 보냅니다. 흔히 문화의 세계화란 우리 것을 밖으로 내가는 것을 위주로 삼는데 외국 것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재해석하여 소개하는 문화의 중계역도 큰 기여가 되는 거죠.
철학도였던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바라>를 그리면서 초등생을 대상으로 생각했는데 직장 여성들의 호응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작년 50주년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모르는 여성들이 전화해 오스칼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오스칼이 죽자 일본 각지에서 캐릭터 장례식까지 열렸죠.
뮤지컬 콘서트는 본 공연을 앞둔 종합 리허설 성격이라서 그런가, 공연 의상도 오스칼과 그 주변인들만 시대에 맞췄고 나머지 앙상블단은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라는 현대적 모습이라서 집중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여러 뮤지컬로 히트를 거듭하면서 이 공연을 기획한 EMK뮤지컬컴퍼니는 이번이 여섯 번째 창작 공연인데 내년 7월 <베르사유의 장미> 본 공연을 하며 그에 앞서 내년 2월 <마리앙트와네트> 10주년 기념공연도 한다니 기대가 큽니다.
일련의 뮤지컬은 역사의 맥을 공유하는 것이므로 앙투와네트는 다른 작품과 겹치더라도 오스칼과 함께 주인공인 셈이니 그의 등장은 많은 뮤지컬 팬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까요? 대혁명이 시대 상황인 만큼 뮤지컬 공연의 어딘가에는 프랑스의 혁명가였다가 프랑스 헌법 2조에 명시한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도 불렸으면 작품 내용의 국제화와 완성도 제고, 관객의 몰입에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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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