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쉬운 성경 시편 139편 1 - 12절
1 여호와여, 주께서 지금까지 나를 살피셨으니 주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
2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
3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5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6 이것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가 계신 곳을 떠나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8 만일 내가 하늘 위로 올라간다 해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내가 깊은 곳에 눕는다 해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9 만일 내가 새벽의 날개 위에 오른다 해도, 내가 바다의 저 끝 쪽에 자리를 잡는다 해도,
10 주의 손이 거기서 나를 인도하실 것이요,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굳게 잡으실 것입니다.
11 만일 내가 "어두움이 확실하게 나를 숨겨 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해도, "빛이 내 주위에서는 밤이 된다"라고 말한다 해도,
12 어둠이 주께는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밤이 낮처럼 빛날 것입니다. 이는 어둠이 주께는 빛과 같기 때문입니다.
<묵 상>
본문은 하나님의 전지_모든 것을 아심과 편재_어디에나 계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신학적 주제들을 찬양하고 있기에 ‘교리적인 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용은 굉장히 신학적이지만, 표현은 아주 신앙적입니다. 아주 깊은 내용을 굉장히 쉽고, 감동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시인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지나온 삶의 여정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씩 하나씩 체험적인 신앙언어로 표현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쳤던 자신의 삶의 단면들을 고백하며, 남은 생애도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합니다.
1.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6절).
"여호와여, 주께서 지금까지 나를 살피셨으니 주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살피다’는 '탐지하다'는 뜻입니다. 탄광에서 광석을 캐내는 작업을 할 때, 전쟁 시 적진으로 정탐을 간 군인이 적의 상태를 탐지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광부가 광석을 캐낼 때에 아무 곳이나 파지 않습니다. 좀 더 양질의 광석이 있는 곳, 더 많은 광석이 있는 곳을 찾아가며 채광합니다. 또한 적진으로 정탐을 간 군인이 적군의 위치와 숫자, 주변의 지형을 면밀하게 살핍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피기고 계시기에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2절) 이 말씀에서 가장 강조 되는 단어는 ‘주께서’입니다. 나를 상세히 알고 계신 분이 그 어떤 신적이 존재도 아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알고 계시면 됩니다. ‘앉고 일어섬’은 ‘인생 전체’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앉고’는 ‘평안할 때’를 의미하고, ‘일어섬’은 ‘괴로울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 같아 보여도 나를 모르지 않으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생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의도’, ‘목적’을 의미합니다. 겉은 물론 속까지 전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3절)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내가 나가는 것'은 공적인 모든 활동, 모든 일터에서의 생활'을 말해 줍니다. ‘내가 눕는 것’은 ‘사적인 생활, 휴식’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적인 생활은 물론 사적인 생활까지 알고 계십니다. 내가 일하는 모습도 알고 계시고, 나의 쉬는 모습도 알고 계십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행동만 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서 상대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말을 해도 상대가 그 말의 진의를 제대로 못 알아들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도 알고 계십니다.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도 하나님은 모르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 부부, 자식은 정말로 고통스럽고, 답답한 심정을 몰라줘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5절)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행을 모두 알고 계심을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신다’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다윗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가는데, 당연히 두려움이 엄습해 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확인해 보니,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의 앞뒤를 둘러싸서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6절) 다윗은 하나님의 전지하심_모든 것을 아시는 분임을 자신에게 담아 둘 수가 없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을 안다', '그런 지식'은 '하나님의 아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심'을 '내가 알 수 없다', '나는 모른다'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모르는 게 정상입니다. 여기서 모른다는 것은 아예 분간을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 행하시는 일은 인간의 차원과 다름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2.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7-12절)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하심_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찬양합니다. 먼저 수직적으로 아무리 높은 곳과 아무리 깊은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가 계신 곳을 떠나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하늘 위로 올라간다 해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내가 깊은 곳에 눕는다 해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7-8절) ‘주의 영’은 ‘성령 하나님’만을 말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주가 계신 곳’의 문자적인 의미는 ‘당신의 얼굴에서 벗어나’입니다. 다윗은 현존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데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높이를 '하늘 위'로 표현했습니다. 또 최저의 깊이를 '깊은 곳에 눕는다'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깊은 곳에 눕다'는 '스올_지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거기까지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어디에 있든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제는 수평적으로 아무리 멀리가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새벽의 날개 위에 오른다 해도, 내가 바다의 저 끝 쪽에 자리를 잡는다 해도, 주의 손이 거기서 나를 인도하실 것이요,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굳게 잡으실 것입니다."(9-10절) ‘새벽의 날개’는 아침에 동이 틀 때에 태양광선이 뻗어나가 바다에 닿는 모습을 염두에 둔 시적표현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다는 지중해였습니다. 그 바다의 끝은 세상의 끝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는 지극히 위험한 장소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바다만 해도 두려운데, 그 끝에는 끝없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혹 그 바다 끝에 살게 된다 할지라도 주의 손이,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붙들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시편의 절정입니다. 그 어느 곳에 있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에서 제외된 곳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어두움이 확실하게 나를 숨겨 줄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이 내 주위에서는 밤이 된'라고 말한다 해도, 어둠이 주께는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밤이 낮처럼 빛날 것입니다. 이는 어둠이 주께는 빛과 같기 때문입니다."(11-12절) 몽골 초원에 사는 사람들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흑암이 가득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매나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가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시고, 다 아니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는 흑암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존재하지 않으시는 곳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낮과 밤이 동일하고, 어두움과 빛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무겁고 어려운 주제인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편재하심을 어렵지 않게 표현합니다. 다윗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도>
전지전능하시고, 부소부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일구어 가게 하옵소서. 나를 감찰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 의탁하며,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께서 나의 가는 길과 눕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와 지지해 주심이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주님 눈 밖에 나지 않고, 주님 눈에 꼭 드는 사람, 주님 마음에 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눈 밖에서 허튼짓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삶의 자리에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