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30
2월8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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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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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dvfQ_T_sAs (배청민 미카엘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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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네 삶에서 보다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늘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한 고통이 이루 말로 다 표현 못 할 상황이지만, 그로 인해 전국민적 위생 관념이 대폭 개선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게으른 편이라 손을 잘 씻지 않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틈만 나면 손을 뽀득뽀득 잘 씻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다인들은 참으로 시대를 앞서 살았습니다. 의료 수준이 열악하던 시절, 틈만 나면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절, 잘 씻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그들은 일찌기 파악했던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 교육시 가장 먼저 잘 씻는 예절부터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유다인들의 이러한 위생 관념은 그들의 율법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고, 정결예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식사 전후, 외출 전후뿐만 아니라, 기도나 예식 전에도 손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정결례는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점점 확대되어, 인간이 사용하는 잔이나 그릇 등 생활용품에도 적용되었고, 나중에는 아주 엄격하게 적용되어, 이를 어길 시 강경한 질타와 처벌이 뒤따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규정들이 늘어났는지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죄인들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래서 몸이 많이 더러워지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약 6.4Km)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웃기는 것은,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 앞에 예수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것입니다.
한 수도원에 들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들고양이지만 색깔도 연한 갈색에다 물결무늬까지 아주 잘 나왔고, 더구나 꽤나 붙임성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과 자연스레 친해진 고양이는 마치 집고양이처럼 편안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수사님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주제는 고양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였습니다. 결과는 한 식구로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한식구로 받아들여진 고양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식탁 위에도 올라오지를 않나? 기도 시간에도 성당에 들어와 다른 수사님들을 따라 꾸벅꾸벅 졸지를 않나?
할 수 없이 수사님들은 제2차 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번에도 주제는 고양이였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다들 그간 고양이 한 마리로 인해 겪었던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장시간에 걸쳐 열띤 논쟁이 거듭되었고, 마침내 꽤 두툼한 볼륨의 고양이 관련 규칙서가 마련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꽤나 웃기는 예화입니다만, 사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 예식 규정들도 다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 예식 규정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패라다임을 한 마디로 산산조각 내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7장 6절, 8절)
우리네 삶에서 보다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늘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늘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좋으신 우리 주님, 사랑스런 동료 인간, 불멸의 사랑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설때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과 영혼과 의지도 정결하게 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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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NXUHnPMiS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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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섞이지 않은 가르침은 ‘마음’까지 이르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따르는 율법 때문에 예수님께 질책을 당합니다. 그들이 먼저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은 없으면서 겉으로만 율법을 지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란 그 율법을 주신 이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들은 돈이 있어도 부모를 봉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라 말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마치 코끼리인 줄 모르고 각자가 원하는 부분을 만지는 소경과 같습니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 자신을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으니 그 율법은 자기 이익을 위해 쓰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주신 분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오는 피를 받지 않으면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을 갖추지 못합니다.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 자주 병원에 입원하고 잠을 자도 15분마다 깨기도 하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았습니다. 위장도 일을 하지 않아 계속 마르는 상태입니다. 그녀는 초 민감함의 소유자로 소위 번아웃이 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시작된 동기는 2014년이었습니다. 아마 세월호 사건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의 아이들이 마치 자기 자신처럼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일에도 의미가 없고 음악 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진다며 두려움을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증상이 있게 된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너무나 좋은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굉장히 폭력적인 분이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폭력을 가했습니다. 본인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것입니다. 대학 때도 통금 시간이 8시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목공소에서 각종 크기의 매를 맞추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윤아 씨는 이런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에 굉장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안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식동물은 소리에 매우 민감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에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민감해지고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그 분노와 두려움을 내뱉는 음악이었는데, 2014년 이후 그런 것까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자녀가 잘되도록 매를 들고 가르쳐도 그 가르침에는 피가 섞이기보다 아이들의 피를 내는 폭력이 있기에 그 가르침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쓸데없는 가르침을 넘어 피해를 주는 가르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증오는 나의 힘’이라는 노래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맙고 고마운 내 아버지, 당신을 죽도록 이토록 증오한 덕에 난 아직 살아있고….”
누군가의 가르침은 그 사람에게 고마울 때 따라주고 싶은 것입니다. 범법자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먼저 자신이 사는 세상에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라에 감사하면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은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안에 피가 섞여야 그 피가 그 사람의 자아를 죽이고 그 율법이 그를 이끌게 만듭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아이는 그 부모의 가르침을 절대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따르는 척하지만 결국 자기를 망칩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잘 지키게 해줄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어 당신을 더 사랑하도록 하신 것인데, 이것을 원치 않고 하느님을 실제로는 미워하면서도 그저 그 율법을 자기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법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를 규정하는 법과 생각을 규정하는 법, 그리고 마음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육체를 규정하는 법은 무력을 쓰면 가능하고, 생각을 규정하는 법은 논리가 맞으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규정하는 법은 ‘피’가 필요합니다. 이 피가 없으면서 마음을 바꾸려 하면 안 됩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로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는데 아이들이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해서 가지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어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왜 아이들은 십일조는 지키면서 실제로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율법을 준 박보영 목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박 목사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전에 JTBC ‘유자식 상팔자’에서 ‘부모님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은?’이라는 질문에 ‘반응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춘기 아이가 있었습니다. 분명 아이는 자기만 100%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버릇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야단을 맞는 건데 엄마가 잘못했다는 건 잘못 생각하는 거지. 엄마랑 너랑 싸우는 관계가 아닌 거야. 난 부모고 넌 자식이야. 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는 관계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엄마를 무시하는 거야, 네가!”
엄마는 아이에게 당연히 아이는 엄마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가르침과 함께 피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맙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피가 모자라는구나!”라고 생각해야지, “난 부모고 넌 자식이야!”로는 안 됩니다. 율법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율법을 주는 이가 ‘고마워서’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피’가 빠진 말은 그저 폭언이 되고 잔소리가 될 뿐입니다. 부모는 나의 가르침에 항상 나의 피가 섞여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사춘기가 넘으면 이 일을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클래어 크로켓 수녀님은 어렸을 때 방탕한 삶으로 빠졌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입 맞추다가 그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그분의 계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사랑의 불화살로 당신 심장이 찔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매일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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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다고 즉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롯의 아내는 어땠는가? 그 여자가 한 것이라고는 세상 부패를 향하여 의지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이 전부인데, 감각 없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창세 19,26 참조) 그 마음이 하느님과 거리가 먼 죄악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제4계명, 신명 5,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7; 레위 20,9)고 하면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가 굶주리는 데도 그 자녀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게걸스레 먹어 치울 제물을 봉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바쳤다는 핑계로 부모께 대한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 썩은 서약이 되어 버렸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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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여기서 ‘더러운 손’이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손’, 즉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은 손’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행한 정결 예식은 위생상의 관습이 아니라 종교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종교적으로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조상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랍비들의 전통’이고, ‘할라카’ 라고 부르는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부족했던 당시에는 일반 서민들은 그 정결 예식을 지킬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냥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 정결 예식을 무시했습니다.(루카 11,38)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지켰기 때문에, 성경에 없는 그런 정결 예식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다고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형식’과 ‘본질’의 충돌이 아니라, ‘인간의 관습’과 ‘하느님의 계명’의 충돌입니다. 즉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렸다.”가 아니라, “계명이 아닌 것들을 계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했다.”입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섬기지 않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라는 말씀은, “계명이 아닌 것들을 계명 지키듯이 지키면서 진짜 계명은 무시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라고 꾸짖으시는데, 그들이 버린 하느님의 계명은 무엇일까? 정결 예식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레위 19,18)라는 계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실 물도 부족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정결 예식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못 지키면 부정한 죄인 취급하고...... 그것은 ‘이웃 사랑 계명’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일반 서민들을 몽땅 죄인 취급했고,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여기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들어 있는 가르침은,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게 하는 사람의 전통은 지키면 안 된다.”입니다. (‘지킬 필요가 없다.’, 또는 ‘안 지켜도 된다.’가 아니라, ‘지키면 안 된다.’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게 만들거나 거스르게 만드는 인간의 전통과 관습은 없애야 합니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여기에 언급된 ‘코르반 관행’은 민수기 30장 3절의 율법에 근거를 둔 관행입니다. “남자가 주님께 서원을 하거나 맹세를 하여 스스로 서약을 할 경우, 자기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 제 입에서 나온 것을 다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민수 30,3) 바리사이들은 이 율법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이라고 선언해서 부모 봉양을 회피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율법을 악용해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는 범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도적으로 부모 봉양을 회피하려고 ‘코르반 관행’을 악용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는 경우에, 대송을 바치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지침을 만들어 놓았는데, 만일에 부득이한 사정이 아닌데도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것도 역시 인간의 규정을 악용해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공동체와 함께 하는 미사’를 할 수 없었던 시기에, 평화방송에서 중계하는 미사라도 시청하라는 권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 정상적으로 미사 참례를 할 수 있게 된 뒤에도 평화방송을 시청하는 것으로 주일미사 참례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정말로 몸이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상황에서 평화방송이라도 시청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성당에 갈 수 있는데도 귀찮아서 평화방송 시청으로 대충 때웠다면, 그것은 주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TV 시청은 미사 참례가 아니라, 미사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바리사이 같은 모습들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관면 조항’들을 함부로 남용하지는 않는지, 형식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계명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또 원칙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원칙주의자라고 조롱하고 비웃은 적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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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끝말잇기’라는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도루묵, 묵주, 주의 기도, 도시’처럼 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게임 중에 ‘도미노 게임’도 있습니다. 하나의 판을 건드리면 그 판이 다른 판에 영향을 주면서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과학에서는 이와 비슷한 이론으로 ‘나비효과’가 있습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나비가 날개를 흔드는 것이 한국의 태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사회도, 국가도, 태양계도, 은하계도, 우주도 어쩌면 끝말잇기처럼, 도미노 게임처럼, 나비효과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선한 행동은 세상을 그만큼 선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나쁜 생각, 나쁜 말, 나쁜 행동은 세상을 그만큼 추하고,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선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행하지 말라.’고 명심보감은 이야기합니다.
과테말라에서 8년간 선교하던 후배 신부님이 필라델피아로 왔습니다. 한국으로 휴가가기 전에 잠시 들렸습니다. 제가 예전에 30일 피정을 함께 했던 신부님이라서 뉴욕에서 잠시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워싱턴 DC에 있는 한인성당으로 갔습니다. 그곳 신부님이 멀리 과테말라에서 온 후배 신부님을 초대했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갔습니다. 왕복으로 10시간 걸리는 길이었지만 모처럼 신부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마치 옆집에 다녀오듯이 갔다 왔습니다. 한 신부님은 후배를 위해서 노트북을 사주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선교에 필요할 것이라고 후원금을 주었습니다. 저도 약간의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이틀을 지내면서 올 겨울에 과테말라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후배가 사는 모습도 보고, 자동차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미리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생각보다 저렴했습니다. 좋은 마음이 모이니 교구 신부님들과 여행 갈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원숭이들을 상대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나무 위에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바나나를 놓았습니다. 원숭이들은 나무에 올라가서 바나나를 집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나나를 집으려는 순간 지붕에서 물이 내려왔습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원숭이들은 이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한 마리를 우리에서 빼고 새로운 원숭이를 우리에 넣었습니다. 새로 온 원숭이는 당연히 나무 위로 올라가려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4마리의 원숭이가 새로 온 원숭이를 말렸습니다. 올라가면 물벼락을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원숭이는 4마리의 원숭이가 바나나를 못 먹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싸움이 일어났지만 새로 온 원숭이는 4마리의 원숭이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고, 맞았습니다. 그렇게 원숭이들이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이제 물벼락을 맞았던 원숭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원숭이 우리에는 하나의 규칙이 생겼습니다. 새로 오는 원숭이에게 달려가서 때리는 것입니다. 새로 온 원숭이는 원인도 모르고 맞았습니다. 나무 위에 바나나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붕에서 물이 나올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어쩌면 우리에 있던 원숭이들과 같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이 생긴 이유와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이 지켜왔으니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였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면 율법과 계명도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장애인, 환자, 가난한 이, 고아와 과부에게는 예외의 규정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신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법과 원칙을 넘어서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희생하는 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과 원칙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법과 원칙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말과 행동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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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을 구분하십니다. 그분께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옹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관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마치 자기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들이 지닌 전통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전통은 오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계명(율법)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끝에 생겨난 규정들일 것입니다. 문제는 세세한 규정들의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집착하다 보면, 그 바탕을 이루는 본질과 정신을 쉽게 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은 규정은 악용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코르반’은 하느님께 드릴 예물이니 그것을 다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서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악용한 일부 유다인들이 부모에게 돌아갈 몫이 아까워 그것을 ‘코르반’이라고 선언하였던 모양입니다. 하느님께 맹세를 드린 예물이라는 핑계로 부모를 봉양할 의무를 회피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본질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과 정신이 바로 ‘사랑’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계명이나 규정도 사랑이 없다면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주일 미사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드릴 때 비로소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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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아~ 너 때문에 너무 힘들어!>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국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간혹 ‘저 사람만 없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힘들어한 그 사람도 나도 미숙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와 다른 너로부터 자유롭고 싶은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사랑받기를 갈망하지만 작은 말 한마디에 토라지고 상처받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때로는 애먼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낼 때였습니다. 함께 살던 여덟 명의 수련자들은 20대 초에서 30대 중반 사이로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자라온 환경이나 성격, 교육 정도 등도 달랐습니다. 다양한 모습의 수련자들이 함께 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수도생활을 배우고 있었지만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싸우고 부딪히고 때로 울고 웃으며 조금씩 자신과 수도형제들을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힘든 형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수사님은 저보다 늦게 입회를 하였지만 제가 군복무를 하는 사이 동기가 된 분으로 어찌 된 일인지 살수록 부담스럽고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어졌습니다. 그 수사님은 제가 실수를 할 때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제게 수사님의 그 잔소리는 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행여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날이면 밥이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불편했습니다. “왜 하필 저 수사님과 내가 동기가 된 것일까?”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고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서 끝기도를 할 때면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에페 4,26)라는 주님의 말씀이 매번 제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 마음에 머물러 살펴 보니 그 수사님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제가 보였고 그런 제가 너무 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자의 영적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평화의 길』 이라는 책의 어떤 글귀가 제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너에게 보내 주신 선물이다.”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그 수사님 얼굴이 떠오르면서 마음에서 이런 외침이 들리더군요. ‘아니 그 수사님이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 주신 선물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물”이라는 단어가 자꾸 맴돌아 다시 저를 들여다보니 제 마음 깊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수사님의 지적이 그렇게나 힘들었던 것입니다. 저 자신에 대한 강한 집착. 그 욕구를 직면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그 수사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수사님과 함께 하는 것이 예전만큼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원수같던 그 수사님 덕분에 저는 저 자신을 더 들여다보게 되었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해의 지평이 넓어진 것입니다. 정말 그 수사님이 저에게 “선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선물” 말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마주 오는 힘든 사람, 마주 오는 힘든 사건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힘든 사람과 힘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숙고할 때 그 안에서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 사람만 없으면”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 그것은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눈으로 나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족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체험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성장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치유로 이끌어줍니다.
이렇듯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의 변화는 자기 자신과 이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주고 나아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기다려줄 것."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데 오히려 우리는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선입견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어진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루카 복음 15장 11-32절을 묵상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깨닫고 발견하여 그분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이 여정에는 행복과 더불어 감당하기 힘든 문제들, 사람들 사이의 상처와 아픔, 고통의 시간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문제를 모두 없애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셨지만, 삶의 문제들과 십자가를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건 바로, 문제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의미에서 마주 오는 삶의 문제들은 성장과 변화를 위한 예수님의 선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 자신의 집착에서 비롯됨을 깨닫게 됩니다.
‘내 것에 대한 집착’
‘내 뜻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벌거벗고 태어나시어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내 것과 내 뜻”에 집착하며 거짓 자아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ness)가 될 때,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마주 오는 모든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힘겨워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됩니다.
지금 나에게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이제 그 선물을 열어보고 주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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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다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혼이 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서 야단을 치시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지적하고 화를 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야단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이 문제가 단지 손을 씻고 안 씻고의 논쟁이 아니라 더 중요한 무엇이 있으며 예수님께서 오늘 그것을 가르치려 하신다는 것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위생 상태가 아니라 종교적인 관습의 준수 여부였습니다. 유다인들은 모세 율법을 확대 해석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규칙들을 만들었습니다.
가령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음식 먹기 전의 손 씻는 예식을 보면, 유다인들은 모든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요리가 바뀔 때마다 큰 동항아리의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또 손을 처음 씻을 때는 양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다 계란껍질 하나 반 정도의 물을 부어 손목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했으며, 양손이 젖어 있는 동안 양손 각각을 주먹으로 문지른 다음에는 손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물을 손목에서 손끝까지 흘러내리도록 부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유다인들은 하느님 앞에 부정하다고 생각하였지요.
손을 씻지 않으면 악령이 침범하여 가난하게 되고 멸망하기 쉽다는 것이 그들의 법이었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죄인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손을 씻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라고 율법 자체를 바꾸어 버렸고 이 율법에 걸려 넘어진 유다인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율법의 핵심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이 만든 계명으로 인하여 왜곡되어 결과적으로 이웃을 죄인으로 취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경직된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는 율법 학자들에게서 발생한 오류입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마르7,6-7)
그래서 이렇게 하느님의 뜻보다는 조상의 전통을 강요하고 있다고 오늘 예수님께 야단을 맞고 있는 것이지요. 손을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형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마태 15,19-20)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그 정신이 있는 것이지 사람을 단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서 제외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뒤집힌 유다인들의 율법 정신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우리 또한 살다보면 자칫 내 생각을 강요하게 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편가르기를 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적이 되고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들이 더러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시대는 너무나도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차를 타면 그 사람의 인격까지도 좋게 보고, 돈이 많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좋게 보아줍니다. 반대로 가난하거나 못 생기면 그 사람의 인격까지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자기의 귀한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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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평겸 타대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해야 했던 과제들을 마르코 복음사가의 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 상황은 갈릴래아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유대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왔고, 여기서 예수님과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유대의 계율 종교의 대표자로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상의 전통인 레위인의 정결 예식을 지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퍼져있는 외적인 것만을 존중하는 유대교 신심을 날카롭게 비판하십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참다운 ‘정결’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마음과 정신으로부터 우러나는 도덕성을 요구하십니다. 즉 그리스도교 도덕성의 기초를 부각시키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나의 조직화된 단체 혹은 종교적 일단이었는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드러내기 위해 허황하게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위선자라는 말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참여할 몫을 얻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조상들의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모든 계율을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노력과 헌신은 상당수의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이러한 집착으로 해서 율법 가운데 가장 작은 계율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상황에 이른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서의 계율에 만족하지 않고, 여기에 구약성서의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서 더 많은 규율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것이 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조상들의 전통’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이 전하는 세세한 부분까지 모세의 율법과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무거운 짐을 부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기로 되어있는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찮은 인간적인 규범들을 주장함으로서 진정한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예를 들어 말합니다.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았는데 가령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는 일들이 그것이었다.”
조상의 전통만을 주장하는 바리사이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의도는 외적인 규범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도덕적이고 거룩한 의지를 망각하고 무시하는 의식주의인 편협함.그리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그들의 태도를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외적인 형식 때문에, 전통이라는 명목 때문에, 모두가 다 하니까 하는 보편적 사고 때문에, 내가 가진 위치와 재물을 지켜려는 자기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실천을 등한히 하지는 않는지 반성해봅시다. 계명의 참된 가치는 하느님 자비와 용서의 실천에 있음을 잊지맙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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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시편 저자의 기도에는 나약한 인간의 죄 성에 숨겨진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교만과 위선에 갇힌 인간이 절대 드릴 수 없는 기도이지요.
멀리서 찾지 않아도 내 주변에는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숨겨진 추악함과 가식을 느끼면, 우리는 관계에서 오는 자괴감을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이런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당신을 닮은 모습을 심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다운 모습, 곧 인간의 죄와 고통, 위선과 탐욕, 죽음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만이 지니신 용서와 자비, 사랑과 나눔, 치유와 영생의 씨앗들이 심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관습과 전통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 온 율법의 정신을 하느님의 자유와 평화로 향하게 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율법의 형식 안에 가두어 두려는 위선적 태도를 비난하십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는 예수님의 비판은, 오늘날 교회조차도 전통이라는 이름에 갇혀 전례 형식주의나 교회의 사업과 관리에만 몰두하여, 정작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사목에 무관심해지는 바리사이들의 조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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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지가 바로 주방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또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관습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의 정신’과 ‘하느님의 뜻’에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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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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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
<진정한 코르반?>
오늘 복음(마르7,1-13)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언급하신 '코르반'이라는 말의 뜻은, 유다인들이 돈이나 재산 등 자신의 소유물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일종의 서약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코르반으로 바쳐진 재물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입술로만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라고 하고,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지 않으면서, 나눔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코르반을 이용했습니다.
'현대판 코르반?'
교회가, 사목자가, 그리고 믿는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인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과 온 존재로 함께 하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
말로만 서약하고, 행동으로는 서약하지 않는 것!
입으로는 "아멘, 아멘!" 하면서, 삶으로는 아멘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오늘 미사했고, 기도했고, 말씀을 묵상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구체적인 이슈나 문제 앞에서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현대판 코르반'입니다.
'진정한 코르반'은 규정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로마12,1 참조)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이 입술로만 외치는 구호나, 보여주는 행위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습과 하나가 되는 '참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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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담아>
마르코 7,1-1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마음 담아>
마음이 담긴
눈길이 부드럽지요
마음이 담긴
말길이 살갑지요
마음이 담긴
손길이 따스하지요
마음이 담긴
발길이 옹골차지요
마음이 담긴
숨길이 고르지요
마음이 담긴
살길이 바르지요
마음이 담긴
내길이 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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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누구랑 같이 여행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갈 때면 늘 혼자 떠나는 여행을 선택합니다. 또 밤에는 누구를 만나서 보내는 것보다는 제 방에서 조용히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 저를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혼자 여행을 떠나도, 또 홀로이 책을 읽고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하늘나라에 가신 뒤에 느끼게 된 감정입니다. 내 편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혼자 있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단지 나를 믿어주는 내 편이 있기에 혼자 있는 것도 괜찮은 것뿐이랍니다. 다른 이들과 수많은 관계 속에서, 즉 ‘우리’로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나’입니다.
상대방이 밉다고 혼자서 살기 시작하면, ‘나’는 더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주는 사랑이 나에게서 나올 때, 사람들 역시 나와 함께 하려 할 것입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나옵니다. 바로 주님으로부터 위선자라는 말을 들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편과 자기 편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했습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자세한 규율을 엄격히 적용하면서 사람들을 분리했습니다.
실상 그들이 말하는 ‘조상들의 전통’은 십계명이 아닌 인위적인 규율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손 씻는 예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교도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 갔다 오면 부정 탔다고 해서 몸을 예식으로 정결해야 했습니다. 위생절차가 아니라 손을 물에 담그거나 몸에 물을 뿌리는 종교예식일 뿐입니다. 내부적인 부정을 벗겨낼 수 있다며 외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 씻는 예식은 식사 전과 후, 때에 따라서는 식사 도중에도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관들이 종교적인 예절을 행하기 전에 했던 것인데, 이를 일반 백성에게도 예절적으로 행하도록 부과한 것이었습니다. 원래의 뜻은 무시하고 그냥 자기 편과 아닌 편으로 나누면서 자기 편이 아니면 죄인으로 취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함께’가 아닌 ‘자기 편’만 생각하는 그들을 주님께서는 인정하실 수 없었습니다.
외로움이 많은 세상입니다. 내 뜻과 다르다면서 단죄해버리는 못된 습관이 외로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더 깊이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나부터 그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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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되이 섬겨서는 안 된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체적인 생명의 양식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겉모양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알맹이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행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소홀히 하는 형식은 율법주의적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보아야 하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코로나19’의 감염병으로 말미암아, 전례와 관련 관면이 많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면의 문제보다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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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의 훈련-
어제는 마침 제 생일이었고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지냈는데 알게 된 여러분들이 사랑의 축하메시지를 보내 줬습니다. 저 또한 즉시 감사의 답신과 함께 제 사진도 전송하니 사랑의 빚을 갚은 기분이었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을 분별의 잣대로 하면 무엇을 행할까 답은 곧 나옵니다. 얼마전 상담전문가 자매에게 드린 ‘환대-경청-위로와 격려-치유의 구원’이란 조언이 생각납니다. 이 또한 사랑의 환대, 사랑의 경청, 사랑의 위로와 격려, 사랑의 치유와 구원으로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통합됨을 봅니다.
“사랑, 현재, 죽음의 3대 경구로 살라!”
개신교의 월보 ‘그리스도복음신보’ 1면의 첫 머리기사에 공감했습니다. ‘사랑-현재-죽음’을 삶의 잣대로 하면 삶은 더욱 단순하고 본질적이 됩니다. 사랑을 실천할 자리는 여기 오늘 지금의 현재요, 죽음을 늘 눈앞에 두고 살면 현재의 사랑 실천은 절박합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잠깨어 밤마다 정원 잔디에 잠시 누워 하늘의 별들을 볼 때 마다 떠오르는 자작시입니다. 바꿔 말해 땅에서 우리의 행복은 하늘의 총애寵愛의 사랑을 담아 두었다가 이웃에게 겸애兼愛의 사랑을 꽃피워 내는 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총애의 하늘 사랑은 저절로 겸애의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첫 주간 미사를 주례하고 강론하는 아브라함 새 수도사제의 자세가 신선했습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강론에 깃든 정성을 감지할 수 있어 주일에 이어 어제 월요일에도 미사후 격려성 칭찬을 했습니다.
“수고많았습니다.”
“강론 준비에 애 많이 썼습니다.”
감동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입니다. 이 또한 사랑의 격려입니다. 미사 10분전에 제의 방에 오는 것도 강론 원고를 정성스럽게 파일에 담아 오는 것도 저를 닮았습니다.
요즘 부쩍 강조하는 것이 선택과 훈련입니다.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여 마음 아파해 하지 말고 날마다 새롭게 선택하여 연마鍊磨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행복도, 감사도, 기쁨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훈련하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결같은 노력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바로 성전에서의 끊임없이 바쳐지는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찬미와 감사의 하느님 사랑의 훈련입니다. 이래야 알게 모르게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하는 사랑입니다.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사랑의 성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솔로몬의 성전에서의 찬미 감사기도의 고백이 진정성이 넘칩니다. 얼마나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한지 감지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도 사랑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사랑의 기도가, 사랑과 기도의 훈련이 참으로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성전에 독점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수도원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듯 성인도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 거하시는 거룩한 진짜 성전입니다. 영문 주석이 새로운 깨우침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했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다.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거룩한 장소는, 복음의 바리사이들이 손씻는 것 같은 거룩한 실천은 하느님 계명이 선포와 보호가 목표로 하는 ‘인간의 거룩한 위엄(the sacred dignity of human person)’에 비교하면 모두 빛을 잃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놔두고 조상의 관습에 타성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생각없는, 부질없는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어리석은 행위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정통한 예수님의 이런 바이사이들의 문제점을 이사야의 말씀을 빌어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사랑 부재의 손씻는 관습에, 코르반의 관습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나무는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는 눈먼 관습의 집착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이 백성이 나를 입술로는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6-7)
참으로 구체적 사람을 망각한 사랑 부재의 모든 관습이나 수행이 헛되이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삶과 전례 역시 둘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로 통합됨을 봅니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이니 관상과 활동의 우열을 논함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잣대는 관습도 율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진짜 수행은 모두가 하느님과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이런 사랑의 수행이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더욱 사랑의 수행에, 사랑의 봉사에, 사랑의 훈련에 전념, 몰두하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날마다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사랑을 닮아가는 '사랑의 훈련'에 마음을 담아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를 바치는 것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몸은 여위어가나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 84;2-3ㄱ.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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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둘 모여 습관이 되고
다수의 집단이 살아온 습관들이 모여
관습이 되고 법이 되나 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습관과 관습과 법이
우리를 편하게 살게해 주는 규범이기도 하지만
때론 사랑을 거부하는 핑계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 내가 편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보다
사람의 전통인 관습을
앞세우지 않게 하소서.
나의 주님!
우리가 감히 성전을 지어
주님을 그곳에 모시고 기도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 늘 우리 안에 있어
관습에 얽메이지 않고
사랑의 종이 되겠다는 언약이옵니다.
그러 하오니 주님,
사람의 계명에 얽메어
사랑의 계명을 소홀히 한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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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TfCzrONep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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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 13)
올바른
삶의 변화가
가장 큰
은총이다.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은총의
말씀이다.
우리의
욕심으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우리들이다.
복음의 방식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중성을
아프게
지적하신다.
하느님을 위한
삶은 결코
이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신앙은
위선이
아니다.
위선을 내려놓고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과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신앙은
참된 복음이다.
참된 복음은
먼저
마음을 살리고
서로를 살린다.
믿는 것을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할 것은
하느님 마음이다.
하느님 마음은
규칙과 전통을
뛰어넘는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을
경계한다.
비겁한 핑계가
아닌 계속
되풀이되는
판단과 단죄가
아닌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삶에 벗어나
참된 겸손과
감사로
주님을 만나야 할
오늘의 시간이다.
교만과 독선의
거짓 이중성을
아프게 회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신앙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인격이다.
인격은 아프게
돌아보는
성찰 없이는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
깨어있는 삶이
구원의 삶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결코
이중적인
위선의
관계일 수 없다.
거짓이 아닌
참된 관계가
신앙이고
복음이다.
하느님 모상을
닮은 참된
인격이다.
거짓이 아닌
참된 사랑의
예수님이시다.
참된 방향으로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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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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