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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엄경보현행원(부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普賢
“절이 존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법회를 열기 위해서입니다” |
1. 오로지 부처님을 따라서
불교는 「설법(說法)․청법(聽法)」의 법회(法會)로 시작〔五比丘法會〕되었고, 이 법회를 통해 각지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사(精舍)에서 거리에서 신도들 집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언제나 법회를 열어 법을 설하셨습니다.
1)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절에서도 부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법을「설하고․듣고․닦는(說法․聽法․修行)」법회를 더 자주 열어가야 합니다. 오직 법회를 통해서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룩해야 하는 것은, 법회만이 불교발전을 위한 바른 방법이며, 바른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법이 풍성한 한국불교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2) 법회는 부처님의 뜻〔救世大悲〕과 부촉〔傳道宣言과 靈山當時 등〕을 받드는 가장 지극한 불사(佛事)입니다. 또한 佛子 개인에게는 법회를 의지하여 바른 삶과 최상의 수행인 전법(傳法)을 동시에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모든 절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법하게 선설(宣說)하는 법회는 불교의 본래 모습이고 지극한 본분사이며 도리입니다.
3) 이에 절마다 매주 정기법회를 열어서 신도들이 청법수행(聽法修行)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제도화해야, 부처님의 뜻과 부촉이 사람들의 가슴에서 다시 살아나고, 법이 이웃에 전해질 것입니다. 흔히 절은 ‘경치 좋은 곳’이라고 말하는데 이제 ‘법이 풍성한 곳’으로 새롭게 다시 알려져야 합니다.
4) 이제 우리 佛子들은 부처님 제자인 부루나 존자처럼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결심을 서원해야 부처님 법이 거듭 이 세계에 떨칠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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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자라면 삼보 주석처인 절에 자주 가서 삼보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잘못을 가려 반성하고 다짐해야 일상(日常)에서 진리에 대한 신앙심이 성숙합니다. 이것이 ‘세간살이 그 속에서 해탈 얻는’ 묘행(妙行)이며 참수행입니다.
2) 여기서 분명한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修行〕을 혼자 하면 보살이 되지 못하고, 독각(獨覺)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항상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자신을 살펴 연기․중도(緣起․中道)의 가르침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3) 그래서 대중이 함께 청법수행(聽法修行)할 수 있는 공간인 절이 있는 것이고, 절이 있으면 당연히 법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회가 없는 절은 한갓 건축구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창․중흥’ 이라는 우리의 말은 먼저 법회를 위해서 쓰여져야 합니다.
4) 누구나「설법․청법」의 법회에 참석하기만 하면 자신의 모습이 진리거울에 환히 비칩니다. 육신이 거울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법경(法鏡)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자신을 진리적인 삶으로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5) 이로부터 점차 자신을 가다듬고 성숙시켜 나가는 것은 불자일생의 성스러운 수행과업이며 불성인격의 구현으로써, 이는 보살의 대원대행(大願大行 : 衆生成熟 - 佛國土成就)을 따르는 법의 원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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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재가불자들에게도 수행본찰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불자들이 이 절 저 절 정처없이 떠돌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떠돌이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하듯, 떠돌이 불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佛子라는 말에는 출가자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불자의 신앙생활은 호기심의 충족이나 한갓 취미 어린 여행의 수준이 아닙니다. 오로지 현실생활에 불성인격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책임있는 삶입니다.
2) 이 불성인격은 일상의 안정적인 수행처에서 인내와 성실을 통해서만 현실에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출가자라는 신분만으로, 불교신도라는 이름만으로, 또는 법인연(法因緣)의 햇수만으로, 내지 몇 번의 善行으로 불자신앙은 성숙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책임감만큼 성장성숙합니다.
3) 이에 재가불자들이 관혼상제와 日常을 모두 맡길 수 있고, 당연히 책임 질 수 있는 절이 있어야 불교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이 커 가는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단순한 공부모임이나 친목이 아닌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의 장으로서 여러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재가불자들에게 수행본찰은 반드시 필요하고, 여기에 대한 종단적인 연구와 대책이 하루바삐 있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4) 동시에 각 절에서는 해당 지역의 전법을 책임지고 불자들의 수행본찰로서의 부족함이 없도록 두루 갖추어야 하고, 재가불자들은 집 가까운 곳이나 인연있는 곳에 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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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마다 도서관 건립을 서둘러야
1) 불교의 수행방법이 많지만 청법은 가장 기본적인 수행이면서 동시에 최종적인 수행〔擇米〕입니다. 불자는 이 청법수행을 통해 거듭거듭 발보리심 하게 되고, 참회와 서원을 새롭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여 바른 길을 찾게 됩니다.
2) 또 청법수행은 공부의 시절인연에 따라서 깨달음의 결정적인 일구(一句)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청법수행은 듣는 것으로 시작하여 듣는 것으로 완성될 수 있기에「설법․청법」의 법회동참은 기본수행이며 종합수행이고 내지 결정적 수행입니다.
3) 일찍부터 절의 출가대중들에게는 정기적으로 상단법문을 하는가 하면 수시로 소참법문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先代의 이 점을 똑똑히 상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출가승단에서는 재가불자들에게도 당연히 청법의 기회를 여법하게 널리 갖추어 주어야 합니다.
4) 이 일은 오늘의 출가승단에게 주어진 일차적인 책무입니다. 해서 이미 있는 법회의 활성화나 새로운 법회의 개설을 통해 傳法佛事를 충실히 이루어 가야 합니다. 도대체 법이 설해지지 않거나 법회를 소홀히 하는 절을 어디에다 쓸 것입니까.
5) 또한 佛書를 통한 聽法은 예로부터 절에서 해오던 자랑스런 전통이며 포교입니다. 각 절마다 출판사를 두어 필요할 때마다 책을 간행했으니, 그 중에서 가장 큰 출판사가 대장경판을 모신 해인사 장경각입니다. 불서보급은 오늘날 지식산업사회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일이기에 절마다 도서관을 서둘러 두어야 합니다. 佛子들이 절 도서관에서 불서읽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청법수행입니다.
6) 법회는 사람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구국구세의 대작불사(大作佛事)입니다. 예로부터 불자들은 법회에 가서 법듣기〔聽法〕가 가장 큰 즐거움〔法悅〕이었고, 법인연을 혈연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몸속의 피와 같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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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모든 절에서는 지금부터 ‘중흥․중창’불사를 일제히 시작해야 합니다. 건물 짓는 ‘중흥․중창’불사가 아니라 천막속에서도 매주 법회를 여는 법이 충만한 ‘중흥․중창’불사가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미학적인 건물 짓는 일과 성과적인 이름 앞세우는 일에서 단연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이나 명예는 세간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됩니다. 출가가 다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출가는 오로지 불법의 증거자, 보살행 중심이면 되리라고 봅니다.
2) 지금 사부대중이 하나같이 불교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화급하게 법의 깃발을 내걸고 사람을 불러모아 법회를 열어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소음이 될 때가 있습니다.
3) 기회가 왔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불교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만 있다면 분명 위기는 새로운 기회입니다. 만약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재앙이 온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
1) 유행과 시류는 흘러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근본에서 보면 한갓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세태의 흐름을 잘 알아서 임기응변에 능한 영리한 사람보다 묵묵히 원칙을 지켜가는 다소 미련하고 둔감한 듯한 사람이 佛事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법(佛法)은 한 때의 유행도 아니고 일시적인 시류도 아닌 시간과 공간을 격절한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 이념의 흐름이나 사조의 변화, 또는 진보니 보수니, 左니 右니 하는 것도, 결국 진리와 역사의 긴 눈으로 보면 모두 한 때의 일에 불과합니다. 결코 함부로 휩쓸려서 불교를 세속화시키지 말고 꿋꿋하게 불교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굳은 심지가 필요합니다. 佛法만이 중생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사람과 제도를 탓하고 바꾸기 전에 불자자신의 참회와 수행원력을 바탕으로 항상 ‘自我淨化運動’을 펼쳐 전통을 중히 여기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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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인들의 생활양태는 양력으로 기준을 삼고 7일(일주)을 가늠하여 일하고 쉬고를 반복합니다. 이에 절에서도 현대인들이 쉬는 날(토요일, 일요일 혹은 공휴일)을 택해 정기법회를 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야 가족이나 남녀노소 누구나 절에 갈 수 있습니다.
2) 또한 앞으로 불교신도들의 신앙관리를 첨단매체〔DMB 등〕를 이용해서 하더라도 근본인 정기법회가 상설되어야 어떤 종류의 매체 포교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 점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3)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절에서는 불자들이 청법수행(聽法修行)을 할 수 있도록 시급히 매주 정기법회를 개설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전국의 모든 절에서 일시에 법회를 열어가야 합니다. 나라가 달라질 것입니다.
4) 비록 산골짜기 외로운 암자라 할지라도 매주 정기법회를 열어야하며, 설령 동참대중이 한 명이라도「설법․청법」의 매주 정기법회를 꾸준히만 이어간다면, 바로 거기에서 한국불교의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의 부강이나 통일의 힘도 진리에서 나옵니다.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일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
1) 그리고 재가불자들의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명분으로든 절에서 상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불법(佛法)을 팔아서도 안되고 물건을 팔아서도 안됩니다. 더구나 절을 유지하고 佛事를 하기 위해 상행위를 하는 것은 正道를 벗어난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굳센 각오로 이 원칙을 지켜 오로지 정도를 가야 합니다.
2) 불사성취에 대한 손쉬운 생각을 버리고, 좀 더디고 어렵더라도 불자들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보시수행으로, 절을 유지하고 불사를 할 수 있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원칙에 출가와 재가는 철저하게 공명, 공감해야 하고, 특히 출가의 확고한 정신자세가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출가한 우리스님들이 장사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돈이 최고인 황금만능시대에 살고 있다해도 용기있게 부처님 법을 지켜가야 합니다. 眞佛子는 파사현정의 정의로 살아야 합니다.
3) 특히 절의 책임자들은 절 안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상행위를 할수록 신앙심이 뚝뚝 떨어져 부처님 가르침과 점점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고 알아야 합니다. 절내에서 상행위, 그 자체는 이미 율장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만약 절에 특산품이나 좋은 물건이 생산되면 신도들이나 이웃에게 나누거나 베풀지언정 결코 팔면 안 됩니다.
4) 그러나 이미 우리는 상행위를 금해야 하는 원칙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물신(物神)시대의 앞잡이가 되고, 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흥 부호(富豪)나 귀족(貴族)이 되려고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설령, 지금까지는 그렇다손 쳐도 이제부터 우리는 뼈를 깎는 각오로 정법을 수호해야 합니다. 용맹정진으로 환골탈태하여 정법을 굳게 지켜가야 합니다.
5) 학자들은 불교야말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개혁할 수 있고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이 시대의 유일한 구세사상(救世思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출가자는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전적으로 자신이 받드는 사상을 실천하는 일이 그 직분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철저하게 자각해야 할 일입니다.
6) 또한 신도들인 재가불자들도 삼보와 일체중생을 위한 신앙심으로 무주상(無住相)의 보시수행을 목표로 해야지, 사찰에 도움이 되거나 이웃돕기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상행위에 참여하거나 나라에서 다시 돌려 받는 기부금 수준에 머물러서 보시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7)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 받는 보시수행은 자칫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질시키고 훼손시킬 수 있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행위와 기부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리를 등지는 일이 될 수 있기에 불자는 오직 육도(六度)의 첫째인 ‘보시수행’으로만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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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은 사회가 시끄럽고 요동치면 적정(寂靜)해야 하고, 또 사회가 활기를 잃어 침체했을 때는 밝은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절은 마땅히 세상을 지탱하는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못 듣는 것을 들어야 사회전체의 균형을 잡아 줄 수 있고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기에 어떤 명분으로든 절이 세속화되어서는 안됩니다. 결코 감각적인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여 경거망동해서는 안됩니다. 한갓 유행을 따르는 세속화는 절의 존재가치가 점점 사라져 결국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3) 해서 절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꿈쩍 않고 의연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지키고 받들기 위해서는, 전통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산같이 흔들림 없는 보수파가 되어야 하고 타협 모르는 고집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유행은 지속적인 가치가 아닌 한갓 흘러가는 허망한 물결입니다.
4) 교정분리는 대원칙입니다. 조계종 종정이셨던 성철대종사께서는 대통령이 해인사까지 왔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출가자의 준엄한 법도인 대원칙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先賢이 세운 법도의 가풍을 지켜가야 합니다. 쉽게 불사를 이루려고 하는 안이한 마음은 결코 불심(佛心)이 아닙니다. 상(相:성과주의)에 빠지면 서두르게 됩니다. 진정한 불사는 가르침에 의한 불자 자신들의 신앙심으로 이루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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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자가 바쁘다는 이유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불자신앙은 물질과 시간, 감각적인 것에 대한 자기절제와 세속적 즐거움〔쾌락〕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양보와 희생을 감수해야 지켜지고 성장해 갑니다.
2) 그러므로 불자는 삶의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여 생활에 우선순위의 질서를 세우면 日常이 마냥 바쁜 것만은 아니고, 시간이 없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자기정리 없이 닥치는 대로 살다보니 하는 일없이 바쁘게 되어 정작 해야할 일은 못하게 되고 결국 세월만 허송하고 맙니다.
3) 또 피곤한 몸을 쉬느라고 법회〔절〕에 못 간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휴식은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불자는 신앙생활〔법회동참〕을 통해 피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법회동참〔청법수행〕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불자는 일상생활의 순서를 절도있고 규모있게 짜서 쉬는 날이면 온 가족이 함께 법회 가는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자발적인 마음이 미흡할 때는 가족의 의무사항으로라도 실천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세속적인 쾌락과 불자의 신앙생활은 양립할 수 없고, 다 누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자는 진리에 대한 남다른 신념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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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인은 삶에 쫓겨 거의 누구나 피곤해 합니다. 그러므로 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힘을 부처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도록, 결혼식 등 축일행사는 가능한 법회가 열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피해 선택합니다.
2) 본래 결혼식은 밤의 축전으로 치러져 왔기에 평일 오후 퇴근 무렵에 식을 올려도 무방합니다. 하객들이 하루일과를 마친 퇴근시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하여 편안하게 축하하고 저녁 접대를 받으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을 것입니다.
3) 우리 불자들이 이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평일이면 5일이라는 넉넉한 날짜가 있어서 주말이나 공휴일의 의례적인 겹치기 인사를 한꺼번에 몰아서 하지 않아도 될 것이므로 진정한 축하의 뜻을 차분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의 혼례식을 가족이 다니는 절에서 하면 부부가 일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의지처가 됩니다. 새로운 풍속도가 될 것입니다. |
1) 또한 사회지도층에 있는 재가불자들과 불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법사나 불교학자 등의 재가불자들이 가족과 함께 매주 법회에 동참하여 솔선수범으로 청법수행을 닦아 신앙심을 키워 가야합니다. 또 불자로서 사회적인 활동이 클수록 부처님 앞에 자주 서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진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은 불자의 본분사입니다.
2) 물론 집에서 혼자 수행할 수도 있겠지만 대승의 보리도를 닦는 사람은 항상 대중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수행이전에 사회지도자로서의 기본요건이기도 합니다.
3) 또한 아직까지 우리 국민들 생각 속에는 보이지 않는 티끌처럼 미세한 찌꺼기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가 남긴 억불훼불의 잔재입니다. 이 불행한 찌꺼기를 말끔하게 씻어내기 위해서는 지식인 재가불자들과 사회지도층에 있는 재가불자들의 용맹정진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오늘의 대한민국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아직까지 조선시대 억불훼불의 미망(迷妄)이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통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암울하게 우리불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들― 사명감의 결여와 무책임, 역사의식과 봉사헌신의 희박, 명예를 앞세운 세속주의, 오류와 오해, 비뚤어진 관행과 관습, 무의식 가운데 흐르는 자괴와 열등감, 죄의식과 업타령(신세한탄), 이기주의와 사행심…, 등등. 이런 것들을 이제 남김없이 내다버려야 합니다.
5)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여러 운동들, 이미 불교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만 잘 수행하면 따로 운동을 벌일 필요도 없습니다. 마치 불교에 없는 것을 보충이라도 하는 듯 한 작금의 무수한 운동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금덩이는 모르고 남이 갖고 있는 돌덩이를 취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무가보(無價寶)의 보물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쓰지 않아서 없던 것으로 되었지 실제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의 요구사항과 필요사항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불교의 본분사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재가의 사회지도층 불자들은 예리한 눈과 佛法에 대한 절실한 책임감으로 우리들 의식에 드리워진 어둠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앞장서는 오늘의 보현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7) 이 시대의 보현보살을 자임(自任)한 불교지성인들과 사회지도자들은 건실한 신앙생활로 불자대중 앞에 우뚝 서서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코끼리처럼 비불교적인 일체의 어둠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남김없이 소탕하는 일에 용기있게 나서야 합니다.
8) 우리나라의 모든 불자들이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할 때 합장하여 경건히 공양기도를 올린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식 식당작법인「대자대비 부처님, 크신은혜 이공양, 일체중생 발보리, 마하반야바라밀」의 기도를 하고 공양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보면 식사에 대한 국민들의 자세와 분위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점도 사회지도층 불자들이 앞장서면 파급효과가 한 층 클 것으로 봅니다. 아주 작은 일부터 말입니다.
9)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사회와 인류의 지도이념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지성인 불자들의 대중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꼭 이루어져야 함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불교에 대한 호감정도나 은둔에 가까운 수행 - 이런 나홀로의 신앙수준으로는 결코 부처님 대비구세의 원력바다에 뛰어 들 수가 없습니다. 또한 불자를 떠난 지식인으로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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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침내 우리한국의 이천만 불자들이 매주 법회 날이 되면 옷을 차려입고 법회 가느라 거리마다 골짜기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는 의당 우리 모두가 대각으로 가는 길〔大道〕이며 구국구세의 길이매, 역사를 빛낼 대한민국시대 불교의 광작불사입니다. 불자의 믿음〔信仰〕은 부처님의 대각이며 불자의 최우선 불사는 중생구제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자면 무엇보다 신앙생활의 원칙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시간 있으면 법회(절)에 가고 바쁘면 못 간다는 취미생활 수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취미활동 정도의 수준으로 여긴다면, 眞理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인격을 심화시킬 수 없으며, 도저히 불성의 구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불자가 되어서 생사의 어둠을 벗어날 수 없고, 마침내 죽어야 하는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고 만다면 本無生死의 佛法은 누가 증거해야 합니까.
3) 바야흐르 이제 절에서는 ‘매주 정기법회’를 서둘러 개설해야 하고, 재가에서는 신앙생활의 자세를 하루바삐 확립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모든 불자들이 청법수행으로 불심을 키워 보살행으로 뻗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종단 제일의 불사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이나 지도자에게는 미래안이 최우선 요건입니다. 우리 종단은 무비의 미래안이 있어야 하고 종단의 지도자인 선지식들은 선견지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나라 이민족의 복이고 인류의 복이 될 것입니다. |
1) 이 불사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각 절의 주지가 사명감과 원력으로 앞장서서 정기법회를 개설하여 상설하는 것이고, 여의치 못할 때는 종책으로 뒷받침하고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종단지도자들이 매주 정기법회 개설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만 인식한다면 여러 가지 방안이 있을 것입니다.
2) 이와 같이 하여 각 절마다 법회를 열면 처음에는 다소 미흡하더라도 세월을 통해 꾸준하게 성장할 것이고, 나아가 이 일이야말로 한국불교의 진정한 ‘중흥․중창’의 발전이 될 것이라는 것은 누누이 밝힌 대로입니다.
3) 한국불교의 신앙심을 총체적으로 강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과서가 중요합니다. 반야지혜의 교과서가 금강경일진데 행원실천의 교과서는 화엄경의 별행본인 ‘보현행원품’이 되어야 합니다. 반야지혜나 대원대행의 출처가 다른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이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우리 조계종 소의경전으로 보현행원품을 추가하여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게 해야 함을 간곡히 권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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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학자들이 각 종교의 특색에 대해서, 사상이 두드러진 종교와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나누는데, 불교는 사상과 신앙을 동시에 잘 갖추고 있는 특출한 종교라고 말합니다. 2) 불교의 이 뛰어난 특장(特長)을 잘 살리고 발휘하기 위해서는 법회를 통해서 불자들을 끝없이 깨우쳐 자각생명(自覺生命)의 무한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종단이 나서서 불자들을 인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3) 또「설법․청법」의 정기법회를 통해 풍부한 불교용어와 어휘를 마음껏 써야합니다. 이를 통해 청법자들의 생각은 점점 깊어집니다. 출가자들은 한층 깊은 신심과 높은 사명감으로 법의 중심이 되고 증거자가 될 것이며, 재가자들은 간절한 신앙심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이 땅의 보살이 되어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좋은 말도 우리가 쓰지 않아 남이 쓰고 있는 것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본래의 뜻을 왜곡한 채…. 언어를 빼앗김은 혼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제 법회를 통해서 불교의 언어를 빛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정신이 섬광처럼 퍼져나갑니다.
4) 나아가 어린이와 청소년 법회도 동시에 활성화될 것입니다. 정기적인 일반법회가 없이 다만 어린이 포교와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만 강조하여 따로 법회를 연다해도 곧 한계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성인들을 위한 정기법회가 밑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 우리종단은 이 세기적인 광작불사를 성취하는데 제도적으로 현실적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랑스런 전통에 뿌리를 두었고, 현실적으로 좋은 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또한 미래불교의 밝은 청사진을 내 보일 수 있는 인재들이 곳곳에 가득합니다. 이로부터 조계종단은 우리 대한민국과 세계의 빛이자 희망이고 자부심이 될 것입니다. |
신앙심〔信心〕을 통해 해결 가능 1) 종단이나 승단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일일이 법을 만들거나 무슨 운동을 하거나 서로 삿대질을 하는 것은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일일뿐 아니라 몹시 볼썽사나운 일입니다. 더욱이나 각 계파간에 정략적인 흥정을 하거나 협상을 하는 것, 또는 성명을 발표하는 일련의 일 등, 모두 해서는 안될 매우 비불교적인 일이고 수행자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뒷골목의 작태입니다.
2) 여기서 가장 불교적인 문제 해결방법은 불자의 구분〔出家․在家〕을 막론하고 오로지 신앙심을 키우는 일입니다. 불교집안의 거의 모든 문제가 신앙심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으므로 신앙심만 키우면 저절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자명합니다.
3) 불도(佛徒)들 모두가「설법․청법」의 정기법회에 동참하여 꾸준히 신심을 키우면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회의 설법은 만병통치약입니다. 출가나 재가나 법 앞에서 순수하면 그 어떤 병도 다 낫습니다. 저절로 치유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규칙이나 법에만 의존한다면 이 또한 불교가 세속화되어 가는 무섭고 두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4) 그러기 위해서는 종단의 모든 기구를 적극 활용하여, 절의 ‘존재가치’는 법회가 최우선이 되도록 시급히 방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5) 모든 절에서 매주 정기법회를 열고 모든 종도가 청법수행에 동참하면 불교 각각의 분야가 동시에 살아나고 활성화됩니다. 삶이 윤택하고 풍성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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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단은 이 시대 불교도의 중심으로 두 가지 가치관을 동시에 추구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한 ‘변하는 가치관’의 추구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변해서 안 되는 ‘항구적 가치관’의 추구입니다.
2) 먼저 우리불교가 정작 변하지 말아야 할〔常〕항구적인 일은 절에서 정기적으로 법회를 상설하는 것과 양질〔無相〕의 봉사헌신, 등입니다. 특히 봉사헌신은 모든 수행자들의 본분으로 방편이나 수단으로 전락하면 큰 화를 초래합니다.
3) 또 인간진실에 대한 항구적인 추구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강화나 스승존경과 어른공경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믿음과 의리, 질서를 바탕으로 불교의 보살인격을 꾸준히 형성해 전통적인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밖에도 많습니다.
4) 변해야 할 것은 사찰운영 방식에 대한 개선입니다. 이는 결국 변하는 것〔無常〕이 진리라는 믿음아래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바꾸어야 할 것은 시급히 바꾸는 것이 진리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예를 든다면 문화재관람료 같은 일입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시대정신에 따라 바꾸어야 합니다. 목하 사찰운영에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5) 사실 그동안 절에서 문화재관람료를 받았어도 문화재에 대한 설명 한 마디나 그 어떤 배려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다수의 사람들 마음에 이미 다른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막는다고 끝까지 지켜질지는 의문입니다. 어쩌면 이 일은 ‘변해야 산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해남 미황사 같은 사찰운영방식이 하나의 새로운 예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종도 모두의 대결단으로 일대전기를 맞이해야 하는 각오가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변해야 할 것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6) 절을 찾는 국민들에게 예의를 갖추도록 배려하는 일도 절에서 해야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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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동안 한국불자들의 신앙심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여러 요인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불교신앙이 기복신앙으로 매도당했고, 외부로부터는 이교도들에 의해 우상숭배의 미신이라는 공격으로, 부처님에게로 향하는 뜨거운 마음을 자신있게 온전히 키울 수가 없었고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안팎의 공격은 한국불자들의 신앙심을 허약하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2) 이제 한국불교의 미래는 오로지 불자들의 신앙심 강화에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절감하고, 신앙생활을 통한 신심증장으로 모든 장애요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 불자가 법회충만(法喜充滿)의 용맹정진에 동참동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너도나도 불교의 앞날에 대해 마냥 걱정만 늘어놓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 또는 몇몇 고승이나 출가자들에게만 이 일을 맡겨 놓아서도 안 됩니다. 불자 모두가 신앙심을 키우는 신앙생활에 대한 통렬한 자성과 대각성 운동을 일으켜 신앙심을 강화해 나갈 때, 우리불교가 민족과 인류를 밝은 길로 인도하는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인류에게 빛이 되고 있는 저 티베트인들의 열렬한 신앙심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배우고 받아들여야 할 좋은 본보기라고 봅니다.
3) 이에 한국불교 발전의 비결(秘訣)은 바로 신심증장의 정기법회를 매주 일요일(또는 토요일)로 상설화하고, 불자들이「설법․청법」의 법회수행에 동참정진하는 일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한국불교의 목표는 보살군(菩薩群)의 양성입니다. 이에 스님들은 음풍농월의 신선이 되지 말아야 하고 신도들은 취미 어린 풍류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4) 이와 같이 각 절마다 성실하게 법회를 키워 가면 머지않아 한국불교가 총체적으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우리불교가 국가사회, 북한동포와 해외동포, 내지 세계인류에게 진리를 전할 수 있는 힘도 매주 법회를 시작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앞에 불을 보듯 볼 수 있도록 빨리 자각하고 크게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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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자들도 이 물질만능의 감각적인 세태의 흐름에 따라 육신을 건강하고 안락하게 보살펴야하겠지만 정신을 바로 세우는 신앙심강화는 그보다 더 우선적이고 화급한 일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불자들은 신앙심강화로「설법․청법」의 법회동참에 앞장서서 개인과 가정을 진리로 바꾸고, 사회와 나라에 연기․중도(緣起․中道)의 진리를 일깨워 국민정신을 확립하여 조국을 빛내고 인류와 지구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일이고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지엄하신 부촉이라고 봅니다.
3) 이제 사부대중의 대각성과 대분발이 있어야 부처님의 뜻과 부촉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인심은 종속되고 육창(六窓)의 원숭이는 마구 날뛰니 아아 때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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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라먼 깊은 산속 암자에서는 법회를 갖지를 못하던데 이건 우쩨된깁니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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