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의미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육체의 피를 흘려주셨다는 믿음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100% 우리 인류의 구원(영생)을 위해 예수님이 친히 육체의 피를
흘려주셨다고 믿고 있다.
과연 예수님의 육체의 피가 우리 죄를 씻어줄 수 있는 참 진리의 피가
되고 우리를 살려주는 능력의 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결단코 그렇지 않다!
왜냐면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로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구체적으로 명백히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하고 있다는 그 무식함을 죄의 본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맑은 양심과 이성을 들여다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창조공법을 알지 못하고 있는 그 무식이야말로
나를 사정없이 난타하고 감내하기 어려운 갈증과 무서운 고독과
질곡의 삶으로 속박하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 사실 내 존재의 정체성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삶이 삶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생지옥이었다. 머리는 텅텅 비고 양심은 더럽고
이성은 혼탁하여 내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 같은 내가 죽어서 황금종 울리는 저 하늘천당에
올라간다 한들 뭣하겠는가.
꿀꿀이 꽃돼지 떼들이 부르스 춤을 추는 난장판 밖에 더 되겠는가.
사람은 지성을 가진,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아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야지
돼지형상의 짐승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형상이어야 할 사람의 인생일생을 살펴보면 부자나 가난한 자나
신자나 불신자나 남여노소 모두가 고생하며 세상에 태어나고, 고생하며
살다가,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최후를 맞게 되니 어찌 아니 불쌍하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아니 허망하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늘상 잘났거나 못났거나 사람들이 불쌍하고 너무나 허무해서
절규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생지옥에 갇혀 있는 노예 같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라고 측은지심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흘려주셨다는 그 육체의
혈액 자체가 사실적으로 우리의 영혼과 이성과 양심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신 그 자유를
안겨주는 진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림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혈액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진리가 절대로
아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말씀(언어)으로서 그 말씀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 모르는 죄를 도말받아 자유를 얻게 되는데, 피는 피일 뿐,
우리에게 그 피가 진리는 커녕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성경에도 없는 희한한 원죄니 자범죄니를
연발하며 예수님의 피가 이미 그러한 우리죄를 대속하고 구원해
주셨다고 난리 법석을 떨어댄다.
완전히 너덜너덜하게 만신창이가 된 엉터리 구원관을 갖고 그것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뻔뻔하게 쓰고 있다. 예수님의 육체의 피가 하나님
모르는 우리죄를 도말해 준다고 믿다니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피는 아무 말도 없는데 말이다.
예수님의 육체의 피는 오늘의 재림 때 영적 피를 상징하는 비유였다.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도 오늘의 재림 때 영적 부활을 상징하는 비유였다.
예수님은 초림 때, 육체로 죽고 육체로 부활하셨으나, 이는 반드시
예수님이 새 이름으로 오늘날 다시 오시는 재림 때,
영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부활하심을 미리 비유법으로 보여주신 것일 뿐이다.
오늘날 재림 예수님이 영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부활 받는다는 것이
신실한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비유법으로 과거 초림 예수님이
육적으로 죽고 육적으로 부활 받음은 허상의 비본질인 것이다.
비본질은 껍데기이고 본질은 알맹이인 것이다.
하나님은 신령한 영이신데, 신령한 영(靈)이란 말씀(언어)을 뜻한다.
신령한 영(언어)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공법과 창조공정을 알려주는
참 진리이다(알맹이).
반면 예수님이 흘려주신 육체의 혈액은 그냥 아무 말이 없는 혈액일
뿐이다(껍데기). 껍데기 속에 알맹이를 감추어놓은 것이 성경인데,
성경문자는 육체의 예법으로 기록을 했기 때문에 껍데기라면,
그것을 영적으로 깨닫는다면 알맹이가 된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초림 때 보여주신 모든 육체의 예법과 그 육체의
행적들은 오늘날 재림 때 영적으로 이루실 것들에 대한 비유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따라서 말씀을 깨닫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급선무이며 하나님
및 예수님은 오직 그것을 촉구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열심과 감성만 고조되어 감성적으로 주여, 주여를 부르짖으며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으니, 하나님 및 예수님은 그것을 경멸하시며
그게 곧 죄라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을 심판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소리치는 자칭
의인들을 심판하신다. 육체의 혈액은 육체를 살게 하는 육체의 생명이
된다. 예수님은 곧 그 육체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죽어주셨다. 그리고 삼일만에 그 육체가 부활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의 중심에 있는 육체의 죽으심(피 흘리심)과
육체의 부활은 모두 비유이고
그 실체는 오늘의 재림 때 영의 죽으심이며 영의 부활하심이 된다.
그러면 오늘의 영의 죽으심은 무엇을 뜻하는가?
기성교단의 비유로 된 복음의 말씀(영)에서 죽어야 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오늘의 영의 부활하심은 무엇을 뜻하는가?
기성교단의 복음의 말씀에서는 죽었으니, 즉 과거 비유의 말씀에서는
죽었으니 이제 오늘날 그 비유의 말씀을 풀어낸 진리의 새 말씀으로
다시 사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흘리신 육체의 혈액으로 당장에 대속 받고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은 광신도의 어불성설이다.
엄청난 넌센스이고 에덴동산의 옛뱀(바울)이 남발해준 부도수표이다.
하나님이 엄금하신 뱀의 선악과이다.
예수님의 혈액으로 이미 구원을 다 받았다고 선포하는 바울신학에(선악과에)
환호하는 기성교단 사람들아! 구원을 그리 쉽게 생각하지 말라!
말씀의 참 뜻을 깨닫고자 하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저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으면 감이 입속으로 떨어질 줄 알지만 어림도 없는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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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