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저녁 한때는 시그널뮤직을
8월엔 입추와 처서가 들어있다. 절기로 처서가 지나면 식물들은 더 이상 성장세포를 만들지 않는다.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벼가 패고 꽃이 피는가 하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계엄군처럼 천변을
점령하던 억새 포기에도 배동이 선다. 동부콩알이 꼬투리 안에서
태아처럼 하얀 막을 뒤집어쓰고 영글어가는 것도 이때부터다.
8월엔 태양의 열기도 절정에 이른다. 한낮이면 얀정머리 없이 내리 꽂히는 햇볕으로
아스팔트는 불가마를 연상케 한다.
호박잎이 지열을 견디지 못해 축축 늘어지고, 연잎에 자발없이 올라앉은 청개구리는 턱밑 살가죽이 발랑거리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양력 8월은 음력으로 치면 7월에 해당된다.
이때쯤이면 농가에선 김매기와 김장배추 파종마저도 끝난 터라 한가롭다.
그래 어정칠월이라고도 한다. 강촌에 살던 두보선생이 종이에다 장기판을 그리는 늙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낚시 바늘을 만드는 모습을 시에 등장 시키던 때도 필경 어정칠월이었을 터이다.
나에게도 팔월은 책 읽기에 좋은 시절이다. 더위 때문에
쪽수가 많은 책보다는 단행본이 좋다. 지난여름엔 포리스트 카터가 쓴「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과
「다산 산문집」을 잼처 읽었다.
책을 읽다가 엉덩이가 의자에 마치면 마당으로 내려가 소나무 아래에 놓인 바위에 걸터앉는다.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울음을 듣거나
데크 난간 사이에서 열심히 그물을 짜는 거미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도 심심치 않다.녀석은 언제나 혼자다.
저 혼자서 진액을 방사하여 허공에다 그물을 짜는데 내 눈이 침침하여 녀석이 난간과 난간 사이를 바쁘게 오고가는 모습만 보인다.
그러나 한참후면 우산살 모양의 은색 그물이 완성될 것이다. 그 다음엔 한쪽 귀퉁이에서 죽은 듯 숨어 먹잇감이 걸려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 거미가 유독 외롭고 허기져 보이는 것은 늘 혼자서 행동하기 때문일 게다.
가끔 소나기가 지나가면 이건 예기치 못한 보너스다. 번개가 번쩍 섬광을 긋고
천둥이 지축을 흔들며 비바람을 몰고
기마병처럼 달려오면, 열어 놓았던 창문을 재빠르게 닫아야 한다. 빨래 줄에 걸린 수건이나 옷가지들도
어마지두 뛰어나가 걷어 들인다.
소나기는 빗방울이 굵다. 굵어서 생동감이 넘친다. 사선으로 내리 꽂히는 빗방울이 연잎을 두드리고
칸나 잎을 후려진다.
장독대 옆 봉숭아꽃과 배롱나무꽃이 송이채 떨어져 빗물을 타고 둥둥 떠내려간다.
바라만 보아도 장쾌한 카타르시스다.
소나기가 지나간 저녁엔 애호박전이 제격이다. 빗물에 씻긴 애호박을 따다 채치고, 부추도 한 줌 뜯어 넣고, 청양 고추는 잘게다져 감자전을 부친다.
이때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어 잔에 붓는다. 막걸리가 더 어울릴 터이나
20 리 산 밖으로 나갈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맥주로 대신한다.
맥주는 남편의 여름철 음료다. 노란 액체가 유리잔에 반쯤 차고 나머지는 거품이다.
입술에 거품을 묻히며 단숨에 들이키곤 따끈한 전을 젓가락으로 살살 뜯어 먹는다.
그런 후에는 오래된 오디오 뚜껑을 열고 나나무수쿠리의 음반을 꺼낸다. “사랑의 기쁨”과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태양의 계절”을 듣고 있으면 흑발에 검은 테 안경을 낀 그녀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소나기가 지나간 8월 저녁 한 때는 사운드트랙이나 배철수의 음악캠프로 들어가 시그널 뮤직을 듣는 것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 괜찮은 방법이다. 사람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때도 행복하지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시간을 보낼 때가 더 행복하다.
첫댓글 청향선생님 시그널뮤직은 살아 숨쉬는 심장의 고동소리요
온유하게 흐르다 멈추고 또 다시 흐르는 멜로요
떠날 날을 예견하듯 마지막 까지 몸서리 치게 떨어
짝을 찾는 8월의 매미 울음같은....~
야무지면서도 마음 차분하게 하는 마력같은 사운드 트랙...?
몇번을 읽고 또 읽어 봅니다.
비움의 시간을 간직하신 비개인 산야의 밤이 정겨워 보입니다
말씀 마따나 등화가친 (燈火可親) 벗하여 아름다운 삶이십니다.~
좋은글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던히도
무더운 여름이었지요
에어컨도
선풍기도
영 만족을 못하고
너무
힘든 여름이었습니다..
소소한
하루의 일과를 들려주시는 글이
더 없이 좋습니다..
자주는
힘드실테니
가끔
제게도 행복 이야기 들려주셨으면
하는 염치 입니다..
선생님의 행복한 시간을 엿보고 있으니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왜 음악 한곡을 차분하게 듣질 못하고 서성이고만 사는지?
아침 남편의 출근을 배웅하고 청소하고 빨래해 널어 놓고
차 한잔 마시며 들었던 엘피판의 직직대는 음악소리에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 시절 돌이켜보면 참으로 행복을 누린 순간이었는데
그때는 몰랐습니다 . 시간은 많은데도 한가롭지 못하게 보내는 하루 일상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시쥬. 늘 그립고 보고픈 선생님
곧 구절초가 활짝 피엤지요. 건강이 허락하신다면 이곳도 함 오시지요.
차도 마시고 저랑 저의방에서 뒹굴뒹굴 옛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재희님도 알미샘도
청원 샘도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 공감해 주시니
용기가 납니다.
청원 샘, 부럽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 배웅 할 수
있어서요.
엘피판이 직직 거리는 것도
매끈한 것보다 정겹지요.
입맛도 쓴게 더 좋아집니다.
80이니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몸이 먼저 알고 준비를 하네요.
조석으로 피부에 닿는
소슬한 바람결이 가을인가
싶어 좋습니다.
모두들 행복한 가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가늘었다 굴었다
그 질량을 가늠하지 못하게
변덕스런 마음은
탈로날 것 만 같습니다
한계절이
가고 오는
길목에서
늘 방황이라는
심란을 꿈틀거리게
할 그런 날인 듯 해서
별 다를 것 없는
아파트 창밖 세상을
드려다 봅니다
잘 지내다가
쉽게 생각을 던져
말이되여
아쉽게도 후회가 밀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다가
님의
삶의 원천을
줄세워 놓은 듯
가지런한 글에서
왜 달램을 느끼게 되었나
잘 모르면서
소심한 심사에 위안을
얻어봅니다
낯과 저녁을 꼭 분별없이
소리내지 않는 시간
고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셔 마주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영숙 샘!
고맙습니다.
모두 시를 주로 쓰는 분들이서
글 올리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가끔 한 번씩
제 글 읽어주시면
행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