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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관련하여 흥미로운 주장이 나와서 제가 나름대로 요약하여 소개할까 합니다.
한 마디로 요악하자면 주몽과 유리는 부자지간이 아니며, 주몽은 계루부의 고씨이고, 유리는 소노부의 해씨라는 겁니다. 게다가 권력 승계가 순탄치도 않았다라고 합니다.
출처는 카페 삼국지 도원결의입니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는 고주몽입니다. 주몽은 중국식 명칭이고, 당대 고구려인들은 추모대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대 기록은 동명성왕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자기를 따르던 부여의 지배층과 백성들을 데리고, 압록강 중류에 토착인과 결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그리고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지배 영역을 넓혀 갑니다. 이런 고구려의 건국 시조의 사망에 미스터리가 있다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구려에는 주몽의 후대왕들 중에 태조왕이 있습니다. 태조왕은 국력이 강성해져서 한나라 국경을 위협할 정도였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여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다집니다. 영토를 엄청나게 넓혔구요. 태조는 원래 국가 건국 시조에게 붙여주는 명칭인데, 후대왕에게 태조라는 칭호를 붙인 것은 분명 어색합니다. 그에게 붙은 태조의 의미는 아마 정권 교체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태조왕 등극 이전에 고구려 왕들 성씨가 해씨이고,그와 달리 태조왕은 고씨라는 점입니다. 고구려 2대왕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 모두 해씨였습니다. 6대왕 태조왕은 고씨였구요. 중국사서에는 소노부의 해씨에서 처음에는 왕이 나오다가 계루부 고씨가 왕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노부 세력의 권력 약화와 계루부 세력의 권력 강화로 해석될 부분입니다. 정권교체 이후 왕이 사망하자 계루부 세력들이 태조왕이라는 시호를 붙여줬다라는 거죠.
삼국사기 본기에는 태조왕의 전임왕 모본왕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기사를 보면 모본왕의 업적을 볼때 폭군으로 보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모본왕 2년에 군사를 일으켜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북서쪽 지역인 상곡, 어양, 태원등을 공략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서리 피해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줬다고 합니다. 고씨의 정권 교체 정당성을 확보를 위해 모본왕을 음해했던 거죠.
왕의 성씨가 바뀌는 것은 그리 보기 힘든 것은 아닙니다. 신라도 김씨, 박씨, 석씨의 임금들이 나옵니다. 삼국통일 이후 김씨가 독차지하다가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다시 박씨가 왕위를 잇기도 합니다.
재밌는 것은 주몽 즉 동명성왕은 성씨가 고씨라는 점입니다. 유리왕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해씨이구요. 삼국사기에서 주몽은 나라를 건국한지 18년째가 되던 해에 유리가 찾아옵니다. 유리를 태자로 봉하고, 주몽은 5개월 있다가 죽게 됩니다. 갑자기 없던 아들이 튀어나오고 아들의 등장 이후 5개월만에 죽다니 분명 작위적인 면이 있어 보입니다.
부친이 고씨이고, 아들이 해씨라는 것은 분명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즉, 주몽과 유리 사이에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유리가 주몽에게 반기라도 들었다라는 걸까요? 쿠데타로 의심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그렇지 않은 듯 합니다. 광개토왕비 기록과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주몽 재위 19년에 황룡국과 큰 전투가 일어납니다. 고구려군은 황룡국 수도 골천을 함락하면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 과정에서 주몽이 크게 다쳤고 소노부 실력자 유리가 권력 공백이 안생기게 태자 자리에 오릅니다. 5개월 뒤 주몽은 병사하구요. 이런 추측을 살피기 위해 고구려와 황룡국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이 홀본 동쪽에서 황룡의 머리에 올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비석에서는 단순히 동명성왕이 정사를 돌보는데 흥미가 없어서 동명성왕이 승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몽이 여러 차례 정복 전쟁을 합니다. 비류국을 정벌하면서 다물이라고 불렀지요. 정복 전쟁의 이유는 고조선 고토 수복을 위한 전쟁이라고 합니다. 고토 수복을 위해서 전쟁이 마무리 되지 않는 상황에서 포기하고 승천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죠. 황룡의 승천 의미가 적국의 장수나 왕의 머리를 밟는 것으로 묘사로 해석 여지도 있지만, 황룡국에서 왕의 승하 의미가 암시가 더 적당한 듯 합니다. 홀본 동쪽의 황룡국을 정벌하다가 그과정에 병을 얻었다라는 거죠.
황룡국과 전쟁으로 병을 얻은 주몽의 계루부는 세력이 약화되고, 상당한 세력을 보유한 유리를 중심으로한 소노부 권력 강화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같은 소노부 출신 백제 온조왕은 어떻게 된걸까요? 아마 주몽의 병을 얻자 소노부 내부에서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것이라 추측이 가능합니다. 같은 소노부이지만 유리가 온조를 축출한 거죠. 소노부 내부 다툼이 있었지만,유리를 중심으로 소노부는 권력 승계를 받습니다. 주몽을 대표하는 외부 세력인 계루부와 힘을 합쳐서 토착세력 중 가장 강했던 소노부가 힘을 합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은 익히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소노부 힘을 짐작케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주몽에서 유리로 순조로운 권력 이양은 아닌 듯 합니다. 일단 정책면에서 유리왕은 주몽과 달랐습니다. 주몽은 고토 회 복에 방점을 찍었지만, 유리는 고토 회복보다 현상 유지에 방점을 찍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국공신이자 주몽의 측근이자 권신이던 협보를 권력 핵심에서 쫓아냅니다. 그리고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6대 태조왕 때 이르러 주몽에 대해서 시조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은 유리왕과 주몽 사이에 권력 승계 과정이 순조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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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죄송합니다. 글을 요약하여 옮기는 과정에서 내용을 다소 빼먹는 실수를 했습니다.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그냥 우리가 평소 아는대로 주몽의 친아들 유리땜에 비류와 온조가 쪽박찬걸로 알면 편할텐데 왜 이렇게 불확실한 기록을 가지고 어렵게 파고 드는건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서양에서도 왕비가 외간남자랑 바람나서 왕의 친자식 아닌 사람이 왕이 되었다고 이러쿵저러쿵 해대는거 가십거리로 정도 밖에 취급 안하는데 말이죠...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것은 조금 심한말인것 같습니다. 물론 남겨진 사료도 적은 고대사이기 때문에 추정을 통한 역사복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나 고구려 백제의 경우 기록이 거의 없죠. 그렇지만 이러한 고구려 백제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고 우리의 역사를 위해 정말 글 한줄한줄을 심도깊게 해석하고 토론하고 하는 우리 학자분들 학생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듯해 보입니다. 이런식이라면 역사는 알아서 뭐하고 우리가 계승할 필요가 무어 있겠습니까
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시던가요
중국측 사료를 보면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서 주몽이 남긴 부러진 칼을 맞출때 피가 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을 유리가 주몽을 제거했다고 보는 역사학자도 있습니다. 유리의 등장과 더불어 주몽이 죽었기 때문이죠. 한편 다른 주장은 유리가 원래는 고씨이나 자신의 세력확장을 위해 해씨를 선택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변변한 지지세력이 없었던 유리는 주몽이 남하 하기 이전 최고세력가이던 송양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 송양의 성이 해씨입니다. 결국 유리가 해씨인것은 송양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입니다.
또 다른측면으로는 주몽 자체가 원해 해씨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주몽의 아버지를 해모수라 보는 것이죠. 그리고 당시 '주몽' 이라는 말 자체도 활을 잘쏘는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아닙니까? 당시의 '고'씨도 영웅에게 붙이는 성씨라는 주장이죠. 그래서 주몽은 원래 해씨이나 고구려 건국이후 고주몽으로 불리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리의 해씨설이 납득이가죠.
그리고 왕씨가 바뀐것하니 신라의 박,석,김 씨도 그렇지만 실제 이성계도 원래 고려왕입니다. 1년정도 고려왕하다가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것이죠. 이것이 바로 '역성혁명' 이죠. 어쩌면 위 고구려이야기에는 이성계의 예가 맞을 것 같습니다. 신라의 경우 원래가 박,석,김이 돌아가면서 왕을 하는체제였으니까요. 통일이후 김씨가 왕을 계속하다 말기에 박,석씨 왕도 나오고 끝내 견훤이 박씨왕인 경애왕 몰아내고 김씨왕인 경순왕을 세운것만 봐도 신라왕조 자체는 박,석,김씨면 힘있는 세력이 왕이 되는 체제였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