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차 김유정 소설 [정조] · 수필 [전차가 희극을 낳아] 문학여행기
글 : 권창순 (cafe daum : 춘천, 김유정소설문학여행) -2014. 1. 21
아 아! 내 뭘 보구 그랬던가? 검붉은 그 얼굴, 푸르딩딩하고 꺼칠한 그 입술, 그건 그렇다 하고 찝찔한 짠지냄새가 홱 끼치는 그리고 생후 목물 한 번도 못해봤을 듯싶은 때꼽 낀 그 몸둥아리는? 에잇 추해! 추해, 내 뭘 보구? 술이다. 술, 분명히 술의 작용이었다.
-김유정 소설 [정조] -전집 상권 283쪽
“어쩌자구 글쎄 행랑걸!”
“주둥아리 좀 못 닥쳐?”
하하하, 호호호! 하호하호, 호하호하!
경춘선의 색동역, 김유정역. 이른 아침부터 이 무슨 해괴한 말이며 웃음이란 말인가!
하하하, 호호호! 하호하호, 호하호하!
두 남녀가 남춘천역을 향해 달려가는 전동차를 보며 배꼽아 빠져라 웃는다.
“어쩌자구 글쎄 행랑걸!”
“주둥아리 좀 못 닥쳐?”
김유정역을 빠져나온 두 남녀는 조금 전과는 달리 곧 주먹다짐이라도 할 태세다. 한참을 서로 노려본다.
여자가 악을 쓴다.
“내가 그렇게 못나 보여요?”
남자가 색안경을 벗으며
“제 눈에 안경이지!”
하하하, 호호호! 하호하호, 호하호하!
두 남녀는 다시 배꼽아 빠져라 웃는다.
“너무 웃었으니 배가 고파!”
“아씨의 말대로 내가 어쩌자구 글쎄, 예요?”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그 주둥아리 좀 못 닥쳐?”
여자가 생글생글
“그럼 내가 반반하단 뜻인가요?”
하하하, 호호호! 하호하호, 호하호하!
두 남녀가 금병산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길을 걷는다. 소설 [정조]의 행랑어멈과 아씨의 서방님이다. 필자도 그들의 뒤를 따라 눈길을 걷는다. 그들의 정조와 나의 정조를 생각하며······.
“저곳이 우리들 사랑(?)이야기를 탄생시킨 고마우신 김유정 작가님의 생가인가?”
“이른 시간이라 문이 닫혀있네요.”
아픔도, 웃음도, 절망도, 희망도
촛불로 태우며 밤새워 썼네
유정을 위하여 따로 놓여 있던 길
문학의 길을 온순히 머리 숙이며
목숨 다 할 때까지 굳게 걸었네
눈물에 번지는 만무방들의 웃음을
웃음에 번지는 따라지들의 눈물을
누구보다 사랑한 작가 김 유 정
그들의 열린 언어로 소설을 써
지금 읽어도 생동감 넘치니
한국단편문학의 선구자, 김 유 정
알싸하고 향긋한 노란 동백꽃이네
-권창순 글 <詩로 읽는 김유정 생애>에서
돌담 너머로 한참이나 김유정문학촌을 구경하던 서방님과 행랑어멈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실레이야기길의 물음표길을 걷는다. 마을엔 사람발자국 보다 강아지발자국이 많다,
핸드폰을 꺼내어 강아지발자국을 찍는다.
친구들과 신나게 눈싸움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나를 보자 달려오는
우리 집 강아지
배고픈 내 마음
어떻게 알았을까!
하얀 털목도리 같은 눈 위에
만두, 만두 찍어 놓았다.
-권창순 디카동시 <먹고 싶은 만두발자국>
“이봐! 그래, 내가 준 200원으로 연 고뿌술집 잘되나?”
“잘 아시면서!”
“디카신가 뭔가 찍는다고 우리 뒤를 따라오는 저 놈 들으라고 그러는 게지 뭐!”
“서방님, 그냥 내버려두세요. 우리만 좋으면 그만이지요.”
가까이 오지 마!
아무것도 줄 수 없어!
나를 지켜야만 해!
아니야, 자주 놀러와!
실은 내 외로움이 돋아나
자꾸만 자란 것일 뿐이야!
-권창순 디카동시 <가시>
“서방님, 아씨를 생각하면 참 고소해요.”
“자네에게 200원을 챙겨주기 위한 내 연기력 말인가?”
아씨의 서방님 말을 들으니 뒤따라가던 필자도 한마디 안할 수 없다.
“고운 아씨를 두고 그래, 행랑어멈을! 에잇 추해!”
그러자 다짜고짜 달겨들어 필자의 멱살을 움켜쥔 서방님.
“이 자식아!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거 몰라서 그래!”
필자는 눈 속으로 처박히며 그래도 한마디를 보태지 않을 수 없기에
“그럼, 수하동 기생첩은? 청진동 여학생첩은?”
“이 자식아, 꽃 같은 계집만 계집인줄 알아!”
필자의 옆구리로 서방님의 발길이 날아든다.
“어이쿠!”
땅이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쏜다.
쭉쭉! 뻗어 나가라.
부지런히,
그러나 아주 천천히!
-권창순 디카詩 <땅이 쏘는 화살>
“대체 정조란 무어란 말인가?” 필자의 이 말에,
“흥! 정조란, 여자의 곧고 깨끗한 절개지! 뭐란 말이요?” 하고 행랑어멈이 돌아서서 눈을 흘긴다. 사실 소설 내용과는 다르지만,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럼 행랑어멈에게 정조가 있단 말이요?” 하고 물으니
“그래, 정조가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단 말입니까?” 삿대질까지 하며 당당하게 내게 묻는다.
“그래도 그게 저어······.”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도 목숨이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
아씨의 서방님도 한마디 보탠다. 그러기에 화가 나서
“아씨의 서방님은 행랑어멈처럼 만무방도 따라지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놈아! 어떻게든 뭐든지 해서 가족과 먹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
“그래서 행랑아범과 셋이 짜고 아씨를 골탕 먹인 건가요?”
“그건 네가 소설내용과 다른 각도에서 본 거지! 망할자식!”
작은 소나무 위
눈동물원을 아시나요?
-권창순 디카시 <눈동물원을 아시나요?>
“서방님, 알몸을 구워 놓았던 그때 기억나세요?”
“이봐, 내가 아씨와 자는 게 질투가 나서 그랬나?”
“그럼요. 밤중에 슬며시 들어가 끓는 고래에다 불을 쳐지폈지요.”
“잘했네! 잘했어!”
한심스러워 필자가 다시 한마디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미친 짓이지! 뭐가 잘했단 말입니까?”
“이놈아! 아까 말했잖아,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맛있어 보인다고!”
“에잇, 추해!”
“등장인물들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며 대추 놔라 밤 놔라 하는 네 놈이 더 추잡스럽구나.”
강아지 발자국이랑
산새, 고라니 발자국이랑
바람과 나무의 발자국이랑
산골 사람들의 발자국이랑
맛있고 재밌게 놀거라.
-권창순 디카詩 <산골에 두고 온 내 발자국>
저만치서 눈밭에 질질, 오줌을 싸고 있는 아씨의 서방님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행랑어멈에게 물었다.
“오늘 아범은 뭘 합니까?”
“뭘 하긴, 술 팔지요.”
“아범도 둘이 여기 온 걸 아니요?”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때요? 누가 누굴 잡아먹나요?”
“그러는 필자는 마누라가 여기 온 걸 알아요?”
“일이 없어 공치는 날이라, 몰래 왔으니 몰...라..요.”
“그러니까, 우습다는 거예요.”
“뭐가요?”
“김유정 소설의 등장인물들, 깔보는 게!”
“제가 뭘 깔 봐요. 제 삶의 활력을 얻을 뿐인데.”
“1930년대 만무방이요, 따라지인 내 삶을 동정하지도 깔깔대지도 말아요.”
“제가 뭘?”
“우린 목숨을 위해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늘에서 날아온 눈벌레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나무를 기어 오른다.
해 중천에 오기 전에
많이 많이 먹거라.
-권창순 디카詩 <해 중천에 오기 전에>
아씨의 서방님이 필자의 핸드폰을 어루만지다가
“이봐? 디카시는 써 뭐하려고 그래?”
“사물이 순간순간 툭, 던지는 말에 귀 기울이고 싶어서요. 실레마을에 오면 나무도 새도 구름도 바람도 툭, 하고 말을 건네지요.”
“소설의 수많은 등장인물들도 보이는가?”
“보이다 뿐입니까. 이 실레이야기길에서 같이 술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하지요.”
“오늘 우리처럼 말인가? 아까는 미안했네. 자, 막걸리 한 사발 하세나.”
뽀드득, 뽀오드득!
저 언덕 넘어
언제 오시려나!
-권창순 디카詩 <기다림>
얼큰하게 취한 김에 아씨의 서방님에게 속삭여 본다.
“아씨가 기다릴 텐데요?”
“그래, 나도 알지. 아씨가 소중한 것도!”
“그럼, 왜 행랑어멈에게!”
“이젠 행랑어멈이 아니라, 고뿌술집 안주인이지! 이젠 아범과 잘살면 좋겠어.”
“세상사 모든 사람들이 의식주의 안정 위에 도덕과 윤리와 평화를 바로 세우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 욕심 때문에 어려울 걸.”
“그래도 노력은 해야지 않겠어요?”
“하긴!”
산새랑 손을 잡고
꼬불꼬불 나무 위의 눈길을
오붓하게 걷고 싶다.
-권창순 디카詩 <산새랑 손을 잡고>
“우리 가끔은 저 나무 오솔길을 함께 걸어요. 아씨 미워말고!”
행랑어멈이, 아니 고뿌술집 [정조]의 안주인 부끄럽단 듯,
“저나 아범이나 다 살려고 그랬지, 누가 미워 그랬나요.”
“하긴요.”
“김유정 소설의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바보형 인물들이지만, 그래도 우린 목숨을 잘 지켜내어 여러분들에게 넘겨준 사람들이지요.”
“고맙습니다.”
“김유정 소설의 많은 독자들과 자주 만나길 바래요.”
“그럼 다음에 또······.”
우린 경춘선의 색동역인 김유정역에서 전동차를 타고 서울로 달린다. 종착역인 상봉역. 사람들이 내리자, 슬그머니 우리 셋만 태우고 청량리역까지 달린다.
문안으로 가는 전차가 기다리고 있다. 전차를 타니 계절은 바뀌어 첫여름의 해맑은 바람이 극히 육감적이다. 동대문으로 향하여 들어오는 전차노선 양편으로는 논밭이 늘여놓인 퍼언한 버덩으로 밤이 드니 언뜻 시골처럼 한가롭다.
교외로 산책을 다녀오는 깡뚱한 머리에 댕기를 들인 열 칠팔 되어 보이는 여학생과 말쑥한 세루양복을 입은 사각모가 전차를 탄다. 그러자 전차가 곧 희극을 낳는다.
차장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와서 하품을 한 번 더 치고는
“어디로 가십니까?”
“종로로 가요. 문안차 아직 끊어지지 않았지요?”
“네, 아직 멀었습니다.”
그리고는 2구표 두 장과 돈을 거슬러준 다음 돈가방을 등뒤로 슬쩍 젖혀 매고 차장대로 나오려 할 때였다.
손잡이에 의지하여 섰던 색시가 별안간
“아야!”
비명을 지르더니 목매 끌리는 송아지모양으로 차장에게 고개가 떨려가는 것이 아닌가. 사각모는 이 의외의 돌발사에 눈이 휘둥그래서 저도 소리를 같이 질러야 좋을지 어떨지 그것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덤덤히 서서는 색시와 차장을 번갈이 보고 있을 뿐이다.
-김유정 수필 [전차가 희극을 낳아] -전집 하권 202쪽
“하하하, 차장의 돈가방이 교묘하게도 색시 댕기의 한끝을 물고 잡아챘군!”
“호호호, 저 꿀먹은 사각모 놈 좀 봐!”
소설 [정조], 아씨의 서방님과 고뿌술집 안주인이 애들처럼 깔깔댄다.
첫 여름밤의 전차가 바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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