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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李允宰 (1888~1943)】 "평북 영변군 영변면 만세시위 주도, 조선어학회 조직 "
1888년 12월 24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우부면(右部面) 답곡리(沓谷里, 현 김해시 대성동)에서 아버지 이용준과 어머니 이임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호는 환산(桓山)·한산·한메·한뫼이며, 전명(前名)은 이여민(李䴡民)과 이검신(李儉臣)이다. 환산·한산은 우리나라 산이라는 뜻의 한자어이며, 한메·한뫼는 큰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지은 호다.
1894년에서 1905년까지 11년간 마을의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공부하며 사서삼경을 독파하였고, 재주가 비상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서당 시절 훈장으로부터 한국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천자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기뻐서 동무들과 춤을 추다가 도랑에 빠져 옷을 망친 일화가 있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김해공립보통학교를 다녔고, 1906년부터 1907년까지 대구의 계성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다시 김해공립보통학교에 복교하여 1908년 3월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08년 5월 답곡리에 위치한 함영(涵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09년에서 1911년까지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이 설립한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는 기독교 계통 학교인 마산 창신학교에 재직하면서 한글과 역사 과목을 가르쳤다.
1915년에서 1917년까지 3년간 일본 도쿄(東京)에 머물면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과를 다니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2년간 평북 영변(寧邊)에 있는 숭덕학교에서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 40여 장을 등사·배포한 사실 때문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7월경 풀려났다.
이후 일본 유학을 도모하였으나 전과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중국 유학을 결정하였다. 1921년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뒤, 독립운동가인 신채호(申采浩)를 찾아갔다. 1921년에서 1923년까지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다녔고, 신채호와 만나면서 민족주의 사학을 수용하는 등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신채호가 강조한 민족의 영웅, 상고사에 대한 사관, 그리고 일제에 대한 비판 등을 계승하였다. 1922년 흥사단에 입단청원서와 이력서를 내고 문답식에 합격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문답식은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위원장인 안창호(安昌浩)가 맡았다. 이후 안창호의 노선에 입각하여 흥사단·수양동우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여름 귀국하였고, 1924년 9월부터 1년간 오산학교 교원으로 한국어 과목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한글의 역사를 교육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강제로 해직되었다. 이후 서울로 와서 1925년 4월부터 1927년 3월까지 낙원동에 있던 협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 윤우열(尹又烈)을 도와주었으나, 1926년 윤우열이 이른바 ‘허무당(虛無黨) 선언서 배포 사건’으로 체포되자 일제 경찰은 그를 ‘갑종요시찰인’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경신학교·동덕여학교·연희전문학교·배재학교·중앙학교 등에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서울 신촌에 있는 연희전문학교를 갈 때는 단 5전의 전차 삯을 왜놈에게 주기 싫어서 걸어 다닌 일화를 남겼다. 특히 경신학교 교원 시절인 1933년과 1934년 사이에는 제자들에게 민족의 얼을 지녀야 나라와 국어도 지킬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자신은 독립투쟁의 전선에 매진하다가 감옥에서 죽게 되더라도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고 하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 독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1930년 10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동아일보』에 「성웅 이순신」을 43회 연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연재물은 1931년 9월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성웅 이순신』으로 출판되어 초판이 모두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에 두 번째 판을 발매하였으나, 다 팔리기도 전에 일제의 관헌이 “조선 사람에게 읽힐 것이 못된다”하여 발매금지 처분을 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 『성웅 이순신』은 통문관에서 재발행되었다.
한편 중국 베이징 시절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뒤 1923년 국내로 돌아와서는 흥사단의 노선을 이은 수양동맹회·수양동우회·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과 1927년에는 수양동우회의 기관지인 『동광』에 「자조와 호조」, 「조선사람이거던」, 「우리의 수양운동(일)」, 「희망의 신년」이라는 글을 통해 개개인의 인격 혁명과 전민족의 단결을 통해 민족해방을 달성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는 안창호가 흥사단에서 제창한 대공주의(大公主義)와 맥을 통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일제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1937년 6월 7일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제는 “예전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살아왔던 자”로 결론지었다. 1938년 7월 29일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1년이 넘도록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도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다.
한편, 한글운동의 핵심인물로서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은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민족어 규범 수립이란 한글 맞춤법의 통일, 표준어의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을 말한다. 먼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에 참여하였다. 1930년부터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 수정위원, 정리위원으로 3년간 활동하였다. 한글맞춤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글에 한자를 넣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순국문으로 문자 생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한국어 표준어 사정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1월 조선어학회가 한국어의 표준어를 사정할 때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글』지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여 민족어 규범 수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4월에서 1937년 5월까지 직접 『한글』 11~45호의 편집을 맡아 발행하였다. 『한글』에 대한 출판비가 없을 경우, 자신의 사재를 털어 충당하거나 『문예독본』의 판권을 팔아 발행하였다. 1931년 『문예독본』 (상· 하)은 나라와 국어가 일제에게 강탈당한 시기에 중등 이상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과의 보습(補習)과 작문의 문범(文範)으로 쓰도록 만든 책이었다.
16만 어휘에 달하는 우리말의 뜻풀이를 제대로 한 민족어대사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10월 31일 이극로(李克魯)가 한글날에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31년 1월 6일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 간사에 선임되었고, 이후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 발생 전까지 우리말 주해 작업에 몰두하였다.
아울러 1933년 겨울부터 단독으로 중사전 규모의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시작하여 2년 동안 작업하였다. 단독으로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여 뜻풀이를 한 원고는 해방 뒤 사위 김병제가 유고(遺稿)를 보충하여 1947년 『표준 조선말사전』으로 출간된 이후, 1953년에는 9판까지 발행되었다. 이 사전은 조선어학회가 지은 『조선말 큰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국어사전 역할을 하였다.
한국어 강습 활동에도 많이 참여하였다. 1929년 9월에는 동아일보 주최의 한글 강연에 참가하였다. 동아일보사가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할 때 학생 계몽대가 사용할 한글 교재인 『한글공부』를 저술하여 제공하였다. 동아일보사는 이 교재를 1931년 30만부,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각각 60만 부씩 발행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동아일보사가 매년 주최하고 조선어학회가 후원한 조선어강습회에 참여하였다. 1931년 평안도의 선천·평양·정주에서, 1932년 함경도의 영흥·흥남·경성·선천·웅기·청진에서, 1933년에는 철원·홍원·부령 등지에서 한글 강연을 하였다. 1934년에도 한국어 강습회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1937년 6월에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한 결과,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1942년에는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한글 수호 운동이 민족독립운동임을 분명히 밝히며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 운동이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조선어학회의 동지들과 함께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탄압하였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2년 10월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일제 형사들로부터 매일 난타를 당한 것도 모자라 살아서 감옥에서 풀려나기 어려울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으며, 6번의 물고문을 당하였다. 결국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12월 8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잡지 『동광』에 수록된 이윤재의 글 [판형3] |
예심종결결정서(경성복심법원, 1939. 1. 12) [판형3] |
조선어표준어사정회 제2독회기념(봉청각, 1935. 8. 8, 앞줄 맨 왼쪽이 이윤재)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