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道 - 수평과 수직의식의 조화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의 마지막 전시회에서 길도(道) 자 글씨를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수평의 꼬리를 하늘로 길게 올린 글씨였는데 인생의 길이란 결국 하늘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90대에 남긴 그 글씨는 지금 친구의 병원에 걸려 있는 데 자주 가서 보곤 한다.
나는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꼬리를 하늘로 치올린 길 도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십자가는 수평과 수직의 교차를 보여 주는 데 그것은 수평의 세상에서 수평적 의식에만 매달려 살지 말고 수직으로 상승하는 자기 초월의 삶을 살라는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수평은 과거 현재 미래로 말해지는 크로노스적 시간 속에서 존재와 상관없이 공간 이동만 하고 있는 삶을 말한다. 그 의식권에서는 그가 예배당에 있건 시장 바닥에 있건 상관없다. 그것은 잠든 사람,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사람의 면모이다. 수직은 질적 변화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이다. 더 깊어지고 높아지는 차원이동이다. 애벌레의 수평에서 수직으로 상승하여 자기의 하늘을 나는 나비의 세계로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육체와 물질의식에서 영적인 의식으로의 깨어나 시간에서 영생으로 거듭나는 부활의식이다.
수평의 세계는 본능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다. 돈이 생기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의 동기가 지배한다. 그러나 수직의 세계는 그런 목적과 의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일이 좋고 행복해서 움직인다. 그 일이 나의 즐거움이고 하늘이 나에게 주신 천분이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꽃을 가꾸고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할동하는 순간의 순수한 기쁨 때문에 그 일을 한다. 그러나 죽지 못해서 억지로 기쁨 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인생이 괴롭다. 그들은 순간에 존재하지 못하고 그 일이 끝나는 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릴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의 의식권에 들어서 있다. 그들은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예수는 낳고 죽는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수평적 삶에 종지부를 찍으라는 의미에서 자기 부정의 상징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 24. 눅 9:23 참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개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 38)
자기 부정이란 욕망의 동기에 움직이는 삶의 방식에 대해 종언을 고하라는 뜻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 불안에 떨며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수평과 수직의 교차점, 가고 오는 지금 여기,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에 나를 세우라는 뜻이기도 하다. 삶의 모든 은총이 작열하는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다. 그것은 존재의 영역이요, 온전히 깨어 있는 각성의 상태다. 크로노스의 시간대에서 인간은 과거와 미래라는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다. 지금을 놓치는 일이 습관화 고정화 되어 있다 . 바로 이것이 습관이요 성격의 근간을 이룬다. 현재를 현재화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거듭남의 구원은 없다.
국어 시간에 영어공부하고 수학시간에 국어 공부하는 학생은 실력있는 학생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형태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에니어그램은 통찰해 주고 있다. 교회에 오면 집 생각, 집에 가면 교회 생각하는 식으로 살면 자기 초월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
에니어그램이 추구해온 영적 각성에 대한 지혜 역시 같은 내용이다. 인간의 성격이란 과거의 회한(가슴)과 미래의 불안과 염려(머리), 일과 소유에 대한 집착(장)에 대한 각자의 독특한 반응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수평의식이요, 이생에 대한 근심과 몸나에 묻혀 사는 인간의 보편적 의식이다. 바로 이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부활이란 지구적 공간과 시간의식에서 그리스도 의식( 왕, 제사장, 선지자)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이다. 그러나 상징이 타락할 때 교통 신호등 같은 사인으로 그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는 길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