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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형통을바라보며
시편 73:1-14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다윗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된 후 당장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즉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는 언약궤를 위한 장막을 따로 마련하고 그곳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이는 다윗이 얼마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만을 섬기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따로 구별된 장막 안에 놓이자 다윗은 아삽을 언약궤 앞에서 섬기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있게 하며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더라”(대상 16:37).
그러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3조를 짜서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섬기게 하였습니다.
[
1 다윗이 …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
2 아삽의 아들들은 … 아삽의 지휘 아래 왕의 명령을 따라 신령한 노래를 하며
3 여두둔에게 이르러서는 그의 아들들이 … 그의 아버지 여두둔의 지휘 아래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4 헤만에게 이르러는 그의 아들들이 …
6 … 다그들의아버지의지휘아래제금과비파와수금을잡아여호와의전에서노래하여하나님의전을섬겼으며, 아삽과여두둔과헤만은왕의지휘아래있었으니
7 …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명이라
](대상 25:1-7)
이처럼 아삽은 헤만과 여두둔(에단)과 함께 다윗이 세운 3조의 성가대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된 지휘자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의 거룩한 공동체의 영적 리더였고, 그가 지은 시는 시편 50편, 그리고 오늘 본문인 시편 73편부터 83편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 중, 열두 편이 아삽의 시입니다.
오늘 아삽의 시, 시편 73편은 아삽이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는 이 시를 지을 때 하나님께 크게 시험 든 상태에 있다가 극복합니다. 사실 아삽이 겪은 시험은 그의 삶 전체의 위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오해가 불현듯 그의 마음속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한번 들면 떠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향한 그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그는 믿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그의 오해를 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삽은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오해가 풀리면서 그는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충성하며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삽은 하나님을 향해 어떤 오해를 했으며, 그 오해는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
시편 73편을 원어로 보면, (아크)라는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본문은 그 단어에 의해 세 단락으로 나뉘어집니다. 개역개정에서는 그 단어를 “참으로” 또는 “실로”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1절에 “참으로”가 있고 13절에 “실로”, 그리고 18절에 “참으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단락은 1절에서 12절, 제 2 단락은 13절에서 17절, 그리고 마지막 단락은 18절부터 28절입니다.
그리고 저자 아삽이 자신의 깊은 깨달음을 표현한 단어는 개역개정에는 안 나오지만 원어에는 (아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영어 역본 중에는 NASB 가 “As for me”라고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 단어가 담긴 구절은 2절, 22절, 23절, 28절입니다.
2절,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
22절,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도다.”
23절, “내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28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리고 본문의 축은 17절입니다. 즉, 17절을 중심으로 아삽은 반전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절).
그리고 1절은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며, 아삽은 그 진리를 의심하였다가 다시 그 진리를 확증하고 붙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절은 시험을 이긴 자에게 더욱 분명한 영원한 진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도다”(1절).
사실, 개역개정은 1절을 약간 오역하였는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로서 “마음이 정결한 자”,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1절을 제대로 번역한다면 “참으로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 곧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시도다”라고 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어느 날 그 진리에 대해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삽이 보니 악인이 형통하고 마음이 정결한 참 이스라엘은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 곧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진리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이고, 그런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생기면서 마음이 힘들어진 것입니다. 2절부터 12절이 그가 오해하게 된 상황을 설명합니다.
[
2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도다. 내 믿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도다.
3 왜냐하면 내가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그런 교만한 자들에게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라.
4 그들은 마음에 갈등도 없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살아있을 때는 몸도 건강하고 강하다.
5 그들에게는 우리가 겪는 고난이 없고, 다른 사람들처럼 불행한 일들과 재앙도 일어나지 않는다.
6 그러므로 그들은 교만을 목걸이로 삼고 폭력을 옷으로 입고 있다.
7 그들의 굳어진 마음에는 악한 생각이 들어 있으며, 교만한 생각은 끝이 없다. 잘 먹고 살아서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나 있고, 그들의 소득은 그들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많다.
8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면 멸시하며, 거칠고 악한 말을 하고, 늘 거만한 태도로 말을 한다.
9 심지어 그들 입으로는 하나님과 하늘을 대적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악한 말과 영향력은 멀리 수많은 사람들에게 뻗쳐 나간다.
10 그러므로 허다한 무리들이 그들을 추종하고 따르며 심지어 주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자들마저 그들에게 물들어 악인의 편에 섰다.
11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뭘 알고 계신가?”라고 말한다.
12 그럼에도 이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산은 점점 더 늘어만 간다.
](시 73:2-12, 쉬운 성경 부분 참조)
반면에 아삽은 자신의 형편을 돌아보고 비참을 느낍니다. 그는 악인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도리어 가난하고 힘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4절).
아삽은 까닭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과 재앙과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죄가 없는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조그마한 실수에도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악인들은 큰 죄악을 범해도 하나님의 징벌은 없고 형통하기만 하는데 자신은 조그마한 허물만 생겨도 어느새 하나님의 징계가 찾아오니 '아침마다' 매일 징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보아도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즉, 악인은 형통하고 행복하고 잘 지내는 반면, 마음이 깨끗하고 정직한 삶은 형통은커녕 너무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어느새 아삽은 푸념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을 깨끗이 하였단 말인가?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성실하게 살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13절).
이에 아삽은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도다”(1절)라는 진리에 대해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깊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에 부정적인 마음이 자리잡은 후 돌아보니 하나님을 섬겨온 삶은 피곤한 삶이었습니다. 힘써 섬기면 더 좋은 일이 생기기보다 도리어 더 요구가 많았고, 더 깨어 있어야 했고 종일 바빴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이 있는 것 같으면 양심의 가책이 생겼고, 주변의 주의 백성의 차가운 눈초리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주의 백성으로부터 쉼이 없는 감시와 압박을 받아온 것입니다. 분명히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더 많은 율법과 요구였습니다. 진심으로 주를 섬겼는데, 하나님은 더 요구하시고 이에 긴장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많이 피곤했고 불편했습니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형통의 복이 임할 줄 알고 참아왔습니다. 하지만 벌써 수십 년 신앙 생활하며 주를 섬겨왔는데 주변을 보니 악만 행하는 간교한 저 불신자들은 다들 잘 먹고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 되고 권력을 붙들고 있고 재산도 끝없이 많아지는 반면, 나는 여전히 근근이 살아가고 아이들도 탈이 많고 세상에서도 힘이 없고 언제나 약자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들어오자 아삽은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혼란과 괴로움과 시험에 빠져든 것입니다.
‘불의한 하나님, 주께 온 마음을 다하는 백성에게 신경 써 주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모순된 하나님, 약속을 안 지키시는 하나님, 나를 이용만 하시는 하나님!’
이제 아삽의 마음에 하나님이 이런 분으로 여겨지는데 어떻게 공중 앞에서, 후배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해 담대히, 그리고 자신 있게, 거짓 없이 그분을 전하며 그분을 송축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아삽은주의백성의공동체를이끄는영적지도자로서입장이곤란해졌습니다. 이제설교하기가불편합니다. 찬양을인도하는것이위선이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15절이말하는핵심입니다. 개역개정은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라”(15절)
고 번역했고, 쉬운 성경은 15절을
“만일 내가 이 일에 대해 말하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주의 백성들을 속였을지도 모릅니다”(쉬운 성경).
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이런 마음 상태에서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요, 모순된 분이라고 주의 백성에게 말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악한 영향을 끼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의심이 생겨난 상태에서 후배들에게, 자녀들에게, 청중에게,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저 깊은 마음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 입을 열면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말만 하게 될 텐데, 아! 참으로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삽은 양심에 따라 지휘자 자리를 내려 놓아야 할지 모릅니다. 더 이상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주를 송축하며 주의 영광을 전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16절을 보면, 아삽은 말로 다 표현 못할 심한 갈등과 고통을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진실한 메시지를 전합니까? 만일 진실하게 전하면 하나님을 욕하는 메시지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 공동체에서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삽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참으로 너무 힘든 갈등과 번민에 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이런 갈등과 번민의 때가 있었는지요? 없었다면 감사하기 바랍니다. 있었다면 그 오해를 극복하고 이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기 바랍니다.
아삽이 이러한 침체에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빠져 있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삽이 하나님을 오해한 그 기간 동안은 아삽에게는 가장 큰 위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그의 생명 및 삶 전체가 근본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대단히 큰 위기였습니다. 자칫 정신병자가 될 수도 있는 위기였고, 나아가 스스로 삶을 끊을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만일 이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아삽은 이제 앞으로 완전한 위선자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이스라엘 공동체를 떠나야 합니다. 사실 이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불신자가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분이요, 불의한 분으로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삶의 목표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데마처럼 이 세상의 영광을 찾기 위해 세상으로 달려갈 것입니다(참조, 딤후 4:10). 그렇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해 혀를 내두르며 그런 이상하고 악한 하나님을 믿는 어리석은 무리들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밖에 없고, 주를 믿는 자들을 비아냥 거리는 가장 악한 무리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오해가 풀리지 않는 사람은 결국 마귀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요, 아삽이 그러했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지도자가 이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떠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 편에서 보면 가룟 유다처럼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73편의 아삽의 위기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결코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절).
아삽은 일단 당장 그가 하던 일을 집어 던지지 못하고 찬양대 인도자로서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단 회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과정 가운데 주께서 그를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아삽은 한동안 위선의 상태로 있다가 결국 어딘가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아삽을 찾아오셨습니다. 예배가 진행되는 중에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소” 가운데 계신 주 하나님이 아삽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삽이 성소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셨습니까? 그 이유는 아삽은 1절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참된 이스라엘로서 마음이 정결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삽에게 선을 행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삽을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이는 아삽은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택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장래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극치 가운데 있는 아삽을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즉, 아삽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신부였기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오해를 친히 풀어주셨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 역시 고난을 당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예측처럼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리까지 내려갈 것 같은 위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도 고난 가운데서 아삽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갑자기 또 다른 큰 번민에 들어갑니다.
[
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는구나
](욥 21:7-13)
심지어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친히 준비했던 이사야의 마음을 지닌 세례 요한마저 큰 시험에 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왜 시험에 들었습니까?
마태복음 11장을 보니 오직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주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온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예수님께 그의 제자를 보내어 묻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
이때 세례 요한은 새언약에 속한 주의 백성과는 달리 복음의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은혜와 진리가 되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 살아온 그는 옥에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의 주인공이신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라면 악한 헤롯 왕이 제거되고 이 세상 나라들을 대표하는 로마 제국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일부는 성취된 것 같은데, 다 성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메시아로 인한 정의가 이 땅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악과 불의가 승리하고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가장하고 비참하게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참으로 예수님 당신이 구약에 언급된 모든 메시아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분이 맞습니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즉, 그는 당장 악인들이 이 땅에서 제거되고 착하고 선한 깨끗한 주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할 줄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4-6).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은 유대 민족의 정치적인 메시아나 경제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민족으로부터 택한 백성을 찾아내어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새언약의 시대를 여시기 위함임을 알려주십니다. 물론 세례 요한 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분명하게 알려주심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구약의 가장 영광스런 마지막 선지자였음을 재확인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은 지금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주의 백성의 죄를 대속하러 오셨고 그 이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모든 민족으로부터 주의 택한 백성을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위해 오셨음을 알려주면서 역사의 끝 부분에서 영원한 심판자로서의 다시 오실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이미와 아직의 위대한 새언약의 비밀을 세례요한으로서는 다 알 수 없어서 잠시 오해했지만, 예수님의 대답으로 요한은 즉시 믿음을 회복하고 기꺼이 순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마 11:10-14).
욥도 폭풍 가운데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주 하나님을 만나 뵙고 모든 오해가 풀리고 오직 믿음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1, 3, 5-6)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 역시 현재 삶 가운데 나타나는 불의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 더 악한 사람들이 큰 제국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현상은 왜 그런 것이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주께서 나타나셔서 대답하셨습니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심판으로 갚으시고 의인들에 대해서는 영원한 영광으로 보상하실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때는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것”(합 2:14)입니다. 그때는 썩어질 이 세상의 것으로는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모순되어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사랑을 믿고 사는 자만이 계속 의로운 길을 걸으며 주의 형상을 본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시면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온 세상을 공의로 다스릴 것을 믿고 주를 바라면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고 권하십니다. 이에 하박국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합 3:2-3).
[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마찬가지로 아삽 역시 “하나님의 성소”, 즉 성소의 실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의심과 오해가 풀렸습니다. 아삽 역시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2-28)
그러면 아합이 하나님께 오해가 풀린 답변은 무엇입니까? 악인들의 번영은 임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매우 길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고작 안개와 같은 이 세상의 짧은 기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의 번영이며 더 정확하게는 고작 꿈 같은 현상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돼지가 도살의 날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썩은 음식을 먹으며 잠시 동안 한없이 행복하게 느끼는 현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거지가 배가 고파서 낮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대궐에 왕처럼 앉아 신하들을 거느리며 건강하며 큰 잔치 상을 받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가장 비참하고 가장 배고프고 천한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악인들의 죄악의 상태가 더욱 깊어지고 악을 쌓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더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며 나아가 주의 심판의 때에 그들의 불의와 악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아삽은 악인들의 종말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아삽은 주의 은혜 때문에 주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만나 하늘의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즉, 악인은 임시적으로 형통하는 것 같아도 고작 짧은 인생이 전부라는 것이요 그 끝은 영원한 멸망이지만, 참 이스라엘인 주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는 거룩함을 향하여 정결한 자로서 훈련 받으면서 여러 힘든 기간이 있더라도 도리어 그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 그들의 성품과 영광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신자들의 형통, 악인들의 형통은 더욱 위험한 상태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교만해지게 되면서 끝없이 죄악을 쌓게 되며 그들의 양심은 화인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킬 준비가 늘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수치와 멸망이 아무 때든 임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멀리하고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자는 주께서 항상 함께 하시며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큰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한 하늘 나라의 기쁨과 의와 평강을 맛본 자들은 이 세상의 썩을 것에 대해 전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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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리라
](요일 2:15-17)
참된 신자들은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으로 헛되다는 것을 알기에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위해 사는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또한 그 영원한 것들은 장차 미래에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령으로 선물로 주어진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쉬지 않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적인 차원에서 임시적으로 모든 것이 모순되어 보이고 불의해 보여도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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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6-9)
아삽도, 욥도, 세례 요한도, 주의 제자들도, 지금 이 시대의 모든 주의 믿음의 백성들도 이 동일한 믿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억울한 일 가운데서도 주께서 반드시 보상하실 것을 알고 더욱 주를 믿고 순종하며 주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보상, 공적인 보상은 주의 재림의 때에 모든 천사들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바랍니다. 죽도록 충성하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 짧은 인생 가운데 우리를 주의 형상으로 빚어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미워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서, 세상의 썩을 것들 것 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참된 유익을 주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기 때문에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할 때마다 주지 않으신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 실재가 드러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말씀의 뜻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소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에 주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21)고 말씀하셨고, 이 의미는 예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 2:22)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속량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실 때 그들의 몸이 친히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면서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소인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2).
이에 예수님은 중보자시요 하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성소의 휘장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찢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성소 그 자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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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2)
이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잠시 서 보겠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억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보며 무한한 좌절과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주의 제자들은 다 도망쳤고 낙심으로 살아갔습니다. 이때 주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오해를 풀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잠시의 영광은 배신과 자살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잠시 실망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를 완전히 떠나지는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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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완전히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오해를 풀어주시고 말로 다 표현 못할 기쁨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40일을 이 땅에 계신 후 하늘로 승천하셔서 만유의 주와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즉,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가장 많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주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마저 물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지켜 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되면서 죽음도 다 바치는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며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사랑과 완전한 지혜의 경륜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인의 형통은 잠시입니다. 제자들의 실망은 사흘이면 족합니다. 당장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면서 모든 의심이 제거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이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아삽이기 때문에 억지로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은 이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불만과 의심을 해소해 주셨습니다. 그 답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악이 영원한 불못으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자비와 기회가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는 저 영원한 영광을 내다 보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코 앞의 썩을 사과보다는 잠시 후에 주어질 영원한 보화를 택할 줄 아는 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보여준 참된 믿음의 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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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이러한 자들은 쉬지 않고 영원한 가치 있는 것들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닮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빌 3:8).
이 시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답변을 들을 자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함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비한 평강과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입에서는 감사만 흘러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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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1-13)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악인의 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가련한 자들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미끄러운 곳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며, 성령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우리의 삶으로, 고백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함이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질문합니다. 네로 황제가 부럽습니까? 베드로가 부럽습니까? 돼지가 부럽습니까? 청아하고 정결하고 거룩하고 맑은 하늘의 백성이 부럽습니까?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린 아삽은 이제는 다른 그 어떤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주와 함께 하는 것만이 소중한 것이며 영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확인하고 고백합니다. 영원한 의미가 있는 삶과 보람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 고백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만일 주께서 성소에서 그를 만나주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삽을 찾아오셔서 오해를 풀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에 그는 무한한 감사 가운데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청중들과 후세들 앞에서 주를 송축하며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오늘 이 복된 말씀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량과 주의 부활하심을 기억하며 이제는 승천의 상태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주께 더욱 내 마음과 삶을 헌신하여 드리고자 하는 믿음으로 깊어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