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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2009년] 전 의원 이진연 씨 별세
← 이진연 전 의원
제 9, 10,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진연 전 의원이 12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 전 의원은 신민당 원내 수석부총무와 통일민주당 전라남도 도지부장, 국회 내무위 건설위 간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지난 1987년 제13대 대선을 앞두고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兩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통일민주당 분당 반대에 앞장섰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향학송 씨와 아들 상일(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 승철(사업) 씨 등 2남3녀와 사위 정순문(삼성전자 상무), 이중환(재독 사업)씨, 며느리 김미영(워싱턴 중앙일보 편집부장)씨 등이 있다. /조선
[2006년] 미소짓는 제퍼슨 70년만에 바뀐 5센트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새로운 5센트 짜리 니클동전이 공개됐습니다. 연방 조폐국 민트는 8000천만 달러 어치의 니켈동전을 오는 20일 부터 12개의 연방은행에 배포할 계획입니다. 새 동전은 지난 1800년에 그려진 제퍼슨 대통령의 초상화를 기초로 했으며 약간의 미소를 띤 모습에 제퍼슨 대통령이 쓴 “리버티” 친필이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2000년] ‘4ㆍ3사건 특별법’ 공포
제주 4·3 사건(濟州 4·3 事件)또는 제주 4·3 항쟁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시민항쟁과 그에 대한 미군정기때 군인과 경찰들(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에는 국군), 극우 반공단체들의 유혈진압을 가리키는 사건을 말한다.
제주 4·3 사건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나게된 배경에는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과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의 폭력에 대한 제주도 주민들의 반발등 여러 복합요소들로 얽힌것부터 시작된것이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2만5천 ~ 3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이 중에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포함되어 있으나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은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와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였다.
진상 규명 노력
제주 4.3학살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위키백과
[1976년] 여류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 사망
← 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불리는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1976년 1월 12일 사망했다. 86세였다. 생전에 단편소설 147편, 희곡 15편, 장편소설 90편 등 많은 작품을 남긴 크리스티의 소설은 전세계 50여개국 언어로 20억부가 넘게 팔려 ‘성경(Bible)’ 다음으로 독자수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작품 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열개의 인디언 인형’) ‘쥐덫’ ‘나일강의 죽음’ ‘오리엔트 특급 살인’ 등은 우리나라 독자들로부터도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명탐정 셜록 홈스를 낳은 작가 코넌 도일의 작풍에 실증주의와 심미주의를 결합시킨 것으로 평가받았다. 행동보다는 추리를 더 좋아했던 그의 작품 주인공 에르퀼 푸아로가 1975년작 ‘커튼’에서 죽자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그 해 6월 1일자 1면에 이 탐정의 부음 기사를 실었고, 뜨개질을 좋아하는 그녀의 또 다른 주인공인 독신 노처녀 제인 마플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제시카 플레처를 비롯해 그 뒤에 창조된 여성 탐정들의 모델이 됐다.
애거서는 외도가 심했던 첫 남편 아치볼드 크리스티와 이혼하고 14살 연하의 고고학자 맥스 맬로언과 재혼한 얼마 뒤 한 기자로부터 "왜 하필 고고학자와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때 크리스티가 한 대답은 이랬다. "고고학자 남편은 내가 늙어갈수록 나를 더 사랑할 테니까요."/조선
[1972년] 방글라데시 라만(Rahman, Mujibur) 초대 총리 취임
1972년 오늘, 독립운동 지도자 무지브 라만(Rahman, Mujibur, 1920~1975)이 방글라데시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한때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던 무지브 라만은 교도소에서 풀려난 지 4일만에 총리가 됐다.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 속에 총리에 취임한 라만은 3년 뒤인 1975년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을 하고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이 됐다. 방글라데시 건국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무지브 라만은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1975년 8월 15일 쿠데타로 피살됐다.
[1950년] 애치슨 미 국무장관, '애치슨라인' 발표
←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이른바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워싱턴 내셔널클럽에서 행한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연설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에 선언취소를 강력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흔히 '애치슨 라인'이라 불리우는 이 동아시아 방위선 설정으로 애치슨은 6.25를 발발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선언이 6.25 발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지만 전통주의자들은 이 연설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지 못한 미국의 결정적 실책이라고 보는 한편 일부 학자들은 이 연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음모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애치슨은 이 지탄이 평생 마음에 걸린 탓인지 1971년 타계하며 "불행한 한국에 '불안한 침묵'이 퍼져 가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대회
←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국민대회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년간의 미소신탁통치안이 가결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외신보도가 발표되자 1946년 1월 12일 독립정부의 수립을 갈망해 온 전국민은 이에 격분하여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를 열고 100여 개의 애국사회단체와 정당의 이름으로 신탁통치 반대성명을 전개했다.
특히 김구와 임시정부계는 반탁과 즉각독립을 내걸고 운동의 선두에 나섰으며 이러한 반탁운동은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좌익세력이 박헌영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를 표변하며 찬성에 나섬에 따라 좌우익의 분열이 시작됐다. 이후, 남한에서의 반탁운동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까지 극렬하게 전개됐다./조선
[1923년]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 김상옥 열사
의열단원 김상옥 열사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일경과 매일신문 기자 등 7명이 다치거나 사망했으며 건물 일부도 파괴됐다.
현장을 벗어난 김상옥은 사건 후 후암동의 친척집과 금호동의 안장사, 효제동의 이혜수 집, 홍제동의 동지 집을 전전하며 거처를 옮겼으나, 1월 22일 새벽, 홍제동에서 끈질기게 뒤쫓아온 경찰 수백 명에게 포위된 채 격전을 벌이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자신의 총으로 자결했다. 일경 15명을 살상한 뒤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만 11군데에 이를 정도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며 일제하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 가운데 가장 장렬하고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이었다.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어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1910년 경성영어학교에 입학해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기르며 물산장려운동과 야학운동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4월 비밀결사단체 혁신단을 조직,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듬해 8월 일본 총독 사이토 암살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의열단에 가입, 수차례 국내에 잠입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조선
[1904년] 동양화가 이응로(李應魯) 출생
1904년 1월 12일 태어남 / 1989년 1월 10일 죽음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 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습니다." - 이응로, 1989
이응로는 주로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동양화에 서양 추상회화의 기법을 도입한 화가이다. 호는 고암(顧庵)·죽사(竹士)이다. 그는 19세 때에 김규진 문하에서 서예와 사군자 등 문인화를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묵죽 墨竹>으로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여러 차례 입상했다. 1935~43년 그는 일본에 유학해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해 새로운 민족미술 발전에 힘썼다. 1958년에 파리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해오다가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주목을 받았다. 이해부터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묵화·서예 등을 가르쳤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재독(在獨) 작곡가 윤이상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고, 1977년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 납치음모사건에 연루되는 파란을 겪기도 했다.
[1896년] 미국 헨리 루이스 스미스 교수, 최초의 X레이 사진 촬영
톰슨은 외과에서의 X선의 비중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뢴트겐 및 X선을 외과에 응용해서 효과적인 진단방법을 외과의에게 제공한 사람들 이상으로 인류의 고통을 구하는데 공헌한 사람은 드물다."
당시 뢴트겐이 발견했던 현상을 미리 목격하고도 행운을 잡지 못했던 사람이 여럿 있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크룩스 방전관으로 연구를 하고 있던 스미스 교수는 방전관 근처의 서랍에 넣어두었던 사진건판이 자꾸 흐려지는 것을 보고 불평만 했을 뿐 그 원인을 알아보지 않았다. 또 뢴트겐을 자문했던 레나르트(1862-1947)도 방전관 주위의 발광현상을 목격했지만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당시 음극선 연구의 대가는 레나르트였다. 그는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후보로 올랐지만 X선을 발견한 뢴트겐에게 6대 16으로 밀렸다. X선 발견은 그만큼 의미가 컸던 것이다. /Google
[1876년] 미국의 소설가 런던(London, Jack) 출생
← Jack London in 1900
1876. 1. 12 ~ 1916. 1. 22
본명 John Griffith Chaney. 샌프란시스코 출생. 순회 점성술사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의붓아버지의 성인 런던을 따랐다. 극빈한 가정형편으로 신문배달, 통조림공장 직공, 바다표범잡이배의 선원 등 갖가지의 육체노동과 방랑으로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18세 때는 방랑 중에 붙잡혀 투옥된 일도 있다. 19세 때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다음해에 캘리포니아대학교에 들어가 반 년 남짓 다니면서 H.스펜서, C.R.다윈, K.마르크스, F.W.니체 등의 저서를 탐독하였다. 1897년 클론다이크 지방의 금광 발견으로 일어난 골드 러시에 끼어들었으나 병만 얻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후 우편국에 근무하면서 단편소설을 써서 몇몇 잡지에 발표하였고, 1900년에는 최초의 단편집 《이리의 아들》을 내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개를 주인공으로 하여 생존본능·야성·폭력 등이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세계를 묘사한 대표작 《황야의 절규 Call of the Wild》(1903), 니체풍(風)의 초인(超人)을 연상하게 하는 바다표범잡이배의 선장을 그린 《바다의 이리 The Sea Wolf》(1904), 《황야의 절규》와는 대조적인 《흰 엄니 White Fang》(1906), 자본가의 독점에 의한 파쇼화(化)를 그린 일종의 미래소설 《강철군화 The Iron Heel》(1908), 자살로 끝나는 한 작가의 기구한 생애를 그린 반자전적 소설 《마틴 이든 Martin Eden》(1909), 경제문제를 다룬 《달의 계곡 The Valley of the Moon》(1913) 등을 차례로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많은 소설과 평론 등의 발표로 돈과 명성을 얻었으나 본능적인 명예욕·금전욕과 자기의 주의·주장과의 모순에서 오는 갈등으로 말미암아 자살하였다. 그 외에도 복싱 선수의 비극을 그린 《시합 The Game》(1908), 꿈 이야기인 《아담 이전 Before Adam》(1906), 자전적 소설 《존 발리콘 John Barleycorn》(1913), 단편집 《생명애(生命愛) Love of Life》(1907), 평론집 《계급투쟁 The War of the Classes》(1905) 등이 있다.
한편 1904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익저미너》지의 종군기자로 조선에 와서 YMCA의 초청으로 그의 대표작 《황야의 절규》의 낭독회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군을 따라 러일전쟁을 취재하면서 조선에 대한 글들을 여러 곳에 기고하였는데, 1982년 프랑스에서 《조선사람 엿보기 La Coree en feu》란 제명으로 출판되었다(한국에서는 1995년 동명으로 도서출판 한울에서 발간). 이 책은 당시 서양인들의 조선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주변 강대국 러시아 ·일본 ·중국에 휩싸인 봉건 말기의 허약했던 조선의 모습을 담고 있어 사료적 ·교훈적 가치가 크다. /naver
[1822년] 내연기관 발명가 기계기술자 르누아르(Lenoir, Etienne) 출생
오늘날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의 동력원인 내연기관은 프랑스의 발명가 르누아르(Lenoir, Etienne, 1822.1.12-1900)에 의해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보편화 되기 시작하였다. 2행정 복동식 증기기관인 그의 발명품은 비록 에너지 효율은 떨어졌지만 강한 내구성에 의해 오랜기간 사용하여도 문제가 없을 만큼 우수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주로 작은 동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사용되었지만 1862년 개량된 그의 내연기관은 자동차에 장착되어 3시간동안 10km를 주행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1746년]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 출생
1746. 1. 12 ~ 1827. 2. 17
취리히에서 출생하였다. 취리히대학교에 재학 중 애국자단체에 소속되어 사회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769년 같은 단체원이던 안나와 결혼하였다. 1771년 노이호프에 농민학교를 세웠으나 실패한 후 사색과 저술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1798년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스위스로 밀려왔을 때 슈탄스에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를 돌보았다. 그후 부르크도르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워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실천하다가 만년에는 다시 노이호프로 돌아갔다.
당시의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은 정당한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민중에게 바른 지성의 힘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인간학교의 이상을 제안하였다.
또한 바른 지성의 힘을 체질화하기 위해서 형(形)·수(數)·어(語)의 개념을 직관적 경험을 통해서 부여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자발성·자기활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기초도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펼쳤다. 도덕적 도야의 근원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서 찾으면서 생활이 도야한다는 입장을 역설하였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전생애를 통하여 온갖 고경(苦境)을 참으면서 언제나 교사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외길을 걸었던 강한 실천성과, 교육에 의한 인류구제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확립하여 소상히 전개한 교육적 천재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새겨진 묘비명은 그의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 농민학교 운영에 실패한 후에 쓴 교육선언 《은자(隱者)의 황혼 Abendstunde eines Einsiedlers》(1780),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후의 교육소설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 Lienhard und Gertrud》(1781~1787), 그의 근본적인 철학적·인간학적 사상이 담긴 《인류발전에 있어서 자연의 운행에 대한 나의 탐구 Meine Nachforschungen uber den Gang der Natur in der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1797), 교육방법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한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1801) 등이 있다.
또한 만년의 저서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1826)에서는 교육이상으로서 전인적(全人的)·조화적 인간도야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저서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신(神)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그의 생활과 사상의 바탕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naver
[1665년] 프랑스의 수학자 페르마(Fermat, Pierre de) 사망
1601. 8. 17 ~ 1665. 1. 12
1601년에 툴루즈 근처 보몽드로마뉴(Beaumont-de-Lomagne)에서 부유한 피혁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30세에는 툴루즈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으며, 이어 1648년부터는 툴루즈 지방의회의 칙선의원(勅選議員)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직에 종사하였다. 수학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으나 여러 방면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으므로,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나중에 아이삭 뉴턴(Isaac Newton)이 미적분학에 응용하였던 극대값과 극소값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였다.
데카르트, 메르센 등과 서간을 통하여 연구 성과를 통보하였으며 생전에는 그 연구 내용을 공간(公刊)하지 않았다. 또 이 서간은 결론으로서 얻어진 정리(定理)만을 표시하고, 증명방법을 풀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의 수학자에게 많은 과제를 남기게 되어 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연구 성과 가운데 우선 미적분(微積分)에 관한 업적을 들 수 있다. 연속곡선(連續曲線)에 접선(接線)을 긋는 방법으로서 제기된 이 문제는 페르마를 ‘극값[極値]의 문제’로 유도하여 미분의 개념에 도달시킨 것이며,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이런 성과가 얻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이것과 관련하여 극대극소(極大極小)의 문제를 연구하고, 이를 광학(光學)에 응용하여 ‘최단 시간의 원리(페르마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또 빛의 반사 ·굴절의 법칙을 유도해냈고, 후년의 역학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하학 분야에서는 데카르트와는 별도로 해석기하학을 수립하여 3차원 공간을 취급하였다(데카르트는 2차원). 파스칼과의 서간에서는 확률을 논하여, 오늘날 파스칼과 함께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연구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수론(整數論) 분야이다. 디오판토스의 수론서(數論書)에 자극되어 관여하게 된 이 분야에서는 소수수열(素數數列:페르마형 소수)의 추측에서 시작하여, 페르마의 대정리(np-n의 정리), 4n+1형 소수에 관한 제곱수[平方數]의 합의 정리, n=2의 디오판토스방정식의 해답의 정리 등에서 이른바 ‘최후의 정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통찰력이 발휘되어 정수론 연구사상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페르마가 발견하고 스스로 증명하였다고 하는 정리를 증명하는 데 상금까지 붙고 후년의 수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수이론은 많이 발전하게 되었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교수인 앤드루 와일스(Andrew Wiles)는 1993년 6월 23일 영국 뉴턴연구소에서 행한 강연중 이 정리의 증명을 제시하였으며, 그뒤 발견된 결함은 자신의 제자이자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인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와의 공동연구로 1994년 10월 보완하였다. 그 내용이 1995년 《수학연보 Annals of Mathematics》에 발표되어, 페르마의 '최후의 정리'는 공식적으로 증명되었다. /naver
[1628년] 아동문학의 아버지 프랑스의 비평가 겸 동화작가 페로(Charles Perrault) 출생
1697년 발간된 한권의 동화집은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버전들로 양산되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집이 되었다.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 동화작가인 페로(1628.1.12~1703.5.15)에 의해 쓰여진 ‘거위 아주머니 이야기’라는 이 동화집은 그를 17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동화집에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신데렐라’를 비롯하여 빨간모자, 장화신은 고양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모두8가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1670년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 되어, ‘루이 대왕(大王)의 세기(1687)’라는 시를 통해 격렬한 신구논쟁의 불씨를 지펴 진보파를 대표하는 비평가로서도 이름을 높이기도 하였던 페로는 동시대 최고의 상상력이 동원된 이 동화집으로 인해 훗날 프랑스 아동문학의 아버지라고 까지 불리게 되었다.
그 밖에
2006년 한나라당 신임 원내대표로 이재오 의원이 당선
2006년 하지 순례 마지막날 300여명 압사
2006년 신상우 KBO총재 취임
2001년 휴렛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 윌리엄 휴렛 사망
1998년 유럽회의 19개 회원국 '인간복제금지' 의정서에 서명
1992년 '라인 모드 브라우저' 버전 1.1 등장
1990년 대한항공-아에로플로트, 서울-모스크바간 항로 취항키로 합의
1989년 재일교포 2세 이양지, 일본 아쿠타가와상(芥川賞) 수상
1989년 한국ㆍ소련 은행, 사상 첫 신용장 개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이 81년 국정연설에서 남북한당국최고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제의하고 김일성의 조건없는 서울 방문을 제의
1981년 부산대, 경북 의성군에서 1억년전 공룡 화석 발견
1980년 북한, 남북총리회담 서한으로 제의(대한민국 호칭 처음 사용)
1979년 환율인상 등 경제조치
1977년 박정희 대통령, 대북식량원조 제의
1973년 비상각의 ,정부조직법개정안 의결(공업진흥청, 공단관리청 신설)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 주월미군은 19만명이라고 발표
1962년 정부, 이식제한법 공포
1961년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조직
1960년 파리서 13개국 대서양경제회의 개최
1956년 여객선 태신호 삼천포서 화재. 65명 사망
1950년 서울 국제 전신전화국 개국
1949년 일본의 현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출생
1946년 UN안전보장이사회 발족
1942년 미국과 멕시코 공동방위위원회 설치
1931년 인도에 대폭동
1899년 스위스 화학자 뮐러 출생
1896년 미국 심리학자 데이빗 웩슬러 출생
1834년 영국의 해외 노예무역을 폐지한 영국의 정치가 그렌빌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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