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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삼마(겔48:35)-2021.8.22
북아메리카에 살던 인디언 중에 체로키라는 부족이 있는데 그들은 아주 특별한 성인식을 치른답니다. 소년들이 13세가 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냥하는 법과 정찰하는 법, 칼 쓰는 법과 낚시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13세가 되는 생일날 밤에 아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갑니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한번도 부모 곁을 떠난 적이 없지만 13세의 생일날 저녁이 되면 소년의 눈을 가리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숲속으로 데리고 간답니다. 그리고 그곳에 소년을 버려두고 옵니다. 그런 다음 소년은 부모와의 약속에 의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기 눈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풀게 됩니다.
소년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깊은 숲속에 홀로 버려짐을 당한 것이지요. 소년은 혼자 숲속에서 공포의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언제 달려들지 모를 동물을 떠오르며 밤을 새우는 것이지요.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날 때마다 소년은 공포의 밤을 혼자 버텨야 하지요. 그런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밤도 몇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숲속에 빛이 들어오지요. 그리고 그때 소년은 저 먼발치에 떨어져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활과 화살을 들고 서 있는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밤새도록 그 숲속에서 아들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소년은 몰랐지만 아버지는 그날 밤 그곳에서 아들과 함께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 바로 에스겔서의 주제와 비슷합니다. 에스겔서에 흐르는 사상이 있거든요. ‘여호와삼마’입니다. ‘여호와삼마’는 ‘거기에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양하게 나옵니다. 엘로힘(창조자), 여호와(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임마누엘, 아가페, 로고스, 아도나이, 여호와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라파, 여호와 살롬, 여호와 로이, 여호와 멜렉, 여호와 삼마 등 30여종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한 이름이 여호와삼마입니다.
에스겔서는 총 4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파트로 나누어집니다. 두 파트의 흐름이 분명히 나뉘어집니다. 1장부터 32장까지는 ‘여호와가 거기 계시지 않는다’는 내용이요, 33장부터 48장까지는 ‘하나님이 거기에도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장부터 32장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몰락과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데, 33장21절에 예루살렘의 함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에스겔이 바벨론에 사로잡힌 지 12년 10월5일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온 자가 알려준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선지자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언되어 왔지만 막상 그들에게 들린 멸망 소식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보해주십니다.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되는 날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36:33). 그리고 회복되는 성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삼마’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삼마’는 ‘거기’(there)라는 뜻이에요. 물론 그 성의 이름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회복된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지으신 거예요. 그 성읍을 완전히 회복해주신다는 말입니다.
(1)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에스겔서의 주제는 ‘여호와삼마’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삼마의 말씀을 들었던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포로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생각했을 텐데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하사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니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때문에 에스겔서는 절망으로 시작해서 희망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절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그들이 죄악으로 고난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자기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장-43장은 성전을 회복하신다는 내용이요, 44장-46장은 예배를 회복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47-48장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다 회복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성전, 새로운 법, 새로운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삼마’라고 부르게 될 성읍은 출입문이 동서남북으로 3개씩 12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된 것으로 보아 그 성읍은 온 이스라엘의 공동소유가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실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심(11:22-24)과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심(43:4)을 통하여 이후로는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언약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을 회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신다는 말과 같은 것이거든요. 그 성읍의 이름이 ‘여호와삼마’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이름이 ‘여호와삼마’가 아니라 성읍의 이름이 ‘여호와삼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호와삼마’의 공식적인 이름은 성읍의 이름이지 성전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전밖에도 계시는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삼가야 합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시켜 버리거든요. 그래서 마치 교회 오는 것을 하나님을 면회 오는 것 정도로 착각합니다. 우리 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성전에 갇혀 계신 하나님으로 착각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원론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장소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어떤 곳은 거룩하고 어떤 곳은 거룩하지 못하다는 말이지요. 마치 예배당은 거룩한 곳이요, 세상은 거룩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성스러운 사람과 속된 사람도 이렇게 구분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고,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것처럼 착각한다는 말이에요. 대부분 신앙의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있는 거지요. 성속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사람의 직분으로 구분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그 성읍이 ‘여호와삼마’가 되는 것은 성읍 중앙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48장8절에 보면, ‘....성소는 중앙에 있을지니’라고 말씀하거든요.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거주하는 성읍일지라도 반드시 성소는 중앙에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삶의 중앙에 계셔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그 성읍이 ‘여호와삼마’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든 곳이 ‘여호와삼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거기도 하나님은 계시지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모든 곳을 ‘여호와삼마’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 곳이나 성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논리와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이 거하실 처소에 있습니다. 그 처소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당신의 눈과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거든요.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왜냐면 성전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전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성전도 있거든요. 이른바 눈에 보이는 건물은 보이는 성전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는 불가시적인 성전이에요. 우리는 성령을 통해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성전 된 우리 안에 당신의 이름을 두고 계시는 것이에요. 우리와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말이지요.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성전 된 우리 심령을 깨끗하고 정결케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거하시는데 불편함이 없고 부족함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있는 그 어떤 곳도 ‘여호와삼마’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여호와삼마’는 ‘임마누엘’을 전제하거든요. ‘임마누엘’의 신앙 안에 있는 자가 거하는 곳은 어디나 ‘여호와삼마’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거룩한 처소라도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여호와삼마’는 ‘임마누엘’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구약 에스겔을 통해 알려주신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신약 성도들에게 알려주신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동일하신 하나님이시지요.
고린도전서 3장16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성전입니다. 결국 우리가 성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신다는 말이지요.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의 성전이 지어졌다는 말이에요(요2:19-21). 성전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성전이나 보이지 않는 성전이 다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호와삼마’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여호와삼마’의 이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여호와삼마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사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시지요.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살 때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지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떠나면 하나님도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악 중에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시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붙여주신 이름이에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에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십니다. 물론 자기 백성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채찍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범죄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이 자기 품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분이시거든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은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를 동원하여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이방나라를 이스라엘을 교육하는 채찍으로 사용하신 것이지요. 채찍으로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막대기와 몽둥이로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일정 기간의 징계가 풀리면 반드시 회복하십니다.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포로로 잡혀갈지라도 분명한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70년이라는 유기징역을 받은 셈이지요. 70년이 지나면 반드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언약하셨거든요.
70년이 지나면 무너졌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신앙을 회복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선민의 자존심을 회복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차이는 여러 가지나 궁극적인 차이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죄를 짓고, 이방인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처리하시는 방식이 다릅니다. 이방인들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별로 간섭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둔감하신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회복이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하나님이 민감하십니다. 그리고 징계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징계가 금방 풀립니다. 이스라엘의 징계는 회복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비록 자기 백성들이 범죄 할지라도 그냥 못 본 척 눈감아 주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들의 죄를 물어 오시고 죄의 값을 지불하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범죄 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았던 역사를 아십니까? 간단하게 사사시대를 보십시다.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 하나님은 주변 국가를 일으켜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때로는 메소보타미아, 모압, 가나안, 미디안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금방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회복해 주신 것이지요.
왕정시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두말 하지 않고 용서하셨어요. 그런데 이방인들이 범죄하면 달랐습니다. 그들을 다루시는 방법이 달랐던 거예요. 대부분 이방인들의 범죄는 회개의 기회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징계는 그 자체가 심판이에요. 한번 맞으면 일어서지 못하지요. 완전히 거꾸러뜨려 버리는 것이니까요. 한마디로 한방에 맞고 꺾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지상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의 결정적인 차이예요. 한마디로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이 다른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은 민족이에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민족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의 열조와 맺은 그 언약을 하나님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계셨던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그 언약을 그대로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지금은 힘들어도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내일의 소망이 없는 민족이나 개인은 가장 불쌍한 거예요. 그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복된 민족이지요. 그들은 비록 얻어맞을지라도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참 소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은 복된 자들인 거예요.
이스라엘은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내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잠잠히 70년간 옥고를 치르면 하나님이 이전보다 더 풍성한 것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바벨론 포로기간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곳에서 성실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이스라엘의 특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자기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포로로 잡혀간 이방 땅 바벨론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도 계시고, 바벨론에도 계심을 보게 될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도 계시고, 이스라엘 밖에도 계심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음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에요. 이른바 자기들의 하나님이 범우주적인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 기대하시는 가장 큰 섭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는 민족들인 거예요. 이른바 이스라엘의 특권인 셈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편견을 깨뜨려주시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범우주적인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거예요. 만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았다거나, 혹은 아무 존재감 없이 사라져 버렸다면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을 테지요. 어쩌면 하나님은 수많은 신들 중에 한 신에 불과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신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친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바벨론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친히 보여주시고, 바벨론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신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굳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이라는 이방인의 손에 붙이셔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을 사랑의 법으로 구원하시고, 바벨론의 죄악을 하나님의 공의로 다스리시는 이중적인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의 역사를 아무 이유 없이 사용하신 적은 없거든요.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며 여전히 그들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행악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그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절대적인 하나님이시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의 열조와 약속하신 언약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호와삼마’라는 의미는 결국 이스라엘을 완전히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사랑을 나타내신 말씀인 것입니다.
(3) 여호와삼마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호와삼마’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세상 어디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시편139편은 하나님의 성품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과 편재하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그 가운데 7절에서 12절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7절과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 눈으로 의식하는 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줄로 압니다. 혹은 자기 양심이 찔리는 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주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만드신 하나님이 운행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는 자는 복된 사람인 거예요.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적인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인 폐단이에요. 잘못된 율법적 편견이지요.
율법에 매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특정한 공간에 가두어버리거든요. 예컨대, 교회라는 공간, 혹은 기도원이라는 공간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려요. 하나님이 특정한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삼마’라는 의미도 그렇습니다. 도저히 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실 것 같았던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다는 말이에요. 혹은 특정한 시간에 가두어 놓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 시간이나 기도시간에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가두어 버립니다. 혹은 어떤 거룩한 모임 중에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보십시다. 이스라엘이 과거에 경험했던 불행한 역사는 어떤 것일까요? 물론 수없이 많은 주변으로부터 침입을 받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불행한 역사는 애굽의 종살이와 바벨론의 포로살이가 아니었을까요? 물론 애굽의 종살이와 바벨론의 포로살이는 체감도가 달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애굽에서 그들이 종살이 한 것은 운명적으로 받아 드렸을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려 430년 동안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살이를 해왔거든요. 그래서 운명처럼 받아 드리고 살았을는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바벨론에서의 포로살이는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풍성하게 받고 살았던 민족이었지요. 애굽에서 종살이만 하던 민족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분명히 체험했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었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와 행복을 직접 누려본 민족이에요. 그러나 그것도 잠간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지요. 바벨론 포로살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당한 징계였거든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다가 징계를 자처한 것이지요. 스스로 매를 벌었던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살이는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가난을 운명처럼 여기고 사는 가난한 사람과, 한 때 부를 누리다가 갑자기 가난에 처한 사람은 체감도 다르거든요. 그만큼 바벨론의 포로살이는 치명적인 고통의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고난을 유익되게 여기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바벨론의 포로됨이 징계가 아니라 평안이라고 말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여전히 그들에게 희망이 있는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에요. 이른바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셨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도 계셨던 거예요. 비록 ‘여호와삼마’가 장차 영적인 이스라엘을 위해 새롭게 건설될 하나님의 성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당시 그곳에서 그런 환상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바벨론에서 지금 포로살이를 할지라도 여전히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데 목적을 두셨던 것이에요.
그래서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의 이름을 확대해석하면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함께 계신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의 이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을 믿는 자는 복된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지요. 지금 당장 그들이 바벨론 포로살이를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행복한 거예요.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은 그들이 고통스러운 포로살이를 할지라도 꿈이 있는 것입니다. 장차 그들을 회복하실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다시 새롭게 회복하실 하나님이 그들을 새롭게 맞이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니까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땅을 주실 것이고, 새로운 성을 주실 것이며, 새로운 성전을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입니다. 이른바 새 언약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그들은 그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를 회고하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126:1)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대사를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대사가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출 바벨론이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현장에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은 자기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아는 자요,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항상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지금도 살아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이지요. 그 믿음 안에 사는 자는 항상 주님의 눈을 의식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비록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말입니다.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은 지금도 어디에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거기도 계시는 하나님이시지요. 비록 거기가 이스라엘이나, 바벨론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믿는 자가 있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이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편견은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만 사랑하는 줄 알았거든요. 잘못된 선민의식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자기들의 들러리로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백성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려고만 했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는 종종 이스라엘이 받은 복에 대해 자랑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 유대인들이 복을 받았다고 인용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수많은 복을 받은 민족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받은 복은 신령한 복이 아니에요. 영적인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구촌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은 빼어난 복을 받은 민족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신의 복을 주신 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적인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복이지요. 이른바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이스라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복음화율은 비참한 수준이에요. 통계상으로는 0.3%밖에 안된다 합니다.
사실 그 땅에서 시작된 복음이 왜 그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에 대해 성경은 이방인이 구원받는 기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거든요. 로마서1장25절과26절로 말씀하시기를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입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면 이스라엘의 눈먼 상태가 끝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영적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국적으로는 회복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받기로 작정한 영혼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잠시잠간 내어버려두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사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에스겔서는 소망의 신학이요, 에스겔 선지자는 소망의 선지자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만 바라보고 앙모하는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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