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선학들의 연구를 접할 때 의아하게 여겼던 것 가운데 하나가 검병두식이다. 당시도, 지금도 해당 유물을 검병두식이라 부르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일반적으로는 검파두식이라 부르고 있다.
검파두식이라 부르는 것이 착장되는 것은 검손잡이의 머리부 상단이다.
그런데 검손잡이는 한자로 조어할 때 '검병'이라 하지, '검파'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검병의 머리부 상단에 감입한 뒤 가죽끈으로 묶어 고정하는 문제의 유물은 전체 검병에 추가되는 것이기에 검병두식이라 해야하지, 검파두식이라 하면 잘못된 용어가 되는 것이다.
검파는 검병 가운데 파지를 위해 손으로 쥐는 부분, 즉, 검병의 파부 또는 악부에 가까운 말이지, 검병 전체를 지시하는 용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이 유물을 관례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검파두식이 아닌 검병두식이라 한다.
비파형동검, 노야묘-윤가촌식동검, 세형동검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은 검신, 검병, 칼집과 부속이 아닌 검병두식이다.
또한 검병두식은 조립식구조를 하고 있는 비파형동검-세형동검문화권에서 칼의 사용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최종 유물이다. 또한 동검을 구할 수 없던 곳에서는 석검에도 착장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검병두식이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근 30년 전 해당 연구를 시작할 때는 대부분 연구자들이 검신과 검병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검병에 해답이 있다는 분위기가 있어 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검병은 목병으로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고, 이러한 까닭에 십이대영자문화 남동구유형과 동대장자유형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는 청동검병이 드물게 확인된다.
반면 검병두식은 조립식구조의 비파형동검, 노야묘-윤가촌식동검, 세형동검을 사용한 지역에서는 해당 동검을 실용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부속재이다
따라서 검병보다는 검병두식이 관련 청동기양식과 문화의 계열적인 관계를 파악하는데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점이 있다.
검병두식에 대한 분석은 간단한 언급까지 포함하면, 근 30년 전까지 榧本龜生(1932), 秋山進午 선생(1968), 靳楓毅(1982), 武家昌(1990), 全榮來(1993), 李健茂(1995) 등이 있었다.
모두 인식의 층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연구들이지만, 요령과 한반도 전역, 비파형동검, 노야묘-윤가촌식동검, 세형동검 전반에서 확인되는 검병두식을 염두에 두고 있던 당시의 나에게는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지 않고는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를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榧本龜生 선생과 秋山進午 선생은 침형과 입두부식만을 언급하였고, 靳楓毅 선생은 비파형동검단계 요령지역의 것만을 분류하였으며, 武家昌 선생은 요동 북부지역의 최근 발견물만을, 李健茂 선생과 李康承 선생은 한반도지역에서 침형과 십자형 및 입두부식만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당시 연구로서는 유일하게 전영래 선생만이 동북아 전역의 검병두식을 종관하는 상세한 분류를 진행하였는데, 중요한 여러 형식이 중간 중간 빠져 있어 완전하지 않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를 기준으로 할 때 이건무 선생과 이강승 선생은 한반도의 검병두식을 침형과 십자형 및 입두부형의 세 형식으로만 분류하였는데, 이러한 분류로는 한반도내 검병두식의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었다.
예를들어, 細竹里式과 八達洞式 등은 십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세부적인 형태는 물론 제작과 관련된 기술성을, 貞栢洞式과 鳳陵里式, 竹東里式, 坪里洞式, 良洞里式 등은 다같이 입두부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세부적인 형태와 구조를 달리하고 있기에 별개의 형식으로 세분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또한 靳楓毅 선생은 요령지역 발견의 침형을 계측적 속성을 보조기준으로 하여 전체 다섯 개 형식으로 세분하고 있는데, 검병두식의 성격상 제작집단의 지역적인 편차에 따라 동형 내에서의 미세한 차이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뚜렷한 차이(양단부의 가공상태)를 기준으로 2~3개의 형식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근풍의 선생은 이외 십자형과 유사한 것을 모두 獸乳形으로 일괄하고 있는데, 그가 수유형으로 분류한 것 가운데는 建平 門前과 樺甸 西荒山屯과 같이, 형태는 물론 장착 방식을 달리하는 것들이 일괄되어 있다. 따라서 수유형 가운데 일부는 별개의 형식으로 분류할 필요가 있었다.
이외 최근 당시(1980~1990년대)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 지역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적지 않이 발견되고 있었는데, 이 자료들 가운데 기왕에 알려진 것들과 다른 속성을 보이고 있는 것들을(法庫 柏樹溝, 東遼 河北屯山, 大邱 林塘…) 새로운 형식으로 분류할 필요도 있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인식과 필요에 의해 2001년에 초안을 작성한 뒤, 2002년 박사학위논문에서 핵심 분류안과 이를 기초로 한 확장된 논의를 발표하였고, 2005년 동북아역사논총(당시 북방사논총)에 나 또한 몇 개의 형식을 추가하여 단독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검병두식 관련 최신의 연구로는 나 외 궁리수 선생의 연구가 있었는데, 나와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지만 한반도 지역 검병두식에 관한 편년관 등과 관련하여 참고할만 하다.
당시 발표한 논문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검병두식은 직접적으로는 검병, 간접적으로는 청동단검에 장착됨으로써 원래의 제작의도가 완전하게 실현되게끔 하는 부가물이다.
따라서 검병두식은 곧 검병과 검신의 존재를 의미한다. 반면 검신은 지역에 따라서는 그 자체가 위세성과 상징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하기에 검신이 곧 검병두식의 공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울러 검병두식은 아주 강한 실용성을 띄고 있다. 따라서 검병두식의 시공간적 양상을 통해 청동단검 뿐만 아니라 관련 유물군이 동일 시기 어느 지역에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또 실용화되었는가를 가늠하여 볼 수 있다.
검병두식의 시공간성은 요서(전10후~7세기)→요령(전6~5세기)→요령, 길림 남부(전4~3세기,요동중심)→한반도(전2~1중, 서북한 중심)→한반도(전1후~후1세기, 동남한중심)→남해안(후2세기)으로 변천하는데,
형식상으로는 왕팔개자형(A형)→십이대영자형(B형)→세죽리형,정백동형(KI,KII형)이 변천의 중심을 이루면서 기타 형식들이 지역적으로 국지적인 현상을 보이며 제작되는 특징을 보인다.
검병두식의 위와 같은 시공간적인 변천은 곧 관련 청동기문화의 주변 지역으로의 확산은 물론 이러한 청동기문화 중심의 변천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점은 검병두식과 함께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다뉴기하문경, 동모, 선형동부, 흑색마연장경호, 점토대토기, 석곽묘, 토광묘 등의 유물복합 또한 같은 범위 내로 변천하는 것을 통해서 입증된다.
이러한 변화상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기원전 5~4세기의 요동지역과 기원전 3~2세기 서북한과 서남한지역이 중심으로 부상하였다는 점인데, 전자는 십이대영자유형의 분화로 심양 일대에 정가와자유형이 출현하게 된 것과 연관이 있고, 후자는 고조선 중심의 이동과 연관이 있다.
이외 기원전 2~기원후 2세기 한반도 내 검병두식 중심의 이동은 고조선(위만조선 포함) 관련 집단의 파상적 이동과 재지집단의 문화적 변모, 자체 기술적 혁신과 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