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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 계곡(Basha River)의 아란두(Arandu) 마을을 기점으로 하는 초고룽마 빙하(Chogolungma Gl.)와 케로룽마 빙하(Kerolungma Gl.)를 다녀온 다음날인 2000년 6월1일에는 스카르두 강가의 버드나무 밑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다. 낚싯대는 한국에서 가지고 왔다.
이 곳 강과 개울에는 큼지막한 송어가 많이 산다. 무겁게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얼마나 훌륭한 현지 먹거리인가! 남극에 가면 펭귄을 잡아먹고 북극에 가면 물개를 잡아 식량으로 삼았다. 옛날에는 그랬다. 지금은 큰 일 날 소리지만. 그러나 송어는 그것과는 다르다.
▲ 알링빙하를 답사중인 필자. 빙하가 생긴 이후 기록상 세번째 탐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옆에서 구경하면서 멱을 감던 아이들 중 한 놈이 측은해 보였는지 자기 집에 가면 고기를 주겠단다. 물고기는 사양하고 홍차를 마시고 어둑해진 강물을 저벅저벅 건너 숙소로 돌아왔다.
93년 첫시도 때 제지당해 실패
▲ 카팔루에서 샤이욕, 살토로, 후세강이 합류하여 넓은 강폭이 형성된다.
반은 깨져나간 창문으로 차갑게 들이치는 바람소리와 현지인의 얘기소리로 귀가 멍할 지경이다. 차는 스카르두에서 강폭이 좁아지는 인더스강 상류를 향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거슬러 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린다. 그렇게 1 시간을 채 못 되게 갔을 때,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겼다. 짜증이 잔뜩 배어 나오는 인상의 차장에게 얘기하자 허연 눈만 부라리며 자리에 앉아 있으란다.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허리도 못 펼 지경이 되었다.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다.
▲ 깊은 산중에서의 재회는 기쁨과 새로운 활력을 준다.
파키스탄이라는 나라에는 시내에 공중화장실이 없다. 스카르두도 마찬가지다. 현지인 남자들은 구석진 곳에서 그냥 대소변을 해결한다. 긴 상의가 앉은 자세의 신체를 가려주어서인지 지나치는 사람이 보아도 무안한 표정이 없다.
다시 가벼워진 버스는 옛 소왕국이었던 키리스(Kiris)의 샤이욕(Shayok) 강이 인더스와 합류하는 지점에서 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지 않고 계속 2시간 정도 가면 파키스탄-인도 국경을 넘어 눈(Nun·7,135m), 쿤(Kun·7,087m)봉이 있는 카르길(Kargil)로 간다. 지금은 외국인 통제구역이다.
▲ 빚은 도자기를 닮은 아민브락 서벽. 거벽등반가들을 불러 모으는 미끼가 된다.
마을 주위 논밭의 밀은 6월 초순인데 벌써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이 길은 처음이 아니다. 비포장이던 길이 지금은 포장이 되었다. 1993년 트랑고타워 등반을 마치고 후세 계곡 입구의 마출루(Machulu) 마을로 갈 생각이었다. 행정구역 상으로 스카르두와는 다른 간체 지역(Ghanche District) 면소재지격인 카팔루의 경찰서에 저녁 때 도착했었다. 무조건 외국인은 안 되니 돌아가라는 말이 담당 경찰의 첫 마디였다. 인도국경과 멀지 않고 분쟁지역이라 민감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중앙정부의 관광에 관한 법규에는 분명 외국인 개방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스카르두를 출발하기 전 아무 문제가 없다는 확인을 받은 상태였다. 원정대의 정부연락관이 동행했으면 하는 후회가 앞섰다.
“NO!”만 외치는 경찰과 함께 지방의회 의원이자 이 지역 왕을 만나러 낯설고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 검문초소 두 곳의 쾅쾅거리는 철문을 지나 왕을 알현했다. 우리는 어두운 정원에 서 있었고 잠시 후에 키 큰 이가 발코니로 나왔다. 우리와 동행한 마출루 출신 쿡인 굴람이 자기네 말로 사정 얘기를 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군다.
▲ 마출루의 티벳 양식 모스크. 카팔루와 후세계곡 주민들은 티벳 라마교를 믿었으나 지금은 이슬람 시아파로 개종했다.
지프 대절해도 현지인 돈 받고 태워
3시간여만에 카팔루에 도착했다. 흙과 콘크리트로 무질서하게 지은 시장통에서 칸데(Kande)로 가는 대중교통(Cargo Jeep)을 찾지만 쉽지 않다. 각 계곡으로 들어가는 지프는 통상 오후 두세 시쯤에 시장에서 출발해 계곡의 마지막 마을에 저녁 무렵에 도착하도록 시간을 맞춘다. 주둔 군인이 많은 곳이라 장교의 도움으로 좋은 가격에 전세지프 흥정을 마치고 경찰서에 들러 신고를 했다. 씁쓸한 기억의 장소에서 오히려 즐거운 여행이 되라는 말까지 들었다. 뭔가 잘 되려는 모양이다.
▲ 낭마계곡 일원의 수많은 암봉 중 하나인 그레이트타워 북면.
운전사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길을 걷는 주민들을 화물칸에 태운다. 멈출 때마다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는다. 전에는 그 웃음이 단지 “비어 가는 차에 힘들게 걷는 사람들과 같이 가면 얼마나 좋겠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알고 나면 반갑지 않은 웃음이다. 운전사는 그들에게도 요금을 몰래, 그리고 반드시 받는다. 열에 아홉은 그렇다. 두 배의 장사를 하는 셈이다.
그 날 뒤에 탄 주민들은 다시 걸어야 했고, 이 좋지 않은 사건의 발생으로 후세를 향한 여행은 문제의 연속이었다. 이 계곡에서 가장 큰 마을인 마출루는 인도의 라닥(Ladakh)과 함께 티벳 라마교를 믿었었다. 지금은 이슬람교 시아파의 한 파인 누르 박시야(Nur Bakhshiya)파다.
언어 또한 고대 티벳어의 방언을 사용한다. 한가지 예로 ‘동쪽에서 온 사람’이란 뜻의 네팔의 셰르파(Sher-pa)족과 같이 후세 사람을 후세파(Hushe-pa)라고 한다. 마출루를 비롯하여 후세
▲ 브룸브라마에서 만난 영국인 트레커 사이먼. 장딴지에 난 종기가 곪아 결국 하산했다. 침봉과 암벽의 붕괴.
2시간 후 칸데 마을의 K-6 모텔에 도착해 늦은 식사를 간단하게 먹었다. 후세 마을을 거점으로 하는, 탐사에 필요한 식량배낭 하나를 창고에 맡기려고 주인에게 부탁했는데, 되돌아오는 말은 냉혹했다. 하루에 200루피를 지불하라고 한다. 결국 갔다 오는 동안 꾸준히 숙박료를 내라는 뜻이다. 할 수 없이 40kg이 넘는 배낭 2개를 야크처럼 지고 후세 강을 건너 민귈루(Mingyulu) 마을에서 낭마 계곡을 남쪽으로 내려와 언덕을 오른 곳의 바위 밑에 숨겼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일이란 한 번 틀어지면 등나무 줄기처럼 더 꼬이기 마련이다. 낭마 계곡 입구는 양쪽이 1,000여m의 바위협곡으로 좁다. 주니퍼, 버드나무, 야생장미들이 계곡 바닥에 자라고 있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으로 들수록 풍요로워진다.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간 나무다리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민귈루 주민들을 만났다. 그들을 도와 다리를 완성했다.
아민브락 북서면 보려고 설맹 각오
큰 버드나무숲이 우거지고 초원과 맑은 물이 있는 캠프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93년 원정 대행사인, 히말라야 트렉 앤 투어(Himalaya Trek & Tour)에 근무했던 샤비르(Shabir)씨를 만나 스파게티와 과일로 푸짐하게 저녁대접을 받고 내일 가야할 아민브락(Amin Brakk) 베이스캠프로 가는 정보도 들었다. 그는 지금 트랑고 어드벤처(Trango Adventure)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 달간 스위스 트레커들을 가이드하고 있다.
▲ 호숫가의 마셔브룸 베이스캠프. 알리가 준 ‘선물’인 이를 수장시킨 곳이다.
베이스캠프가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다. 힘껏 소리쳐 부르지만 대답이 없다. 아직 오지 않았나.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는다. 배낭을 두고 사면을 거슬러 오른 곳에서 그들의 대답과 뛰어내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힘이 솟는 것 같다. 한국에서 헤어진 지 한 달만에 이국의 땅, 아니 그렇게 그리던 산꾼들의 세상에서 재회했다. 장형원, 임성묵, 신문희 세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음에도 됫병 소주 하나를 들고 왔다. 오후에는 또 다른 팀인 안종릉, 문성욱도 도착했다. 이 두 사람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날 밤 여섯 명은 몇 잔의 소주에 취했다. 반병은 등정 축하주로 남겨두고-.
▲ 야크 젖을 짜는 후세 주민들. 가이드와 포터로 활동하기 전에는 유일한 수입원이다.
두 팀이 브락상 등반을 시작했다. 아민브락 빙하로 들어간다. 며칠간 눈이 내려 빙하는 잔설로 덮여 있다. 텐트에서 고글을 가져오지 않았다. 천으로 얼굴을 덮고 실눈을 가늘게 뜨고 아민브락 빙하 반대편의 설릉을 따라 올랐다. 북서면이 보일 때까지, 봉우리에 덮인 구름이 걷힐 때까지 올랐다. 옷을 뒤집어쓰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자 했던 북서벽은 등반으로서는 매력을 주지 못했다. 설맹의 고통을 한 번이라도 겪은 사람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날 밤은 눈물을 질질 흘렸다.
야크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초원을 따라 낭마 계곡 원두로 거슬러 올랐다. 온통 바위벽의 세계가 펼쳐진다. 낭마 빙하를 올라서자 발티스탄 피크(Baltistan Peak)라 불리던 K6(7,281m)의 폭넓은 남벽이 나타났다. 1970년 오스트리아대가 초등한 루트가 복잡하게 보인다. K6는 초등은 됐지만, 등산가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 같다.
적은 양으로 배불리는 현지 수제비
▲ 낭마계곡 초원지대의 야크떼.
그러나 지금은 세계 제2위 고봉 K2(8,611m)를 비롯하여 8,000m 거봉들이 밀집한 발토로 빙하에서 하행 캐러밴을 곤도고로 고개(Ghondogoro La·5,960m)를 넘어 후세로 내려오는 짧은 루트를 많이 이용한다. 이들 등반대와 트레커들의 증가와 더불어 수입이 늘어났고, 외국인 투자로 자가수력발전소와 상수도 시설이 생겼다.
마셔브룸 인(Maserbrum Inn)을 후세의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후세에 파견나와 있는 스모선수급 체격의 굴람 무하마드(Ghulam Muhammad)가 숙소로 찾아왔다. 장부에 등록하고 혼자 여행한다고 얘기하자 무조건 안 된다고 정색을 한다. 국경, 외국인 보호, 법규 등 지겹도록 들은 내용을 되풀이한다. 곤도고로 고개 가는 루트와 차락차 빙하(Tsarak Tsa 또는 Charakusa Gl.)쪽은 1999년부터 규정이 바뀌어 허가서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곳에는 가지 않을 것이며, 개방지역인 마셔브룸 빙하, 알링 빙하(Aling Gl.), 혼보로 빙하(Honboro Gl.)만 돌아보겠다고 해도 반드시 가이드와 포터를 데리고 가라는 엄명이다.
내일 출발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하니 이제는 여권과 비자에 문제가 있다고 물고 늘어진다. 밤늦게까지 입씨름을 하고 있는 차에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부르더니 그냥 1,000루피 정도 주면 될텐데 왜 고생하느냐고 되묻는다. 그런 일이야 쉬운 방법이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화를 내다가 달래다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혹시 내빼지나 않을까 이른 시각에 그가 찾아왔다. 결국 한 발씩 물러나 내가 원하는 고용조건에 그가 추천하는 가이드 겸 포터인 무하마드 알리를 고용하고 마을을 출발할 수 있었다.
속도를 내기 위해 알리에게 10kg 배낭을 주고 내가 18kg 배낭을 들쳐 메고 보리밭길 사이로 빠르게 앞서서 걷는다. 혼보로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후세 본류와 만나는 바로 위쪽에서 나무다리를 이용해 강 서안으로 건넜다. 구름으로 산군은 잘 보이고 않고, 마셔브룸 빙하로 들어가는 양쪽의 바위절벽이 서 있다. 돌담이 길게 쌓여 있고 모스크가 있는 웨숙(Wesuk)을 지나 알링 빙하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에 가로 걸린 통나무 다리를 건넌다.
마셔브룸 빙하 말단으로 들어가기 전의 버드나무 밑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캠프지(Parbisan)가 있다. 우리는 각자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나는 미리 준비한 마른 쌀로 죽을 끓이고, 알리는 고춧가루를 넣은 수제비를 해먹었다. 결국 원하지 않은 동반자 알리로부터 현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적은 양으로 푸짐하게 먹는 식단을 배웠다. 후에 대부분의 내 식사는 수제비였다.
하룻밤새 설표가 소 한 마리 먹어치워
잡석지대를 서쪽으로 가로질러 빙하 언덕을 오른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산사면을 오르는 양치기가 지나가고 60세는 되어 보이는 스위스 남자 트레커가 스톡을 짚고 돌덩이와 같은 몸을 움직여 내려온다. 뒤에 가이드와 포터가 여러 명 내려온다. 고소적응이 안되어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되돌아간다고 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자연 걸음은 빨라진다. 오른쪽 언덕 밑으로 마셔브룸 빙하의 모레인이 펼쳐진다. 지도와는 달리 캐시드럴 피크 남쪽의 드렌모 계곡(Drenmo Nala)의 빙하는 마셔브룸 빙하와 연결되지 않고 개울물이 되어 흘러 들어간다. 알리에게 오늘은 마셔브룸(7,821m)을 촬영하기에 좋은 곳에서 야영지를 잡자고 몇 번을 일러두었다. 하지만 비가 조금씩 계속 내리자 브룸브라마(Brumbrama·4,050m) 전의 언덕 사면이 가장 좋다며 야영을 재촉한다.
텐트를 치고 차를 마셨다. 마을에서 보았던 영국인 사이먼이 올라온다. 차를 건네고 사이먼 일행이 위쪽으로 올라가자 알리는 텐트 안에 들어가 코를 골며 잔다. 머리가 아프고 피곤한 모양이다. 구름이 잠깐 걷히는 일몰시간에 사이먼의 캠프지까지 여러 번 오르내렸다. 괘씸한 알리를 원망하며-.
산사면과 빙하 가장자리 언덕 사이의 좁은 풀밭을 오르자 넓은 풀밭이 나타난다. 초고스팡(Chogospang)이다. 갑자기 사이먼의 가이드가 언덕 사면에 무엇이 있다고 한다. 400m 정도 사면을 오른 곳에 검은 색 소 한 마리가 머리와 뼈만 앙상히 남아 있다. 살빛이 붉고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젯밤 설표(Snow Leopard)의 짓이란다. 이 계곡에는 아직도 곰과 설표가 많으며 겨울이면 산양이 먹이가 부족해 후세 마을까지 내려온다고 한다.
사이먼은 장딴지에 큰 종기가 곪아 터져 절룩거리며 걸었다. 그래서인지 한 마디 않는다. 미터피크(Mitre Peak·5,944m)에서 흘러 내려오는 흰 잡석의 모레인 지대를 30여 분 건너면 광활한 초지와 목동들의 돌집, 그리고 두 개의 푸른 호수가 있는 마셔브룸 베이스캠프(4,280m)다. 인도 스리나가르 북쪽의 하라묵 정상에서 측량 당시에는 K1이었던 거대한 마셔브룸 남벽이 보이고, 남쪽으로 암봉들이 희미하게 솟아 있다. 호숫가 모래 위에는 예전 원정대의 정부연락관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얀 조약돌로 크게 자기 이름을 써 놓았다.
알리와 1~2인용 텐트 안에서 함께 한 이틀째 되던 날은 밤새 온몸에 슬슬 기어다니는 놈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 옷을 모두 벗었다. 하얀 색 면티셔츠의 재봉선을 따라 이가 새카맣게 붙어 있지 않은가! 알리의 침낭에서 새로운 피맛을 보러 모두 옮겨온 것 같다.
나흘 걸리는 빙하 16시간에 끝내
옷을 돌에 말아 차가운 호수물에 던져 놓고는 빙하 원두까지 다녀왔다. 물 속에서 옷을 꺼내보니 반은 사라지고 반은 죽은 채로 붙어 있는 건지 결국 원숭이 털 고르기 하듯이 손으로 다 떼어냈다. 알리에게 마을까지 되돌아가는 임금까지 지불하고 자기 짐만 지고 먼저 내려보냈다. 그는 저 멀리 빠르게 사라졌다.
이제 다시 혼자다. 답답하게 보조를 맞출 필요 없이 배낭을 들쳐 메고 중간에서 알리를 지나쳐 3시간 반만에 알링 빙하 입구 둠숨(Dumsum)에 도착했다. 계곡 안쪽에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닮은 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날씨는 맑아 뜨겁다. 계곡 양쪽으로는 가끔 양치기 집들이 나타나고 겨우내 사용할 땔감들이 쌓여 있다. 자작나무, 버드나무는 밑둥치만 남아 있다. 1시간 반 가량 오른 곳에서 강의 남안으로 건넜다. 뒤쪽으로 초골리사(Chogolisa·7,668m)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알링 빙하로 들어서기 전의 자작나무숲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크레바스가 갈라진 빙하 말단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을 찾아 건넌다. 쉽지가 않다. 계속 이어지는 푹푹 무너져내리는 흙과 잡석은 다리를 더욱 지치게 만든다. 알링 빙하 동측으로 길을 잡고 계속 오른다. 서쪽으로 수많은 6,000m급 미등봉들이 줄줄이 서 있다. 빙하 상에서 하루를 자려고 했으나 중류 부근에서 모든 산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 곳에 빙하가 생기고 인간이 들어온 것은 세번째가 아닌가 생각된다. 1911년의 불록-워크만(Bullok-Workman)탐험대과 1950년대의 등반대 한 팀, 그리고 내가 세번째일 것이다.
6월14일 새벽에 빙하 말단 캠프지를 출발해 후세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낭마 계곡 등반팀에게 선물로 보내 줄 닭 두 마리를 부탁하고 네슬러 커피, 야채, 담배 등을 사놓고 점심을 먹은 후 촬영장비만 챙겨 혼보로 계곡으로 간다. 무하마드 경찰은 나흘 걸리는 혼보로 빙하 끝까지 반나절만에 갔다 온다니 믿기지 않은 모양이다.
표고차 600m의 언덕을 오르자 갑자기 평평한 초지에 야생화가 만발한 평원이 나타난다. 알리는 다른 트레커들을 데리고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개울 북측을 뛰다시피 혼보로 빙하 말단으로 진입해 동측으로 방향을 잡고 어두워질 무렵 빙하 상류의 혼보로 피크(Honboro Peak·6,459m)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섰다. 그리고 몇 커트 촬영을 마쳤다.
구름에 가려진 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랜턴도 없이 올라온 길을 더듬어 내려왔다. 마지막 1시간은 신발창이 떨어지는 바람에 양말만 신은 채 전등불이 몇 개 반짝이는 후세 마을에 밤 11시 도착했다. 18시간을 걸었다.
다음날 아침 찾아온 무하마드는 보자말자 껴안는다. 어제 늦은 시각까지 기다렸다고. 그 시간부터 우리는 서로 돕는 사이가 되었다. 곤도고로 빙하와 차락차 빙하는 규정 변경으로 허가서가 필요하게 됨에 따라 이로써 이 계곡 탐사를 마무리했다. 전세 지프를 고용해 마을을 내려와 칸데에서 한 명의 포터에게 식량을 올려 보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암봉들을 보며 후세 계곡은 앞으로 새로운 등반을 원하는 젊은 클라이머들에게 맛있는 미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계곡을 벗어났다.<계속>
▣트레킹 가이드 - 후세 계곡
낭마·혼보로·마셔브룸 빙하는 허가 없이 트레킹 가능
후세 계곡은 수많은 암봉들과 암봉들 사이의 계곡에 형성된 좁은 초원이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풍광으로 카라코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아직도 이 계곡에 솟은 대부분의 봉우리들이 측량되지 않았고, 지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카팔루 동쪽의 수르모(Surmo)와, 지금은 인도군이 점령하고 있는 시아첸 빙하로 통하는 콘더스 계곡와 살토로 계곡은 외국인 트레킹 금지구역이다. 곤도고로 빙하와 차락차 빙하는 개방지역에서 제한지역으로 바뀌어 이슬라마바드의 관광성으로부터 허가서를 취득해야하고, 공인된 가이드를 동행해야한다. 그 외 마셔브룸, 알링, 혼보로 빙하는 개방지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식량은 대규모 트레킹팀인 경우 스카르두에서 구입하는 것이 좋지만, 카팔루 시장도 꽤 큰 편이다. 후세 마을에도 몇 개의 기본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다.
스카르두~카팔루 구간은 마셔브룸투어의 대형버스가 하루에 한 번 운행한다(요금 50루피). 전세 지프는 스카르두~후세 구간은 2,500루피, 카팔루~후세 구간은 1,000루피 정도로 흥정하기 나름이다.
트레킹시즌은 6월~10월이나 양치기들이 초지에 머무는 7월~9월이 좋다. 가이드나 포터는 어디에서나 쉽게 고용할 수 있다.
□낭마 계곡
두 개의 코스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칸데를 출발하여 민귈루 마을을 끼고 계곡 안으로 들어가 민귈루 캠프지에서 야영하고 이틀째 K6 베이스캠프를 다녀와 같은 캠프지에서 자고 3일째 내려오는 코스다.
두번째는 민귈루 캠프지에서 야영하고, 이틀째 아민브락 베이스캠프, 3일째 되돌아오는 코스다. 모두 식수 사정은 좋다. 왕복 6일치의 포터 임금을 지불해야 하므로 비싼 편이다.
□혼보로 계곡
숨겨진 비경을 볼 수 있는 코스다. 후세 마을 서쪽의 표고차 600m의 가파른 계곡을 오르면 홀연 노란색, 보라빛 야생화가 지천인 천상의 화원에 도착한다. 양치기 집들과 맑은 물이 졸졸 흐른다.
둘쨋 날은 텐트는 그대로 두고 혼보로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을 건너 남쪽의 능선을 오른다. 맑은 날에는 K2(8,611m)도 볼 수 있다. 3일째 마을로 돌아온다. 포터 임금은 이틀치다.
□마셔브룸 빙하
제1일 후세(3,050m)~둠숨~파르비산(3,475m). 2~3시간 소요, 캠프지에 맑은 물이 흐르고 아늑하다. 알링 빙하 안의 봉우리들과 마셔브룸, 차락사 빙하 주변의 많은 산들이 연봉을 이룬다.
제2일 파르비산~브룸브라마(4,050m). 2~3시간 소요, 잡석 모레인 지대에서 가파른 언덕을 20여 분 오르는 지점을 제외하고는 서서히 고도가 올라간다. 회색빛이라도 흐르는 물을 식수로 하고 깨끗해 보이는 연못의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제3일 브룸브라마~모레인 빙하 횡단~마셔브룸 베이스캠프(4,280m). 2시간 소요. 산사면의 평탄한 초지대를 오르고, 흰 잡석으로 뒤덮인 빙하 지류를 건너면 호수 캠프지가 나타난다. 일몰에 호수면에 비친 마셔브룸의 모습과 이어 떠오르는 달의 모습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이틀동안 마을로 내려온다. 포터 임금은 왕복 6일치를 지불한다.
(김창호 서울시립대 OB·쎄로또레 등산아카데미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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