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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MEMENTO’로 본 자아의 동일성과 죄의식의 기원
1. 영화소개
시간의 비순차적 구조와 단기 기억손실증이라는 독특한 병을 다루고 있는 영화 ‘메멘토’는 철학적 질문들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 중에서 ‘자아의 동일성’과 ‘죄의식’에 관한 주제를 두고 시작하겠습니다.
2. 논의 주제 소개 및 선정 이유
먼저 저희 조의 논의 주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희 조는 ‘자아는 동일한가?’ 라는 질문을 전면에 내세우고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또한 그에 따라 파생되는 ‘죄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물음은 이후에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저희 조가 ‘자아는 동일한가?’라는 질문을 선정한 이유를 먼저 밝히고자 합니다. 기억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요. 만약 그 기억이 손상되거나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영화 메멘토는 이러한 가정을 토대로 출발합니다. 주인공 레너드는 단기 기억손실증을 앓고 있습니다. 10분마다 기억이 지워지고(한마디로 초기화 되고) 또 다른 기억들이 계속해서 채워지는(혹은 덧씌워지는) 행위들이 반복됩니다. 그러한 순환고리를 주인공 역시 알고 있습니다. 순환고리를 알기에 그는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레너드와 나탈리(술집을 경영하는 여자)가 그녀의 집에서 다투던 장면을 살펴보면, ‘자신의 부인을 욕한 나탈리를 때린 레너드’와 ‘기억을 잃어버리고 그녀에게 누가 때렸냐고 묻는 레너드’가 동일 인물로 볼 수 있을까요. 여기서 저희가 논의하고 싶은 것은 육체적인 동일성이 아닙니다. 단지 몸이 같다고 해서(이것 역시 논의해봐야 할 부분 입니다만)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희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정신적인(심리적인) 동일성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자아’라는 개념은 아마도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측면이 더 강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레너드에게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동일할까? 동일하다면 왜 저런 과정들을 반복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억과 자아의 관계를 생각해보다가 ‘그렇다면 혹시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기억이 아닐까?’라는 가정을 조심스럽게 세웠습니다. 저희는 따로 꼭지를 나누어 개념 정의를 하지 않겠습니다. 일반적인 개념 정의가 아닌 저희 나름의 타당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지면서 논증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3. 자아는 동일한가?
3.1. 자아는 기억으로 구성된다.
저희의 물음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자아’이고 또 하나는 ‘동일함’ 다시 말해 ‘동일성’, 이 두 개념입니다. ‘동일성’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고 먼저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자아라는 개념은 우리와 가장 친근한 개념이면서 가장 애매모호한 개념입니다. 우선 임의로 자아를 분류해보자면 앞서 말한 대로 육체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한 자아는 비아(非我)가 있음으로 생겨나기에 본인 내부에서 지각하는 자아가 있으며, 외부에서 지각하는 자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에서 보면, 레너드가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과 테디(타자)가 파악하는 것은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이야기 되겠지만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기대로 우리 머릿속에 표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현존하는 자아’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자아를 기준으로 구성됩니다. 여기에서 기대란 단지 심리적인 것일 뿐 무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연적인 가능성(물론 소수의 비개연적인 가능성도 있지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기대는 기억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기억은 기대와 다릅니다. 기억은 과거 당시에 현존했던 자아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경험의 묶음입니다. 그리하여 기억은 새로운 경험이 연이어 추가되어, 끊임없이 덧씌워지게 됩니다. 러시아의 마트로시카 인형(커다란 인형을 열면 그보다 작은 인형이 계속해서 나오는 인형)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최초의 자아 위에 다른 자아들이 계속해서 겹쳐짐에 따라 그것들은 변화합니다.
또한 레너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기억은 항상 보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레너드가 이야기하는 새미 재킨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새미 재킨스는 레너드가 변용한, 즉 수정된 기억의 자기 자신입니다. 이처럼 기억은 덧씌워질 뿐 아니라 ‘수정’되기도 합니다. 기억은 불변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며 연속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영화로 돌아가서, 레너드는 잠에서 깨자마자 ‘이곳이 어디지’라고 말하며 자신이 기록했던 문신과 메모와 사진을 찾습니다. 이것은 레너드가 ‘잠’이나 ‘기억손실’로 인해 끊어진 이전의 기억들과 연속하려는 노력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기억’이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면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판단했으며, 현존하는 자아는 이러한 기억들이 한데 묶여있는 총체(總體)입니다.
3.2. 시간과 기억의 비고정성
이제 ‘동일성’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동일성은 말 그대로 두 개 이상의 것들이 하나이면서 같은 성질을 띠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대상들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어떤 상태의 자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구분 짓는 잣대는 바로 ‘시간’입니다. 잣대를 ‘공간’으로 둔다고 해도(예를 들어 집에 있는 자아와 학교에 있는 자아) 그 역시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아는 동일한 시간에 다른 공간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시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시간이라는 관념을 고정시킨 것 뿐이니까요.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과거 현재 미래는 의사소통을 위해 임의로 만들어진 언표입니다. 시간은 주로 물에 비유되곤 하는데 물이 흘러갔던 곳은 과거이며 물이 흘러가고 있는 곳은 현재입니다. 당연히 미래는 앞으로 흘러갈 곳이라 할 수 있겠구요. 그러므로 현재가 어디냐 라고 묻는 그 순간의 현재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시간은 非고정되어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일성을 문제 삼을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현존하는 자아와 과거의 자아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과거의 자아란, 앞서 언급하대로 자아는 기억들이 묶여 있는 총체라고 가정할 때 과거의 자아는 그 중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일성은 불변해야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기억은 계속해서 변화되고 자아는 그 기억에 의해 구성되므로 자아는 가변적인 특성을 지닌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는 동일하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3.3.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동일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덧붙여 이야기 하겠습니다. 기억은 ‘사실’이 아닌 ‘해석’으로만 있는 것입니다. 아내의 죽음은 레너드에 의해 변질된 후에도 계속 왜곡 변형을 거쳐왔음을 테디의 대사에서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으로 들어온 기억이 기존의 기억과 상호작용을 거쳐 자아는 매순간 순간 마다 또 다른 자아로 변화되어 갑니다. 여기서는 능동의 의미(변화하다) 보다는 피동의 의미(변화되다)가 더 강합니다. 레너드가 만약 기억을 능동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면 끊임없는 조건 반사를 통해 자신을 세뇌시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우리는 대부분 기억한다고 믿지만 기억이란 우리의 의지대로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기억은 해석이다’ 라는 것은 영화의 도처에서 등장합니다. 하나의 예로 테디의 사진의 ‘Don't believe his lies'란 문장을 보면, 레너드가 쓸 때 당시와 읽을 때의 견해가 다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아가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노력 역시 실패로 끝날 뿐이며, 또한 그러한 노력이 진행된다는 것은 노력하는 자아와 바꾸고자 하는 자아가 존재하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아란 ‘최후의 자아’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레너드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점으로, 감독은 기억손실증이란 설정을 통해 인간의 그러한 면모를 극화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개인에 관한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상으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죄의식의 기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4. 죄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4.1. 가치판단은 선천적인 능력인가.
죄의식은 어디에서 올까요. 죄의식은 선과 악의 가치기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해보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악으로 규정되는 행위가 죄이고, 자신의 행동이 죄임을 깨닫는 자기의식이 죄의식입니다. 이는 대개 괴로움의 감정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이 능력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인간의 이성이라 주장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이성은 실천적 의지로서 도덕적인 선을 욕망하는 능력이며, 육체적인 욕구보다 고차원적인 윤리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윤리적인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순한 인식차원에만 머무는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되며,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추구할 줄 아는 사유능력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로서 자기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상대적으로 물질적인 것을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감성, 지각 등의 인식능력을 이성능력의 하위에 있다고 봅니다. 감각은 환각이나 꿈처럼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고 그 자신의 육체적 욕구로 인해 왜곡된 채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감성에 근거하는 심리적 작용 또한 불완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이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감정을 배제하게 됩니다. 따라서 진리는 오로지 이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진리는 다름 아닌 최고선, 절대선, 혹은 선 자체로서 신 존재로 귀결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구조로써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합리론자라고 합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죄의식 자체는 괴로움을 느끼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괴로움의 기원은 분노나 동정 등의 단순한 정념과는 구분되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윤리적 의식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욕구가 스스로가 볼 때 악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반성하며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혹은 최소한 악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를 더욱 다지게 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며 도덕적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건,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이성이 주어져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마냥 수긍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선과 악이 정말로 우리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관념일까요. 주인공 ‘레너드’의 경우,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이가 다름 아닌 자신이란 것과, 복수를 이루고 나서도 무고한 이를 또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기억을 은폐시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 못한 채 또 다른 누군가를 아내의 살해범으로 여기고 죽이게 될 상황으로 자신을 기꺼이 내맡깁니다. 윤리적 이성의 의지대로라면 그는 살인을 반성하고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복수완료’라는 문신을 왼쪽 가슴에 새기겠지요.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내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바에야 끊임없이 복수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우린 여기서 인간의 윤리이성에 관한 허구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주인공에겐 무엇이 선으로 다가왔을까요.
4.2. 선과 악은 사회화로 인해 학습된 관념.
선과 악이란 가치 관념은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하며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즉 사회는 개인의 자기보존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만들어진 잠정적 협의체 입니다.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해나가기 위해선 질서가 요구되며, 구성원들의 합의를 거쳐 공동의 규칙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 규칙은 그 공동체의 역사적 배경이나 지리적 환경, 변화된 상황 등의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가치규범화 되면서 구성원들에게 선과 악에 관한 관념으로 각인되어 가불가의 행위원칙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의식이 발생하게 된 기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선악은 인간의 도덕성이나 실천이성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이해득실 근저에 놓여있는 것이고, 또한 개인에게 교육, 학습되는 후천적 개념입니다.
4.3. 죄의식은 감정의 경향에 불과.
죄의식도 이성에 준하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고통이란 감정에 의거한 것입니다. 이 감정에는 먼저 자신이 동의한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이 닥쳐올 것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흑백화면의 ‘레너드’는 모텔 안에서 문틈으로 경찰의 봉투를 받고 두려움에 떨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살인행위가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죄의식은 그 사회질서를 부정하든가, 사회에서 부과한 책임을 완수하든가 함으로써 모면할 방법이 있습니다. 보다 궁극적인 것은 스스로의 생명에 위협을 가했다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죄의식입니다. ‘레너드’는 진심으로 사랑한 아내가 죽은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내는 자신의 일부이고 그녀를 죽게 한 것은 그 자신의 삶에도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심판하는 것도, 그 벌을 받는 것도 자신입니다. ‘레너드’는 ‘레너드’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요, 유죄를 선고했을까요. 유죄라면 얼마만큼의 형량이 선고되었을까요. 기억을 은폐함으로써 재판장에서 달아난 그의 선택으로 보아 판결은 사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보존욕구를 가진 생명체이므로 그는 살기를 택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선이었던 것입니다. 이 선이 결코 윤리적 이성이 판단하는 선이 아니라는 건 증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5. 맺음말
선과 악의 관념은 사회화에 따라 후천적으로 양산된 것이며, 죄의식은 인간이 타고난 이성적 의지가 아닌 신체적 욕구에 따른 감정에서 기원함을 ‘레너드’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앞서 논의된 자아의 동일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문제로, 선천적 이성의 부재라는 고찰은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가 해석으로서의 기억일 뿐임을 부연하고 있습니다. 타고난 이성으로서의 자아도 허구의 개념이며 자아의 동일성을 입증해주지 못합니다. 가치문제를 가르는 도덕적 판단능력도 기억에 따른 습관이나 경향, 혹은 순간순간의 해석에 따르는 것입니다. ‘레너드’는 10분마다 새로운 의식체계를 세우는 번거로운 과정 대신 메모를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사실은 아니었지요.
급변하는 21세기라는 현 시대는 기억손실증을 앓는 ‘레너드’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린 스스로에게 물음을 제기해볼 수 있겠지요. 나는 무엇을 사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가. 그러한 기준의 근거는 어디에 정립시켜야 할 것인가.
※ 참고문헌
『흄의 철학』, 최희봉, 자작아카데미,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