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한 이십 년
1974년 봄, 또는 1973년 겨울
이 인 성
그때, 그가 돌아오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여전히 돌아가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절실함, 그는 지나는 길에 잠시 머문 춘천을 떠나 돌아오기 위해 서울행 직행버스에 앉아 있었다. 탑승대 옆 벽시계의 커다란 분침이 뚝 일 분을 건너뛰어 네 시 사십 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또 뜻 모를 조바심을 느꼈다. 종합 정류장을 빠져나온 버스는 왼쪽으로 방향을 꺾더니 곧 나타난 다리 위로 올라섰다. 다리 아래로, 반쯤 얼어붙은 너른 물 폭의 공지천이 길게 내려다보였다. 깨끗하게 기슭을 다듬은 강둑 가까이 보트 한 척이 얼음 속에 갇혀 있었고, 그 안에 두터운 파카 옷을 껴입은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헛되이 얼음을 저어 나가려는 것일까? 그 장면을 바라보며 불현듯 꿈 터오는 그의 상상 속에서, 남자가 말했다. 사랑해.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가 피식 대꾸했다. 안 믿어. 순간, 그의 두 손이, 가슴 밑으로 한 점 바늘처럼 날카롭게 관통해 들어오는 통증을 움켜잡았다. 그는 잠깐 얼굴을 일그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아픔만은 그 자신 특유의 무표정으로 참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때 해야 할 일은 가능한 한 빨리 그 표정의 동요를 지우는 것뿐이었다. 언제부턴가 때때로 그의 몸 한 점을 향해 기습해오는 그 지독한 아픔. 그것은 언제나 순간으로 왔다. 그러면 그 순간의 긴 그림자가 오랜 시간 남은 몸 안에 드리워질 것이었다. 겨울이었다. 그리고 봄이었다. 그는 여전히 어디론가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어디로? 낯익은 거리를 내다보던 그는 다시 뜻 모를 조바심을 느꼈다. 그리고, 버스가 창경원* 돌담을 끼고 고가도로를 넘어 ‘홍화문(弘和門)’ 앞에 멈추었을 때, 황급히 버스를 내렸다. 한 정거장을 남기고, 그는 예정된 목적지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곳은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들면서, 그리고 한 정거장만 더 갔다면 또 자신을 속일 뻔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는 번번이 그런 의식에 시달리는 것이 힘겹게 여겨졌다. 하늘을 가리는 낮은 천장처럼 연회색 구름이 내려앉은 삼월의 음산한 날씨, 그는 밭은기침*을 뱉어냈다. 그는 꺼끌거리는 혀끝을 씹었다. 그는 한 갑의 담배를 고스란히 소비하며 지난 밤을 뒤척였었다. 무모하게도. 왜냐하면 그가 밤새도록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사실뿐이었으므로. 그렇다. 그는 전날 그곳에 있지 않았었다, 그 현장에. 그래서? 생각은 거기서 캄캄하게 가로막혔었다. 어둠의 벽 뒤에서는, 자욱한 안개가 꾸역꾸역 밀려나왔었고…… 어둠의 안개 속에서는, 고삐 풀린 말이 방향 없이 날뛰는 소리와 허공을 마구질치는 채찍 소리가 들려왔었고…… 귓속이 웅웅거렸다. 통증의 여운 때문인지, 아니면 하루 종일 버스에 시달리는 데서 오는 피로 때문인지. 춘천의 외곽 지대를 꾸미는 주택가의 그런그런 풍경들이 차창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자세를 낮추고 좌석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자, 잠깐 동안이라도 좀 편안한 마음이 되도록 하자. 이 통증을 진정시킬 겸. 어차피 앞으로 두 시간은 버스에 내맡겨야 하니까, 그러면 어쨌든 이 귀향―서울을 고향으로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건만―의 종착점에 다다를 테니까, 그래, 그렇게 이 하루는 지나갈 테니까, 이 모습을 가늠할 수 없는 괴로움들은 내일로 좀 미루도록 하자.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다고, 거리에 선 그가 다른 곳에 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뜻하지 않게 빗나간 그 시간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정류장 앞에서,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더듬이를 잃은 벌레처럼 제자리를 한 바퀴 맴돌았다. 빌어먹을, 어쩐다? 어디로 가야지? 그가 누군에게 물었다. 아무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 무심히 오가는 차량들. 무심하다고? 아니, 결코! 그가 허점을 보일 때, 저들의 무심함은 소름 끼치는 어금니를 드러낼 것이었다.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는 마치 어떤 버스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을 지니려고 애썼다. 초조함이 목구멍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남모르게. 저 혼자 표정 없이 간직한 마음의 어려움을, 누가 담담한 모습으로 귀향하는 한 평범한 제대병에게서 찾아볼 것인가? 그는 몸짓을 풀고, 잠자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 얼굴의 살갗이 두 겹으로 분리되며 굳은 무표정 밑의 다른 표정이 뒤틀려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부대를 떠나면서부터 그 철저했던 무표정이 자꾸 더 심하게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눈꺼풀 밑의 근육이 함께 뒤틀려왔다. 뒤틀림을 의식하자, 그는 곧 체념 했다. 결국 눈을 뜨고야 말 거라면 더 참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실눈을 뜨고 있었다. 앞좌석의 등받이에 붙은 쇠재떨이의 윤곽이 가물거렸다. 그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꺼풀이 뜻밖에 무거웠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데 눈을 감았던 시간이 몇 분이나 될까, 버스는 아직도 춘천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당이 들여다보이는 길가 신흥 주택의 방 창문에 달라붙어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아이는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무뚝하게 남아 있는 통증을 쓰다듬으며, 다시 스스로를 달랬다. 자, 눈을 뜨고라도 좀 편안한 마음이 되도록 하자. 어차피 앞으로 두 시간은 버스에 내맡겨야 하니까, 그 사이 시선은 풍경의 표면만을 스쳐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 생각 없이 창밖이나 내다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저 보이는 거나 보면서. 보이는 것은 오가는 사람들, 오가는 차량들, 공중변소, 아직 잎을 피우지 못한 가로수들……, 길 건너 홍화문과 돌담, 그 앞에 쪼그리고 늘어앉은 행상들, 공중전화 박스……, 따위였다. 정말 어쩐다? 어디로 가지? 그는 거듭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누군가가 그의 등 뒤에서 속삭였다. 창경원 구경 어때?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나마나지, 유치찬란하게 꾸며놨을 텐데. 그럼 어때? 어린 아이 같은 기분 있잖아. 순진한? 그래, 순진한. 젠장, 그게 될까? 가벼운 그의 대꾸는, 그러나 무거웠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길을 건넜다. 길을 따라 싸늘한 흙먼지가 휘몰려왔다. 바람이 차창 뒤에서 잉잉거렸다. 마침내 춘천을 빠져나온 버스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늘진 산기슭을 뒤덮는 눈밭에 굵은 흑갈색 나무들이 줄기만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바닥에 깔린 눈빛이 검은 나무들의 흰 그림자처럼 보였다. 흰 그림자가 바람에 뿌옇게 쓸렸다. 겨울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봄이었다. 한적하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조용하겠지. 조용할 거야, 이런 날씨에 창경원에 오는 사람은 드물 테니 말이야. 그는 매표소로 가던 발길을 멈추고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그는 손끝이 기억하는 친숙한 전화번호를 돌렸다. 드르르르륵, 챌칵. “네, 학림*입니다.” 어, 오늘은 어떻게 주인아줌마가 전화를 다 받고? “아, 주인아주머니세요?” 그의 목소리가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 밑을 달려 삐걱이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 담백한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 거기서 모든 것은 의미 있는 그 무엇인가였다, 지나간 시절. “네, 아…… 광대 학생이구먼.” 그는 학생이라는 말의 껄끄러움을 묵인했다. “패거리 중에 아무나 좀 바꿔주세요.” “기다려요.” 알 듯 보를 듯한 어떤 교향곡의 한 구절이 수화기 속에서 흘러나왔다. 저 음악 속에 쭈그리고 앉은 거슴츠레한 눈빛들을, 그는 언제나 경멸했었다. 잠시 사이. “여보세요!” “나야.” “누구?” “나.” “으응, 왜? 얼른 오지 않고?” “나 거기 못가.” “뭐? 좀 크게 말해!” 학림의 음악 소리가 친구의 귀를 방해하는 모양이었다. “나 거기 못 간다구!” “왜?” “갈 수가 없어.” “왜냐니까?” “갈 데가 있어.” “어딘데?” “나도 몰라.” “헛소리하구 자빠졌네. 지금이 농담할 때야? 냉큼 못 와!” “못 간다니까. 그리구 부탁이 있어.” “뭔데?” “마침 니가 전화 받았으니까, 이따 시내로 잠깐 나와! 너 혼자. 할 이야기가 있어.”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친구는 반응을 중지했다. 수화기에서 다시 가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심각한 이야기야?” 다시 친구의 목소리. “뭐라구? 여기서도 잘 안 들려” 하고, 이번엔 그가 거리의 차 소리를 핑계 삼았다. “알았어! 어디서 볼까?” “글세… 응, 그래, 종로 대학서점에서 보자.” “몇 시?” “네 시.” “그러
지.” “끊는다.” 숲이 끊기면서, 벌목지일까, 헐벗은 등성 이에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심겨진 작은 전나무 묘목들이 보였다. ‘녹색 혁명’과 ‘입산 금지’의 커다란 팻말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그 팻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는 샛길과 절 표지가 있었다. 저 절에는 갈 수 있다는 것 일까, 없다는 것일까?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는 홍화문 앞에서 한 번 더 망설였다. ‘홍화문(弘和門)’ 안의 ‘명정문(明政門)’ 안의 ‘명정전(明政殿)’ 이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처림 들여다보였다. 습한 암회색 하늘빛을 끌어 모아 고체
로 굳혀놓은 듯한, 이끼 낀 엣 기와들이 가지런히 그림의 깊은 곳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그 깊은 곳에서, 그는, 그 수렴의 끝에 열려 있을 어둡고 허황된 공간과 낡은 옥좌를 앞질러 보았다. 그러자, 그의 망설임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기에 혹시 투명 인간처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한 임금이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버려진 힐벗은 자리이므로, 더 이상 아무 신하도 거느리지 못하므로, 이제 진실로 모든 것을 맑게 다스릴 왕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는 그. 왕에게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묻고 싶었다. 그는 반쪽으로 찢어진 입장권을 들고 홍화문을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아직 왕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발길을 왼쪽으로 돌렸다. 왼쪽으로 방향을 꺾자, 문득, 버스 오른쪽 시야에 넓은 물의 터전이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하마터면 그는 탄성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왼쪽 창가의 좌석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장면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단번에 그 물덩이를 알아보며 엷게 지켜온 잠시의 평정을 무너뜨릴 뻔했던 것이다. 아니, 사실 그는 이미 그 평정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을 억제했지만, 거의 반쯤 몸을 일으킨 자세였다. 추위에 얼기에는 아직 너무 넓고 깊은 물덩이였다. 산줄기와 산줄기 사이로 흘러들어 고인 넓디넓은 물덩이가 흐름을 멈춘 듯 금속처럼 웅결되어 보였다. 그것은 찻길이 바투* 허리를 타고 질러가는 계곡의 벼랑을 되비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벼랑을 올려다보았다. 때로는 둔각을 이루며 무너질 듯 버티어 선 절벽. 돌금을 끼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들과 그 틈바구니에 비집고 선 나무들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을 돌의 응집력, 모든 혼돈을 돌로 가둔 맺힌 마음의 단단함. 그 바위의 마음이 저렇게 물 위에 서려 있는 것 인가? 그래도 언젠가는 무너지리라, 무너져 물속에 잠기리라… 그는 뒤늦게 제 모습을 깨달으며, 꾸부정하게 일으켜 세웠던 몸을 제자리로 떨어뜨렸다. 옆 사람이 힐끗 그를 곁눈질했다. 버스가 다리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괜스레 헐렁한 제대복의 옷매무새를 고쳤다. 설명되지 않으며 받아들이기도 싫건만 스스로 이해할 수는 있는 어색함과 쑥스러움. 그가 다다른 첫 철장―그것은 어떤 새의 우리였다―앞에서, 그는 바로 그런 감정의 뒤범벅에 뒷얼굴이 뜨거워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어쩌면 보이지 않는 눈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사실 때문에 더욱 뭉쳐 오르려는 그 감정의 덩어리를 감당하기 위해, 습관처럼 그는 제 앞의 철장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읽어 내렸다. ‘이름: 에뮤*/사는 곳: 평원/먹이 : 과일, 풀잎/생식 : 산란 수는 7∼16개, 40일간 부화/수명 : 40년/특징 : 타조 다음가는 제2의 큰 새로 날개가 퇴화한 흔적이 있음. 진회색. 시속 50km를 낼 수 있으며…’ 그는 간신히 감정의 열을 억눌렀다. 비로소 그는 가로·세로·높이 이십 미터쯤의 철장 속에 갇힌 시속 오십 킬로미터의 뭍―날짐승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깃털로 덮인 큰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게 삐죽한 목과 작은 머리를 가진 에뮤는 본능을 숨긴 듯 몸을 웅크리고 회색의 공기 속에서 더 진한 회색의 덩어리로 서 있었다. 그런데,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그는 더 유심히 그 새를 관찰했다. 또는 더 유심히 관찰하는 척하여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뿐이었다. 그가 억눌렀던 감정의 열이 이번엔 심한 수치심과 뒤엉켜 가로막을 수 없이 솟구쳐 올랐다. 도리 없이 그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의 뜨거움이 앞얼굴의 무표정만은 일그러뜨리지 못하도록, 그는 남아 있는 마음의 긴장을 끌어 모았다. 그는 제대병답게 헌병 앞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가 왜 담배를 피우는지 헌병은 눈치 채지 못한 듯싶었다. 그는 아직 자기 뒷얼굴의 심한 뒤틀림이 발각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버스 안을 쓱 휘두르고 내려가는 저 헌병이나 전투경찰의 검문 기준은 무엇일까? 한눈에 척 보았을 때의 그럴듯함일까? 그렇다면, 그럴듯하지 못한 자여, 혹 그대만은 그대가 어디로 되돌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한 꼬마 아이가 쪼르르 그의 옆을 지나 철장으로 다가갔다. 아니, 아이는 철장으로 다가간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마치 철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철장의 존재를 뚫고 그대로 지나쳐 그 커다란 에뮤에게로 다가갔다. 에뮤가 아이에게 몸을 굽히자, 아이가 그. 잔등 위로 올라탔다. 갑자기 에뮤는 무서운 속도로, 그것 역시 철장의 가로막음을 지워버리고 달려 나갔다. 아이와 에뮤가 삽시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철장 너머로 사라진 에뮤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진정한 ‘있음’으로 있지 않는, 하지만 색감과 입체감과 동작을 그대로 지닌 에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뛰쳐나간 제 몸을 쫓아가지 않은 그림자. 그 그림자가 움직이는 박제처럼 그에게로 다가와 그를 태우려는 듯 몸을 숙였다. 그러나 그림자의 동작은 철장에 저지당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감각은, 무수한 마름모꼴로 그의 시야를 난도질하는 철장의 거슬림 때문에, 새 우리 그 자체에 머물러 가로막혀 있었다. 그의 사고 또한 새의 속도와 철장의 크기가 갖는 상관관계에 멈추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보았나? 한 짐승의 부자유를? 그뿐이라면, 단연코 그는 그 짐승의 현실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다. 그가 꿰뚫고 싶다는 것은, 그가 꿰뚫고 싶다는 것은…, 어쨌든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옮겼다. 검문을 마친 버스가 ‘신연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오히려 빛과 열을 끌어 모으고 있는 듯 비현실적으로 서편 하늘 낮게 떠 있는 주홍빛 태양 아래, 우뚝우뚝 골격을 세운 ‘의암댐’의 거대한 콘크리트 축조물이 물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로막힌 생각은 진전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이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이 진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는 생각이 진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그도 떠나간 제 몸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대답할 수 없음. 대답할 수 없음의 막막함. 고개를 끄덕인다고 사태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 그는 고개의 끄덕임을 멈추고, 지난겨울 내내 놀이터 공중 궤도의 한 지점에 떠 있었을 녹슨 전동차를 멀리서 바라다보았다. 봄이었다. 그러나 겨울이었다. 다리를 건넌 버스는 이제 계곡의 반대편을 따라 나갔다. 댐에 가로막힌 강줄기는 댐 밑에서 기이한 돌바닥을 드러냈다. 저 돌무늬는 흐르는 물의 마음이 새겨진 것인가, 물 밑에 숨어 있던 땅의 마음이 드러난 것인가? 활짝 편 공작 꼬리의 영롱함은 저 공작 그림자의 마음인가, 그것을 보는 사람 혹은 사람의 그림자의 마음인가? 아주 제 몸답게 생긴 화식초*의 그림자, 하기야 동물원이란 그런 걸 보여주는 곳일 테지만, 아주 제 몸답게 생긴 칠면조의 그림자… 그림자처럼, 그가 탄 버스는 땅에 닿아 있으면서도 허공에 뜬 듯이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타이어 소리가 진공을 열며 가르는 바람 소리 같았다. 계곡 건너, 비교적 가파른 산등성이의 낮은 허리를 둘러친 철도가 이쪽 차도의 대응선인 양 뻗어 가고 있었다. 그 위로 등성이를 부숭숭하게 뒤덮은 나무들.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그러나, 그는 그 나무들이 어떤 나무들인지 구별해낼 수 없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나무 이름을 붙여 나열해나갔다. 마구 이름이 떠오르는 대로. 떡갈나무, 향나무, 산사나무… 하마, 바다사자, 잔점박이물범… 오리나무, 참나무, 노가주나무, 옻나무, 가락나무… 흰곰, 불곰, 퓨마, 흑표범, 재규어… 싸리나무, 개옻나무, 갈매나무·¨ 거북, 고릴라, 비단구렁이… 검은댕기해오라기, 먹황새, 흑따오기, 흰뺨관학, 꼬불새, 어치, 파랑까치… 줄참나무, 박달나무, 피나무, 엄나무, 으리나무―이런, 이건 아까 나왔던 이름인데― 팽나무, 물가리나무… 그러고는 더 이상 나무 이름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무 이름들을 어디서 배웠었지? 나무의 질감도 향기도 잘 모르면서, 식물도감 같은 책에서나겠지. 어쩌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이효석의 「산」쯤을 읽으며 심심풀이로 외웠는지도 모르고. 숨어 있던 어떤 지류들이 합해진 것인지, 혹은 땅속에서 스며 나온 것인지, 강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물은 어디로 가려고 자꾸 더 큰 물로 모이는 것일까? 물도 어디론가 되돌아가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코끼리의 그림자는 제 몸 곁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몸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않고도 몸인 척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그림자의 괴로움까지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는 ‘열대관’을 감아 돌아 명정전 뒤뜰로 빠져나왔다. 그곳은 몇 개의 작은 ‘당(堂)’과 ‘전(殿)’ 들이 세월의 나무들을 사이에 끼고 서로를 비껴 보고 있는 좁은 옛 공간이었다. 세월이 흘러가 세월의 말을 버린, 이제는 그저 단순하고 아늑한 뜨락일 뿐인 공간. 그는 그 공간을 밀폐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제 몸과 마음을 휘젓고 있는 모든 움직임을 중단시킨 채 땅 위에 드러누워 게으르게 뒹굴고 싶었다. 이미 드러누운 그의 한 마음이 열대관 옆에 까마득히. 솟구친 거대한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한낮을 향해 점점 더 어둡게 몰려오는 구름을 배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불길한 날씨를 알리는 신호의 깃발처럼. 그 나부끼는 신호는 그의 머릿속에서 다른 해독을 요구하는 새로운 암호가 되어 모스부호처럼 찍혀나갔다. 다닥 다다다닥 다닥…다닥닥 다닥… 그것은 무슨 통신이었던가? 겨울, 두메산골의 한 민가에서 그가 납작하게 엎드려 잠들려 할 때, 나뭇가지 하나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었다. 닥 다다닥 다다닥… 해 질 무렵까지 갠 날씨였는데, 그의 선잠 속으로 바람과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는 어렴풋이 암호를 해독했다. 너는 개다, 너는 개다, 너는 이미 개처럼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너를 개처럼 살게 할 것이다, 우리가 너를 개처럼 죽게 할 것이다·‥ 통신을 보내는 자, 누구인가? 그는 뱃가죽을 허공에 드러내며 자빠지는 여윈 개처럼 돌아누웠다. 강 건너 산이 허옇게 뱃가죽을 내밀었다. 산사태가 났던 곳일 테지. 골짜기를 타고 산머리에서부터 돌더미가 휩쓸려 있었다. 산사태를 피해 솟아오른 전신주를 따라, 등성이 너머로 고압선이 뻗쳐 갔다. 그는, 어느 순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대로 수락하고, 그러나 강렬한 전류에 새로 충전되고 싶었다. 헛된 욕망일까? 누워 있던 그의 한 마음의 귀가 개들의 낮은 헐떡거림을 들었다. 그는 주위를 살폈다. 음음거리는 기척은 ‘환경전(歡慶殿)’ 뒤쪽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건물의 모퉁이로 접근했다. “…같이 가는 거야.”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내가 뭐 싫다고 한 거 있어? 허지만 그건 안 돼, 응?” 또 그 수작들이군. “그럴 이유가 없잖아. 오늘은 정말 그냥 보낼 수 없어.” “…….” “난 더 못 참겠어. 정말 싫어? 싫다면 우리 그만 만나.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짐짓 협박, 그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정말 날 사랑해?” 예정된 순서. “그걸 말이라고 해?” “정말?” “물론이지.” “난 몰라. 난 겁이 나.” 수컷이나 암컷이나 어쩌면 저토록 완벽할까? 완벽하게 터무니없을까? “괜찮아. 날 믿지, 그지?” 다시 헐떡임. 믿냐고? 무엇을? 힐떡거림을? 핥아주다가 그게 먹이인 줄 알고 물어뜯다가 다시 핥아주는 시늉을 하는 사랑. 엉덩이를 뭉개놓고, 소주를 퍼먹이는 사랑. 그 역시 겨울이었다. 그는 물컵으로 소주를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엉덩이를 어부정히 내 뺀 걸음으로 그는 야간 초소 근무를 나갔다. 그는 이를 갈며 총을 허리에 대고 버티어 섰다. 차갑게 별들이 쓸리는 어둠 속에서, 어둠으로 웅크리고 있는 눈앞의 모든 형체들이 순식간에 적이 되어 몸을 털며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는 어둠을 향해 마구 총을 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초소 안의 무전기에서, 심한 잡음과 함께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덩이…즈즈즉 즈즉…덩이 초소…즈즈…나…라…즉즉 나와…즈…여기·‥” 그것은 저기 어딘가 먼 별의 한군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게 박혀 있던 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별들이 눈앞을 빙빙 돌며 하늘의 더 깊은 곳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별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들이 그를 중심으로 아득히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즈즈즉즉즉…여…즉즈즈…답…라…즈즈즈….” 닥다닥다닥…다다다…다다닥다…나뭇가지의 통신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고, 그는 머릿 속의 바람과 구름이 부리는 요술 그림들을 몽릉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박 잠들려는 찰나에, 그는 거센 바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를 찾아왔는가? 네? 아니오,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는 길입니다. 그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뭐 하러 이렇게 궂은 길을 택해서 돌아가는가? 곧바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바람의 힐책에 그는 금방 기가 꺾였다. 밤기차 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전 그곳에 잠시라도 더 머물 수가 없었던 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그런데, 제게 낯익은 지명이 보였던 겁니다. 여기, 강원도 산골의 여기, 한번 꼭 와보고 싶던 여기. 그래서 이곳으로 오는 표를 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의 목소리가 친근하게 변했다. 이놈, 많이 컸구나. 이 텁텁하게 휘몰아치는 목소리. 많이 듣던 목소린데, 누굴까? 네가 기어이 우리의 밭을 일구러 왔구나. 아, 아니오, 전 그저 지나가는 길인데요. 우리의 밭은 여기만 있는 게 아니니까, 어디든 네가 가꿀 우리의 밭은 있는 법이다. 전 지금 지쳐 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젊은 나이에 지쳐? 이제 고작 한 이십 년을 살았나, 그래 놓고? 한 이십 년, 대략 이십 년, 고작 그럴 뿐인 이십여 년, 그러나 한 맺힌 한 이십년…만 이십삼 년,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나이를 헤어냈다. 고작 그럴 분인 이십여 년, 그러나 그 이십여 년 동안 이백여 년을 산 것은 아닐까? 강 건너 철길을 따라, 기차가 느리게 춘천 쪽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차는 그의 시간을 묵묵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의 자력에 끌리지 않으려고 버티던 어떤 힘이 풀어져버리면서, 갑자기 그의 버스가 뒤로 달리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춘천의 종합 정류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뒷걸음질로 버스를 내려 어느 완행버스에 처박혔고, 그 완행버스가 다시 뒤로 달렸다. 덜컹 덜컹 험한 산길을 거꾸로 헤어 올라간 버스는 두메산골의 한 마을에 그를 떨궜다. 전혀 낯설면서도 그 평범함 때문에 낯익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어느 시골에의 도착 장면을, 그는 자주 상상하곤 했었다. 전날 저녁, 그가 발을 디딘 곳이 바로 그 장면을 실현하고 있었다. 그는 매표소와 구멍가게를 겸한 길가의 납작한 흙집에서 담배와 소주 한 병과 새우깡을 샀다. “여기, 풀무배움집이란 데가 어디 있죠?” “마을 맨 꼭대기, 저기 긴 돌담이 쌓인 곳이오.” 쉰 줄로 보이는 가게 주인이 힐끗 쳐다보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언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골짜기에 펼쳐진 마을을 바라보았다. 저녁 무렵이라곤 하지만,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한 풍광*이 서린 마을이었다. 어느 날, 그 거센 바람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도 이렇게 도착했겠지. 무엇이 당신을 이곳으로 오게 하였는가? 그는 생경한 느낌으로, 그것도 한자의 붓글씨체로 ‘의지(意志)’라는 낱말을 떠올렸고, 곧이어 긴 숨을 내쉬었다. 서산 너머, 무심히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를 향하여, 그의 의식 속에서 뒷걸음쳤던 버스는 다시 속력을 냈다. 강줄기 끝에 핀, 아까보다도 더욱 비현실적인 붉은 꽃송이. 유리벽 안에 흐드러지게 벌어진 붉은 햇조각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세 채의 유리집 ‘식물관’이 때없이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유리벽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그는 유리벽 밖으로 스며 나오지 않는 그 꽃향기를 맡고 싶었다. 맑은 피 냄새랄까, 붉고 신선한 향기를 뿜으며 새벽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밤새 몰려오던 바람과 구름은 눈을 뿌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말끔히 사라져 없었다. 그는 눈 위에 시린 발을 구르며 마을 위로 올라갔다. ‘풀무배움집’의 돌담이 일직선의 굵은 선으로 흰 눈풍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Ξ그 돌담은 야릇한 애착과 거부감을 함께 뻗쳐왔다. 돌담 뒤로 눈이 가득 고인 경사진 운동장은 그리 넓지 못했다. 운동장 건너편, 작은 교사의 맨 앞머리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낮은 찬송가 소리가 새벽빛 속으로 새어 나왔다. 여기가 당신께서 마지막으로 일군 밭인가?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박아 세운 축구 골대 앞에서, 그는 눈 덮인 땅 위에 엎드렸다. 그는 눈 속에 턱을 처박고 운동장의 반대편 끝을 향해 기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높다! 무릎을 땅에 붙이고! 자세를 낮춰! 귓속에 쟁쟁한 소리들이 울렸다. 그만둬, 이제 그만둬, 내가 기어가겠어! 그는 귓속의 소리를 몰아냈다. 눈 밑의 싸늘한 바닥이 그를 고문했다. 그는 벌레처럼 꿈틀대며 온몸으로 전진해 나갔다. 그의 몸 자국이 길게 밭이랑처럼 눈 위에 끌려갔다. 겨울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겨울이었다. 그는 서울 변두리의 한 황량한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는 서툰 솜씨로 언 땅에 쟁기를 박았다.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밤학교에서 그가 맡은 과목은 영어였다. 히 이즈 어 앰비셔스 보이. 보이즈, 비 앰비셔스… 그는 겨드랑이에 끼우고 있던 야학 교재를 펼쳤다. 주저앉은 벤치가 냉기를 전해왔다. 책갈피의 온기 속에 오글거리던 글자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는 벌레를 잡듯 세게 책갈피를 닫았다. 그가 앉아 있는 완만한 언덕 밑으로 사슴 우리가 내려다보였다. 진흙기가 많은 우리 안의 땅을 사슴의 그림자들이 느릿느릿 질컥질컥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구석의 두 마리가 뿔을 부딪쳐 탁탁 소리의 그림자를 울렸다. 어느 영화에선가 저 뿔이 얽혀 죽도록 풀어지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 그러나 그림자로 얽힌 뿔은 얼마나 쉽게 풀어질 것인가. 그는 정말 보고 싶었다. 풀어지지 않는 뿔을 얽고 마주 선 두 사슴의 눈빛을. 그 맑디맑다는 사슴의 눈은 그때 어떤 빛일까? 그는 학생들의 눈빛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 초롱초롱함은 무엇인가가 달랐다. 무엇이? 그는 알 수 없었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증오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그는 오십 분 내내 책과 교실 밖 뒷산의 나무들만을 바라보며 가르쳤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수업을 끝내며 책을 덮다가 한 학생의 눈과 오갈 데 없이 마주쳤다. 그는 당황하며 물었다. “힘들지?” 학생이, 당신은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도 못 할걸요―라고 소리 없이 전제하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힘들어도 배워야지요.” 그는 때 없이 떠오르곤 하는, 그가 수업 시간을 빠져 뛰어넘던 고등학교의 철망 친 담장을 생각했다. “그렇게 공부하고 싶어?” 그는 재수 학원의 컴컴한 계단과 거기서 피우던 담배를 떠올렸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으니까요. 모르는 게 억울할 때가 많아요.” 저 학생을 가르치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학생은 장래 희망이 뭔가?” 그 자신의 희망은 무엇인가? “저도 선생님이 돼서 저같이 못 배운 학생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는 시큰한 코를 한 손으로 덮었다. 그 시큰함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일종의 감동이었을까? 그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불확실해질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고 난 어느 날, 그는 버스 안에 더러운 옷차림으로 올라서 징징댈 어느 아이에게서 문득 똑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에. “차 안에 계신 아저씨, 아주머니, 형님, 누나, 조용한 차중에 잠시 소란을 끼치게 되어 대단히 죄송함다. 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단순한 동정심 ―맙소사, 동정이라니 ―이 아닌 게 확실하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감동과 동정의 너머에 있는 무엇? 그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맞다, 이런 생각들이 튀어올랐다. 동전을 주머니 속에 모아 아이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영어를 배운 그 학생은 어디로, 영어를 가르친 그 자신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왕초의 주먹이 할당량을 못 채웠다고 아구창을 돌리거나 또는 그의 말 속에 죽은 휑한 부모가 라면을 끓이는 무허가 판잣집으로, 그리고 홀어머니가 외롭게 지키고 있는 일본식 이층집으로? 아니,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남은 나이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집을 넘어 더 어디로 돌아가는가, 돌아가야만 하는가? 그는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 버스의 목적지가 곧 자신의 목적지는 아닐지 모른다는 것을. 강 건너, 집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기차역 같은 곳이 보이고, 붉은 쇠다리… 강촌인 모양이군. 강촌이라면, 이 근처 어딘가 폭포가 숨어 있지, 아마. 떨어지는 물의 힘과 부서지는 물의 몸의 영상이 그의 상념을 뒤따라왔다. 그리고 폭포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내려다보는 아찔함이 그를 기습해왔다. 번번이 그런 아찔한 느낌으로, 그는 언덕을 뒤덮은 판잣집과 흙집들을 내려다보곤 하였다. 밤학교를 마치고 돌아갈 시간, 밤 아홉 시나 열 시 무렵의 비탈진 골목길로는 일월의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 골목의 맨 위에서, 그는 선뜻 내키지 않는 발길 때문에 우두커니 서 있기 일쑤였다. 무엇이 그를 그곳에 가게 했던가? 무허가 건물 번호가 노란 페인트로 매겨진, 구더기떼처럼 오글대던 집들의 지봉 위 어둠 속에 인공의 더듬이로 솟아 흔들리던 수많은 텔레비전 안테나들. 그가 내려다본 것은 그것뿐이었던가? 그는 자기가 들어와 있는 창경원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갔다. “손님이 한 사람이라도 태워줍니까?” 창구 안에서 껌벅이던 눈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타세요.” 그는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서둘러 춘천행 버스를 탔다. 왠지 그는 한낮의 밝
음 속에서 그 마을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눈밭 위에 백금빛을 뿌리며 제법 떠오른 해를 등지고, 그는 햇살에 밀리듯 황망히I두메산골을 떠났다. 그는 그곳을 지나 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다다른 곳이 결국 그 바람의 목소리가 말하던 ‘우리의 밭’이란 말인가? 그는 허공의 우리에 홀로 담겨 실려 가기 시작했다. 회색 하늘이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단면의 둥근 벽이 되어 그를 둘러쳤다. 암녹색 연못이 발밑의 바닥 없는 깊이로 여겨지면서, 그의 다리가 갑자기 후들거렸다. 그는 손잡이를 잡기 위해 두 손을 뻗쳤다.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던 책이 툭 떨어졌다. 그는 책을 주울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야를 넓혔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넓은 조망이 아니었다. 큰 물새집과 식물원과 명정전의 지붕과 열대관과 그 너머가 가려진 채 건너다보였다. 한쪽으로는 창경원 밖 대학 병원의 건물과 거리의 차량과 사람 들이 보일 정도였다. 그는 그 정도의 높이에 후들거리면서도 더 높은 곳에서 더 넓게 둘러보고 싶었다.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순간, 건너편에서 오는 텅 빈 케이블카가 부닥칠 듯 스쳐 지나갔다.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버스에 그는 날카로운 위협을 맛보았다. 둔중한 충돌, 뒤집히는 허공, 벼랑, 추락, 물 바닥, 물먹은 죽음·‥ 확률이 희박한 우연이 자신을 내려칠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것은 전혀 뜻밖의 써늘함이었다. 언젠가 죽음은·‥ 피? 모르겠다, 기억이 자욱해진다. 그러나 분명 이런 써늘함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써늘함은? 그것이 개죽음이기 때문에? 개죽음이란 또 무엇이냐? 억울한 죽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 도대체 개처럼 죽기 싫다면 어떻게 죽어야 하나? 차라리 그 정도로 우연을 빙자한 개죽음이라면 행복에 훨씬 가까운 게 아닐지? 이끌리던 생각은 곧 저지당했다. 케이블카가 벌써 반대편 탑승대에 다다라 있었다. 케이블카를 내리며, 그는 힐끗 그 바닥에 그대로 떨어져 있는 자신의 책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손댈 수 없는 물건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어쩌면 케이블카를 폭파하기 위해 놓인 시한폭탄일지도 몰랐다. 내버려 두자, 이제 저 혼자 터지도록. 그는 눈앞의 저 초현실적인 풍경을 폭파하고 싶었다. 차창의 틀이 만든 풍경화의 초현실적 인 모습은, 아주 사실적인 산수화의 저 중심에 펼쳐진 기이함 때문이었다. 산세와 물줄기가 아련히 멀어지며 모여드는 거기서, 까닭 모르게 더욱더 비현실화되어가던 태양은, 이제 언젠가 현미경의 작고 둥근 시야로 확대되어 보이던 핏방울과도 같았다. 아까까진 꽃이었는데, 왜 피인가? 피, 그것이 그가 남모르게 키워온 어떤 환상적인 붉은 꽃의 정체였던가? 그러나 저 풍경을 초현실화로 완성 시키고 있는 것은, 허공에 둥글게 응집되어 쏟아지지 않는 핏방울 아래, 옆으로 세워진 사다리였다. 구분되지 않는 먼 하늘빛과 강물빛 사이에 걸린 사다리는 강 건너편과 이쪽을 위·아래로 구분하는 듯싶었다. 그래서 풍경 속에는 우리가 살아온 위·아래·옆과는 다른 개념의 위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듯싶었다. 그 다른 질서로 보자면, 강 건너편은 그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높은 곳이었고, 그는 여태껏 그 질서에 수직으로 비껴 서서 옆으로 살아온 셈이었다. 어지러움도 없이. 겨울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겨울인 봄이었다. 그는 ‘들어가지 마시오’의 경고를 물리치고, 그가 미리 보았던 명정전 안의 을씨년스러운 공간 속으로 몸을 들였다. 그는 옥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 옥좌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왕이여, 모습을 나타내 다오. 그는 시선에 모든 정기를 모았다. 제발… 몸 안의 핏줄을 따라 흐르던 정연한 시간이 돌연 점점의 불씨로 흩어져 마구 부딪치며 불길을 지펴 불덩어리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이내 그 열기에 몸의 내벽 가득 뜨거운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드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몸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바랜 단청을 입고 나무로 굳어 있던 천장의 용과 봉황이 잠을 깬 듯 무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세월을 차단하던 격자문들이 북처럼 울리고, 옥좌 뒤에 함께 떠 있던 해와 달이 동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눈이 불을 뿜었다. 불길은 옥좌 위로 쏟아져 타올랐다. 아, 그러자, 그 불의 옷을 입은 한 형체가 투명한 모습을 눈부시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다시 사라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힘은 산산이 흩어졌다. 그는 장님처럼 캄캄해오는 시선을 떨궜다. 그는 본 것인가? 비록 돌아갈 곳을 물을 틈조차 없었지만, 보기는 한 것인가?·‥그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사다리가 다리와 물 위에 어린 다리 그림자의 대칭이 결합되어 빚어낸 모습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 사실로 있을 때, 몽상 또한 몽상으로 함께 있었다. 그것이 다리라는 사실은 그것이 사다리라는 몽상을 지우지 못했다. 그때 그것은 단연코 사다리였다.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없음’의 ‘있음’에 빠져 들 수밖에 없는 어떤 상태를, 그는 헤매고 있었다. 껍질을 깨고 나올 때, 껍질의 안과 밖을 선명히 구분해볼 때, 그러나 그곳이 그 껍질을 둘러싸는 더 큰 껍절의 안쪽일 때, 그럴 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옥좌에 버티고 앉은 한 마리 거대한 사자를 헛보았다. 사자의 포효가 쩌릉 명정전을 울렸다. 그는 얼어붙은 몸으로 간신히 뒷걸음질쳤다. 몸을 돌리자, 명정전 안뜰의 품석* 옆으로 짐승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 가운데를 허둥지둥 달려나갔다. 저놈을 잡아라! 한 짐승의 발톱이 그의 옷을 찢으며 등어리에 날카로운 상처를 긁었다. 사방에서 발톱들이 무수히 달려들었다. 그는 이리저리 휘저어 도망치다, 간신히 피투성이 몸을 명정전 밖으로 날렸다·‥ 악몽. 그는 나무에 기대어 숨을 가누었다. 몽상 속으로 잠입해 들어온 현실. 현실적 몽상의 보복. 사다리를 타고 철길이 쏟아져 내려왔다. 다리를 건너온 철도가 차도와 맞물릴 듯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두 길이 모두 강 이쪽으로 건너오자, 강 건너편은 더욱 높고 먼 세상처럼 여겨졌다. 그는 자꾸 제 속에 들끓고 있는 어떤 사태의 핵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은 긁을수록 깊고 넓게 스미고 번지는 흉측한 부스럼 같았다. 그는 왕에게 자신의 돌아갈 곳을 묻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니, 어쩌면 왕도 모른다고 대답했을지 몰랐다. 그래, 왕은 모를 것이다. 그는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거꾸로 단언했다. 아는 게 있다면, 그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겠지. 그 밖의 무엇인가를 안다면, 어찌 그의 왕이겠는가. 왕은 말했을 것이다. 나를 시험하지 말라. 가거라, 가서 혜매거라. 치닫는 그의 기분을 어우르기라도 하듯, 속력을 줄인 버스가 건물들이 줄지어 선 거리로 들어섰다. “가평입니다. 내리실 분 준비해주세요!” 안내양의 꾀죄죄한 목소리와 함께 서서히 차가 멈췄다. 부스럭거리는 몇몇 사람들의 움직임이, 새삼 그가 버스 안에 다른 사람들과 동승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저들은 사람의 그림자로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대머리호로새 또는 검독수리였으며, 낙타나 고릴라이기투 했다. 아니, 그것들의 그림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무슨 짐승의 그림자인가? 창경원을 나서 발길을 망설이며 오가는 짐승들의 그림자를 바라보던 그는 다시 홍화문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림 밖의 그림 밖의 그림 밖에 있었다. 그가 발 디디고 있는 그 그림을 나설 문은 어디에 있을까? 어쨌든 서 있을 수만은 없지. 그는 막연히 걷기 시작했다. 물방울 한 점이 뺨 위로 떨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결국 비가 올 참인가. 바람은 싸늘함에 습기를 더했다. 그는, 아까 그가 넘어온 고가도로가 굵게 떠받쳐진 네거리까지 거슬러 나와 다시 멈췄다. 어디로 갈까? 안국동 쪽으로? 종로 4가 쪽으로? 아니면, 아직도 안 늦었으니 학교 쪽으로? 그는 창경원 돌담에 나붙은 쭈글쭈글한 영화 광고를 보았다. ‘로저 무어의 007/죽느냐!? 사느냐!?/앙코르
로드쇼 단행!’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의 입이 뜻 없이 햄릿을 흉내 냈다. 그러자 기계적으로 대사가 흘러나왔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아 참는 것이 마땅한가, 아니면…” 그는 곧 대사를 끊었다. 내 주인공은 어쩔 것인가―하는 생각이 기어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발각당한 자신의 비밀에 당황했다. 또는, 만약을 대비해 자신에 대한 알리바이를 남기려는 양 당황을 가장했다. 그 비밀이란 그 봄의 그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꿈이었기 때문에. 벅찬 꿈! 그랬다. 그는 감히 연극을 하나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기미를 느끼면서도 모른 척하며, 얼굴 모를 제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막연함이 어느 날 형태로 드러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어떤 시작을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일 그 막연함 자체로 연극을 만든다면·‥ 언뜻 스친 그 생각에, 모든 것은 여전히 막연했지만, 그는 약간 가슴의 생기를 얻었다. 그가 오던 방향 그대로 뻗친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초록색 불을 켰다. 그는 신호등에 발길을 맡겼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까지 사십구 킬로구나. 가평을 벗어나는 곳에서, 철길이 이번엔 차도 오른쪽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강줄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길 왼편으로는, 빈약한 개울이 그나마 얼어붙어 있었다. 강물로 가기를 중단한 개울 주변의 자잘한 나무들이 목말라 보였다. 그는 목에 끓는 마른 가래를 끌어 올려 탁 길바닥에 뱉었다. 막연함, 막연함이라·‥ 어떡하면 주인공을 막연함으로 괴롭힐 수 있을까? 주인공이 막연함 속을 개처럼 기어 다니게 하려면 어떤 구도가 필요할까? 그는 잔인한 마음을 주인공에게로 몰아붙였다. 찰흙의 그 두터운 흙기가 느껴지는 어둠을 둘러쳐야 할 텐데… 철길이
차도와 멀어지며 시커먼 암흑의 문 속으로 뻗쳐들었다. 컴컴한 터널 속으로 뻗친 반들반들한 두 줄의 쇳길이 그 자신의 몸속에서 번득이는 마음의 두 줄기처럼 보였다. 마음의 두 줄기, 어떤 두 줄기? 버스는 철길이 그 가슴을 관통한 산의 등허리 살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빛의 상당량이 산의 높이에 차단당한 듯한, 뚜렷지 않은 그늘이 느껴졌다. 밝음은 그대로 있는데, 그래도 무엇인가 없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점점이 빛이 사라지는 것인지? 의문문만 가득 찬 상황, 제 안팎의 아무것도 모를 때처럼 가혹한 상황은 없을지도 모르지. 헉헉거리도록 허우적거리도록, 주인공 놈을 그런 늪에 풀어놔야 할 텐데, 제풀에 꺾이도록. 그는 줄짓는 생각에 발길을 잊었다. 버스의 속력이 두드러지게 떨어졌다. 제법 굴곡지고 험한 가파름이었다. 터널로 들어가는 기찻길이 계곡 밑으로 내려다보였다. 어느덧 개울조차 숨어버렸다. 하지만 더 작게 흩어져 갈라진 무수한 물길들이 혈관처럼 산의 몸 곳곳에 닿아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 한 줄기 작은 물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었다. 그 끝은 어디일까? 어느 숨은 돌부리 밑에서, 혹은 나무 밑둥이나 풀뿌리 아래서 물줄기는 시작될까? 한없이 계속될 한 흐름의 시작. 때로는 급류가 되어, 때로는 얼어 멈추며. 그러나 언젠가는 끝이 오리라. 크나큰 바다가 되리라. 그러고는 더 깊고 낮은 곳을 떠돌다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떠오르리라. 덧없이, 기꺼이.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징그러운 뱀의 포승에 온몸을 맡겨 친친 감기는 양, 그의 주인공은, 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도망치다 막다른 곳에서 뿔 들이대기를 포기한 사슴이 죽음으로 가증스러운 맹수와 살을 섞는 양, 그렇게?·‥ 산 고비를 넘어서는 순간인지, 그는 버스 앞머리가 아래로 기우는 느낌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몸이 지나치게 앞으로 쏠렸다. 시야가 다시 조금 밝아졌다. 그것은 불투명한 밝음이었다. 둥근 원으로 응집되어 있던 핏방울이, 이제 조금 전과 반대편으로 내려다보이는 먼 서산마루에 거의 닿아 있었건만, 마지막 힘을 잃은 듯 하늘의 삼투력에 끌려 나와 번지고 있었다. 한 방울의 핏빛이 저렇게 온 누리를 덮을 수 있었던가? 그의 손끝이 가늘게 경련했다. 핏빛을 휘감고 있는 나무들이 유난히 정지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막 손끝으로 스며들어 오려는 붉은 기억을 씻어내기 위해 혼자 속으로 외쳤다. 움직여다오, 나무여. 가로수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짐승―그림자들이 따라서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선명해진 빗줄기들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휘몰리는 바람을 타고, 그의 시야에 이리저리 꽂혀왔다. 그는 눈이 아렸다. 그는 팔뚝으로 눈을 가리며 자신의 감정을 과장했다. 하늘 위에서 무색의 피가 떨어지고 있다고. 사자에게 옥좌를 물려주고 제 손목을 끊은 왕이 하늘로 떠오르며 흘리는 피랄지. 떨어져 흐르는, 무색의, 피. 비. 비. 피, 붉은, 괴어 얼어붙은. 경사지를 타고 어지러운 무늬를 그리며 일구어져 올라온 밭, 그것을 뒤덮은 비닐하우스들은 붉고 진득하게 침전되어 보였다. 핏덩이? 또? 결국? 다시 한 번, 그는 그 윤색된 광경을 씻어내기 위해 외치고 싶었다. 한데 외칠 말이 없었다. 별수 없이, 그때, 거기서, 그는, 기억 속의 손목에 휘감기던 한 줄 아픔과 솟구치던 피와 그 순간의 한없는 침몰을 되살렸다. 그는 자인했다. 그는 죽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주인공을 죽이기로 결심 했다. 그리고 주인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비가 내리는데,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 틈에 뛰쳐나왔는지, 비닐우산 더미를 움켜 안은 어린 망아지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우산을 샀다. 그런데 우산을 펴는 것과 동시에, 몰아친 바람이 우산을 뒤집었다. 우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방금 산 우산이 망가졌다. “제기랄.” 그는 우산을 길바닥에 팽개치며, 무의식 적으로 가로수 밑에 들어섰다. 그러나 잎을 키우지 못한 가로수 가지 사이로, 빗바늘들은 여전히 그의 얼굴을 찔렀다. 그는 비에 젖기로 마음먹었다. 느긋해지려고 애쓰며, 그는 얼굴을 훔쳐냈다. 자,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어디로 가나? 처량한 폼을 잡고 청계천이나 기웃거려? 그러면 너무 우회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영 다른 길로 빠지면? 그는 다시 초조해졌다. 그의 초조함은, 그 치명적인 기억을 인정했을 맥, 그러나 얼핏 다른 이유로 다가왔다. 그가 너무 지쳐 있었던 탓인지, 다행스럽게도, 그 기억이 환원될 때마다 그러했듯이 그 장면에 맞물려 사슬처럼 앞뒤로 이어진 고통의 궤적이 송두리째 재현되지는 않았다. 뜻밖에도 그 장면은 한 장 스냅 사진처럼 떠올랐다 사라졌고, 다만 그때 엄습한 진한 허탈감이 풍경의 붉은 색감에 더해졌을 뿐이었다. 그의 초조함은, 그때 그 허탈감 속에 울리기 시작한 클랙슨 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하는 클랙슨 소리에 아랑곳없이, 버스 앞에는 커다란 화물 트럭 몇 대가 느릿느릿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트럭에 가로막혀 지체될 시간과 그 하루가 흘리는 마지막 핏빛이 어둠으로 완전히 굳어갈 시간을 재고 있었다. 마지막 빛의 도움으로, 그 길을 따라 펼쳐질 한 풍경을 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찌하여 그런 욕망이 그 쓰디쓴 핏빛의 뒷면을 이루고 있었던가, 동시에 한몸으로? 아무려나, 그는 견딜 수 없이 그 풍경 속으로, 그 아름다움 속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곳이 그에게는 대성리였다. 굵은 강줄기가 하염없이 건너편 산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쪽에는 우거진 숲 그늘이 물가에 닿아 있던 곳. 그저 자연 그대로 아름답던 곳. 아니, 보이는 것을 넘어 아름다움 그 자체가 어른거리던 곳. 아름다움은 왜 그렇게 비현실적일까? 그는 그곳에 가서 그 숲 속에 한 그루 나무로 서고 싶었다. 그 숲을 이루던 나무들은 무엇이었던가? 이탈리아포플러였던가, 아니면 개량종 사시나무? 왠지 그것들은 흰 줄기를 늘씬하게 뽑아 올린 나무들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것은 단지 나무였다. 아름다움 그 자체 속에 들어선 나무 그 자체. 그렇다면 그곳은 대성리라는 지명을 넘어선, 현실을 넘어선 어떤 곳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대성 리를 그리기 시작했을까? 언젠가 서울을 벗어 나오던 길에 그는 무턱대고 그곳에 내렸었다. 지금은 얼굴이 지워진 누군가와 함께. 버스가 언덕을 넘어설 때 문득 펼쳐지던 굵은 강줄기가 거기에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땅과 물이 마주치던 곳,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섬뜩, 그는 닥른 사실을 깨달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방향에서 보자면, 그곳은 땅과 물이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곳이었다. 그래도 보고 싶다, 늦기 전에 어서 달려다오. 그는 버스에 명령했다. 마침 버스는 U자 길을 돌며, 아스팔트를 가른 노란 줄을 넘어 트럭들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커브를 트는 차를 따라, 그의 마음이 크게 꺾였다. 그는 마음과 몸을 틀어, 한길을 등지며, 철근 골격이 솟아오르는 공사판 옆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제 엉뚱한 발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좁은 외길 골목을 무턱대고 따라 들어갔다. 시간의 뒷면으로 발을 디딘 듯, 그가 내미는 발걸음이 자꾸 가라앉았다. 그는 길을 막고 선 가파른 계단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느닷없는 설움과 마주쳤다.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예고 없이 복받쳐 나타나는·‥ 그 설움이 이번엔 거대한 늙은 느티나무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계단 위의 어느 고궁―무슨 고궁? 아, 종묘인가?ㅡ의 높다란 돌담 위로, 느티나무는 검게 용틀임 치는 굵은 몸통과 추상적˙으로 얽히고 뻗친 가지에 하늘의 피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누군가가 교모하게 자신을 이곳으로 몰아넣은 것만 같았다. 누가? 이렇게 몰아넣고 어쩌란 말이냐? 춤이라도 추란 말이냐? 정말 춤을 추랴? 소리 없는 오열로 흔들리며, 설움을 가락 삼아, 그렇게 어깨를 들먹이며, 들썩들썩, 그리고 탁, 젖은 땅을 치며, 어어이 어어이… 싸늘한 비가 뿌려지는 봄이었다. 그러나 눈 덮인 겨울이었다. 그때 설움의 첫 모습은 얼어붙은 수면 위에 흰 눈발이 눈부시던 호수였다. 그는 막 제대복을 갈아입고 부대를 나오는 참이었다. 그는 전역 명령서를 받고, 밤늦도록 소주와 군가와 가요를 퍼붓고 토하고 또 퍼부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 때문에 전혀 어울리지 못했던 동료들―그 어감은 참으로 어색했다―에게 그렇게나마 마지막 정을 주려 했던 것이다. 쓰린 배를 쓰다듬으며, 그는 호숫가 눈 위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설움은 풍경 전체로 다가왔다.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속에는 제 나이만 한 편력이 담겨 있었다. 한참 만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에게는 단 두 가지 사실만이 명백했다. 이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것은 외아들인 그의 아버지의 죽음―그것은 그에게 언제나 절제를 요구하며 낮게 깔려오던 어떤 지적인 목소리의 죽음이었다―으로 인한 의가사제대* 덕분이라는 사실.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그 골목으로 몰아넣은 그 누군가를 찾아내 죽이고 싶었다. 그는 적개심을 다지며, 또는 그 반대로 체념을 다지며,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랐다. 계단 위에서, 골목은 더욱 좁아지며 종묘 돌담을 따라 완만하게 흘러내렸다. 드높은 담의 질서 속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수없는 돌들이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함을 이루고 있었다. 군부대들은 왜 돌담을 쌓은 곳이 많을까? 조금씩 핏빛이 안개 같은 어둠으로 변해가는 차창 밖에, 커다란 웅덩이처럼 움푹 팬 산의 지형을 이용해 들어선 군부대의 돌담이 보였다. 그 돌담은 야릇한 애착과 거부감을 함께 뻗쳐왔다. 아마도 지금쯤 병정 하나가 내무반 창문으로 제가 쌓은 저 돌담을 망연히 내다보고 있지 않을까? 겨울이었다. 그러나 더 먼 겨울이었다. 그가 배속부대로 저음 배치되던 그 겨울 내내, 돌담을 쌓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트럭을 타고 언 개울가로 가서 차가운 돌을 옮겨 담고, 나르고, 쏟아내고, 다시 나르고, 쌓고. 약간의 훈련 시간을 뺀 남은 시간을 휴일도 없이 계속하던 지겨운 작업 이었다. 누구는 돌에 발등을 찍혀 실려가고. 그는 한없이 길어지는 시간과 돌의 무게를 잊기 위해 자꾸 무엇인가를 추억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제 머릿속을 샅샅이 뒤졌다. 그가 찾아낸 가장 먼 추억은, 네 살 때던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피난에서 돌아온 후 누상동 집에서 얼마간 나와 셋방살이를 했다는 동대문 밖 신설동 시절의 어느 장면이었다. 봄이었나보다. 그의 과거인 어린아이가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마루 끝에 앉아있었는데, 나이가 위였던 주인집 계집 애―지금은 얼굴이 지워진―가 다가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조그맣고 빨간 사과를 내밀었다. 아이는 아작 한 입을 물었다가 곧 뱉어냈다. 조그맣게 잘린 사과의 살 속에 흰 벌레가 곰실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놀라 사과를 내팽개치며 괜스레 뛰쳐나갔고, 그때 달려간 곳은 골목 입구의 부서진 공장 건물이었다. 벽돌 몰골 속에는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는 더 큰 아이들이 귀신놀이를 하던 그 무서운 어둠 속으로 혼자 한 발 한 발 헤쳐 들어갔다·‥ 그런 기억의 단편들을 한번 찾아내면, 그는 되씹고 또 되씹었다. 되씹음 속에서, 그는 무수한 기억의 입자들을 제가 나르고 쌓는 돌의 촉감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기억은 각양각색의 돌이 되었고, 돌은 기억이 되어 가지런히 쌓였다. 그리하여 끝날 것 같지 않던 괴로운 작업이 그의 키만 한 높이로 마무리되었을 때, 그렇게 과거는 돌담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언젠가 떠나야할 시간의 울타리였다. 그래서 그는 어디로 떠나고 있는가? 그의 턱 높이에 차오던 두메산골 배움집의 돌담을 쌓은 아이들은 어디로 떠나갔을까? 그들은 괴로움이 아니라 희망으로 그 돌담을 쌓았겠지만, 그 역시 시간의 어떤 영역을 감싸는 소박한 울타리임에도 틀림이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이 턱없이 높은 종묘의 돌담을 쌓은 백성들은 그 어느 것보다 거대한 시간―차라리, 한 시대랄지 ―의 울타리 밖 어디로 떠나갔을까? 아니, 그들이 완성한 돌담이 그들 자신은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었던 한 시대의 과거요, 그래서 그들은 애당초 울타리 밖―그때 울타리 안에 산 자는 누구였던가―에 놓여 있었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 떠나간다는 것 자체가 가능했을까? 가능했다면 그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 그들의 그 노동은 괴로움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 또는 일종의 경건함이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괴로움이었겠지. 이 시대의 의식으로 짐작하는 거지만, 그제나 이제나 사람의 마음이 비슷하다면… 추적이는 빗속에서 돌을 짊어지고 줄지어 언덕을 오르는 흰옷들의 환영을, 그는 거꾸로 거슬러 내려갔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더러운 담벼락이 종묘 돌담과 마주 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지고 땜질하거나 뒤집어씌운 시멘트마저 뜯겨 나간 벽, 조잡한 페인트 덧칠이 더덕더덕 몇 겹으로 벗겨져 지저분해진 벽, 먼지와 때와 오물과 욕지거리와 배고픔과 한숨과 울음과 간혹은 미친 듯한 웃음과 절망적인 희망으로 얼룩진 벽, 요컨대 서울의 더러운 뒷골목 주택가의 담벼락이었다. 그 너머가, 저 돌담을 쌓고 제 시대의 울타리를 떠나지 못했던 백성들의 자손의 자손의 (·‥) 자손들이 짐승으로 남아 부지하는 땅일까? 그는 철봉에 매달리듯 젖은 담벼락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얼굴을 벽 위로 끌어올렸다. 아까 계단을 오른 만큼, 그곳이 약간 높은 지대임에 틀림없었다. 경사를 타고 빼곡히 들어찬, 오래된 한식 기와지붕·양철지붕·슬레이트지붕 들이 낡은 흑백 사진의 어두운 부분으로 내려다보였다. 어김없이 빼곡한 텔레비전 안테나들은 흡사 지붕 위에 꽂히는 빗줄기 같았다. 그 뒤로 한길의 고층 건물들이 그 밀집 주택가를 둘러친 건너편 담벼락― 그게 이 시대의 울타리?―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턱걸이를 내렸다. 그는 빗소리 사이로 앙금처럼 엉기고 있는 거대한 소음의 덩어리를 의식했다. 그것은 엄청난 신음 소리였다. 그것은 종묘 돌담의 돌 하나하나가 제가끔 꿈틀대며 괴로워하는 먼 소리들의 집합처럼 들렸다. 소리의 앙금이 그의 상상력 속에 갑갑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야가 갑갑해지고 있었다. 조금씩 빛이 어둠으로 화해가는 것 말고도, 무엇인가 그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확실히 파악해 낼 수 없었다. 그저 무엇인가가 뿌옇게 망막 속으로 끼어드는 것 같았다. 버스는 제 속도를 찾고 있었지만, 딱딱한 고체성의 풍경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골목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그는 옷 속의 살갗에 와 닿는 습한 한기를 느꼈다. 문패도 없는 어느 문 앞에 리어카가 거꾸로 세워져 있었고, 바퀴 하나가 쇠사슬에 묶여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다른 바퀴를 돌렸다. 허공의 제 자리에 헛도는 바퀴가 빗물을 튀겨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반쯤 열린 문을 슬쩍 밀었다. 문이 열리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나고, 그 밑에 흙벽에 기와를 올린 낮은 집이 보였다. 어두움 속에 창호지 대신 신문지를 바른 방문,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그는 알 것 같았다. 누렇게 뜬 눈, 머리에 가득한 부스럼, 공장에서 잘려나간 손가락, 독약을 먹고 내 빼문 혓바닥, 가슴의 칼자국, 비흘린 다리·‥ 상투적 상상력? 그러나, 상투적인 상상력이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고통의 현실과 엄연히 맞물린다면? 그러나, 그러나, 상상력은 거기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상상력이 거기 멈추면 현실도 거기 멈출 테니까? 그러면? 그 너머로 가야 하겠지. 그 너머 어디로?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는 왜 자꾸 되돌아가야 한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그 너머로 가는 것이 곧 되돌아가는 것일까? 생각은 거기서 캄캄하게 가로막혔다. 그는 시야를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싶었다. 바람아 불어다오, 이것들을 몰아가 다오. 그때, 시야를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의 뒤에서, 드디어 넓은 강줄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다시 강을 만나는구나. 시야를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확실한 강의 모습이 그에게 터무니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잠시, 하지만 그는 섬뜩,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나오는 길로 보자면, 그곳은 땅과 물이 헤어지는 곳이었던 것이다. 땅과 물이 헤어질 때, 얼굴이 지워진 누군가가 말했었다. 사랑을 믿지 마. 그것은 농담이었을까?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대에 면회 온 그 얼굴 없는 얼굴에게 그대로 말했었다. 사랑을 믿지 마. 그것은 진담이었다. 사랑이란 말은 그때 삶의 모든 것을 요약하며 그의 내부를 울렸다. 그래서 그는 죽으려 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왜 대성리에 어서 이르고 싶은 것인지? 다시 한 번 뒤집자면, 어쨌든 물과 땅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니까? 지금은 헤어져 없는 그것이 그때 거기에 있었으니까? 시간의 무한함 속 그때 그 순간에, 공간의 드넓음 속 거기 그 자리에, 이제는 믿을 수 없는 그것이 분명 ‘있음’으로 있었던 것이다. 시간―공간의 무한 좌표에 찍혀 있는 아주 작고 개인적인 체험의 한 점이건만, 아름다움 자체 속에 있는 그것 자체로서, 그리고 언젠가 피어날 단단한 씨앗으로서·‥ 후드득, 빗줄기가 굵고 거칠어졌다. 때아닌 소나기, 그는 뛰었다. 긴 골목을 벗어날 즈음에, 그는 완전히 젖어버렸다. 어디로 피하지? 그는 김이 피어오르는 포장 리어카 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뭘 드릴까?” 모래 위에 쑥쑥 제 알들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중년의 암거북이 딱딱한 등판 밑에서 고개를 쭉 뽑았다. 그는 리어카 판 위를 둘러보았다. ‘토스트/커피/코코아/ 생강차·‥.’ “토스트하고 코코아 주세요.” 버터뭉터기가 달아오른 쇠판 위에 직직 그어졌다. 자글자글 꿇는 버터 위에 척 올려진 식빵 두 장이 이리저리 문질러져 버터를 먹고 노랗게 되자마자 쓱 한쪽으로 밀려났다. 컵 속에 탁 깨져 드는 계란과 그 속에 뿌려진 홍당무와 파쪼가리를, 거북이 젓가락으로 능숙하게 휘젓더니 다시 프라이팬 위로 펼쳤다. 삽시간에 익은 계란 펼침 이 빵 사이에 끼워졌다. “자, 이거 먼저 들구려.” 그는 조그맣게 사각형으로 잘린 포장지 종이로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혹시 여기서는 익은 벌레가 씹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목구멍에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배고픔만 남은 짐승처림 뜨겁게 한 입을 깨물며, 그는 잦아들지 않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겹겹이 그를 가두는 철창이었다. 어둠의 겹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여전히 덧씌워져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려던 제 몸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동작이었다. 시계를 본다고 시간이 당겨지는 건 아니지.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그는 철창을 움켜잡고, 보이는 아무것도 없어 눈을 감고, 무슨 소리를 들었던가? 제 머릿속에 쌓인 어떤 소리? “지랄스럽네, 이거.” 그가 중얼거렸다. 코코아를 내놓는 거북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꼭 여름 장맛빌세.” 여름? “어디 따뜻한데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푹 잤으면 좋겠네요. 아줌마, 이 근처 사세요?” 그가 무심히 물었다. “저쪽 골목 안인데, 왜 그러우?” “아니오, 그냥. 요즘도 이 근처에 여자 키우는 집 있나 해서요.” 그는 돈을 지불하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친구 만날 시간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이를 어쩐다? 할 수 없지. 그는 빗줄기를 열고 나갔다. 빗줄기 뒤의 빗줄기, 철창 밖의 철창. 기소유예.* 유예, 뒤로 미루기, 남겨두기, 덧씌워놓기·‥. ‘학생의 신분을 벗어난’ 그가 가야 할 곳은 군대밖에 없었다. 군부대가 철길을 따라 길게 자리 잡고 있는 풍경, 그는 단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풍경이 갑자기 환해진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철길이 복선이 되며, 짧게 끊기는 한쪽 선 끝에 녹슨 유류 탱크를 얹은 열차 차량 두 동이 이 년 전과 다름없이 내버려져 있었다. 침목 사이를 비집고 올라와 흔들리던 잡풀들이 얼어죽어 눈 속에 박혀 있었다. 저 너머다, 유원지의 숲 그늘을 벗어나 강물을 따라 오르면 굵은 모래밭 뒤로 갈대밭이 이어지던 곳. 뜨거운 햇살과 나른한 바람에 기울던 갈대숲 속에서·‥ 그때·‥ 여름이었다. 여름이 아니었다. 무더운 겨울이었다고나 해야 할는지(그러나 어쨌든 무더움은 있었다, 그 자신 속에!). 햇살은 모든 것을 녹일 듯 작열했지만, 아무것도 녹지 않았다. 사물들은 모두 뜨거운 열 아래 얼어붙어 있었다. 여름이었으나 겨울이었으므로, 모든 것은 어긋났다. 몸과 그림자가 혜어지듯. 알 것 같은 대성리역이 보이고, 이어서 몇 채의 여인숙, 상점, 집들이 나타났다. 숲이 우거진 유원지는 어차피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줄지어진 건물들이 뒤에 가린 숲의 머리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 나무들은 그가 되뇌었던 것과는 달리 버드나무들이었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잠깐만 멈춰 저리로 가보았으면…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길 쪽으로 향했다. 내키지 않는 그의 다른 마음은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더니 다른 마음은 제 맘대로 발길을 돌렸다. 다른 마음은 다시 종묘의 돌담을 따라 나갔다. 한길로 나선 그는 조금이라도 비를 피하기 위해 건물 쪽으로 바싹 붙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멈추고 싶은 그의 뜻을 저버리고 버스는 재빨리 대성리를 지나쳤으나, 그는 오히려 제 마음의 담담함에 놀랐다. 버스가 앞을 막은 산줄기를 피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물길은 산줄기 왼쪽으로 굽어 사라졌다. 그렇게, 물의 길과 땅의 길이 헤어지는 장면이 짧게 지나갔다. 차도와 엇갈린 철도가, 산등성이와 차도 사이 조금 높은 철둑 위로 곧게 뻗쳤다. 철길의 쇠선이 어스름 속에서 풍경의 저쪽과 이쪽을 날카롭게 갈랐다. 갈린 두 마음이 따로따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가 피카디리극장 앞 건널목을 건널 때, 그의 다른 마음은 다시 종묘 옆 동네의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다닥다닥 달라붙은 한옥집들이 열심히 여관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여관촌으르 바뀌었군. 그는 하얀 타일로 벽을 치장한 ‘춘운여관(春雲旅館)’을 택했다.
한산한 마룻바닥에 똬리를 틀고 화투장을 뒤집던 흑갈색 구렁이 한 마리가 몸을 풀었다. “아줌마, 따뜻한 방 있수?” “있는데·‥ 혼자예요?” “혼자가 아니게 해주면 더 좋고.” “요즘엔 이 동네 단속이 심해서·‥.” “알고 왔는데요, 뭘.” “들어가 기다려보세요.” “우산 좀 같이 받쳐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하고, 그는 한 우산 밑으로 뛰어들며, 재빨리 말했다. “종로 이가 쪽으로 가는데, 가시는 데까지만…” 몸에 꼭 맞는 옷을 껴입은 호리호리한 수제비가 언짢은 듯, “그러세요”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산 쓴 말똥가리, 얼룩말, 펠리컨, 바바리양*. ·‥그 그림자들·‥ 그림자도 비에 짖을까? 물 먹은 구두가 무겁게 절벅거렸다. 그는 구두를 벗어 내던지고 싶었다.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아랫목 이불 속에 누운 그의 다른 마음이 멍하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어림없는 짓을 또 바라는 게 아닐까? 과연 흉터가 없는 여자가 있을는지? 때로는 지레짐작 그 자신이 보이지 않는 여자의 흉터를 찾아냈을는지도 모르지만. 창문 하나 없는 방이었다. 귀에 들리는 빗소리가 자신이 끌고 들어온 소린지 지금 제대로 들려오는 소린지 구별되지 않았다. 노크 소리. 그의 다른 마음은 황급히 담배를 끄고, 눈을 감으며 두 손을 눈 위에 올려놓았다. “들어오쇼!” 문 열리는 소리, 문 닫히는 소리. 다른 마음은 눈을 뜨지 않았다. 다른 마음은 저 여자를 짐승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급하시네, 옷까지 벌써 벗으시고.” 여자가 들어오자마자 교태를 부렸다. “까불지 마. 젖어서 벗었어.” “비가 질질 내리니까 환장하시겠던 모양이야.” 다른 마음이 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어쩔쳐?” “어쩌긴요, 난 그런 사람 때문에 사는데.” 그런 사람? 그 같은 사람? 어떤 사람? 사람 수만큼 다르면서 하나같이 같은 어떤 것? 그 다른 마음 역시?·‥ 그러나?·‥ “너한테 흉터 있냐?” “흉터는 또 왜 찾으시나? 나한텐 그런 거 없어요.” 네 속에도? “그럼 됐어. 누워. 옷은 다 벗어야 돼. 그럼 더 줄게.” “낮거릴 주셨으니 서비스 좀 해드릴까?” 아득한 잠시 사이. 여자가 누웠다고 여겨질 때, 눈을 감은 다른 마음은 대뜸 손을 뻗어 여자의 살을 움켜잡았다. 이게 살인가? 이게 사람의 살인가? 다른 마음이 살 속으로 들어갈 때, 그는 ‘대학서점’의 문을 열었다. 이미 어둠의 문 안으로 넘어 들어온 버스는 어둠의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완전히 서산을 넘어섰을 태양의 탈색된 마지막 빛 여운이 풍경 사이에 어렴풋이 끼어 있었다. 이제 그는 풍경에 무심했다. 다만, 조금 더 뚜렷이 시야를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확인하려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친구의 반응이 아니라고, 그는 미루어두었던 마음을 단숨에 정리했다. 서가 앞에서 책을 뒤적이는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그는 얼굴을 외면했다. 그는 친구의 얼굴조차 짐승으로 보일까 두려웠다. “오늘 너 왜 이러니? 비 맞고 헤매질 않나…” “우산이 망가졌을 뿐이야.”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 한 권을 꺼냈다. “어젠 어땠어? 컸어?” 그가 무심한 척 물었다. “별로. 한 백여 명·‥ 한 시간도 안돼 흩어졌지. 그건 그렇고, 도대체 할 이야기라는 게 뭔데 이렇게 폼을 잡어?” 친구가 곧바로 본론을 이끌어낸 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요점만 말 할게. 나, 그 일, 같이 못 해” 하고 대답했다. “무슨 일?” 친구는 반문했으나, 그의 음색은 무엇인가를 짐작하는 듯싶었다. 그는 뻔한 대답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건성으로 책을 뒤적였다. ‘이러한 통찰을 구현하는 이들 집단을 부르는 이름도 가지가지여서 하나는 히피* 또는 한량패(flower children)라 불리고, 또 하나는·‥.’ 결국 친구는 제 짐작을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네 발상이었잖아?” 하고, 친구는 달리 물어왔다. “이 년 전 발상이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었었어. 확신을 가진 믿음….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친구는 말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더욱 늘어가고 있는 환각제의 사용과 심기폭발(mind blowing) 환경의 이용을 지적고자 한다. 이 문제는·‥.’ “이유가 뭐냐고 안 물어?” 그가 먼저 질문을 앞질렀다. 그리고 대답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그냥 그럴 수가 없다는 거야. 사실, 난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어. 내가 도대체 뭔지,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니, 실질적으로 지금 네 처지로 보나, 넌 그냥 뒷전에서·‥.”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야. 뒷전이건 앞전이건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걸 니가 아이들에게 좀 전해줘.” “나, 참…” 친구가 어이없음을 내뱉었다. ‘한편, 만일 우리가 하나의 참여 사회를 진정으로 소원한다면 심기만이 아니라 제도마저도…’ 그는 책을 덮어 다시 꽂았다. 친구가, “너 뭐 복잡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이러지 말고 어디 가서 쏘주라도 마시면서 찬찬히 좀 이야기하자” 하고, 말숨을 바꿨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 돼.” “무슨 일 있어?” “갈 데가 있어.” “어디?” “나도 몰라.” 거기서 그는 미친놈을 바라보는 듯한 친구―토끼의 놀란 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저 자신의 눈길과 마주쳤다. 어두운 차 안에 불이 켜지면서, 그는 제일 먼저 차창에 떠오른 제 눈을 보았던 것이다. 아, 이 눈과 마주 대하는 일이 남아 있었던가. 어둠을 배경으로 되비쳐져 차창 밖에 드러난 차 안, 그것이 아까부터 그의 시야를 방해하던 무엇인가의 정 체였던가. 빛 속에 숨어 줄곧 버스와 함께 달려온 그 다른 세계가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풍경과 겹쳐 있었다. 풍경은 곧 지워질 것이었다. 어둠이 곧 완전해질 것이었다. 날씨 탓인지, 거리에는 벌써 어두운 기운이 깔리고 있었다. 빗발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또 이제 어디로 가나? 그는 정류장에 와 닿는 버스들의 행선지 표지판을 기웃거리며, 살 속까지 츠며든 빗물로부터 스며 나오는 냉랭한 자기 냄새를 맡았다. 그는 종묘 앞에서 헤어진 자신의 다른 마음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했다. 창녀―그녀가 짐승이었다면 무슨 짐승이었을까?―를 내보낸 그의 다른 마음은 기적처럼 깊게 잠들고 있었다. 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아무도 모르게. 그는 바로 제 앞에 와 선 ‘·‥종로/신촌/제2한강교/화곡동/김포’ 행 버스를 후닥닥 뛰어올랐다. 무의식적으로 뛰어올랐는데, 오르고 나자 그것은 그가 늘 밤학교로 가기 위해 타는 버스였다. 그러나 이제는 책도 없지 않은가? 그는 망설였다. 공항에나 갈까? 거기 가
서 떠나는 아무나 전송해볼까? 그는 뒤쪽 좌석에 늘어져 앉아 창문에 기진한 얼굴을 기댔다. 이미 축축하고 질펀한 버스 안에서, 그는 한 줌 물먹은 솜 덩어리였다. 그는 여관방에 잠든 자신의 다른 마음이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상상했다. 그의 다른 마음은 꿈속의 어딘가에 이르러 있었다. 그곳은 그 다른 마음이 뛰어든 막다른 곳이었으나, 다음 순간 그곳은 더 이상 다른 데로 갈 필요가 없는 어떤 곳이 되어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갑자기 세상은 환하고 따뜻했다. 마치 행복하게 죽음을 수락하듯, 다른 마음은 물오르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다른 마음은 맑은 허공에 떠도는 어떤 소리를 붙잡으려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헤매는 넋을 부르는 무슨 주술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신비로운 소리에 감싸여, 다른 마음은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감격에 몸을 떨었다. 어떤 모든 것? 그저 모든 것, 모든 것! 다른 마음은 소리의 얼굴을 찾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누구지? 그때 보이지 않는 소리가 대답했다. 언제나 만나고 있었으니까요. 언제나? 그런데 왜 누구의 소린지 모르겠지요?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얼굴을 보여주세요. 지금 보고 있잖아
요. 그랬다, 다른 마음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꿈속의 봄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겨울이었다. 차창은 이제 완전한 어둠을 배경으로 또 다른 그의 얼굴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너구나. 하지만 그런 표정은 짓지 마라. 그가 소리 없이 말했다. 나보다 네 표정이 더한 거 아냐? 창밖의 얼굴이 말했다. 뭐? 지금 네 표정, 뭐라고 형용할 수도 없어. 내 표정이? 내 표정이 무표정이 아니라구? 내 표정, 너의 네 표정? 네 표정, 나의 네 표정? 스스로 볼 수 없는 그 자신의 표정. 어쩌면 볼 수 있으나 본 것이 아닌, 어쩌면 본 것이 아니나 본 것일 수도 있는·‥ 그의 ‘나’와 ‘너’, 언젠가는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할 그의 떨어진 두 몸. 그는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차창을 열어젖혔다. 차갑고 캄캄한 어둠이 숨 막히게 몰려들었다. 그는 어둠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들어오라, 내 몸속으로 들어오라. 겨울바람 속에 뜬 넋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는 온 갈망을 다했다. 그러나, “문 닫읍시다!” 하는 뒷자리의 짜증 난 외침이 그의 갈망을 깨뜨렸다. 그는 굴욕을 느끼며 창문을 닫았다. 들어오지 못한 넋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눈과 귀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차창은 이제 단순히 차 안의 모습과 소리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바로 옆자리의 사내가 창밖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창가에서는 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란을 까먹고 있었다. 그리고 앞자리에서는, “바람나 도망간 년 뭐 해? 자식도 없는데 내버려 둘 일이지.” “그래도…” 어쩌구 소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커튼이라도 있다면, 그는 차창 밖을 닫아버리고 싶었다. 차창의 뒷면을 때리는 빗줄기들이 물무늬―한순간, 그 물무늬는 뱀 껍질같이 끔찍스러운 촉감으로 그를 감쌌다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를 그리며 흘러내렸다. 빗물에 가려 있는 거리, 그는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인가 가늠키가 어려웠다. 마주 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언뜻 어둠 뒤의 산길 풍경을 들췄으나, 그것은 방향과 위치의 지표가 되지 못했다. 그는, 원망스럽게 자신을 응시하는 제 밖의 제 표정과 함께, 그저 좁은 차 안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셈이었다. “이 쌍년은 오늘도 벗네.” “오늘은 누구하고?” “왜 크 비리비리한…” 이렇게 좁은 현실― 현실이라구?―에 실려 어디로? “·‥중장비 좀 다를 줄 아니까 중동 가서…” 그는 차창의 안팎에 끼어, 앉은 자리가 답답했다. “너무 빤한 소설이잖아…” “한 삼 년 뛰면…” 그는 몸을 뒤틀었다. 창밖의 그가 따라서 몸을 비틀었다. “차 안에 계신 아저씨, 아주머니, 형님, 누나, 조용한 차중에 소란을 끼치게·‥.” 언제 올라왔는지, 비에 흠뻑 젖은 어린 원숭이 한 마리가 대사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놈아, 다시 만났구나. 언제까지 너를 만나야 한단 말이냐. 그는 다시 제가 탄 버스가 야학을 향해 가고 있음을 되살렸다. 이제는 그리로 갈 수가 없는데… “·‥범근이가 어제 킹스컵에서 또 하나 넣었더라.” “워낙 빠르니까·‥” 저쪽 자리의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입을 대고 토하고 있었다. 탁한 공기에 역한 내음이 섞였다. 그는 헛구역질을 참았다. 그는 눈썹 위에 걸린 식은땀을 닦았다. 입 안이 버석 말라왔다. 갑자기 몸의 오관이 한계에 도달한 듯 몸서리가 돌았다. 어떻게 이 감각의 소란을 가다듬을까? 구원처럼, 몇 점 불빛들이 창밖에 떠올랐다. 그는 창문에 바짝 이마를 대고, 손으로 눈 위를 가려 반사광을 막았다. 벌써 서울인가? 아직은 아닐 텐데. 밝은 조명에 비추어진 안내판이 보였다. ‘금곡 입구’와 ‘예비군훈련장 입구’가 나란히 서 있었다. 먼 곳의 숲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여기다 훈련장을 만들었지? 그는, 이제 예비군복이 될 제 제대복을 내려다보았다. 얼룩무늬,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계급과 포복과 사격술과 비상 훈련에 더욱 얼룩질 무늬. 벗어버릴 수 없는, 점점 번져갈 피부의 반점 무늬. 물무늬 진 그의 의식이 문득 여기쯤이라는 직감을 얻었다. 그는 습기 .진 유리창을 닦아냈다. 그렇지. 버스가 바로 ‘제2한강교’ 위를 지나고 있었다. 하늘과 강은 온통 회색의 장막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기 전에, 야학에 닿기 전에 내려야지. 내릴 때가 다 와가는데, 조금만 참자. 서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좌석을 더욱 답답하게 죄어왔다. 제 밖의 소란이 제 안의 혼돈보다 더 참기 어려운 걸까? 하기야 당장 제 감각에 와 닿는 거니까. 몸을 비틀면 마음은 두 배로 더 비꼬였다. 그는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 갇힌 마음이 몸을 세 배로 더 답답하게 얽어 묶어왔다. 조금만 참자. 하지만 버스를 내린다고 이 답답함 속에서 풀려난다는 보장이 있을까? 버스를 내린 그는 홀로 강변에 버려졌다. 아니, 홀로가 아니었다. 동냥을 구하던 꼬마 왼숭이가 마침 거기서 버스를 내렸던 것이다. 그 원숭이가 쪼르르 강둑을 뛰어 내려갔다. 강줄기 속으로 돌기처럼 밀려들어간 모래밭 가까이 자갈 채취선이 떠 있었다. 그것은 강 밑에 함정을 파는 거대한 갑충, 잠든 집게벌레처럼 보였다. 그는 저 기괴한 현실 하나가 잠들어 있다는 데 위안을 느꼈다. 그런데 강둑을 내려간 새끼 원숭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속으로 들어갔을까? 언젠가 그랬듯이, 늘 그랬듯이,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또 물속으로 헤엄쳐 가리라. 아이는 저 거대한 벌레 곁으로 멋모르고 다가가리라, 그리고 모래 웅덩이에 빠지리라, 그리고 허우적거리다가 물의 섭리를 거스른 그 함정의 바닥에 가라앉고 물먹은 주검이 되어 떠오르리라, 그리고 걸어 나와 짐승처럼 세상을 살리라·‥ 회색 구름 위에 덧칠된 습한 어둠이 풍경 속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흑회색으로 물든 강의 저쪽 끝에서부터, 어둠은 암담하게 덮쳐왔다. 원숭아, 아니, 아이야, 나오너라. 나랑 같이 가자.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보렴, 무엇을 나눠 가질지.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강 위에서 강을 내려다볼 생각이 들었다. 배는 없고·‥ 다리 위로나 갈까? 그는 인적이 없는 곳에도 비가 내리고 있는 게 이상했다. 찬찬히 그는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늘 견디어냈었지.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거니까, 또 견딜 수 있겠지·‥.”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것은 실수였다. “뭐라구요?” 옆사람이 말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더욱더 좁혀진 제 자리에 경황을 잃고 잠깐 말문이 막혔다. “아닙니다. 저 혼잣소립니다.” “전 또 나한테 하는 이야긴 줄 알고. 이제 다 와가는 모양이지요?” “네.” “제대하셨군요?” “네.” “춘천 근방에 근무하셨나요?” 아니오. “네.” “그럼 몇 사단에?” “네. 네?” 말을 끊어버려야 할 텐데, 이를 어떡한다? 꿈에서 깨어났을 그의 다른 마음은 이제 어떡하고 있을까? 꿈으로부터 창 하나 없는 여관방으로 돌아와, 어둑어둑 오슬오슬 몸을 떨며 누워 무엇을 생각할까? 당연히 제 방인 줄 알고 잠에서 깨어나다 낯선 곳임을 깨달을 때의 불안이 꿈의 달콤함을 어떻게 무너뜨렸을까? 더구나 돈 주고 산 여자와 자고 났을 때라면? 아주 잠들지 못하고 왜 깨어났을까를 저주하고 있을까, 또는 제 꿈을 씁쓸히 떨쳐낼까? 혹시 벌써 잠을 깨어난 그의 다른 마음은 주섬주섬 마르지 않은 옷을 제 껍질처럼 껴입고 다시 빗속을 찾아나섰는지도 몰랐다. 다른 마음 나름대로의 돌아갈 곳을 찾아서? 아니면, 그를 찾아서? 아니면, 그를 잊어버릴 무엇을 찾아서? 다른 마음은 한없이 술을 찾고 있을지 몰랐고, 꿈속에 본 얼굴을 찾고 있을지 몰랐고, 사고인 척 자동차에 치여버릴 장소를 찾고 있을지 몰랐고, 혼자 음악을 들을 조용한 다방을 찾고 있을지 몰랐고, 자신에게 구걸하던 아이를
찾고 있을지 몰랐고, 그가 버린 야학 교재를 찾고 있을지 몰랐고, 자신을 때려줄 깡패를 찾고 있을지 몰랐고, 아까 그 창녀로는 모자라 보지로 담배를 피우는 여자라도 찾고 있을지 몰랐다. 둘로 나뉘어, 셋, 넷, 다섯으로 나뉘어, 그는 얼마나 더 떠돌아야 할까? 그래야 떠나가 돌아갈 수 있을까? 다리 위에서, 그는 한 목숨의 추락을 집어삼킬 수도 있을 저 물의 깊이를 헤아려보았다. 내려다보이는 뿌연 강물 위에, 수없는 빗방울들이 점 찍히고 있었다. 물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는 어떤 것일까? 퐁퐁, 풍풍, 팡팡, 탕탕·‥ 이해할 수 없는 격정으
로, 그는 상상의 기관총을 물 위에 조준하고 마구 쏘아댔다. 제 몸속에 한없이 흐르는, 이제는 스스로 두렵기조차 한 어떤 흐름을 사살하려는 듯. 물의 심장은 어디에 있는가? 수많은 총알구멍들을 아물리며, 강은 늠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물을 죽일 수 없는 총을 거뒀다. 그때, 등 뒤에서 모습을 알 수 없는 그의 적이 그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언제나 몸 한 점을 향해 관통해오던 통증이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뒷몸 전체에 무수히 꽂혀왔다. 그는 쓰러질 듯 철책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워 돌아섰다. 보이지 않는 적에게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리고 그 역시 죽일 수 없는 적을 향해 총을 쏘아대려고. 그는 손가락을 접고 펼쳐 권총 모양을 만들어, 다급히 옆자리의 사내 가슴에 가져다 댔다. 계속해서 말을 건네던 사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그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짧게 웃었다. 그는 손을 풀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딴생각만 하다가 그만·‥.” 그러면서 그는 그늘진 사내의 얼굴과 음성을 예전에 한 번쯤 대해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들추기조차 귀찮았다. 얼떨떨한 표정을 채 풀어버리지 못한 사내가 몸을 뒤로 뺐다. 그는 찜찜한 가슴을 그 정도로 도닥거려 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휘돌려 목운동을 했다. 갑갑함이 조금 느슨해졌다. 창밖에 창백한 빛이 밝혀지더니 버스가 속력을 늦췄다. 드디어 서울로 들어가는 마지막 검문인 모양이었다. 다리의 중심이 걸쳐진 작은 섬의 검문소 앞을 지나면서, 다리 끝에서부터 차례로 수은등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허공의 작은 빛점들이 문득문득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 오른편 강 건너 기슭에서, 그는 머리를 든 누에처럼 강변에 돌출된 작은 봉우리와 그 위에 세워진 묘한 건물을 구별해냈다. 불 밝힌 둥근 건물의 윤곽 위에 솟아오른 탑 같은 것도 보였다. 얼마 멀지 않은 화력발전소의 높은 굴뚝을 배경 삼아, 그것은 뭍에서 물로의 출발을 앞둔 커다란 배의 형상이었다. 저기가·‥,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거기, 무슨 순교자들을 기념한다는 덴가? 그렇다면 저기나 가볼까? 그는 별다른 기대 없이 제 발길에 방향을 주었다. 기대라니, 이 나날의 예사로운 발길에 무슨 기대를 건단 말인가? 그는, 다음 날 아침 또 하릴없이 깨어나야 할 시간에, 맑은 날이라면 동향의 창문 가득히 커튼 뒤에 괴어 스며들 그 건조한 아침 햇살을 생각했다. 지겨운 봄이었다. 그러나 우선 그 지겨움으로나마 돌아와야 할 겨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서울입니다.’ 가로등이 밝혀진 언덕길의 팔 차선 도로를 오르는 버스 안에, 츠츠즉거리는 잡음이 떠돌았다. 버스 안의 온갖 소리들이 저렇게 엉겨붙었나? 어지럽게 얽혀 있던 잡음이 문득 주파수를 찾으며 어떤 목소리가 되었다. “·‥라고 정통한 소식통이 전했습니다.” 라디오 뉴스였다. “쿠웨이트에서 유피아이 동양. 아랍 석유수출국기구 오펙 소속 아람 산유국들은 이십오 일 새해 일 월 일 일부터 오 퍼센트 추가 감산키로 한 종전의 결정을 번복하고 오히려 십 퍼센트 증산키로 함에 따라·‥.” 뉴스를 들으며, 그는 비로소 돌아온 현실을 실감했다. 현실로 들어가는 길은 공동묘지를 이룬 산과 산 사이 가운데를 휑하니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은등 빛이 혹처럼 돋아난 무덤들을 비추고 있었다. 과연 죽으면 현실의 밖으로 물러나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것일까? 슬픔을 잊는다는 곳―‘망우리(忘憂里).’ ‘절두산(切頭山)’―머리가 잘려 나간 곳. 그 이름이 전해주는 것은 숭고함이나 경건함이 아니었다. 그는, 절벽 밑으로 목을 떨구고 피 위에 넘어진 목 없는 시체들이 선연히 떠오르는 듯싶어 끔찍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원혼―원혼이라니, 신을 찬양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 복자*가 되었는데―들이 어둠을 타고 일어나 그에게 뒤집어씌여 신들리게 할 것 같았다. 그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의 죽음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없어지고 싶었었다. 그의 죽음은 믿음 다음에 왔다. 그의 믿음―그가 확고히 믿었던 그것은 무엇이었던가―은 죽음 이전에 있었다, 이 땅 위에. 이제는 그것도 잃어버렸지만. 여기서의 이˙ 두려움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신앙이란 것이 없는 자의 마음일까? 그는 습관처럼 제 앞에 주어진 글귀를 읽어나갔다. ‘순교성지 양화진 절두산(殉敎聖地 楊花津 切頭山): 삭풍 몰아치는 북경(北京)으로부터 (·‥) 서학(西學)의 연구를 (…) 숭고한 신앙심으로 정화되었다. (·‥) 타오르기 시작한 신앙의 불길은 (…) 무수한 순교자의 성혈로(·‥) 전국 도처 붉게 물들어진 (·‥)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하여(·‥) 이곳 양화진에(·‥) 굽이쳐 흐르는 한강가 깎아지른(·‥)’ “한편 국무회의는 오늘 국제적인 자원 파동에 대처하여 관세법 제 십오 조의 규정에 의한 탄력 과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운영, 물가 수급조절의 원활과 물가 안정을 기하기·‥.” 방금 이것을 현실감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보충되어야만 한다. 틀에 박힌 말을 통해 주어진, 체험되지 않고 주입된 현실감. 뉴스와 광고와 도처의 안내판과 도로표지와 또 그 밖의 그런 것들로 만들어진 현실감. 누가 그것을 우리에게 주고 있을까? 그 누구를 지나쳐 더 먼 곳으로 되돌아가야 할 텐데. “칠차 한일 각료 회담이 오늘 오전 일본 외무성 대회의실에서 열려, 양국 관계 일반과 한반도 및·‥.” 뒤늦게, 그는 저 막막한 말들이 돌임을 알았다. 지금까지 그의 둘레에서 그를 억압하던, 버스 안의 사람들이 저만큼 짝지어 웅성대던 말들은, 거기에 비하자면 차라리 엷고 투명하고 연약한 유리벽처럼 여겨졌다. 말―돌이 말―유리를 깨부수며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져 쌓이고 있었다. 차창 밖 불빛들이 조금씩 더 밝아져 왔다. 이제 차창에 반영된 차 안을 보기 위해서는 밖의 빛을 피하는 어느 순간의 어느 각도가 필요했다. 거리에는, 여러 불빛 때문에 여러 그림자를 거느린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는 제 그림자를 앞세우고 계단을 밟아 올랐다. 오후 다섯 시까지 열리는 ‘순교자기념관’은 잠겨 있었다. 그는 기념관 앞의 ‘척화비(斥和碑)*를 두들기다가, 건물을 둘러친 난간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무심코 두 번째 모서리를 돌아 강 쪽으로 걸어가려던 그는 우뚝 발길을 멈췄다. 난간의 저쪽 끝에, 난간을 붙잡고 서서 강물을 굽어보는 조각 때문이었다. 어듐보다 진한 검은 의상에 희게 선 칼라로 보아 그것은 가톨릭 신부의 조각이었다. 조각은 무엇을 저렇게 열중해 보고 있을까? 차창에 보이는 것은 이제 완전히 거리 풍경으로 대치되어 있었다. 거리는 갈수록 휘황해져, 차창이 차 안을 되비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 본 차 안이나 지금 보이는 차 밖이나 결국 같은 유리면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라면·‥ 그는 그 사실을 가지고 제 마음을 우겼다. 저 거리 풍경은 결국 이 좁은 차 안이 되비친 것이라고. 다만 공간적으로 확산되어 보일 뿐이라고. 거꾸로 말해, 이 차 안은 저 거리의 응결이라고. 그렇다면, 창밖에 떠올랐던 그의 다른 얼굴은 저 거리 어디를 맴돌고 있을까? “·‥에 의하면,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임승택 씨 피살 사건을 수사 중인 인제경찰서는 임 씨 부인 이십사 세 김순옥 씨의 진술에 따라·‥.” 쏟아져 쌓인 말一돌들은 이미 담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의 돌담인가? 과거의 돌담을 떠나 다다른 현실의 울타리? 이 울타리는 또 언제 떠날 수 있을는지? 출항을 앞둔 배의 선장처럼 물을 응시하던 신부가 천천히 조각의 자세를 움직였다. 이제야 그의 기척을 들은 모양이었다.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빛 속에 신부의 얼굴이 부드럽게 떠올랐다. 그는 신부의 얼굴이 짐승으로 유추되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여기 계신 신부님이신가요?” 그가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여기 신부님을 찾으신다면·‥” “아니오, 그저 여쭈어본 겁니다. 실은, 신부님 뒷모습이 하두 처연했다 그럴까, 제 감정입니다만, 그래서·‥” 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꿈 이곳에 오곤 하지요. 여기 오면 신앙심을 가다듬을 수 있을까 해서요.” “신부님도 신앙심을 걱정하시나요?” “신부도 사람이니까요·‥ 차림을 보니까 학생 이신 모양이죠?” “아닙니다, 그저 실업자 한량입니다.” “무슨 자조의 뜻인 것 같군요.” “사실이 그럴 뿐입니다.” 사실·‥ 사실은 현실인가? “끝으로 오늘 저녁에 있을 국무총리의 특별 담화 및 기자회견을 예고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 아홉 시, 중앙청에서는 최근의 개헌 논의와 관련된 시국에 관해 국무총리의 특볕·‥” 그때 툭 그의 어깨를 건드린 자는 다시 옆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사내는 아까 일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성냥 좀 빌릴까요?” 그는 주머니를 뒤지며, 수상스러운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어디서 봤지? 그가 성냥을 내밀었다. 성냥불이 확 당겨져 오를 때, 그는 앗! ― 하며, 기억의 어느 장면에 겹쳐지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며 다시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부터 뒤쫓아다니기 시작한단 말인가? 그는 사내가 그림자처럼 바싹 발끝에 달라붙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제 것도 아닌데 저를 따라 움직이는 음흉한 그림자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감사합니다.” 성냥을 되돌려주는 사내가 웃었다. 벌어진 입속의 이빨이 날카롭게 드러났다. 부드러움에 자꾸 빨려 들어가듯, 그는 다시 신부에
게 말을 걸었다. “기념관 안에 뭐가 있나요?” “유품들하고, 사진, 그림, 또 복자들을 고문하던 형틀 같은 게 있지요.” “보고 싶군요.” “신자신가요?” “아닙니다. 전 종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긴?” “그냥 지나는 길에 들른 거지요. 저, 한 말씀 여쭈어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아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강물을 보고 계셨는지요?” “여기 올 때마다 생각해보는 거지만, 죽음의 순간에 순교자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엇을 보았을까 하는 거였지요.”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내 눈에는 그저 강물밖에 안 보이는군요.” 그는 어둠이 얹혀진 강물을 굽어보았다. 그리고 그 둔중하게 흐르는 어둠 속에서 익사하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는 제 자신의 일그러진 표정과 안간 몸놀림을 보았다. “우리 시대에도 순교라는 게 가능할까요?” 그가 물 위에 뜬 제 모습을 지우려고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혹 신부답지 않은 생각일지 모로겠습니다마는, 아직도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더 살아서 고통 받는, 말하자면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형태가 아닐지요·‥.” “청량리 내리실 분 준비해주세요!” 여전히 꾀죄죄하고 기계적인 안내양의 목소리에서, 그는 사내를 따돌릴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심하고 있던 사내가 흠칫 놀랐다. “에이, 여기서 내려버리자.” 혼잣소리처럼 중열거리며, 그는 재빨리 달려 나갔다. 그가 내리면서, 차는 떠났다. “휴우…” 그는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숨을 돌렸다. 가만, 그런데 이제 어떡하지? 길 건너 청량리역 광장이 봄비고 있었다. 그는 봄비는 사람들 속에 끼어보고 싶었다.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다. 불가능하겠지만. 신부와 헤어져, 그는 기념관 밑의 텅 빈 정원으로 내려와 동상과 기념비와 묘비들 사이를 오락가락 서성거렸다. 발길이 끌리는 대로, 그는 비에 젖은 성모 마리아의 석고상 앞에 마주 섰다. 이 무지한 인간이 철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리는 단 한 번의 기도를 받아주시옵소서. 신이여, 당신이 진정 계셔 자비로우시다면, 당신을 믿지 않음을 용서하소서. 저는 당신을 지나 더 먼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옵니다·‥ 그리고 그는 물속에 허우적거리는 제 넋을 건져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성모상 옆의 뚫린 철망을 넘어, 비에 젖어 미끄럽고 가파른 바위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슨 낌새 때문이었는지, 그가 다시 성모상을 돌아보았을 때, 틀림없는 착각이었겠지만,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보는 성모상이 희게 빛났다. 희게 솟구쳐 광장을 내려보는 시계탑 밑에서, 그는 광장을 오가는 온갖 사람들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하나의 거대한 유동체를 이루고, 시시각각 그 모습을 뒤바꾸고 있었다. 어느 순간, 유동체의 한 촉수가 불쑥 뻗쳐 나와 그의 팔을 낚아챘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며 물러서던 그는 시계탑에 등판을 부딪혔다. “제대하셨는데 몸 좀 푸셔야지. 어제 온 아가씨랑 연애 한번 안 할려우?” 그렇게 흉터가 생생한 여자와 어떻게 그 짓을 하란 말이냐? 흉터를 감출 줄 아는 여자라면, 그래서 그 짓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자신을 잊게 해준다면, 그것이 문드러지도록 백날 천날이라도 그러마. 개가 되어. 둘 중의 누구 탓인지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었지만. “돈이 없수다.” “그러지 말구 가셔, 응?” 옆으로 몸을 비낀 그는 유동체에 둘러싸여 숨이 조여질 것 같은 공포에 뒷걸음쳤다. 겨울이었다. 그리고 훌쩍 봄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가지 않았다. 여름이 와도 겨울은 가지 않을 것이다. 물 끝을 밟고 서서, 그는 제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덜덜 떨어대기 시작했다. 옛 나루터의 흔적 위에 빗방울이 희끗거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의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수건에 싸둔 그것들은 조금 젖어 있었다. 성냥은 몇 번씩 켜지지 않았다. 간신히 일어난 불길로, 그는 어두운 강을 비쳤다. 그의 시선은 몇 발자국 앞에서 차단당했다. 그를 둘러치고 있는 것은 어둠의 벽이 아니었다. 벽은 이미 없었다. 벽이라면 뛰어넘거나 부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안개처럼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무엇이었다. 한 발을 옮기면, 한 발 전과 똑같이 휘감기며 뭉뚱그려지는 어둠의 안개. 그는 다시 한 번 성냥에 불을 댕겼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으로 비를 가린 담배 끝에 한 점 불꽃이 그의 호흡에 따라 빠끔 달아올랐다가 스러지곤 하였다. 그는 담배를 든 손을 다른 손등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담뱃불을 젖은 손등에 눌렀다. 치익! 뜨거움과 동시에 불이 꺼지고, 점의 아픔이 손을 꿰뚫으며 직선으로 파고들었다. 보이지는 않으나 수억만 개의 줄기로 어둠을 헤집고 있을 빗속에서, 그는 몸 안으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의 무게를 느꼈다. 그 없는 무게를 느낄 정도로 별안간 예민해졌던 감각이 엎어지며, 그는 끝없는 몽릉함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는 몽유병 환자처럼 몸을 움직여 돌아갈 길을 찾았다. 참 이상하지, 역이란 사람들이 돌아오는 곳이기도 한데, 꼭 떠나는 곳이란 인상을 준단 말이야. 돌아오며 떠나기, 떠나며 돌아오기… 그가 거머쥔 붉은 전화기가 위험 신호로 보였다. 그가 집의 전화기를 울렸다. 밤학교의 전화기를 울렸다, 잠 속에서 잠 밖을 거닐듯 거리로 나온 그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일심 학원이죠?” “네, 그런데요.” “아, 김 선생님이세요? 전 영어를 가르치는·‥” “아, 웬일이세요. 오늘 수업이 없으시던가요?” 봄. 겨울. “어머니, 저예요. 제가 왔어요.” “너구나. 그래 어제 온다더니, 연락도 없구. 얼마나 걱정 했는데.” …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기신 모양이죠? 혹 편찮으신 건 아니구요?” “그렇진 않구. 거기 갈 수가 없어서요.” ·‥ “아버지 좀 바꿔주세요. 아버진 또 공부만 하고 계신가요?” “뭐라고?”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놈아, 너 지금 무슨 소리냐? 술 마셨니?” ·‥ “네에, 학생들에게 그렇게 전하죠. 무슨 나쁜 일은 아니구요?” “아닙니다. 그냥 갈 수가 없어요.” “내일은 괜찮으세요?” “내일도 안 됩니다.” “그럼 언제나?” “다시는 안 됩니다.” “네?” ·‥ “아니에요. 술 안 마셨어요.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얘야, 너 왜 그러니? 정신 나갔어?” “아버지!” … “다시는 갈 수가 없어요. 거길 지나왔거든요.” “지나가다뇨?” “더 가야 해요. 이제는 더 가야 한다구요.” ·‥ “얘, 얘, 정신 있니?” “아버지, 저 돌아왔어요. 할아버지가 계셨던 산골 학교를 들러오느라고 늦었어요. 이제 거길 지나왔으니, 아버질 또 지나가야지요·‥” 어디로 떠나갈 것인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나는, 그의 두 시간을 따르던, 내 의식을, 정지시킨다. 나의 밖. 늦은 봄 또는 이른 여름의 밤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텅 빈 그의 방, 창 안의 어둠 속에서 무수한 빗소리가 덩어리져 들려온다. 창문으로 다가가, 나는 유리창에 이마와 코를 누르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방 밖으로부터 흘러 들어가는 불빛 속에서 간혹 반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소리의 모습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작은 소리의 응어리들이 방 안에 투영된 창문 앞의 사철나무를 두드린다. 소리는 나무를 물들이고, 불빛은 물기 속에 스며 나무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불빛들은 여기저기 가지의 끝에서나 잎새의 끝에서 다시 뚝 뚝 뚝 떨어져 내린다. 창 밑의 깊은 어둠 속으로 불빛들이 스러질 때, 어둠의 우물 안에서 설핏 빛의 소리들이 울려 나온다. 창문을 열고, 나는, 문을 열고, 나는, 그 깊은 깊이를 향하여 몸을 기울인다.
『문예중앙』 (1981년 가을호); 『낯선 시간 속으로』 (문학과지성사 초판 1983/재판 1997)
이인성(李仁星)
1953년 경남진해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단편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당대 현실의 부조리와 폭압성을 강렬한 언어적 부정의 형식으로 드러내면서 지배적이고 타성화된 언어 형식에 도전하는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소설집 『낯선 시간 속으로』 『한없이 낮은 숨결』 『마지막 연애의 상상』 『강어귀에 섬 하나』, 장편소설 Γ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