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王祖 實錄上의 有名한 女性들*
■ 인수대비(소혜왕후)
1437년 9월 8일
+10월 7일 - △천칭자리 : 사회성
덕종(추존)의 정비.
수양대군의 맏아들인 도원군 장(暲 - 의경세자)과 혼인하여 군부인으로 왕실과의 연을 맺었으며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이후로 자식 교육과 아랫사람을 경계함에 추호의 빈틈도 없어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내훈(內訓)》을 편찬. 《어제내훈(御製内訓)》이라고도 한다. 《열녀(烈女)》,《명심보감(明心寶鑑)》,《소학(小學)》 등에서도 부도(婦道)의 규범이 될 만한 것을 뽑아 7편으로 편집, 1475(성종6)년에 국문으로 번역되어 간행되어 궁중어(官中語) 및 존대어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교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서적을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 폐비윤씨
+7월 6일 - △게자리 : 개성
성종의 계비
1474년 공혜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왕비가 되었으며 1476년에 중궁으로 진봉.
폐비윤씨는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록에는 그 죄가 매우 자세히 열거되어 있어 근간, 미디어 등 매체에서 여러 형태로 묘사되어진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憲王后)에 추숭되고, 그녀의 묘는 회릉(懷陵)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내린 관작 또한 모두 폐위되어 원상복귀 되었고, 회릉 역시 폐비윤씨지묘(廢妃尹氏之墓)로 격하되었다.
■ 장렬왕후
+12월 3일 - △사수자리 : 창시자
인조의 계비.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1651년 자의(恣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에 대한 복상(服喪)문제로 서인·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는데, 서인의 승리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 장희빈
1659년 9월 19일
+11월 13일 - ▲전갈자리 : 매력
궁녀로 입궐하여, 왕자 윤(후의 경종)을 낳은 후 희빈에 봉작, 끊임없는 모사로 인현왕후를 폐서인시키고 마침내 국모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여인.
이후 희빈은 숙종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이용하여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장희빈은 지나친 투기와 완악한 성정으로 숙종의 총애를 잃게되고, 중궁전에 앉은 지 5년만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것. 그러다가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한 뒤, 희빈이 거처하고 있던 취선당에서 신당(神堂)을 차려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사실이 발각된다. 결국 숙종은 사약을 내리고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와 함께 죽음을 맞았다.
■ 인현왕후
+5월 15일 - △황소자리 : 선언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중궁으로 뽑힌다.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 숙빈최씨
+12월 17일 - △사수자리 : 거인
숙종 19년이던 1693년 4월 최씨를 숙원으로 삼았다, 이듬해 6월엔 숙의로 삼고, 그해 왕자(연잉군 - 후의 영조)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이듬해 6월엔 귀인으로 삼았고, 4년 뒤인 1699년엔 단종대왕을 복위시킨 경사 때문에 다른 후궁들을 승급시키면서 최씨도 숙빈으로 봉해졌다.
오늘날, 최씨의 출신에 관해 의견이 분분해, 크게 1. 무수리설, 2. 침방나인설, 3.각심이설로 압축되어지는데 훗날 영조의 열등의식으로 미루어 궁인의 수발을 들어주던 각심이였을 것으로 점 쳐지나 이 또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 혜경궁 홍씨 - 경의왕후
+8월 6일 - △사자자리 : 균형
영조 20년인 1744년에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세손과 정조가 있다.
1762년 7월 4일(윤5월 13일) 부왕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참혹한 형벌을 내렸으며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여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
1795년 그녀가 회갑을 맞는 해에 회고록인 《한중록》을 저술하였다.
■ 명성황후
1851년 9월 25일
+11월 17일 - ▲전갈자리 : 매력
고종의 정비.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둘째 아들마저 연이어 잃는 등의 비극을 겪었으며,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대고모뻘로, 5대조 민진원의 누이였던 민비는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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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얘깃거리가 풍성한 왕실 여인들 위주로 추려, 이곳저곳에서 발췌하였으며 최근 종영된 드라마로 인해 화제가 되었던 조귀인이나 민회빈 강씨, 또 연산조朝 - 장녹수같은 인물들의 해당성좌도 함께 게시 해 보고자 눈에 불을 켜고 온라인상을 이 잡듯 뒤졌으나 알아내지 못해 못내 아쉽씀다.. 쩝...
왕실 내외명부의 균형에 누陋가 된다 여겼던 탓인지 윤씨를 폐서인 한것으로도 모자라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인수대비께서 우아함의 상징인 천칭좌였다는데에 적쟎이 놀랐고
좋은시절 머무를때 세勢 하나 구축하지 못하고 연정만을 좇다가 자승자박, 스스로 멸滅해버린 장희빈같은 인물이 나와 같은 전갈좌라는 사실은 썩... 유쾌하지 않더라는... -_-*
매번 느끼는거지만.. 별자리는 통계에 기인할뿐 맹신하거나 지나치게 매몰되면 안되겠다는 개인적인 생각, 썰 풀며 또 재밌는 별자리관련 얘기가 있으면 울 동방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겠씀닷!
첫댓글 호~ 자료가 너무 훌륭해요.
오호 장희빈과 인현왕후 전갈과 황소 오포 ㄷㄷㄷㄷ 역시 전갈은 팜므파탈? 명성황후도 전갈 그럴듯. 질투의 게자리~평소에 게자리 보면서 현모양처 아니면 궁중암투라고 생각했는뎅 ㅎㅎ
오좋은자료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매력의 주간이 두드러지네요. 황소 전갈은 그런 관계인가..
음력 9월생 여자들.....뭔가가 있음.....
재밌게 잘보고 갑니다ㅎㅎ 조선왕조 여인들의 특성을 별자리로 해석이 인상깊네요ㅎㅎㅎ
이런거 넘 재밌어요 ㅋㅋㅋ
와~~~재밌어요. 훌륭한 자료네요.ㅋㅋ
전갈/황소 그런관계인가?......장희빈.명성왕후 의외네요.잘 알려진인물중에 악녀이미지(?)로 전갈이라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