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게재 및 인터뷰
■ 일 시 : 2023. 7. 18(수) 10:30
*국방일보 : 2023.7.26 게재
■ 장 소 : 서울시 지부 사무실
■ 인터뷰 : 조수연 기자외 1명 (010-9554-5053)
■ 대 상 : 박덕환 고문외 1명
■ 인 터 뷰 주 요 내 용
*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 6·25참전유공자회 박덕환 서울시지부 고문)
○ 6·25전쟁 당시 어떤 임무 수행
○ 참전 당시 전투 상황
○ 나라를 위해 싸웠던 순간들 중 기억에 남는 일화
○ 마지막으로 후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 인터뷰 장면 및 국방일보게재 주요내용 스 케 치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6·25참전유공자회 박덕환 서울시지부 고문
입영통지, 무서움보다 당연한 일 받아들여
구급낭 메고 전장 누비며 부상병 응급처치
머릿속엔 전우들 신음소리 가득해…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47. 6·25참전유공자회 박덕환 서울시지부 고문
나라의 부름 받고 입대 친구 3명과 마을 사람 배웅 받으며 화차에 몸 실어…
박덕환(92)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고문은 6·25전쟁 때 국군 12사단 37연대 의무중대원으로 활약했다. 강원도 원통리, 사창리, 김화지구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르며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겪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를 넘고 넘었다’는 그의 증언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전장의 참상이 떠올랐다. 원통리전투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린 박덕환 옹을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마흔일곱 번째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글=조수연/사진=이경원 기자
‘모든 건 5분’…극한 훈련 견뎌내
1951년 10월 경기도 안성. 스무 살 성인이 된 박옹은 동네 병원에 취직해 청소·심부름 같은 소일거리를 하며 용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전쟁 통에 입대하는 아들을 걱정할 부모님을 생각하니 목이 메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무서운 것보다 ‘당연히 군대는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전쟁이 났으니 자원해서라도 참전해야 할 판에 마침 갈 때가 돼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정식으로 입대하는 게 축복이었죠.”
마을에는 군가가 울려 퍼지고, 정든 마을 사람들이 나와 전선으로 떠나는 청년들을 환송했다. 박옹도 친구 3명과 배웅을 받으며 입영 화차에 몸을 실었다. 박옹은 제주도로 건너가 제1훈련소 제1연대에서 80여 일 동안 신병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다 마칠 무렵, 국가안보 수호에 더 일조하겠다는 일념으로 하사관학교를 지원했다.
“기왕 한 번 하는 군 생활, 좀 더 의미 있는 역할로 기여하고 싶어 하사관학교 문을 두드렸습니다. 입교하자마자 그야말로 극한 훈련이 시작됐습니다.”
하사관학교에서는 48일간 훈련이 이뤄졌다. 그는 “죽을 뻔했다”는 말로 당시의 고됨을 표현했다. 강추위가 살을 에는 한겨울 얼음호수에 들어가 애국가를 불러 가며 체력단련을 했다. 밥 먹는 것, 씻는 것 모두 5분 안에 해야 했다.
훈련 중에는 배고픈 게 가장 큰 설움이었다. 포복훈련을 받을 땐 밭에서 제주도민들이 심어 놓은 고구마와 감자를 몰래 파먹었다. “배고픈 건 이루 말할 수도 없었지요. 먹어야 살고, 살아야 싸우죠. 어쩔 수 없었어요.”
1956년 5년의 군 생활 마치고 전역
하사관학교를 수료한 박옹은 북한군과 대치 중인 강원도 원통리에 배치됐다. “군 입대 전 병원에서 소일거리 했던 경력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수술까진 못 해도 지혈법, 주사법, 붕대법 등을 익혀 전장에 투입됐습니다.”
박옹은 적십자 완장을 착용하고, 구급낭을 멘 채 전장을 누볐다. 그의 머릿속엔 부상에 고통스러워하던 전우들의 신음, 피와 시체 썩는 냄새가 뒤섞여 진동하던 전장, 잿더미가 돼 버린 마을과 그 위를 뒹굴던 민간인 주검이 또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전투는 ‘인해전술’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병력이 근접전투를 했기 때문에 부상자가 많았어요. 그래서 시체를 넘어 다니면서 치료를 해야 했죠. 후송이고 뭐고 응급처치가 끝나면 다른 부상병에게 가야 했어요. 우리가 치료하면 노무자들이 후송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도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은 전투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박격포탄이 터졌다. 취사장에도 포탄이 떨어져 아수라장이 됐다. 그의 옆에는 위생병 2명도 함께 있었다.
“위생병 2명과 부대로 돌아가는데 포탄이 터져 돌덩어리에 파묻혔어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박군’ 하고 같이 갔던 일등병을 부르니 다행히 대답을 하더군요. 돌덩어리들을 치우고 파편에 맞아 피 흘리는 위생병을 꺼내 부축해 가며 대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박옹은 1956년 5년에 걸친 군 생활을 마치고 명예롭게 전역했다. “당시 계급은 이등병, 일등병, 하사, 중사, 일등중사, 이등상사, 일등상사 순이었어요. 하사관학교를 나온 나는 이등상사로 군문을 나섰어요.”
사지(死地)에서 살아 돌아온 경험은 박옹이 수많은 인생의 파고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또 매 순간을 감사하게 느끼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전역하자마자 대기업에 입사한 것도 전쟁에서 살아남은 경험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에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었어요. 덕분에 대형 식품회사에 들어갔고, 퇴직 후에는 학용품 제조업 회사를 차렸어요. 비교적 풍족하게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군인정신’이 밑거름이 됐습니다.”
6·25 바로 알리기 교육 적극 참여
박옹은 대기업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은퇴 직후 6·25참전유공자회 송파지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어 서울시지부 부지부장, 감사위원 등을 맡았다. 최근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에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현재는 서울시지부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은퇴 후 우리 참전용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어요. 회사에서 주도적으로 일했던 전문성을 토대로 작은 기여를 하고 싶었어요. 6·25참전유공자회 송파지회에서 일하던 중 감사하게도 서울시지부에서 찾아주셔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옹은 현재 서울시 예하 25개 지회에 매달 A4용지를 포함한 비품과 간식을 보내고 있다.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가 매년 70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6·25 바로 알리기 교육’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후손들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아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박옹은 6·25전쟁 중 전우들과 찍은 사진을 여러 장 간직하고 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위해 잠시 돌려받았다며 국가보훈부에 제출했던 사진을 보여 줬다.
빛바랜 사진에는 앳된 박옹의 모습과 ‘전쟁 중 막간을 이용해 찍은 사진’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가 나라를 위해 기꺼이 제출한 사진은 서울시청 서울도서관에 전시돼 있다. 그는 후손들을 향한 당부를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절대 거꾸로 배워선 안 되고, 역사교육이 바로 서야 합니다. 군 후배들과 자라나는 새싹인 청소년들이 올바른 대적관과 안보관을 확립하길 바랍니다.”
첫댓글 박덕환 고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