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행복
새옹지마는 있다.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다지 슬퍼할 것이 아닌 이유는 그 나쁜 일로 말미암아 도리어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옹지마의 법칙을 너무 크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늘 그렇게 법칙대로 되지 않는다. 불행한 일은 더 이상 좋은 일로 연결되지 않고 그냥 그것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법칙대로 되지 않는 인생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악한 처지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나쁜 형편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면서 산다. 왜냐하면 평안뿐 아니라 환난도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는 환난도 평안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매우 역설적인 말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불행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한 여성이 남편을 여읜다는 것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생계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그러했지만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도 여성들에게는 사회활동이 그다지 넓게 허용되지 않았다. 평범한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허드렛일뿐이었다. 이런 시대에 남편을 여읜 여성의 인생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매우 막막한 것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혼자의 몸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자녀들까지 딸려 있다면 (4절을 참조할 때 이런 가능성은 매우 높다) 미망인 된 여성이 헤쳐 나아가야 할 길이 얼마나 버겁고 험난할지 불 보듯이 뻔하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여성을 가리켜 “참 과부”라고 불렀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일찍 남편을 여읜 상태에서 형언할 수 없이 숱한 역경을 통과하면서도 꿋꿋이 견뎌낸 여성을 지시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성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여성이 일생동안 싸워야 할 가장 무서운 대상은 외로움이란 적이다. 특히 남편 없이 혼자서 힘들여 기른 자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곁을 떠나가고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매 순간 엄습해오는 외로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참 과부의 상태를 오직 한 마디 “외로운 자”라는 말로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 여성이 남편과 사별한 것, 게다가 이제는 외롭게 살게 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추천한 말한 인생은 아니다.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아무도 자신이 이런 인생을 맞이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과부됨과 외로움을 반드시 불행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과부 되어 외로운 여성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면 말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 소개하는 한 여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 여성은 과부 되어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였다. 이 여성은 과부된 후에 그냥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 여성은 과부 된 것으로 말미암아 무슨 좋은 일을 만난 것도 아니고, 외로운 인생으로 말미암아 무슨 즐거운 삶을 얻은 것도 아니다. 이 여성에게는 새옹지마란 없었다. 하지만 이 여성은 과부가 되어 외로운 나날을 사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리어 그 형편에서 믿음의 길을 차분히 걸어갔다.
인생의 ‘새옹지마’ 기대 못해
이 여성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 보여주었다. 이 여성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는 표식으로 밤낮 간구와 기도에 힘을 썼다. 이 여성에게 불행은 그냥 불행이었다. 그러나 이 여성은 불행에서 행복을 찾았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불행의 행복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을 행복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요즘 들어 자주 곱씹는 말씀이 있다. 잘 이해되지 않다가도 언뜻 언뜻 깨달아지는 오묘한 말씀이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최상의 즐거움 주는 Win-Win 작전”(딤전5:6)
문화의 최종목적은 쾌락이다. 사람은 땅을 갈고 양을 치든지, 옷을 입고 집을 짓든지, 먹을 것을 팔고 마실 것을 사든지 결국은 자신을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문화의 모든 형태의 밑바닥에는 쾌락을 지향하는 아주 끈질긴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속성은 농업, 목축, 패션, 건축, 상업, 무역 등등 모든 형태의 문화행위에서 예외 없이 발견된다.
쾌락 추구하는 문화생활
그래서 쾌락지향성을 무시한 채 문화를 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 지금은 쾌락이 아예 문화상품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그릇되었다고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쾌락은 문화의 최종목적이자 최종상품이다. 사람은 자신을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문화를 형성하며 문화는 사람에게 자신을 즐기는 것을 상품으로 제공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쾌락은 신앙의 마지막 적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부와 관련하여 가르침을 주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여성과 일락을 좋아하는 여성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딤전 5:5-6). 비록 논문 쓰듯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대조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신앙과 쾌락이 조화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도 바울의 말마따나 대체로 신앙은 쾌락에 거슬리고 쾌락은 신앙과 부딪힌다. 보통 하나님을 바라는 것과 자신을 즐기는 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일처럼 보인다. 우리 주위에 실제로 많은 경우 이런 현상이 짙게 나타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을 즐기는 쾌락을 추구하다가 안타깝게도 신앙을 고스란히 말아먹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해설은 매우 계몽적이다. 예수께서는 여러 곳에 뿌려진 씨들이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차례대로 설명해주시면서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들의 처지를 이렇게 일러주셨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 8:14 개역개정).
이 비유에서 가시떨기는 염려와 재물과 향락을 의미하는데 이 세 가지는 어느 정도 점진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처음에는 삶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가 재물을 얻게 되면 결국 향락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 따르면 신앙의 최종적인 적은 쾌락이다. 쾌락은 신앙을 말아먹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고 말한다. 신앙을 잃어버릴 정도로 쾌락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죽은 인생이다. 그는 살아있어도 죽은 자이다. 자신에 대한 측면에는 살아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측면에는 죽었다는 말이다. 육적으로 보면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보면 죽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쾌락으로 신앙을 질식시킨 사람의 실체이다. 그래서 그의 쾌락이란 하부에 머물고 상부로 전진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발견한 즐거움이 자신의 삶에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자신에 대한 쾌락을 예리하게 분리시키는 이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정작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겨우 자기를 즐기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헛되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오직 자기만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하나님을 진정한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으로 자기의 인생을 즐거워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을 즐기는 삶, 헛될 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도 살고 자신에 대하여도 사는 그야말로 영적인 윈윈 작전이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있기에 육적으로도 살아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사람에게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과 육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