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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버지.
나의 유년시절은 넉넉하고 풍성했다. 풍요로웠던 내 유년의 기억열매 나무는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는 정신적인 기둥이기도 하다. 칠남매 막내인 나는 늘 사랑을 독차지 했다.
특히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면 먹을 것이
많아 신이 났었다. 할머니께서는 특별한 음식이 생기면 어린 손녀 손자들을 모아 놓고
분배를 하신다. 하면 늘 나에게는 좋은 것을 주셨다. 과일의 경우에 나에게는 제일 큰 것을
주셨다. 나는 내 자신이 늘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유년시절부터 어연중에 학습되어 온 듯도
싶다. 엄마 아버지! 부르기만 해도 안락한 의자에 앉은 듯 하다. 나의 친정아버님이
살아 계시면 지금쯤 아흔 넷이고, 친정어머님은 살아 계시면 여든 일곱이시다. 두 분은
1910-1920년대 출생이시며 일제 식민지를 체험하셨다. 또한 6.25도 경험하신 세대다.
일제식민 시대에는 기본적인 식량이 해결되지 않았던 시기였다고 한다. 어렵게 농사를
지어놓으면 일본에서 곡식 공출이란 명분으로 모조리 거두어 가 버린단다. 하면 사람들은
이른 봄이면 보릿고개를 감당해야 하셨단다. 벼 수확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공출로 수탈을
당하게 되고 그로인해 사람들은 공출을 당한 만큼 배를 곯아야 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배고픔이라고 하셨다. 어느 해는 공출을 피하기 위해
땔나무짐 속에 쌀을 숨겨 두셨단다. 다행이 일제로부터 공출은 면했지만, 그 속에 있는
쌀을 꺼내어 보니 이미 다 썩어 먹을 수 없었다고 했다.
보리가 익어 갈 무렵이면 저장된 양식이 바닥이 난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와서 송기 밥을 해 먹고, 무 밥과 고구마 밥을 해 먹었단다. 양식이 모자라기에
쌀과 보리쌀은 조금 넣고 시래기를 많이 넣어 가마솥에서 푹 삶아서 대가족의 끼니를 늘렸다고
하셨다. 곡식으로는 양식이 충분하지 않아 산과 들에서 나는 풀뿌리로 끼니를 연명하신 듯 하다.
이른 봄이면 양식 대용으로 쑥이 수난을 당한다고 한다. 풀죽으로 끼니를 떼우고 나면
영양실조로 얼굴이 퉁퉁 붓는다고 하셨다. 가족으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와 엄마,
우리 형제자매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몇 년 동안은 삼촌과 숙모도 함께 사셨다고 한다.
그 대가족이 한 집에 살기 위해서는 제일 큰 문제가 양식이라고 했다. 보통 소시민들은
식량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일제 앞잡이를 하던 사람은 배 불리 밥을 먹었단다.
나의 친정 집 아랫집에는 일제 앞잡이 즉 친일파 집이 있었는 데 그 집에서는 늘 부침개를
부치는 냄새가 온 동네를 진동했단다. 담 너머로 내려다보면 뒤안간에 부침개가 넓적한
소쿠리에 척척 널려져 있었다는데 엄마는 그 부침개가 그렇게 먹고 싶어셨다고 하셨다.
다들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가 아니라 그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서 식욕에 강한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은 부럽지 않았을테다.
나의 친정아버님께서는 5형제의 맏이셨다. 많은 형제와 당신의 자식 칠남매를 먹여 살리기는
좁은 토지로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일본에 노동을 하러 가셨는데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한 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쉬는 시간을 주지 않아 아버님께서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휴식을 취했단다. 아버님은 배설물 위에 앉아서 쉬셨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시면 고된 노동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님께서
일본에서 돈을 벌어 오신 것으로 한국에 나와서 땅을 사셨다. 친정집은 땅이 적은편은
아니었다. 그 당시 귀했던 밤밭이 있었고 논이 제법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형제들을
결혼 시킬 때 논 몇 마지기 씩 떼어 살림을 내어 주고 나니 정작 우리에게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남은 것으로 당신의 자식 칠남매를 키우고 교육을 시켜야 했다.
아버님께서는 일본에서 고된 노동을 하시면서 설움을 받으신 탓인지 당신의 동생만은
대학공부를 시킬려고 마음을 먹으셨다고 한다. 지금 삼촌이 살아 계시면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교육만이 신분상승이고 살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려운 일을 행하셨던 것 같다.
1945년 해방 전 후, 삼촌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일장에 내다 팔아 등록금에 보태었다고 하셨다. 삼촌이 대구에서 대학을 다닐 당시
청도군에서 대학생이 한 두 명 정도 배출 되던 시기라고 한다. 삼촌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으로
나는 자라면서 동네사람들에게 늘 대우를 받고 자랐던 기억이 난다. 그로인해 친구들에게는
어떤 우월주의가 생성 된 듯도 하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붙인 수식어가 ‘학사집안’ 이었다.
친정 집 대청마루에는 사각모를 쓰신 삼촌의 사진이 가보처럼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이면 사진속의 사각모자는 늘 아버지에 대한 상찬의 도구로 전락한다. 밥도 제대로 배불리
먹지 못할 그 어려운 시기에 동생을 대학까지 시킨 훌륭하신 분이시라고 말이다.
청도경찰서장 차가 우리 집 골목에 들어서면 동네의 장정들은 친정집 대문 앞에서
양복을 갖추어 있고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어릴 때 권력이 어떤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일찍 체험했다. 친구사이라고 할지라도 권력 앞에서는 현실적인 관료주의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어릴 때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나의 친정어머님 세대분들은 고된 농사일 뿐만 아니라 길쌈이 필수였다고 하셨다.
천이 없으니 길쌈을 해야 가족들 옷을 만들 수 있기에 말이다. 길쌈을 하지 못하면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로서의 인정을 못 받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네 어른들에게 길쌈을
배워야 했단다. 그 당시는 먹는 것 뿐만 아니라 입을 옷조차 귀했으니 직접 길쌈 작업을 해서
천을 만들었던 것 같다. 길쌈은 또 다른 엄마의 역할과 며느리의 역할을 대변했다.
그 당시에는 각 가정에서 삼나무 씨를 심었단다. 길죽한 삼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어
꽃이 피게 되면 껍질을 벗겨 가마솥에 삶은 뒤 시냇가에 담구어 놓는단다. 그것을 삶아서
삼베 실을 뽑는다. 삶을 때는 된장과 양잿물을 넣어 삶으며 푹 삼긴 삼은 하얀 실처럼
엉긴다고 한다. 그 시대에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함께 감당하던 시대였다. 길쌈도
농사일을 할 때에는 할 수 없고 농한기에 짬을 내어서 배워야 한단다. 길쌈을 하는 작업은
허벅지 위에 실을 올려 놓고 손으로 밀어서 실을 가늘게 만든다고 한다. 무엇보다 실을 뽑기
위해서는 두 이빨이 잘 맞아야 실이 가늘고 예쁘게 나온다고 한다. 한참 작업을 하다 보면
허벅지에 물집이 생기고 살의 껍질이 다 벗겨져 벌겋게 피멍이 드셨단다. 부모님 세대들은
지금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정말 고달픈 삶을 사셨는 것 같다. 나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그 지긋지긋 하셨다는 공출과 엄마의 길쌈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또한 나의 친정집도
유교사상의 핵심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내 위에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산업현장에 취직했다. 70년대 산업화 붐이 일어나면서 농촌 처녀들이 대거 도시로
밀려 들 시기였다. 열악한 근로여건 속에서 언니가 일했던 곳은 봉재공장이었다.
언니.
친정집 형제는 3남4녀이다. 비교적 키가 큰 친정의 유전인자를 제대로 받지 못한 이가 바로 위의
언니이다. 돌연변이인 듯 하지만 아마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받았으리라. 언니의 상징은 늘
작은 키라는 것이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숨을 조이지 않았을까. 아예 언니의
이름대신 키 작은 아이가 언니의 이름 석자를 대신하기도 했다. 나는 키가 컸기에 키가 작은 언니의
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세월이 지난 후에야 언니에게 키 작은 것이 얼마나 심한
컴플렉스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년시절 키가 작다는 것 외에 언니에게는 기상대라는
별명도 있었다. 가족들이, 감난등이란 논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대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갑자기 하늘을 보며 비가 온다고 빨리 집으로 가자고 했단다. 어른들은, 아이의 터무니없는
투정을 무시하고 계속 일을 했지만 조금 있으니 언니의 예언대로 하늘에서 비가 후드득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동네사람들은 마저도 언니를 만나기만 하면 귀찮도록 날씨를
물어보곤 했다. 화야?(정화) 오늘은 날씨가 어떻겠냐? 비가 올 것 같으냐? 언니는 어른들의
질문에 그저 황당할 뿐이다. 무관심하게 일하는 엄마에게 부족한 애정을 갈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가 온다고 보채다가 어쩌다 기상이변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것뿐인 데 말이다.
언니를 떠올리면 비켜갈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옛날에는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아 읍내까지
갈려면 몇 십 리를 걸어가야만 했다. 가을이면 엄마는 홍시를 팔기위해 읍내 장까지 가셨고,
머리위에는 무거운 감반티와 등에는 젖먹이를 업었으며 옆구리 사이로 언니의 목이 인형처럼
달랑 거렸다고 한다. 그 후 언니는 사람들의 뇌리에 일국댁이의 등에 업혀 목만 달랑거리는
아이로 각인 되고 말았다. 또한 언니는 젖배를 곯아 정상적인 발육을 할 수 없었으며
어릴 때부터 작은 체구에 형제 서열에서도 어중간하게 끼여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애정과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던 언니는, 70년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붐을 일으켰을 때
힘든 미싱일을 했다. 그 당시 중학교를 졸업한 소녀들이 낮에는 수출업체에서 중노동에
가까운 미싱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야 하는 고달픈 인생의 참맛을 일찌감치
보아야 했다. 펄펄 끓어 넘칠 것만 같은 그 뜨거운 청춘들은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험한 세상의 파도와 일찌감치 맞닥뜨림 하였다. 언니도 그 소녀들 부류에 끼여 한 맺힌
사연을 안고 인생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주역이다.
언니는 고달프고 어려운 미싱일을 해서 막내오빠의 잡비로도 집어 주었다.
월급을 탄 봉투째 오빠에게 건내고 난 언니의 손에는 허탈감과 텅 빈 공허감만 남지 않았을까.
둘째 오빠도 결혼하기 전까지 언니와 함께 생활하며 동생 육신의 뼈 진액까지 빼내었다.
오빠들을 독립시킨 후 막내인 내가 언니에게 기생충이 되어 아직 자라나는 푸른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언니는, 스타킹 살 돈도 아끼느라 올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신었으며
신경만 쓰면 스타킹 하나로 열흘은 거뜬히 버틴다고 했다. 그 당시, 맞춤옷이 유행이었으나
언니는 그 시대의 문화를 마음껏 즐기지도 못하고 형제를 위해서 묵묵히 희생의 재물이 되어
주었다. 나는 언니의 청춘의 피를 3년 동안 진드기처럼 붙어 빨아 먹었다. 언니의 고달픈
삶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내 몸과 마음이 편하면 되는 것으로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으며 언니면 당연히 동생에게 헌신을 해야 한다고 여겼었다.
엄마 아버지께서는, 맏이로서 동생들에게 부모역할까지 해야 했으며 당신들의 3남4녀나 되는
자식들 뒷바라지까지 하기란 여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나의 학비를 대어줄 형편이
되지 않아 언니의 월급으로 나의 학비와 도시의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대신 착하다는 수식어가
언니의 멍든 가슴을 조금 보상시켜 주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이지 않았는가.
그 당시 나는 언니의 수고를 생각하기보다 언니에게 오로지 돈을 받아 내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목적이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 몇 과목의 학원수강을 빌미로 거금을 챙길 수 있었다. 몸집이 작은 언니는
동생의 학원 비를 대기위해 부산 땅처럼 넓은 천에 접은 꿈과 한의 실을 촘촘히 박아 대야만
했을 것이다. 언니의 육신은, 한 자루의 촛불이 되어 동생을 위해 뜨겁게 태워야만 했지만
나는 그의 육신을 태운 대가의 돈을 받아 학원을 수강 하지 않고 내 용돈으로 챙겨 버렸다.
나는 언니의 젊음을 송두리 체 빼앗아 버린 흉기 들지 않은 강도와 도적이었다. 시간은 쉬임없이
세월의 강을 따라 흘러간다. 문득문득 행여 언니의 가슴속에 부모와 형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물풀이 자라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와 아픔이 엄습해 올 때도 있다. 언니는 작은 키도
서러운 데 형제들을 위해서 자신의 희생재물이 되어야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 하지만 작은 키의 언니 내면에는 강한 무쇠의 기둥과 거인이 들어 있었다. 실리에
어두운 나와는 달리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으며 물질만능주의인 경쟁사회에서 거뜬히 살아 갈 수
있는 강한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다. 지금은 언니의 사업장을 혼자 당당히 이끌어 가고 있는
커리우먼이다. 유년시절부터 유달리 작은 키가 컴플렉스였던 언니! 심리학자 아들러처럼
형제간의 서열의 열등감을 잘 극복한 언니! 성공은 열등감에서부터 시작되며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성공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말이 나의 언니가 보기 좋게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작은 키와 형제간의 서열의 열등의식은 오히려 언니를 이처럼 강하고 대범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뚝이와 질경이 같은 삶을 살아온 인내심 많았던 언니는 꿈 많던 소녀시절을
미싱일을 하면서 밤이 되면 발이 저려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했다고 한다. 언니는 저려오는
발을 붙잡고 무엇을 위해 아니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까? 지금 생각하니 갑자기
현기증이 날려고 한다. 그 시대의 산업역군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이토록 경제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조용히 반문해 본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잘 살 수 있었으며 세계 석유소비국가로 손꼽힐 수 있었겠는가. 공부를 하고 싶어도 어려운
형편으로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던 70년대 소녀들의 피와 땀이 한국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발상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밀알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이 물질의 풍요로움을 기대나 할 수나 있었을까. 작은 체구의 언니는 맏이에게 시집가서 시동생과
시누이를 엄마처럼 따뜻하게 보살피며 진정한 아름다운 여자의 삶의 본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다.
언니의 삶을 보노라면 처음에는 미약하나 나중이 창대하리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부지런함과
인내심의 싹으로 성공의 나무를 키워낸 정화언니는 요즘 작은 키가 오히려 아담하고 예쁘게
보여서 더욱 여성스럽다. 젊은 청춘을 형제를 위해 헌신했던 언니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있으며 노후의 삶도 더욱 더 풍요롭고 윤택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순전히 겸손과 미덕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준 언니의 사랑과 수고와 고마움의
소산물이다. 유년시절 언니의 속을 뒤집어 놓고서 나는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이 지면을 통하여,
언니의 초기인생에 둘째 언니와 나로 인해 심한 왕따를 당해 마음에 깊은 상처 안겨준 것과
나로 인해 받은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남에게 원망을 돌리지 않고 묵묵히 헌신과
희생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나의 언니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여자이다. 이 아름다운 여자를,
"58년 개띠" 병술년을 맞이하여 존경하는 정화언니에게 오롯이 받친다.
오빠.
나의 친정 오빠가 세 명이지만 두 명은 공직자로 정년퇴직 하셨고, 막내 오빠는 현재
C금속 대표이다. 막내 오빠의 나이는 1952년생 쉰여덟이시다. 80년 대 당시에는 그룹 해체가
많았다. 오빠는 해체된 S그룹의 부회장 사위였다. 또한 오빠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할
당시에는 학교 교사가 품귀현상이 일어날 시대였다. 지금 교장 정도에 오른 선생님들이
오빠의 연배정도 된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것을
선호했다. 막내 오빠는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했고 모범생이었다. 한데 당시 엄마의 병환으로
주기적으로 병원 신세를 졌기에 살림이 기울어 막내 오빠를 초등학교 졸업 후 일명 뺑기
공장이라는 데 취직을 시켰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그 후
다음해에 중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늘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는
오빠의 우수한 성적표가 당신의 에너지 원천이자 희망이 되기도 하셨을 것이다. 청도군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일찌감치 청도군수가 자신의 딸과 정혼을 시키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는
말도 있었다.
오빠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은 부산대학교 72학번이다. 오빠 말에 의하면 70년대 당시
대학가에도 농촌출신 아이들과 도시출신의 아이들 사이에 학력의 괴리가 생기더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때도 지금처럼 학력지향주의가 심했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도시로 도시로의
교육열풍은 여전했다. 같은 고등학생이라고 할지라도 실력의 차이가 많이 났다고 했다.
농촌에서는 책도 제대로 구비되지 않아 독서량부터 도시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태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교육에 대한 열풍이 불었지만 그 교육의 기회는 오직 아들에게만
선택권이 주어졌다. 막내 오빠는 고등학교 3년과 대학 4년을 큰오빠네서 기거를 했다.
큰오빠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 당시는 다락방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키가 180센티
정도 되는 장정이 다락방에서 공부를 하고 잠을 잤다. 아내를 두 번이나 잃어야 했던
큰오빠네에서 막내오빠가 더부살이를 했으니 마음인들 편했으랴. 언젠가는 무슨 연유인지
큰오빠가 막내오빠의 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려 막내 오빠가 울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필시 큰오빠 자신의 분노를 동생에게 전가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숙을 하면 돈이 많이 들기에 형제 집에 더부살이를 했던 것인데 형님에게 눈칫밥도 많이
먹었으리라. 부산대학은 국립이라 등록금이 그리 비싸지는 않았지만 거듭거듭 이어지는
자식들의 결혼으로 부모님께서는 오빠 학비를 대시느라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다. 70년 대 초
당시 만원짜리가 신권으로 나왔다. 오빠가 친정집에 용돈을 가지러 오면 엄마는 만원짜리
한 장을 내어 주었다. 그 당시의 만 원짜리 가치는 컸던 것 같다. 오빠가 대학시험에 붙었다고
동네 할머니가 오빠에게 만원을 준 기억도 난다. 또한 주기적으로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
엄마의 병원비로 우리 집은 늘 돈 걱정을 해야 했다. 엄마와 아버지의 대화는 늘 돈 걱정으로
주고 받으셨다. 겉보기에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지만 실상은 늘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들은 우리 집을 부잣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다. 오빠의 등록금 날이 다가오면 엄마는 친척 집으로 돈을 빌리러 다녔다.
그래도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라 남에게 기죽지 않으며 희망을
잃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딸들에게 고등교육은 사치로 여기던 시대였기에 나의
친정언니들은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던 세대였다. 나의 친정오빠는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놓지 않았기에 성공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인터넷에
오빠 이름을 치면 오빠가 펴낸 책과 회사를 볼 수 있다. 오빠는 직장을 그만 두고 기업을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다. 현재 일본에 수출을 하고 있는 오빠의 사업장은 호황기를 누리고
있으며 이제 자본가로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오빠세대 친구들 중에 대학을 가지 못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많았다.
명절이면 오빠 친구들이 주최해서 윷놀이도 하고 노래자랑 즉 콩쿨대회도 개최했다.
당시 스물 살 초 중반의 혈기 넘치는 총각들은 동네 어른들을 위해 큰 행사를 준비했다.
오빠는 대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끝까지 머물지 못하고 윷놀이 행사 중간에 부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윷놀이 1등상으로는 소금 한 가마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금
한 가마를 타기 위해 윷놀이 표를 사느라 그 몇 배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모른다.
중간 등수는 양은 바케스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행사가 다 끝나고 나면
동네사람들은 북과 장구를 치며 다함께 한 바탕 놀이문화에 흡수하게 된다. 또한 언니 오빠
세대들은 가설극장에 많이 다닌 듯하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가설극장이 찾아 왔다. 가설극장은
천막을 쳐 놓고 그 안에 영화를 상영을 한다. 동네 처녀 총각들과 아줌마들이 가설극장이 오면
모처럼 외출의 기회가 된다. 상황을 봐가며 꼬맹이들은 가설극장 천막 밑으로 숨어들어
가면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기도 했다. 그 가설극장은 동네 처녀총각들의
연애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명절이면 콩쿨대회를 개최를 했다. 한데 상을 주는 것은 노래 실력에 따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미리 상을 정한다고 한다. 콩쿨대회 심사위원들은 동네 청년들이다. 일등상은
동네 형님뻘로 제법 힘이 막강한 사람에게 주었다. 즉 주먹에 센 정도에 따라 상의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 처녀총각들의 놀이문화는 소죽을 끓이는 따뜻한 사랑방에서
이루어진다. 모여서 먹을 것을 해 먹고 밤새 화토를 치며 놀았다. 발 이불을 하나 깔아 놓고
그 밑에 모두의 발을 넣고 둘러앉아서 대화를 하며 놀았다. 나는 그 당시 꼬맹이기에 언니
오빠들의 심부름을 많이 해 준 것 같다. 그들은 당시 귀했던 라면을 끓여 먹고 떡을 해 먹고
평소에 먹지 않던 별미를 해 먹었다. 그들이 노는 곳에 어물쩡거리다 보면 별미를 좀 얻어먹기도
한다. 또한 봄이면 동네 처녀총각들은 도시로 봄놀이를 가기도 했다. 그로인해 그들은 에너지를
얻어 그 해 농사일을 준비하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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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봄 학기에 사회변동론이라는 과목의 과제물 입니다. 각 시대변천사를 공부하면서 과제로 자신의 가족사를 레포트로 제출을 하라고 해서 급하게 써 놓았던 것입니다. 개인의 가족사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가늠하게 하는 것이지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정치적, 시대적, 사회현상을 한 눈에 볼 수 있지요....우리나라의 변천사를......저의 것도 적어 놓은 것이 있는데 너무 길어서 잘랐습니다. 이 글만 해도 보니 엄청나게 긴 듯 하네요....지루하시면......스스로 편집해서 읽으셔도....딸깍 잘라셔도 됩니다. ^^ 길게 쓴 글은 독자들을 질리게 하기에....
아 사회학과에선 과제물도 독특합니다. 제가 다닌 대학에는 공교롭게도 사회학과가 없어 사회학과가 있는 학교들이 좀 부러웠는데...그린님 말씀대로 개인의 가족사들이 모여 시대사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린님 것은 너무 길어서 자르셨다고 하는데, 나중이라도 좀 봤으면 하는데요. 궁금합니다. 글고 저번에 제 댓글을 통해 말씀하셨던 편찮으시다던 오빠분이 바로 그분이시군요...감명 있게 잘 읽었습니다...
자른게 요 정도면, 원본은 도데처 을매나 길꼬..
"마켓가든"을 능가하지 않을까 싶네요.. ^^ 일단, 냅뒀다가 낭중에 다시 볼께유..
예.... 사건이 될 만한 것들만 적었지요...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차원에서....큰오빠는 아무 걸림돌 없이 중소도시 시장급까지 승진 할 수 있었고.....서울오빠 역시 순조로웠지만....유독 막내오빠는 그런 아픈과거가 있었지요....또한 언니도 둘째 언니는 30년 전에 자가용을 몰며 부르주아 계층의 삶을 살았지만, 유독 셋째 언니는 고생을 많이 했었지요. 산업전선에 뛰어 들어 미싱일을 하면서......언니 글은 7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몇 년 전 써 놓았던 글을 함께 합류했지요.
저는 56년생 원숭이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세대가 우리 부모님세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식민지... 전쟁...
읽는 내내 가슴이 저려 혼났습니다......
그러게요...저도 싸이펑클45님과 같은 생각이었는데...
나머지도 마저 올려주시면 재밌게 읽겠습니다.
..잘 지내시죠?
어쩌면...우리네 가족사아버지의 아버지 시대부터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일제강점기서 부터 독립운동,해방,6.25 이후 나 태어난 '50년대 ...부모님 결혼서부터 자식들 태어나고 그 자식들 키워내느라 고생하시고... 어느 집이나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 비슷한 시대를 겪어낸 참 힘든 세월들 사셨는데.... 하는데...그린님 정말 뛰어난 기억력 소유자시네요. 예전부터 글 속에서 묻어나긴 했지만요.막내언니 얘기는 나 같으면 꺼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존경해요
저 역시 아버지,엄마에게 어릴 적부터 이것 저것 많은 이야기들을 듣긴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몇 가지 안되고 이렇게 그린님의 글 같은 내용을 읽으면서야..그래 그랬다지
그린님 막내언니요그리고 남은 뒷얘기도 마저 보고 싶어요 그림비님처럼요
청도 예찬론도 하나 쓴 거 있으심 보여주시고요
그린님 결코 쉽지 않은 글이었을텐데 잘 정리를 해 주셨네요. 그린님의 가족사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가늠해 보게 됩니다. 특히 정화언니에 대한 부분은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언니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담고 계시는 그린님의 마음도 좋습니다. 덧글을 잘 달지 못했지만 그린님의 해박하고 전문적 지식의 덧글들을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데(저는 독학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시는 그린님의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참, 들꽃 님....바로 답장 보냈는데 보셨어요? ^^
그래요? 아예 오지를 않았는데요. 배달 사고났나 봐요....*.*
우찌 배달사고가? ^^ 택배로 안 보내고 퀵으로 보내서 그런가요? ^^ 방금 또 다시 보냈습니다 확인해 보셔요. 들꽃 님을 알게 되어 참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해요~~~~
글이 길어 많이 지루하셨을텐데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의 형식도 고려하지 않고 무형식으로 그저 써내려 갔습니다. 우쨌기나 글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저희 친정식구들은 다들 비교적 넉넉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것이 엄마 아버지의 그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방은 실로 시간을 많이 요하는 글들이 많은지라 잠깐잠깐씩 들르는 나에게는 읽고도 심히 댓글조차지 못할때가 많지요 그린님의 가족사 어쩜 저희 친정 7남매 막내 3남4녀 비슷한점들이 많으네요.지금은 고인이신 친정아버님은 9남메 막내로 태어나셔서 기미년생이시니 일찌기 도시로 진출하셔서 오빠들은 물론 조카들 모두 대학까지 시키셨습니다. 읽어내려오는 내내 우리집얘기를 읽는것 같은 느낌은 아마도 고향이 저희 친정도 합천 이거든요 잘 읽고 갑니다.
글이 꽤 긴데 읽으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저 무형식으로 쓴 글이라 그리 이해하시고 읽으시면 더 편하실 듯 합니다. 과거 우리 부모세대들은 대학생이 신분을 나타내었지요. 그 당시는 지식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지요. 좀 더 후하게 내려가면 베이비 붐 세대들까지도 그렇다고 볼 수 있었지요. 하나 우리 조카들 세대 물론, 우리 자식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대학생이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그저 보편적인 정규과정으로까지 폄하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으로 보아 시대의 변화를 가늠하고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